내 연애의 발칙함
제 10장, 난 네 세컨드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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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슨 중요한 날이야? "
통계프로그램을 돌려 정리한 보고서를 대리님께 전해주고, 급하게 할 일이 없어 스케줄러를 살피던 중이었다. 올 해 목표는 취업하기와 하루도 빠짐없이 일기쓰기였는데, 한 개는 성공했지만 나머지 하나는 실패하고 말았다. 일기를 쓴 날보다 백지인 날이 더 많다. 오늘부터는 정말 일기를 써야겠어. 마음을 먹으며 일정을 살폈다. 개인적인 일정인 만큼 이 날은 누구를 만났고, 이 날은 뭘 해야 하며, 이 날엔 무슨 옷을 주문하고와 같은 사소한 것들이 적혀 있었다. 그나저나 집에 안 가 본지 벌써 두 달이 다 되가는 구나. 아직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따로 나와서 살다 보니까 이렇게 집 가는 게 힘들다. 가끔 엄마가 우리 집에 올 때 빼고, 그나마도 정국이 때문에 자고 가라고 말도 못한다. 엄마도 그렇고 대일이랑 아빠 볼 겸 이번 주말에는 꼭 들려야지.
이제 뭐 또 할 거 없나. 보라색 펜을 들고 날짜를 쭉 살펴보는데, 어머, 세상이나. 이번 주 수요일이 정국이 생일이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미리 체크해 놓지 않아 하마터면 챙겨주지도 못 할 뻔 했네. 지금이라도 인식한 것을 천만 다행이라 여기고 또 까먹을까 들고 있던 펜으로 수요일에 동그라미를 왕창 그려 넣었다. 마음 같아서는 우리 자기 생일~ 이라는 닭살스런 멘트도 적고 싶긴 했지만 그랬다가 혹시라도 전정국이 내 스케줄러를 염탐하는 날에는 아마 적어도 일주일은 놀림감이 될 것이다. 동그라미를 쳐 놓은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해져 샐쭉 웃고 있으면 주임님이 내 스케줄러를 흘끗 쳐다보면서 무슨 날이냐며 묻는다. 깜짝 놀랐지만 기분 나쁠 수도 있으니 최대한 태연하게 스케줄러를 닫으면서 대답했다.
" 중요한 날은요, "
어색한 웃음을 지어주고 나면, 애초부터 그렇게 큰 관심으로 묻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러냐며 휘릭 지나가버리는 것이었다.
" 고마워요. "
내가 작성한 보고서를 대리님이 내자 김태형이 살짝 웃으면서 고맙다고 말한다. 가끔 민망할 정도로 말을 툭툭 던지는 경향이 있지만, 다른 부서 상사에 비하면 훨씬 순한 편이고, 심지어 같은 남자한테도 저렇게 친절하게 구니, 내가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 유독 나에게 싸늘했던 녀석을 옹호하던 팀원들의 반응을 지금 와서 이해할 수 있었다. 구박을 받으면 기분이 나쁜게 당연한데, 또 화내야 할 상황에만 딱딱 화를 내니까 다른 사원들끼리 뒷 담화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무튼 저 혼자 사회생활도 참 잘한다. 그래 너 혼자 다 해 먹어라. 하지만, 그럼에도 팀장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긴 있었다. 아무리 완벽한 사람이라도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을 순 없는 것이 지당한 논리. 우리 회사 우리 부서에 유일하게 김태형을 미워하는 사람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신입사원 김탄소. 김태형 안티 회장 부회장 회원을 맡고 있다. 녀석이 사회생활을 혼자 다 해 처먹는다면 나도 녀석의 안티를 혼자 다 해 처먹을 것이다. 아직 표면적으로 녀석을 싫어하는 사람을 발견한 적은 없지만 이 회사 어딘가에 분명 나 말고 다른 한 명쯤은 더 있겠지. 그 한사람을 위해 김싫모는 폐쇄되지 않을 것이야.
" ......... "
번듯한 녀석을 처다 보다가 이번에 다시 컴퓨터로 시선을 돌려 고개를 푹 숙였다. 헛소리는 그만하고, 정국이 생일선물이나 생각해 봐야겠다. 다른 사람 생일 선물 고르는 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탑 텐에 들 것이다. 녀석과 내가 이제 갓 사귄 풋풋한 새내기 커플도 아니고, 서로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에다가 몰래 서프라이즈 파티까지 준비해야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선물 고르는 건 어려워. 모든지 물어보라는 모든 것을 답변해준다는 초록창에 검색을 해 봐도 답변이 다 신통치 못한 기억이 있기 때문에 인터넷 검색은 패스.
차라리 필요한 물건이 있다고 귀띔을 해주거나 시원하게 말 해주면 오히려 편 할 텐데 얘는 내가 뭐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거 있냐고 물어도 없는데 하고 고개를 젓는다. 그게 다른 큰 무언가를 바라고 하는 행동이 아니라 정말 자기가 받고 싶은 게 딱히 없어서 이기 때문을 알아 더 답답한 거지. 작년에는 백화점에 데려가 구두를 사줬고, 제 작년에는 녀석이 뭐 조립하는 걸 좋아하기에 조립모형을 사줬었다. 사실 그 프라모델 조립모형을 사는데 돈 십 만원이 그냥 깨지기에 기겁을 하고, 차라리 그 돈이면 구두 하나를 맞춰주는 게 백배 천배 낫겠다 싶어 사줬던 게 기억에 남는다. 전정국은 정말 필요 없다고 하고, 주는 물건은 그 물건대로 고맙게 받아쓴다. 근데 그게 정말 좋아서 좋다고 하는 건지 녀석의 속을 알 수 없는 나는 해주고도 남는 그런 찝찝함이 있다고나 할까.
" 김탄소씨만 남고 퇴근하셔도 좋습니다. "
입사하고 처음에만 적응 하느라고 힘들었지 그 이후부터는 그 때처럼 모든 업무가 힘들진 않았다. 어느 정도 일이 손에 익기도 했고, 어딘가 모르게 다 불편했던 사람들과도 이젠 어느 정도 관계가 편해졌기 때문일 테다. 팀장님 말에 미리 짐을 챙겼음에도 몇 분 정도 더 주섬주섬 거리다가 일어나 인사를 하고 나가 버린다. 학교도 아닌 주제에 일주일에 한 번씩 내게 과제를 내주고 월요일 마다 심사를 한다는 사실은 자존심 상하게도 모든 직원들이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팀장님이 나를 각별히 하나라도 더 알려주려는 각별한 마음이라고 했지만, 글쎄. 허허. 웃고 넘겼다. 덕분에 월요일만큼은 칼 퇴근을 할 수 있는 팀 사원들만 아주 신나 입 찢어진다.
" 조심히 들어가세요~ "
" 탄소씨도 내일 봐 "
녀석이 앉아있는 자리에 가기 전에 내 책상을 흘끔 봤다.
이미 짐은 다 싸 놓은 상태. 으 오늘만큼은 정말 녀석 앞에 서기 싫다.
사실 김태형이 외워오라고 한 것들 머리에 하나도 들어있지 않거든.
꾸물꾸물 녀석의 앞에 섰다.
만지작거리던 마우스를 손에서 뗀 녀석은 네. 하고 대답한다.
" 오늘 하루만 넘어가 주시면 안 될까요? "
" 뭘요 "
김태형 앞에서 존댓말을 쓰는 건 예나 지금이나 어색하지만, 그래도 처음처럼 소름이 돋진 않았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야.
그런데도 딱 하나 적응되지 않는 건 김태형의 싸가지 밥 말어 먹은 말투랄까? 뭘요라니. 내가 그렇게 정중하게 물었는데. 하하. 너 참 예의가 바르구나?
" 제가 어제 정말 바쁜 일이 있어서 못 했었거든요. 다음 주로 넘겨주시면 감사하겠는데요.. "
흐음.
하고 숨을 내쉰 녀석이 한 쪽 눈썹을 들어올린다.
아, 이건 필시 뭔가 집요하게 파고들 때 녀석이 짓곤 하는 표정인데.
" 시간이 어제 밖에 없었나요? 제가 외워오라고 한 것들은 저번 주 목요일 날 줬던 것 같은데.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겠죠. "
맞다.
하지만, 못 한 건 사실이나 안 한 건 결단코 아니었다.
누구 때문에 주말 내내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었는지 뻔히 알면서 저렇게 난 모르쇠 하는 표정이라니. 정말 얄미워 죽겠어서 이젠 미안하지도 않지만
" 죄송합니다. "
진심으로 죄송한 척 고개를 꾸벅 하고 숙였다.
나도 사회 때가 타긴 했는지 정말로 죄송하다는 마음이 들지 않아도 상황을 피하기 위해 죄송한 척 연기를 할 준 알았다. 이렇게 까지 머리를 조아리는데도 뭐라고 하면 넌 사람 아니다. 악어지 악어. 김태형은 어깨 부근이 뻐근한 지 고개를 좌우로 딱딱 뼈 소리가 나게 움직이다가 컴퓨터를 끈다. 녀석의 행동을 유심히 지켜보는 와 중에도 대체 정국이 생일 선물을 무엇으로 해야 좋을지 생각을 했다. 다행히 월급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통장은 두둑하다. 지갑을 선물 해 줄까? 아니야 아니야. 얼마 전에 회사 형한테 선물 받은 지갑이라며 나한테 자랑했었어. 전정국에게 도대체 필요한 게 뭘까.
" ..뭐가 좋지.. "
" 뭐가 좋아? "
나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떠 올린 말을 내 뱉고 말았다.
나이 먹으니까 이게 안 좋아.
나이랑 상관있는 건지 확실히 모르겠지만, 확실히 요 근래에 혼잣말 하는 수가 늘었다. 지하철에서도 노선표를 보다가 여기서 두 정거장만 가면 되는구나.. 하고 굳이 입으로 중얼거린다거나 하는 일. 자각하지 못하고 마음껏 중얼거리다가 어느 순간 깨달아 버리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는 혼자 중얼거리는 아줌마들이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내가 어느새 그 대열에 합류하고 있을 줄이야. 물론, 아직 내가 아줌마 소리 들을 나이는 아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런 습관은 가끔 창피함을 느끼는 것은 물론이고 이렇게 좋지 못 한 연출까지 동반하니. 앞으로는 각별히 신경 써야겠다.
" 아. 혼잣말이에요 혼잣말. "
" 그러니까 뭐가 좋냐고. "
오늘 제 앞에서 용어를 줄줄 외우게 시키기는 포기했는지, 다른 곳에 시선을 빼앗긴 녀석이 방금 전 중얼거린 말이 무엇이냐며 재촉한다. 호기심이 가득한 녀석의 눈동자를 보며 무언가 생각난 듯 손바닥을 짝 하고 쳤다.
" 잠깐 시간 있어? "
어차피 오늘 일은 다 끝났고, 김태형이 엄청난 피로감에 집에 빨리 들어가서 자야하는 일 아니면 시간이 있을 것이다. 시간이 있다고 대답하면 뭐라도 하자고 제안할 것 같은 뉘앙스가 다분한 내 말에 인중을 고무줄처럼 늘려 입술을 씹었다가 고개를 끄덕이는 김태형이다.
" 잘 됐다. "
" .....? "
" 내가 저녁 살 테니까 나랑 백화점가서 뭐 좀 같이 골라줘. "
내가 알기로 아마 백화점 폐점시간은 8시 30분. 2시간 정도 남았다. 여기서 선물을 고르고 푸드코트가서 밥 먹으면 딱 되겠다. 뭐 선물 사는데 시간을 다 써 버리면 근처 음식집에 가던가 아니면 다음에 사준다고 하던가 해야지.
" 뭐 사는 건데? "
남자는 같은 남자가 봐야 알고, 남자가 마음에 드는 물건 역시 같은 남자가 더 잘 알 것 같아서 무작정 데리고 온 것이었다. 게다가 나이까지 비슷하니 정국이의 선물을 같이 골라주는 도우미로써의 조건은 완벽했다. 사실 정국이의 선물을 골라달라며 데리고 올만한 인물은 전혀 아니었지만, 그래도 뭐 어떻게 하겠어. 녀석만큼 선물을 잘 골라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전정국의 생일선물 고르는 것이라고 말한다면 억한 심정을 갖고 비협조적이게 굴진 모르지만 내게도 다 생각이 있었다. 나라고 무작정 녀석을 이렇게 끌고 온 것은 아니다. 이미 넘어가야 하지 말아야 할 마지노선을 이미 훨씬 전에 넘은 녀석과 나의 관계를 이렇게라도 정의하고 싶었다. 그러면서도 김태형과 나의 이런 관계가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나는 분명 이기적일 테지.
풋- 스스로도 웃음이 나온다. 김태형과 거리를 둬야하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정국과 태형의 가운데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내 꼴이 우습다가도 또 이 상황을 끝내고 싶지 않아하다니
" ......... "
선물을 같이 골라 달라 했지만 막상 누구를 위한 선물인지를 말하지 않았으니 앞장서서 백화점 안을 돌아다니는 것은 나였다. 이 곳 저곳을 돌아다녔을 때도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았고 뚱한 표정으로 발걸음만 재촉하는 내 옆을 가만히 지키고 있던 녀석이 무엇을 사는 거냐고 물었을 때 걸음을 뚝 멈췄다.
" 너는 선물로 뭐를 제일 받고 싶어? "
" 너 "
제 대답이 꽤 웃겼는지 개구진 웃음을 짓는다.
" 진지하게 좀. "
" 진지하게 너 "
" ...말을 말아야지. "
에잇-
괜히 데리고 왔나
밥 사준다고 까지 했는데 밥값만 날리게 생겼다.
잠시 멈췄던 발을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그러자 또 어느새 내 옆에 찰싹 붙은 녀석은 제 손을 내 허리에 은근히 두르며 귓가에 진짜 너라니까. 능청스러운 구렁이처럼 군다. 내 앞에서 다 벗고 섹시 이벤트 같은 거 해 주면 더 좋고. 순식간에 내 허리에 둘린 녀석의 단단한 팔을 손으로 찰싹 때렸다. 얘가 사람들 많은데서 미쳤지 아주?
" 왜, 전정국한테 줄 선물이라도 고르는 거야? "
떨어지라는 뜻으로 때린 건데 아픔을 느끼지 못 한 건지 아랑곳 하지 않고 허리를 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어 제 쪽으로 바싹 당긴 녀석이 입 꼬리를 한 쪽으로 올려 웃는다.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는 녀석의 표정에 힘이 빠졌다. 기분 나쁘다고 화를 낼 줄 알았지만 여유롭게 웃어 보이는 그 얼굴에 이유 없이 말이다. 명백한 비웃음을 짓는 것으로 보아 기분이 좋아 보이진 않지만, 하기야. 녀석은 언제나 내가 예상한 반대로 행동을 하지.
" 와, 되게 뻔뻔하게 날 데리고 왔다. 많이 변했어. 김탄소 "
너도.
" 어차피 난 세컨드니까. 이런 것도 해줘야 할 의무가 있는 건가? "
" .... "
" 기분은 별로네 "
" 그래도. 이왕 도와주기로 왔으니까 열심히 골라줘야겠지? "
김태형은 내게 말을 하면서 어느 매장으로 날 확 끌었다.
" 내가 고른 선물을 하고 다닐 전정국을 생각하면서 비웃기도 하고 말이야 "
녀석의 의미심장한 말에 매장 직원이 의아한 얼굴을 했고, 나는 눈을 세모나게 치켜 떠 째려보았다. 그러자 아까 그 비웃음은 지우고 다시 빙글빙글 웃으며 에이. 그런 표정은 네가 지으면 안 되지. 뼈 있는 말을 하곤 상품들이 가지런하게 진열되어 있는 유리 관 안으로 시선을 옮겼다. 역시나 만만한 녀석은 아니다.
" 이거 꺼내서 보여주세요. "
내가 백화점을 빙빙 돌면서도 고르지 못했던 정국의 선물이었는데,
녀석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날 매장으로 이끌었다. 밝은 백화점 안에서도 유난히 더 밝은 매장은 시계를 파는 곳이었다. 여자 직원은 검정색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유리 관 안에서 김태형이 가르킨 모델의 시계를 꺼내어 전시용 쿠션위에 시계를 올렸다. 알이 조금 크지만 동전 두 개를 합친 것 정도의 얇은 두께의 은색 메탈시계는 남자 시계에는 전혀 관심 없는 내가 봐도 디자인이 참 예뻤다. 시계는 초침만 잘 가면 된다 하는 지론을 갖고 있는 나로서는 이 것 저것을 봐도 다 예쁘고 다 비슷해 보이는 시계 문외한이었다. 아아, 생각해 보니 여자의 자존심. 여자의 상징이 가방이라면 남자의 상징은 시계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으, 왜 처음부터 시계를 사 줄 생각을 못 했을까?
" 어때? 내가 보기엔 괜찮은 것 같은데 "
" 어..어. 예쁘다. "
" 이걸로 해? "
이렇게 돌아보지 않고 한 번에 막 결정해도 되나 싶지만. 내가 보이게도 시계 선물은 나쁘지 않고, 돌아다녀 봐야 이것보다 더 나은 선물을 고르지는 못 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오래 왔다 갔다 해 봐야 시간만 버리지. 우리의 말을 들은 눈치 빠른 여자 직원이 이걸로 계산해 드릴까요? 물었고, 네 하고 대답했다.
" 얼마예요? "
능숙한 직원의 손놀림에 의해 시계는 미니 쿠션에 둘러져 검정 박스 안에 들어갔고 내가 따로 포장 해 주세요. 라는 말을 하지 않아도 될 만큼 정갈하게 포장되어 갔다. 검정색 박스에 재질이 색 다른 끈으로 리본이 메어지고 쇼핑백 안에 박스를 넣어 계산에 위에 올려졌다. 내일 사도 될 선물을 너무 빠르게 구매 한 건가? 어차피 이틀 후에나 녀석의 앞에 내밀 수 있는데. 그래도 늦게 준비하는 것 보다 지금 미리 사 두는 게 낫겠지. 들어가자마자 주고 싶은데. 흐흥.
" 230만원입니다. "
기쁜 마음으로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던 내가 순간적으로 움찔 했다.
아아, 지금 내가 뭘 잘 못 들은 건가?
직원의 태연한 얼굴에 내 귀에 문제가 있나 의심이 들었다.
그러니까 분명 나 230만원이라고 들은 것 같은데.
포장까지 다 된 마당에 물릴 수도 없고, 얼마요? 라고 다시 물을 용기마저 사라진다. 여기 브랜드 네임도 모르고 들어온 난 할 말을 잃었다. 가만가만, 230이면 거의 내 한 달 월급이다. 이깟 시계에 내 한 달의 수고가 날아간다고? 하하. 참.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 걸? 이 작은 시계가? 어? 실성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올 뻔 했다. 그런데 내 통장에 돈이 얼마 있었더라. 지금 들고 있는 체크카드를 넣고 신용카를 꺼내들어야 하나. 예상치도 못한 고가격의 시계에 식은땀이 쭈욱 난다.
" 할부로 해 드릴까요? "
" 일시불로 해 주세요 "
아니야.
일시불은 지랄.
삼개..아니 할 수 있다면 36개월로 해 주세요.
" 감사합니다. "
하지만 내밀어진 카드는 내 것이 아니었고,
당연히 내 카드도 아닌데 삼십 육개월로 해달라느니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삐리릭- 시원하게 긁힌 김태형의 카드는 영수증과 함께 녀석의 지갑에 다시 들어갔고 직원이 내미는 쇼핑백을 얼떨결에 들은 나는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녀석에게 허리를 잡힌 채 매장 밖으로 빠져 나왔다.
" 밥은 나가서 먹을까? "
" 야. "
그런데 나 기분 엄청 상한다.
" 네가 왜 계산해? "
" 그게 중요해? "
당연하지.
이건 내가 정국이한테 줄 생일선물이라고.
" 내가 골랐는데. 생각보다 가격이 나와서. 너 부담스러울까봐 내가 계산한 건데. "
" 그니까 너가 왜 "
방금까지 투닥거리긴 했지만 기분 좋게 백화점에 들어갔었는데, 지금은 기분이 아주 더러워져 있었다. 지금 이 선물을 계산 한 사람이 녀석이 아니었다면 어쩌면 난 부담스러워 하면서도 고맙게 받아들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김태형이질 않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김태형.
" 화났어? "
" 그럼 안 나겠어? "
" 왜? "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나를 돌아보는 김태형을 따라가지 않은 채 뻣뻣하게 서 있었다. 나 기분 상했다. 라는 것을 얼굴에 대놓고 티를 내고 있는 나를 보며 녀석이 왜? 하고 묻는다. 왜라니. 정말 몰라서 묻는 게 아님을 알고 있기 때문에 왜 라는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았다. 너야말로 왜? 왜 내가 이럴 반응을 보일 것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많은 돈을 쓴 거야? 그 돈을 뿌리면서까지 내 기분을 상하게 하고 싶니?
" 표정 풀어. 계산한 거 별 의미 없으니까 "
넌 별 의미 없는 걸로 몇 백씩이냐 쓰냐?
네가 대기업 팀장이라고 해 봤자 샐러리맨인데, 네가 얼마나 받는지 몰라도 그 돈이 너에게 결코 작은 금액이 아닐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나를 달래며 어깨를 잡아끄는 녀석에 뾰루퉁한 입으로 엘리베이터 앞에 서게 됐다. 나를 내려다보며 짓고 있는 웃음이 재밌다는듯 귀까지 걸려있다.
" ...내가 전정국한테 선물을 사 줄 이유는 없지만, "
" ...... "
" 그냥 너한테 준거라고 쳐. 그러니까 그렇게 기분 나쁜 표정은 짓지 마. 돈 쓴놈한테 엄청 면박주네. "
" ......너.. "
" 입사 선물 정도로 하면 되겠네. 어때? 그럴듯하지? "
" .....너 진짜.. "
" 어, 왔다. 타자 "
꺼내려던 말을 고이 접게 만드는 녀석의 재주는 참 대단하다. 지금까지 뱉으려다 다시 삼킨 말들이 몇 가지나 되는지, 분명 언젠간 녀석 때문에 화병 날 일이 생기리라.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녀석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꽤나 높은 층에서부터 내려가던 엘리베이터 안에 사람들이 꽉꽉 메워지기 시작했다. 덕분에 나와 김태형은 벽에 찰싹 달라붙은 매미가 되었다지. 아직도 화가 풀리지 않아 댓 발 나온 입으로 바닥만 쳐다보고 있는데 녀석이 점점 가까이 붙어온다. 아, 저리 가. 하고 말하니 어쩔 수 없다며 마주 본 그 멀대같은 키로 나를 가둬오기 시작했다. 좁은 엘리베이터 안에는 더 좁은 나와 김태형만의 공간이 만들어졌다. 덥지 않은 날씨에도 가까워지는 숨에 얼굴이 화끈거려서 고개를 옆으로 돌리니 바로 내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며 긴 손가락을 하나 들어 내 가슴 부근 위로 조심스럽게 올려놨다.
큰일났다. 둥둥 거리는 심장에 따라 올라오는 김태형의 손가락이 야살스럽다.
" 여기 "
얇게 빠진 긴 손가락을 빙글.하고 한 바퀴를 돌린다.
" 엄청 빨리 뛰고 있어. "
" 이래도 거짓말 칠 거야? "
" 이게 날 향한 게 아니라고? "
얼굴 가까이 쏟아지는 녀석의 숨결에 내 정신까지 아득해질뻔했다. 연애할 때 맨날 보던 김태형의 짓궂은 모습이었는데도 이렇게 생각지도 못하게 당하니 이거 정말 당황스럽다. 여전히 녀석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깨물고 있던 참이었다. 풉, 하는 웃음소리가 머리 위로 흩어졌다.
" 미치겠다. 왜 이렇게 귀여워. "
" 요즘 너만 보면 자꾸 놀리고 싶어 미치겠는 거 알아? "
" 멍청해진 네 표정이 얼마나 귀여운지. "
그래도 이건 반칙이다. 내 심장까지 누굴 향해 뛰고 있는지까지 읽어버리면 나와 정국이가 너무 비참해지잖아. 숨길 수도 없는 심장박동이 애석하기만 하다. 나는 흔들리는 두 눈을 부릅뜨며 녀석을 노려봤다.
" 왜? 안돼? "
" 난 네 세컨드인데. "
" 우리 사이에 이 정도쯤은 당연한 거 아닌가? "
어깨를 밀치는 내 손목을 힘주어 잡은 김태형이 여전히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내 연애의 발칙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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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선배'입니다. 후배님들(부둥부둥)♥
이제 곧 폭풍전야를 향해 달려가겠지요
다음화는 그닥 상관없는 정국이편인데 여러분이 아셔야하는 사실이 있기에 넣습니당
전정국 발칙한 아카..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