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숙집 홍일점 IV
#1
"노크하라고 했잖아!"
김남준이 방에 쳐들어왔다. 내일 반장 선거 투표 용지를 만들어야 한다고, 너 때문에 종이가 세모가 될 뻔했다고, 알기나 하냐고 따졌지만 내가 소리 질러도 김남준은 눈 깜빡 안 하고 오히려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김남준의 말에 나는 입을 꾹 물고 몇 초간 고민한다.
"모자는 내가 잃어버린 거 아니야. 모자가 날 잃어버렸어."
"... 내 모자 잃어버린 게 너였냐? 죽을래?"
아... 이건 아닌가 보다.
"... 그래, 솔지기 과자는 유감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먹을 생각은 없었어. 난 가만히 있었는데 과자가 나타나서 날 부른 거야."
"그거 내가 침대 밑에 숨겨놨었는데."
"정말이야."
"......."
이것도 아닌가 보다.
"스킨은 이번 주 안으로 사다 놓을게."
"스킨도 너냐?"
"... 그게 내 팔꿈치에 와서 부딪친 걸 어떡해."
"넌 대체,"
"나중에 내가 치킨 살게."
"그래."
한 번 한숨을 쉰 김남준이 방을 나가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돈다. 문득 어떤 기억 하나가 내 머리를 스친다. 저번에 내가 몰래 김남준 옷을 훔쳐 입고 나갔던 어느 날 말이다.
"옷은 내일 빨게."
"어."
나는 머리를 쥐어뜯는다. 옷부터 말할걸.
#2
"노크 하라고!"
"......."
"노크! 노크! 노크 좀 하면 죽냐?"
또 문이 벌컥 열리더니 전정국이 처들어왔다. 오늘 무슨 날인가. 문을 연 전정국은 곧장 침대에 누워있던 나를 일으켜 내 어깨를 잡고 흔든다.
"지웠어?"
"뭘."
"지웠냐고!"
"그러니까 뭐를."
갑자기 쳐들어와서는 주어 목적어 다 빼고 저렇게 서술어만 말하면 내가 어떻게 아냐고. 정국아, 아파. 아프다고. 앞뒤로 흔들리며 겨우 말하자 그제야 전정국이 내 어깨에서 손을 뗀다. 앞머리를 쓸어넘기는 전정국의 한 손에 핸드폰이 들려있는 게 보인다. 내가 갤러리에서 야동 파일을 삭제했던가? 아니다. 나도 봐야 하니까. 핸드폰에 있던 중요한 문서를 삭제했던가? 나는 게임 말고는 한 게 없는 걸. 김남준처럼 잘못 고해성사 했다가 들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핸드폰 켤 때마다 얼마나 힘을 받았는데!"
"... 너 설마 그 사진 말하는 거냐."
"어, 그래! 그거! 그거 지웠냐고!"
어젯밤에 소파에 누워 전정국 폰으로 게임을 하려고 켰다가 소파 뒤로 핸드폰을 던졌었다. 배경화면이 내 사진인 거다. 잠금도 안 걸어놓은 핸드폰에. 몇 초간 놀란 가슴을 - 별로 없지만 - 달래다가 소파 주변을 기어 다니며 핸드폰을 주워들었다.
자세히 보니까 옷이 지난주 월요일 옷이었다. 다시 사진에 얼굴을 박고 보니 퇴근하고 버스 타고 오는 길 같았다. 사진 속 나는 이어폰을 끼고 핸드폰을 보며 음흉한 눈으로 처웃고 있다. 그러니까, 전정국은 버스에서 나랑 마주쳐놓고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가기는커녕 사진이나 찍고 있었던 거다. 내가 밖에서 아는 척하지 말자고 했는데! 그리고 자기도 그게 좋겠다고 했으면서! 당장 갤러리로 들어가서 내 사진을 삭제하고 내가 세운 게임 신기록을 캡처해서 배경 사진으로 해놨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 어떻게 그렇게 매정할 수 있냐고...."
"......."
"인생이 힘들 때! 모든 의욕을 잃었을 때! 그거만큼 위안되는 게 없는데!"
"......."
썩은 표정으로 전정국을 쳐다보니까 전정국은 나와 썩은 표정 대결을 하자는 건지 얼굴을 더 찌푸리고 세상 잃은 얼굴을 한다.
"......."
눈물이 고여있는 전정국의 두 눈을 뽑든지, 그런 전정국을 보고 있는 내 눈을 뽑든지 둘 중 하나는 해야겠다.
#3
퇴근 후에 치킨을 사서 집이 아닌 민윤기 작업실로 왔다. 마침 김남준도 있었다. 다행이다. 두 마리를 샀는데, 민윤기는 거의 안 먹어서 분명 남겼을 거다. 김남준은 안 그래도 저녁 못 먹었다면서 좋아했다. 치킨을 김남준의 손에 올려놓고 소파에 쓰러지듯 누웠다. 뒤에서는 김남준이 책상에 치킨을 오픈하는 소리가 들린다.
"보든가. 네가 좋아하는 검은색인데."
"오빠는 호피야."
"그럼 누구지?"
누가 나한테 자기 취향은 검정이라고 했었는데. 누구더라.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치킨 두 조각 먹고 배부르다고 손 씻고 온 민윤기가 내 다리를 툭 쳐서 모으게 만든다. 아, 민윤기였나 보다. 민윤기가 턱으로 치킨 먹는 김남준을 가리키며 나도 치킨 먹으란다.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별로 입맛이 없다. 치킨도 그냥 기분 내려고 산 거지. 치킨 대신 냉장고로 향해 맥주를 꺼냈다.
"무슨 일인데."
의자에 앉자마자 곧 모니터에 빠질 사람처럼 컴퓨터만 보고 있던 민윤기가 의자를 돌리더니 내 손에 쥐어져 있던 맥주를 뺏는다. 난 눈을 꼭 감고 다시 빈손으로 소파에 눕는다. 민윤기는 눈치 백단이다. 민윤기는 내가 기분이 안 좋을 때면 어떻게 알아서는 꼭 저렇게 물었다. 정말 귀신같이 알아서.
"무슨 일이냐고."
내 말은 들은 척도 안 한다. 개소리는 무시하겠다는 거다. 심지어 민윤기가 익숙하게 따서 마시는 저 맥주는 전에 내가 내 돈으로 사서 넣어놨던 거다. 민윤기의 눈치를 보던 김남준은 자신이 마시던 콜라를 종이컵에 반만 따라 내 손에 쥐여줬다. 민윤기는 내 앞에 놓인 컵을 흘끗 보더니 아무 말 안 한다. 허락한 거다. 독수리 사형제의 공통점이 있다면 가끔 자기들이 내 아빠인 줄 안다는 거다. 정작 진짜 우리 아빠도 술 갖고 잔소리는 안 하는데.
"......."
내 말에 민윤기는 맥주를 마시려던 동작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나를 쳐다본다. 말없이 종이컵만 보고 있으니까 한숨을 쉰 민윤기는 고개를 돌려 다시 모니터를 본다. 한참 동안 마우스 클릭하는 소리만 들리다 민윤기가 뒤통수만 보인 채로 툭 묻는다. 어디서.
"... 김석진이 누군데?"
신나게 치킨을 뜯던 김남준은 좋지 않은 분위기에 눈치만 살피다 묻는다. 그래. 김석진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그는 쓰레기다. 아, 아냐. 내가 뭐라는 거야. 쓰레기한테 미안하다. 그는 쓰레기만도 못한 놈이다. 김석진을 딱 세 단어로 정의하자면,
"전남친, 쓰레기."
"......."
"첫사랑."
이렇게다. 얼마나 좆같은 조합인가. 고등학교 때 이름 날리는 고유명사 '석진 선배'였던 김석진은 비 오는 날, 우산 안 챙겨서 안절부절 하고 있는 이름도 몰랐던 나에게 자기 우산을 주고 뛰어갔었다. 우산을 받고 더 안절부절해하던 내게 자기는 괜찮다면서. 난 그 날로 반해서 졸졸 쫓아다녔고, 끝내 골인을 했다. 그리고 100일째 되던 날, 김석진이 좋아하던 초코 쿠키를 직접 만들어서 교실로 찾아갔다. 나름 서프라이즈 한답시고 발소리도 죽이고.
'... 그래서 걔랑은 언제 헤어지게?'
'곧 헤어져야지.'
'너 진짜 좋아하는 거 같던데.'
'그러니까.'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김석진의 등 뒤로 몸을 숙였다. 본능적으로 저게 내 얘기라는 걸 느꼈고, 내가 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았다.
'혜영이한테 걔랑 사귀는 거 들켰다간 나 목 날라 가.'
'걔 존나 착하지 않냐? 몸은 더 착하던데.'
'그러니까 좀만 더 갖고 놀다 버려야지. 그때 네가 꼬셔보든가.'
'그럴까?'
쓰레기 같은 말을 하는 김석진이나, 그 말에 좋다고 낄낄대던 친구나. 유유상종이다. 난 그 자리에서 뺨을 때리지는 못할망정 혼자 체육실로 달려가 엉엉 울었다. 그때의 나는 김석진이라면 뭐든 줄 수 있었다. 첫사랑에 나름 크게 데인 나는 지금까지도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연애를 시작하기도 어려웠고, 시작해도 금방 끝났다.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기가 어려웠다. 미련하고 찌질하기 짝이 없다. 아, 좆같아서 정말. 고등학교 기억을 떠벌리던 입을 다물고 소파 옆에서 생일 축하 모자를 주워 썼다.
"... 뭐 하냐."
"이러면 좀 신날까 해서."
"내놔."
다시 조심히 벗어서 민윤기 옆에 내려놨다. 모자 옆에 콜라도 내려놨다. 도무지 뭘 먹고 싶은 기분이 아니다. 나는 소파에 웅크리고 앉는다. 민윤기의 컴퓨터에서는 노래 한 소절이 계속 구간반복됐다. 같은 마디만. 계속.
"그래서, 만나서 뺨 갈겼어?"
"아니."
"명치 조졌어?"
"아니."
"그럼 뭐 했는데."
"... 얘기했는데."
걔가 뭐래. 모니터에 눈을 박은 민윤기가 묻는다.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몇 초간 입을 꾹 다물던 나는 별 말 안 했다고 대답한다. 민윤기가 다시 묻는다. 뭐라고 했냐고. 나는 입을 한 번 꼭 깨물고는 대답했다. 역시 민윤기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가 없다.
"... 내가 보고 싶었대. 그리웠대."
민윤기는 여전히 눈을 고정한 채 한숨을 쉰다. 호구냐. 맞다. 난 호구다. 그냥 호구도 아니고 초울트라 슈퍼 우주최강 왕 호구다.
#4
최근에 민윤기가 프로듀싱을 맡았던 앨범 하나가 끝났다고 한다. 우리 독수리 오형제는 고깃집에서 자축 파티를 하기로 했다. 그리고 나를 제외한 모두의 앞에는 술잔이 놓여있다. 난 또 퇴짜 맞은 거다. 지들은 부어라 마시면서 나만 안 된다. 이건 진짜 불공평해. 난 입을 내밀고 고기만 젓가락으로 찌른다.
"너 왜 애를 괴롭히냐."
한 남자아이가 우리 테이블 쪽으로 왔다. 난 귀여운 아이를 보고 말을 걸지 않으면 뒤지는 불치병이 있기 때문에 놓치지 않고 눈을 마주쳐 인사했다. 아이는 수줍게 손을 흔들었다. 나는 얼른 제일 작은 상추에 고기를 싸서 먹을래? 하고 물었다. 아이는 조심조심 오더니 내가 내민 쌈을 입에 물고 오물오물거렸다.
"애 앞이라고 목소리 바뀐 거 봐라."
"내 쌈 먹어줬다! 봤냐! 봤냐고!"
"네가 아니라 고기가 좋아서 먹은 거야."
... 꼭 초를 친다, 초를 쳐. 그럼 네가 해보든가. 하고 상추를 내밀었다. 민윤기는 고기를 하나 싸더니 아이 앞으로 내밀었다. 아이는 입을 꼭 물고 고개를 저었다. 거절당한 거다. 우리 넷을 민윤기를 마음껏 비웃었다. 내가 좋은 거 맞다니까. 민윤기는 분했는지 제일 크게 웃던 전정국에게 상추를 내밀었다. 야, 너도 해 봐, 하면서. 전정국은 자신 있게 쌈을 싸서 아이에게 줬고, 아이는 민윤기의 눈치를 보며 입을 벌렸다.
"형 것도 먹을래?"
옆에서 지켜보던 김태형이 고기를 내밀자 아이는 또 민윤기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벌린다. 민윤기를 비웃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갔다.
"형도 줄게. 맛있게 먹어."
"......."
"팔 내려. 너도 됐대."
이번에는 아이가 입을 닫았다. 김남준도 거절이다. 눈을 부라리는 김남준에 지난번 참관수업의 악몽이 떠올라 아이를 얼른 부모님께 돌려보냈다. 민윤기의 표정이 좋지 않다. 맘에 안 든다는 얼굴이다. 김남준도 저 멀리 있는 아이에게 눈을 부라리느라 바빴다.
"그냥 깔끔하게 인정해."
"근육 빼면 남는 게 없는 게 뭐가 좋다는 거지?"
"지금 그거 내 얘기냐?"
존나 웃긴다. 아이 하나 가지고 서로 디스전이 펼쳐졌다. 누가 누가 더 낫나. 디스를 하는 실력이 거의 래퍼 급이다. 다들 자존심 센 만큼 누구 하나 안 진다. 서로를 쌉을 거리가 떨어지자 그다음은 자기 PR의 차례였다. 졸지에 심판이 된 나를 두고 서로 자기 자랑을 쩌렁쩌렁 하기 시작했다. 진짜 놓고 도망가고 싶다.
"난 잘생겼어! 남자는 잘생긴 게 최고야!"
난 키도 안 보고 얼굴도 안 보고 다른 거 하나도 안 보고 사람만 본다고 입에 달고 살았는데. 망실도 이런 망실이 없다. 내 말에 민윤기는 인상을 찌푸린다.
민윤기의 표정은 썩어 들어갔다. 썩든 썩어서 부패하든 내가 알 바는 아니니 넘어가기로 한다. 우리 반 아이들은 실망 대신에 망실이라는 말을 쓴다. 이건 우리 반 아이들만이 아니라 요즘 초등학생 유행어다. 시대에 뒤처지는 민윤기. 나 진짜 착해! 갑자기 김태형이 또 치고 들어와 자기 PR를 해댄다. 전정국도 질 세라 랩을 한다. 듣는 사람 없이 말하는 사람만 넷이다.
"야."
팔짱 끼고 가만히 있던 김남준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뭐냐는 듯이 쳐다보니까 눈을 똑바로 뜨고 말한다.
"내가 제일 커."
뜬금없이 나온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나 키 안 본다고. 얼굴도 안 보고 아무것도 안 본다고. 이게 지금까지 내 말을 귓등으로 들었나, 발바닥으로 들었나. 내 반응에 김남준은 고개를 젓더니 그릇에 담겨있던 풋고추를 가리킨다.
"크다고."
우리는 동시에 숟가락을 불판에 던지고, 더럽다는 얼굴을 한 전정국은 그릇에 있던 고추를 죄다 불판에 던졌다. 힘 조절에 실패한 김태형 숟가락이 불판 위에 있던 마늘장을 엎었다. 마늘 기름이 쏟아진 불판에서는 불길이 솟아 고추가 구워지는 불쇼가 일어났고,
"당장 나가!!!"
우리는 쫓겨났다.
#5
인생에서 가장 살기 싫어지는 순간이 언제냐고 누군가가 묻는다면 나는 바로 대답할 수 있다. 바로 앞머리를 잘랐는데 망했을 때다. 일주일 내내 김석진 생각을 하면서 잠드는 게 좆같아서 다음에 마주쳤을 때는 못 알아보라고 한 거였는데. 이제는 알아봐도 모른 척할 꼴이 됐다.
"미안... 참고 싶었는데..."
"......."
"뭐, 왜."
"대망실이다. 진짜."
"저게 망실이냐. 망신이지."
나를 보자마자 얼굴을 씰룩대는 김태형에 그냥 웃으라니까 바닥을 광광 치면서 웃는다. 지나가던 김남준은 얼마 전에 내가 한 말이 마음에 들었는지 대뜸 망실도 이런 대망실이 없다는 응용력을 보여줬다. 바닥을 기어 다니던 김태형은 옆에서 이건 망실이 아니라 망신이라고 고쳐준다.
"......."
"...귀엽네."
한바탕 소란에 2층에서 내려온 민윤기도 나를 보자 입을 꼭 깨물더니 겨우 귀엽다는 말을 했다. 전혀 그런 얼굴이 아니라서 제일 비참했다.
"......."
"... 저런 거 보는 거 아니야. 눈 감자, 아가."
전정국은 나를 보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인형의 눈을 가려주며 저런 거 보는 거 아니란다. 얼마 전에 회사에서 회식 있다고 늦게 온다더니 잔뜩 취해서 저 인형을 들고 왔다. 그놈의 술. 5000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뽑기 기계에서 뽑았다는 토끼 인형을 전정국은 우리 집의 유일한 홍일점이라면서 엄청 애지중지했다. 매일 들고 다니면서 지금처럼 못 볼 꼴이 있으면 눈을 가려주고, 누가 욕을 하면 나쁜 거 듣지 말라면서 귀도 막아줬다. 나쁜 짓은 자기가 제일 많이 하면서 꼭 지랄이다.
"인형은 언제까지 들고 다닐 거냐. 진짜 한심하다."
"네 앞머리가 세상에서 제일 한심해."
"......."
전정국은 발을 돌려 식탁에 인형을 앉혀놓고 너는 저렇게 되면 안 된다, 하고 있다. 저런 것도 머리라고 달고 다닐까 봐여-. 인형의 팔을 흔들며 일인이역도 한다. 심지어 토끼 인형이라고 여자 목소리를 흉내 내는 게 여간 역겨운 게 아니다.
"진짜 죽여버리고 싶다."
"헉! 그런 잔인한 말을! 너무 하신 거 아녜여!"
너 말고 너. 손가락으로 인형을 한번 콕 집고 전정국을 집었다. 아무리 전정국이 제정신이 아닌 건 알았어도 이런 취향이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러다 인형에 이름도 지어주겠네. 혀를 끌끌 차며 인형의 귀를 잡아당겼다. 전정국은 뭐 하는 거냐며 기지배 마냥 새침하게 내 손을 탁 소리 나게 쳐내고 인형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우리 쿠키 아팠져..."
"......."
... 이름은 벌써 있었다.
#6
전정국은 방문을 열고 들어오더니 대뜸 책임지라고 한다. 요즘은 주어와 목적어를 생략하는 게 유행 화법인가 보다. 이번에는 또 뭐, 하니까 나 때문에 회사 사원들 앞에서 망실이라고 했단다. 그게 왜 나 때문이냐. 전정국은 탓할 사람이 없으면 제일 만만한 나에게 돌린다.
"겨우 그걸로 노크도 없이 방문을 연 거야? 진짜 망실."
"그 놈의 망실! 망실! 망실! 씨발 망실!"
망실. 한 마디 했다고 전정국은 망실! 망실! 하면서 한 마디당 한 대씩 내 입을 때렸다. 이런 병신... 이러다간 내일 입이 터질 것 같아 얼른 팔을 앞뒤로 쥐불 놀이 하듯이 돌렸다. 전정국은 순간 뒷걸음질 친다. 뿌듯한 얼굴로 팔 돌리는데 전정국이 따라서 팔 돌린다. 방 안에는 두 개의 인간 풍차가 돌았다. 내가 더 빠르거든! 그럼 반박이 들어온다. 아니거든? 내가 더 빠르거든! 싸움은 목소리 큰 사람이 이기는 거란 말처럼 소리도 고래고래 지르는 인간 풍차.
"슉슉, 슉, 들리냐? 이건 입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거든!"
"......."
김태형은 기겁하며 열었던 방문을 다시 닫았다. 그러자 전정국이 김태형도 자기가 무서워서 나간 거라고 우긴다. 웃긴다. 너 아니고 나거든. 질 세라 팔을 더 힘차게 돌린다.
"넌 학교나 가서 애들 앞에서 망실이나 외쳐!"
"이미 하고 있거든! 너나 해!"
"......."
"둘 다 그만하고 반성문 써 와!"
아, 씨발.
#7
전정국이랑 식탁에 나란히 앉아 반성문을 쓰는 중이다. 짜증 난다. 예에전에 학교에서 싸움이 난 애들 둘을 반성문 쓰라고 하고 화해시켰었다. 그리고 그날 집에 와서 또 싸우고 있는 전정국과 김태형을 의자에 앉히고 반성문 쓰게 했었다. 그 이후로 내 아이디어를 마음에 들어 한 김남준 덕분에 하숙집에서 벌을 받을 땐 반성문을 쓴다.
"벌써? 나랑 공유하자. 한 문장만 알려줘."
"그럼 수고하세요."
전정국은 얄밉게 혀를 내민다. 상사한테 아부 떨던 게 있어서 그런지 금방 쓰고 탈출했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는다. 나는 진짜 잘못한 거 없다고. 그래도 김남준은 끄떡없다. 망실이다. 존나 망실이다. 기다리던 김남준이 그럼 자신이 씻고 올 때까지 써 놓으라며 위층으로 올라간다. 진짜 쓸 게 없다. 내가 내 방에서 숨 쉬고 있던 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시비는 전정국이 먼저 와서 걸었다고. 나는 반성문에 아무말 대잔치를 갈긴다. 나는 하나도 잘못이 없고, 나는 지금 자몽 워터가 너무 너무 먹고 싶고, 자몽 워터가 없는 내 인생은 의미도 없고...
"다 썼어?"
책상에 엎드려 자몽 워터 먹고 싶는 말이나 끄적이는데 김남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서 반사적으로 반성문 찢었다. 김남준은 내 모습을 얼빠진 얼굴로 쳐다봤다. 벽 보고 손들어. 망했다. 일단 눈을 깔고 구석에 들어가 손을 들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팔이 저려왔다. 내리고 싶어도 뒤에서 느껴지는 김남준 인기척에 내릴 수가 없다.
"남준아. 나 팔이 너무 아파."
"... 이제 그만 내려."
"사랑해."
"방에 들어가서 옷 두껍게 챙겨 입고 따라나와."
"......?"
따라나와, 라니. 이건 영화에서나 하는 말 아니었나. 옥상으로 따라와. 뭐, 이런 거 말이다. 혹시 옷 두껍게 입으라는 것도 그래서...
"남준아... 혹시... 나 때리려고?"
"......."
"알았어, 알았어."
"......."
"... 대신 얼굴만 피해서 때려주면 안 될까."
김남준이 인상을 찌푸린다. 또 말을 잘못했나 보다. 안절부절 하는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돌아온 건 뜻밖의 대답이었다. 자몽 워터 먹고 싶다며. 나는 의아한 눈으로 김남준을 쳐다본다.
"사줄 테니까 나오라고."
나는 김남준을 우러러 본다. 식탁에는 내가 찢었던 반성문이 조각조각 맞춰져있다. 김남준이 짱이다. 다 필요 없어.
#8
"어? 아니. 안 바빠. 들어와."
침대에 앉아 핸드폰을 하던 김태형이 내가 고개를 내밀고 물으니까 자기 옆자리를 내준다. 김태형의 침대랑 이불이 제일 아늑하다. 침대에 착석 완료하자 김태형은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별 건 아닌데...
"지가 뭔데 너한테 뭐라 해."
"그니까! 우리 엄마 아빠도 나한테 그런 말은 안 하는데!"
"진짜 미친 거 아니야? 난 그런 새끼들이 제일 싫어."
그치! 그치! 김태형이 맞장구를 맞깔나게 쳐주니까 말이 술술 나온다. 원래 개소리를 많이 지껄이는 노총각 선생이 학교에 하나 있는데, 초반에 엄청 찝쩍거리더니 내가 다 무시하니까 이제는 경로를 바꿔 나만 보면 씹기 바쁘다. 결혼을 들먹이며 나 같은 여자 때문에 저출산 문제가 생기고 나라가 망하는 거라고 연설을 하는데, 진짜 어이가 없어서. 거기서 받아쳤다가는 씹을 거리만 내주는 꼴이라 그냥 꾹 참았다. 짜증 나 죽겠다.
"내가 내일 가서 혼내줄까? 얼굴에 주먹 한번 박아?"
내 말을 듣고 있던 김태형이 내 눈에서 눈물이 고이자 갑자기 표정이 싹 굳으면서 정색한다. 순간 무서웠다. 원래 평소에 생글생글 웃는 사람이 정색할 때가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거다.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쫄아서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는지도 까먹고 김태형을 말린다. 아니, 아니야. 너가 참아. 화내지 마, 태형아...
"참긴 뭘 참아. 그런 새끼는 언젠가 정신 차려야 돼."
"아니야, 태형아. 그냥 무시하면 돼."
"앞으로 계속 너 볼 때마다 그럴 거 아니야. 내일 학교 가는 날 맞지?"
태형아, 제발. 급기야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팔을 걷어붙이는 김태형의 손을 잡는다. 못할 거 안다. 그 인간은 체육 선생인데다 키가 192다. 김태형은 좌우로 목을 돌리며 뚜두둑 소리를 낸다.
"아니다. 내일 갈 건 또 뭐야. 지금 가자. 걔 번호 불러."
"하지 마, 태형아. 네가 참아."
"반 죽여 놓으면 너한테 그런 말 못하겠지?"
김태형은 나보다 더 화를 냈다. 이거다. 이거면 됐다. 기분 다 풀렸다.
-
우리 자몽들 ♡ |
엔프라니 / 쿠쿠옹 / 단골 / 미자 / 바나나 / 낰낰 / 쓴다 / 코드마인 / 김까닥 / 정국오빠 애인 / 비비빅 / 내마음의전정쿠키 / 자몽에이드 / 스누피 / 호비 / 캔디 / 설 / 0121 / 코코팜 / 푸롱리 / 콧구멍 / 헹구리 / 착한공 / 너만보여 / 홍합 / 숙자 / 민윤기 / 밍구짱 / 잘자네아무것도모르고 / 뀰 / 빠밤 / 라면 / 라뜨아뚜이 / 꾹꾹 / 윤두 / 냠냠이 / 무네큥 / 프우푸우링 / 엘런 / 뮤즈 / 호석아 / 자몽자몽 / @자몽@ / 전아장 / 웃음망개짐니 / 황새 / 디즈니 / 두부 / 너만보여 / 옮 / 오리 / 책가방 / 청아 / 미니핀 / 구리구리 / 팥붕어빵 / 슙슈 / 핫초코 / 연꾹 자몽해 / 꽃구름 / 곤약 / 침침니 / 퓨아 / 브금 / 슉아블리 / 바다코끼리 / 유루 / 낙엽 / ㅇ<-< / 나의 그대 / 종이심장 / 한지아 / 에디 / 밍기적 / 블루 / 들국화 / 꾸루 / 모찌 / 마티니 / 프로자몽러 / 짐쮸 / !@계란말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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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분량 괜찮나요? 조금 적은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요. '^' 게다가 조금 늦었지요...? 석진이도 나쁜 놈으로 만들어 버리고... 그래도 애들 보느라고 그랬다고 변명을 하면 이해해 주시려나요... ㅎ....
애들 비주얼이 다 했자나여ㅠㅠㅠㅠㅠㅠㅠㅠ 노래 아주 씹어먹잖아여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뮤비에서는 세상 간지가 나줍니다. 그럼 제 심장은 아파줍니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지금도 듣고 있습니다. 워내 만니 만니~
저번에 보니까 자몽을 좋아해 주셔서 너무 좋았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들이 제가 좋아하는 것을 같이 좋아해 주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 자몽이들이 짱입니다. 볼 때마다 예뻐서... TT 물론 자몽보다 바나나가 좋으면 자몽 대신 바나나라고 생각하셔도 좋습니다. 이름이 어떻든 결국 제가 우리 자몽들을 좋아한다는 표현 중 하나일 뿐이니까요. 사랑합니다!
구럼 우리 자몽이들, 오늘은 구빰 대신 굿저녁!
BGM : 가끔 (inst.)
+)글 쓰다 실수로 확인을 눌러버렸... 신알신 가서 놀란 자몽들, 미안해요. T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