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에 화랑이 산다 1
Written by. 옐
1.
"으아…! 내가 집에서 나무 베지 말라고 했잖아!"
"그렇지만, 나무가 이리도 크지 않았는가."
21세기, 이런 말투를 내뱉고 있는 이 남자의 정체는 '김태형'이다. 이 남자는 어느 날 내게 찾아왔다. '여기는 어디요?' 라는 말과 함께.
2.
때는 겨울 방학이였다. 빈둥빈둥, 집순이가 되어 이불과 물아일체가 되어있었던 내게 자취를 하는 처지라 잔소리 하는 엄마도 없고 티비를 독점하는 아빠도 없어서 천국에 온 것처럼 지내고 있을 무렵.
간만에 늦은 시간까지 친구들과 마시고 죽자. 라는 말과 함께 새벽 4시까지 마실 수 있는 것들을 다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간신히 찾아 온 집 안에는 방석에 앉아 우리 집 냥이, 그러니까 뭉치를 쓰다듬고 있던 남자가 보였다. 내가 너무 많이 마셨나. 헛것이 보이는 구나 싶었다. 처음에는.
"…으에에…? 느그세어."
알코올은 사람의 뇌를 취하게 만드는 성분이 있다. 그래서 발음이 저 모양이였다. 내 발음을 들은 김태형은 나를 보며 비웃었다. 그리곤 여기가 어디요? 라고 묻는데 내가 많이 피곤해서 헛 것이 이제는 말도 들리는 구나 싶었다. …꿈으로 꺼져. 난 분명 머릿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고 잠이 들었다. 난 당연히 꿈에 있던 것이 눈으로 보이는 줄 알았었다.
…그래 그랬었다.
햇빛이 뜨거웠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오후의 해는 중천에 떠있었다. 어제 커텐을 치고 자지 않은 나에게 욕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속도 뜨거웠다. 무언가 부글부글 거리는 것이 식도를 타고 올라오고 있었다. 입을 급하게 틀어막고 우에엑, 하고 화장실로 들어가 열심히 어제 먹은 술과 함께 투명한 위액까지 보고 나서야 수건을 꺼내 입을 닦고 뒤를 돌았다. 그런데. 어제 보이던 헛것이 아직도 보였다.
"성이름 미쳤구나?"
눈을 얼마나 비볐는지 모른다. 김태형이 내게 손을 뻗어 소매를 거둘 정도였으니까.
"공주아가씨! 어찌 이 곳에 있소?"
…공주…아가씨….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은 채로 멀뚱멀뚱 김태형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긴 머리의 김태형은 손을 맞잡으면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시오! 라며 울먹거렸다. 느에? 사극 찍으시는 건가? 뭐지. 옷도 처음 보는 옷이였다. 조선시대 남자의 옷 차림도 아니고, 머리는 길게 풀어헤친 채 어쩌면 나보다 더 예쁘게 생긴 얼굴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였다.
"…주거침입범이야!!"
3.
한 바탕 소란을 치르고 난 뒤, 나는 옆 집이 출근을 일찍하신 게 다행이라 생각했다. 아랫 집이나 윗 집도…. 이 아파트 라인에 대학생은 나랑 21층에 그 오빠 뿐이니까.
"그러니까…그 쪽 말을 조합해보자면…신…라시대…. 화랑이요…?"
"그러하오. 공주 아가씨."
"근데 내가 왜 공주 아가씨에요?"
"그야, 공주 아가씨이니까요."
"공주 아가씨가 뭔데요…?"
"마립간, 그러니까 왕의 여식. 공주 아가씨."
"내가 그걸 물었어요?"
초롱초롱한 눈으로 나를 보고 있는 김태형에 한숨을 내쉬었다. 이걸 믿고 있는 나나…. 술술 얘기하는 너나….
"그런데 이 곳은 어디요?"
"네?…그…아저씨…? 라고 불러야하나…. 할아버지…? 뭐라고 해야하지…."
"태형. 이라고 불러주시오. 공주 아가씨께선 소인을 항상 그렇게 불러주셨지 않소."
"태형…? 어감이 이상한데….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갑신년, 열 아홉이오."
"열 아홉 살? 와, 아기네. 극존칭 써. 알겠지?"
"싫소."
"왜?"
"아가씨께서 편하게 하라고 그러지 않으셨소."
"그건…."
말하는 걸 포기했다. 그 외에도 몇 가지 김태형은 내게 더 말해주었다. 조합해보자면 과거에 자기가 살던 땅이 여기였던 거 같은데, 북쪽에 공주와 몇몇 신하들과 놀러왔다가 이 세계로 왔다 이건가?
뭐지 이 3류 로맨스 소설은?
"그…미친 건 아니지?"
"미쳤다니. 공주 아가씨. 어떻게 그런 말씀을 하오?"
"그그, 공주라고 작작해. 오글거려 죽겠다고."
"오글 거린다는 게 뭘 의미하는 거요?"
"…하지말라는 의미야."
"아. 알겠소. 아가씨."
그게, 자그마치 일주일 전 일이였다.
4.
"싫소, 싫다하지 않았습니까!"
"그렇게 거추장한 머리로는 이 시대에서 못 살아남아. 그리고 옷 좀 바꿔 입어라. 사줄테니까 가자."
"싫소!"
"가!"
싫다는 김태형을 억지로 끌고는 미용실로 데리고 왔다. 미용실 언니는 나를 한참이나 바라보더니 김태형의 머리를 잘라주었다. 가려져있던 눈썹이 살짝 보이기 시작했다. 원래도 잘생겼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더 잘생겼네. 감탄이 나왔다.
"잘생겼어. 태형아."
"……"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옷 사고 사줄게."
"됐소."
"삐졌어?"
"……"
김태형은 그 이후로 말이 없었다. 저 잘생긴 얼굴을 까치집 같은 머리로 가려놨었다니. 신라시대 사람들은 이해가 되질 않았다. 미적 기준이 도대체 뭐야. 김태형의 옷을 한 가득 사고, 집에 있는 걸 뒤적거리다가 라면을 발견했다. 엄마가 라면만 먹지마! 하고 소리치는 게 여기까지 들려왔지만 꾹, 참고 라면을 끓였다.
스윽, 하고 손이 올라왔다. 내 어깨에 어깨동무를 두른 김태형이 냄비를 가까이서 보고 있었다. 미친. 너무 가까…워! 김태형을 팔로 밀어내자 알아서 튕겨주는 김태형이였다.
"미친."
"너무하오…. 아가씨."
"아가씨는 언제까지 부를 건데. 내 이름 이름이라니까? 성이름!"
"아가씨가 더 편한데 이리 부르면 안되겠소?"
"…어휴. 말투 고치면 생각해볼게."
"아가씨처럼 말하면 되는 것이오?"
"응. 뭐."
"뭘 그렇게 요리하고 있는 거요야?"
순간 너무 자연스럽게 말하는 김태형에 웃겼다. 약간 귀엽네. 주저 앉아 있던 김태형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똑똑하다. 근데 틀렸어. 라고 말해주었다. 김태형은 그런 내 손을 잡아채더니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어라. 혹시 설레하는 건가.
"어머, 나 좋아해?"
"무, 무례하요. 아가씨."
"하가 아니라 해."
"무례해요."
"잘했어. 우리 태형이."
"나는 개가 아니에요."
말투가 맞음에도 어색해서 웃겨넘어갈 뻔 했다. 은근 귀여운 면이 있었구나. 그래. 너 개 아니고 태형이야. 됐지? 끓고 있던 라면을 휘적였다. 슉, 하고 일어난 김태형은 침실로 들어가더니 문을 닫아버렸다. 뭐야…. 궁금해하다가 나중에 열어보기로 하고, 끓은 라면을 그릇에 옮겼다. 그리곤 앞치마를 풀고 침실의 문을 두드렸다. 똑똑.
"태형아 나 들어간다?"
"아, 아니되여!"
저게 무슨 말투람. 나는 코웃음을 치고 방 문을 활짝 열었다. 아, 쾌쾌한 냄새. 나중에 페브리즈 뿌려야지. 그리고 시선을 내려 김태형을 바라보았다.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이불 안으로 집어넣고 있었다. 응…? 저게 뭐지…? 다가가서 이불을 치워버리니 김태형이 큰 손으로 자신의 작은 얼굴을 다 가려버린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아니, 그…. 그…. 너무 다가오지 마세요."
"…어?"
"창피하니까…. 다가오지 말라구요."
"왜 창피한데?"
"사내가 되서 배짱이 두둑하고 이끌어가야하는 능력이 있어야한다고 아버지께서 그러셨…는데…."
"……"
"아가씨 손 길 한 번에 이렇게 낯이 벌개지다니….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미친 졸라 귀여워. 코에 피가 쏠리는 느낌이였다. 아, 김태형 귀여워! 나는 얼굴을 감싸고 있던 김태형을 안았다.
"넌 그런 배짱 없어도 돼. 태형아."
"느…에?"
여전히 동공지진이 일어나하는 김태형을 한 번 봤다.
넌 졸라 귀여우니까!
***
프롤로그였는데..! 망쳤어요..! 세상에 태형아 여주야 모두 미안해! (소리없는 아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