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치된 연습실을 하나 발견했다.
그리고, 학교 내부로 통하는 개구멍도 발견했다. 정확히 한 달 전 이야기다.
밤새 제 단아한 자태를 뽐내던 달이 미처 도망가지도 못한 이른 새벽, 삼십여 일간의 이른 등교 탓에 새벽에 집을 나서는 것이 습관이 된 지민은 늘 그랬듯이 해와 달이 공존하는 하늘 아래 터벅터벅 걸음을 재촉하였다. 5월, 봄기운이 완연하다 하여도 이른 시각엔 아직 제법 쌀쌀한 날씨는 연습실 창문에 서린 뿌연 김이 되어 제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하얗게 김이 서린 탓에 내부를 확인할 수 없는 연습실 창문에 주먹 쥔 작은 주먹을 뉘고 쓰윽 문지르면 아무도 없는 빈 공간이 보인다.
주번이 교실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모든 아이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담임 선생님이 들어와 아침 조회를 하기 직전까지 지민이 유일하게 숨어있을 수 있는 장소. 오전 여섯시 삼십분, 아침 조회까지는 두 시간 삼십분이 남았다. 오래 방치된 탓에 먼지가 잔뜩 내려앉아 있는 이곳에서 지민은 행복한 아침을 맞는다.
지민의 학교 건물은 ㄷ자 형태였는데, 연습실은 4층 맨 끝에 위치해 있었다. 옆 교실들도 별다른 목적이 없어 비워져 있는 상태고 학년별 교무실이나 교실도 반대편에 있기에 이 복도에 발을 들이는 이는 많지 않았다. 따라서 지민이 이곳에 숨어 아침 시간을 보낸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럼에도 두려웠다. 누군가 찾아와 자신의 유일한 행복을 방해할까, 지민은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아무런 음악도 틀지 않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춤을 추다가 잘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반복해서 계속 연습하고, 힘이 들면 잠시 쉬는 것. 이것이 이제 막 입학한지 두 달이 지난 신입생 전체 수석, 무용과 박지민의 일상이다.
아무와도 대화를 나누지 않는 아이가 있다. 가만히 앉아있으면 어느새 그 자리에 누가 앉아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릴 정도로 존재감이 없는 아이.
하지만 춤을 출 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빛이 나는 아이. 몰래 박지민을 지켜본지 정확히 두 달째였다.
처음 입학하던 날, 신입생 대표로 단상에 나가 선서를 했던 모습을 기억한다. 긴장했는지 살짝 떨리는 목소리였으나 듣기 좋은 부드러운 미성. 또박또박 선서문을 읽어내려가는 뒷모습에서 알 수없는 묘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듯했다. 긴가 민가 했는데, 맞네.
그때만 해도 지민은 무용과 최초의 전체 수석으로 꽤나 주목받았다. 보통 전체 수석은 음악과, 그게 아니면 미술과에서 배출되어 왔다. 그런데 무용과, 그것도 남녀 비율이 1대 4인 곳에서 떡하니 남학생이 전체 수석으로 입학하였으니 당연히 주목을 받을 수밖에. 유례없는 이변에 일부 시기 질투하는 아이들은 카더라 통신 담당자에 빙의하여 박지민이 이사장의 조카라카더라. 혹은 졸부의 아들로, 넘치는 게 돈뿐이라 심사위원들에게 뒷돈을 먹여 입학 성적 기록을 조작해 수석이 되었다카더라. 여기저기 떠들어댔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더니 그게 참 맞는 말이다. 놀랍게도 채 하루가 지나기 전 미술과인 내 귀에도 그 소문이 들어왔으니 말이다.
" 소문 들었어? 박지민 쟤, 뒷돈 주고 수석 입학했다며? "
" 으, 우리 학교가 저런 애한테 수석 자리 줄 정도로 썩은 학교인 걸 알았더라면 다른 학교에 갔을 텐데. "
" 얼굴에 철판 깐 것 좀 봐. 진짜 당당하네, 나라면 저렇게 못 했을 텐데. "
박지민을 욕하는 아이들은 애써 찾아낸 씹을 거리가 사라지게 되어 아쉽겠지만, 미안하게도 그 소문들은 모두 거짓이다. 이사장 조카? 졸부의 아들? 박지민 본인이 듣는다면 무슨 개소리냐며 뒷목을 잡을만한 소문이었다. 왜냐하면, 박지민은 고아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16년 전 하늘 고아원 운동장 나무 벤치 위에 버려져 있던 아이니까. 내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이유는 나 역시 그러했기 때문이다. 고아원 원장은 참으로 지독한 인간이었다. 후원자들에게서 받아오는 돈은 다 어디로 가져다 쓰는 건지 하루 세끼 겨우겨우 입에 풀칠할 정도였고, 밤이면 추위에 덜덜 떨며 이불 하나를 아이 여섯이 덮고 자야 했다. 한 달에 한 번, 후원자들이 고아원을 둘러본다며 오는 시간만이 우리가 웃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세상 모든 아이들이 다 그렇게 사는 줄만 알았던 어린 시절, 나와 지민은 꽤 친하게 지냈다. 온갖 궂은일을 시키는 원장의 눈을 이리저리 피해 가며 자주 놀기도 했다. 그러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우리의 삶이 평범한 아이들과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고, 중학생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지민은 가출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다시 말해 탈출한 것이다. 이 끔찍한 나락에서. 아, 나는 운이 좋게도 지민이 가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양부모님을 만나 여기까지 왔다.
아무튼, 그런 지민을 다시 만난 곳이 바로 입학식이 열리는 강당이었던 것이다. 죽은 줄로만 알았는데 용케 살아있었네. 게다가 수석입학. 가끔 고아들을 대상으로 하는 무용 공연들을 보러 갔을 때 초롱초롱한 눈을 하고 관람하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무용에 재능이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찌 되었든, 반갑네. 박지민.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안녕하세요, 나기입니다.
꽤 오랫동안 고민해오다 기존에 사용하던 필명이 아닌 다른 필명으로 찾아오게 되었어요.
새로운 기분으로 나락에서를 쓰고 싶었거든요.
아, 물론 기존에 연재하고 있는 글도 계속 쓸 예정입니다.
느끼셨듯이 이 글은 조금 어두운 글입니다.
제가 찌통물을 워낙 좋아하는 탓에.. 이해해주세요.
무용하는 지민이와, 그림 그리는 탄소의 이야기.
앞으로 자주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