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학하고 일주일이 지났을까, 복도에서 우연히 지민이와 마주쳤다. 깊은 생각에 빠진 건지 멍하니 바닥을 응시하며 터덜터덜 걸어오는 모습에선 입학식 날의 당당하던 박지민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상한 소문 때문에 친구도 하나 못 사귄다 들었는데 설마 그것 때문인가? 같이 살던 시절에는 곧잘 센 척도 하던 지민이었는데, 그 새 유리멘탈이 되었나 보다. 박지민. 박지민? 아무리 불러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는 걸로 보아 분명 지금 제정신은 아닌 것이다. 나를 지나쳐가는 지민의 어깨를 붙잡고 나서야 천천히 고개를 돌리는데, 보고도 못 알아본 건지 부딪힌 것이냐며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다시 제 갈 길을 가는 모습에 어딘가 가슴 한편이 턱하니 막혀오는듯했다.
박지민이 가출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가 생각난다. 초등학교는 같은 곳이었으나 각자 다른 중학교로 진학한 우리는 처음으로 하루의 절반가량을 떨어진 채로 지냈는데, 늘 붙어 다녀 그랬는지 무언가 허전한 것이다. 좋은 방법으로 만난 사이도 아니고, 드라마에 나오는 소꿉친구처럼 애틋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그래도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부터 함께 했으니 꽤나 정이 들어있었다. 거지 같은 원장 밑에서 더는 못 살겠다고 중얼거리던 지민의 말을 가볍게 웃어넘긴 내 탓일까, 지민이는 어느 날 갑자기 저녁시간을 훌쩍 넘어서도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박지민이 도망가도록 내버려 두었다며 이틀간 독방에 갇혀있어야 했다.
같이 도망가자고 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함께 갔을 텐데. 저 혼자 살겠다며 홀로 떠나버린 지민을 참 많이도 원망했다. 10년이 넘는 세월을 가족처럼 살아왔는데도 결정의 순간 지민에게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던 것이다. 하긴 나를 볼 때마다 이 지옥 같은 곳이 떠오를 테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조금, 아니 아주 많이 서운했을 뿐이다. 지민이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양부모님을 만나 그곳을 떠나왔지만, 여전히 내 영혼은 그 나락 속을 떠돌아다니는듯하였다. 완전히 그곳에 대한 생각을 떨쳐버리기로 결심한 게 원장의 체포 소식을 듣고 난 직후였다. 아동 학대 혐의로 구속되었다 하는데, 한 고아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당시 고아원에 남아있던 아이들 중에서 누가 죽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지민이 어디선가 죽은 채로 발견되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너의 3년이 너무나도 궁금했다. 항상 굶주렸던 그곳에서와는 달리 밥은 잘 먹고 다녔는지, 잠은 어디에서 잤는지, 아프지는 않았는지, 원장은 어떻게 된 것인지. 그냥 모든 것이 다 궁금했다. 쉬는 시간이 끝나는 종소리에 재빨리 교실로 달려와 자리에 앉아서도, 머릿속엔 온통 박지민 생각뿐이었다. 옆자리에서 무슨 일 있었냐고 물어보오는 짝에게도 아무런 말을 할 수 없었다. 이곳에서 그 더럽고 더러웠던 나와 지민의 과거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민을 아느냐고 조심스럽게 운을 떼 보는 것뿐이었다.
" 박지민, 알아? "
" 아 그 수석입학? 알지. 더럽다고 소문 쫙 났던걸. "
" 오늘 걔 봤다. 어딘가 정신 놓은 애처럼 보였어. "
" 애들이 따돌리는 모양이야. 소문 퍼진 이후로 학교도 안 나왔다더니 오늘은 나왔나 보네. "
초등학교 시절 방학숙제로 관찰일기를 써가야 했던 적이 있다. 곤충을 직접 잡아보고, 관찰하며 조사한 결과를 가져가야만 했는데 첫 단계인 곤충 잡아보기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차리리 혼나면 혼났지, 여름에 산이며 물가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고생을 하긴 싫었다. 그때 박지민은 내가 포기한 만큼 더 많은 곤충을 잡아왔었지.
그냥 내가 아는 박지민은 한번 목표를 잡으면 그걸 이룰 때까지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스타일이다. 게다가 자존심도 세고 자기 자신에게 엄격한 스타일이라, 스스로를 절벽으로 모는 편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무용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 이상 최고가 아니면 안 된다며 죽도록 노력했을 것이다. 그랬으니 당당하게 수석으로 들어왔지.
박지민은 속에 감정을 담아두었다 홀로 삭이는 편이었다. 아마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 것이 가출사건이었겠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지금쯤 박지민의 속이 어떨지 너무나도 잘 보였다. 죽도록 노력해서 얻은 결과가 말도 안 되는 소문으로 되돌아왔으니 기가 막힐 것이다. 그래서, 위험했다. 언제 어떤 방식으로 자신을 괴롭힐지 모르기에. 이대로 방치하다간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며 뉴스에 이름이 나와야 할 박지민이 학교폭력의 피해자로 나올지도 몰랐다.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그놈의 수석이 무어라고 이렇게 지민을 몰아가는지. 아마 그들은 험난했던 입시 준비 과정에서 받은 스트레스들을 죄다 지민에게 푸는 것이겠지.
나락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고자 하였으나, 이제 막 날개를 펼친 지민의 눈앞에는 새로운 모습의 그것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해야 했다. 나를 버리고 갔으면 보란 듯이 잘 살아야 하지 않아? 왜 이 꼴로 나타난 거야. 지금의 이 감정이 연민인지 애증인지 그것은 나도 잘 몰랐다.
확실한 것은, 박지민이 너무나도 신경 쓰였다.
제 글을 독방에서 추천해주셨다는 댓글을 읽고 정말 놀랐어요. (눈물) [호석아] [초록보꾸] [대유잼] [김짱구] 암호닉 분들 그리고 읽어주시는 모든 분들 감사해요.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