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그래프꼭짓점 21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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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8시 10분. 끝내 성규는 나타나지 않았다. 집 앞 대문에서 기다리던 우현은 성규가 자신을 피해 일찍 출근한 거라는 결론을 짓고 차를 출발시켰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씨! 늦었어! 어떡해!"
초고속으로 세수와 면도, 머리까지 감고 나온 성규가 파다다닥 뛰어다니며 출근 준비를 했다. 핸드폰 배터리가 분리되어 알람이 울리지않은건 제 잘못이었지만 안 깨운 봉신씨는 뭐고, 또 명수는 뭐란 말인가. 왜 안 깨웠냐고 버럭 물으니까 너무 곤히 자고 있었댄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양말,양말! 넥타이!"
한 손으로 스킨을 착착 때려바르며 다른 한 손으로는 넥타이를 가방에 챙겨넣었다.
"나 갔다올게!"
"…기다리다 먼저 갔나."
기다리긴 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서둘러 정류장으로 미칠듯이 뛰어갔다. 때마침 버스가 정류장에서 막 출발하려던 참이었는지 부릉 소리를 내며 검은 매연을 뿜어냈다.
"어어! 아저씨! 아저씨 나! 나!"
버스 옆구리를 팡팡 두드리자 허겁지겁 달려오는 성규를 알아본 운전기사가 버스문을 열고 성규를 태웠다.
"허억…허억 감사합니다아…."
버스카드를 찍고 갈라진 앞머리를 정리하며 뒷자리로 가 앉았다. 아침부터 달려서 그런지 진심 토할 것 같다. 속을 가라앉히며 넥타이를 꺼내 매고 차림새를 곱게 매만졌다.
"휴우…. 그나저나 남우현 얼굴을 어떻게 보냐…."
회사가는 길이 이렇게 지옥같는 길처럼 느껴질 줄이야. 게다가 차까지 밀린다. 신입 사원 티를 벗은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부터 지각을 하다니! 왕창 꾸지람을 들을 게 분명했다. 볼네드 본사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 또 한번 죽을듯이 달렸다. 일년에 두세번 달릴까말까한 일을 오늘 하루 다 달린 기분이다.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서둘러 사무실로 들어가려던 성규가 불투명한 사무실 문으로 사무실 안 동태를 살폈다. 우현의 자리가 텅텅 비어있었다.
"저럴 사람이 아닌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며 '늦어서 죄송합니다,죄송합니다'하고 허리숙여 사죄를 한 뒤, 후다닥 자리로 달려가 앉았다.
"제가 많이 늦었죠. 죄송해요."
호원이 넓은 화면에 뜬 우현의 이름을 성규에게 보여주며 전화를 받았다.
"어. 성규씨 왔냐고? 내 옆에,"
성규가 기겁을 하며 손사래쳤다. 말하지마요, 똥싸러갔다고해요! 아님 없다고 하던지! 대충 눈치를 챈 호원이 '내 옆에 없어. 오늘 좀 늦나봐'하고 말을 이어갔다.
"응. 알았어. 오면 전화줄께."
가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핸드폰을 켜자 부재중 전화 3통과 문자 한 통이 와있었다. 부재중 전화 3통도 우현에게서 온 전화고 문자 한 통도 우현이 보낸 문자다. [벌써부터지각이에요?전화왜꺼놨어요.할말있으니까이거보면전화해요] 천천히 문자를 읽어내린 성규가 한숨을 쉬기도 전에 바로 우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거에요? 인상을 확 찌푸리며 말하자 호원이 금세 기가 죽어 '아뇨…'하고 고개를 돌린다. 핸드폰은 빨리 전화를 받으라며 손안에서 징징거렸다. 받을까말까 고민을 하는 동안 전화는 끊겨버렸다. '부재중 전화 1통 멋진 남팀장님' 아, 받을 걸 그랬나. 또 걸려오겠거니했지만 전화는 다시 걸려올 생각이 없어보였다.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책상 한 곳에 잘 얹어놓았다. 또 언제 전화가 올 지 모르기에.
"…몸무게가 줄었네…."
46kg. 운동도 안 했는데 몸무게가 줄었다. 체중계 위에서 내려와 전신 거울앞에 섰다. 살이 빠진 것 같다던 성규의 말이 겉치레는 아니었나보다. 약간 헐렁해진 바지를 매만지고 가벼운 화장을 한 뒤 방에서 나와 성열의 방문을 열었다.
"성열아, 준비 다 했어?"
부쩍 길어진 성열의 머리와 허리에 닿을 듯한 자신의 머리를 손질하러 미용실에 가기로 했건만, 성열은 멍하니 침대에 앉아 한숨만 폭폭 내쉬고 있다. 왜 그래? 다정한 순재의 말투에 성열은 잠시 입을 달싹거리다가 또 한 번 한숨만 내쉬었다. 아니야. 고개를 저으며 일어난 성열이 먼저 방을 나섰다.
"왜? 무슨 걱정있어?"
그러더니 길쭉한 발로 휙휙 먼저 마당으로 걸어나갔다. 쟤가 또 왜 이러지. 집 대문을 나서는 성열과 순재 뒤로 꽃밭에 가득 만개했던 꽃들이 이제 슬슬 때를 지나 꽃잎들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심해!"
너 좋아하는 사람 생겼니? 성열이 대답없이 입술을 앙 다물었다. 성열의 코 끝이 빨개지기 시작하더니 곧 눈에서 굵은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왜, 왜 울고 그래!"
순재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성열이 애처럼 울기 시작했고 지나가는 사람들이 힐끗 힐끗 한번씩 쳐다보며 지나갔다.
"그만 울어! 사람들이 내가 너 울린 줄 알잖아."
간신히 울음을 그친 성열이 울음을 참으려는듯 꺼이꺼이 숨을 들이마쉬며 눈가를 소매로 벅벅 닦아냈다. 일단 어디 앉아서 얘기 좀 하자. 성열을 데리고 까페로 들어간 순재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성열에게 건넸다.
"왜 운 거야, 도대체?"
앞 뒤 잘라먹은 말이지만 순재는 용케 알아듣고 미소를 지었다.
"너 그 사람 진짜 좋아하는 구나?"
순재한테 말할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이 여자가 아닌 남자고 옆집사는 명수라고. 그리고 어제 그 명수를 대상으로 몽정을 했다고.
"우현이 자리에 뭐 있어요?"
계속 우현이 자리만 쳐다보길래요. 호원의 말에 얼른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우현에게 전화는 커녕 문자도 오지 않았다. 마음이 편안하긴 무슨, 오히려 뒤숭숭하고 심란해죽겠다. 결국 핸드폰을 집어든 성규는 메세지창을 켜고 우현에게 보낼 말들을 적기 시작했다. [바빠요?] 아, 이건 아니지. 당연히 바쁠테니까. [뭐해요?] 뭐하겠어. 일하겠지. 다시 삭제. [밥은 먹었어요?] 장난하냐? 지금 밥 안부 물을때야?
"아아…."
우현에게 다시 전화가 걸려왔음좋겠다하고 생각하는 순간! 정말 거짓말처럼 전화가 울렸다. '멋진 남팀장님'. 서둘러 핸드폰을 들고 휴게실로 들어갔다. 후우후우 몇 번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럽게 전화를 받았다.
"……."
우현의 목소리. 성규는 뭔가 반가운 기세로 말하려다가 곧 목소리를 죽이고 무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네. 받았어요."
엥? 뜻밖의 말에 성규는 미간을 확 찌푸리며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했다.
"내가 지각하고 싶어서 지각했어요? 늦게 자서 그래요, 어제."
지금 장난하는건가? 근데 막상 대답할 말이 딱히 떠오르질 않는다. '심장이 요란해서요', '마음이 심란해서요'. '그냥요'. 세 대답 중에 고민하다가 제일 무난한 '그냥요'를 선택했다.
"그냥요."
자신은 이렇게 복잡하고, 심란하고 우현 생각에 잠도 설쳤는데 우현은 너무 아무렇지도 않은 듯해보였다. 뭔가 서운하다. 내가 생각한 건 이게 아닌데…… "…알았어요."
그러더니 정말 뚝, 하고 전화가 끊겼다.
"진짜…."
개싸가지….
*
"이거 드시면서 하세요!"
시원한 음료수와 초코바를 나눠준 동우가 뚝딱뚝딱 다시 모습을 갖춰가는 가게를 보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작업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전문가만 모여있는건지, 모든 작업이 오차 없이 딱딱 진행되고 있다. 오권의 말에 따르면 간판 디자인은 예전 그대로 하되, 외형과 내부 모습은 조금 바뀐다고 했다. 아무렴 어떤가. 유명 디자이너가 디자인 해준다는데. 그나저나 성규와 친하다는 이유로 모든 돈을 일체 지불하지않아도 되는건가싶다. 사례를 하긴 해야할 것 같은데……
"저…장오권 실장님."
진지한 오권의 말에 동우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대충 손가락으로 계산을 마친 오권이 동우의 귓가에 작게 금액을 속삭였다.
"히익! 그,그렇게나 많이 들어가요?"
평생 한번 만져볼까말까한 금액에 동우는 떨리는 손을 패딩 주머니에 쑥 끼워넣었다.
*
"…바빠서 안 온 건가."
서빙을 하던 명수가 항상 성열이 앉아있던 자리를 보며 중얼거렸다. 막상 앉아있는 날엔 바빠서 잘 신경쓰지 못 하는데 이렇게 오지않는 날이면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같이 홀서빙하는 직원들도 성열이 레디락에 들어오면 명수가 주문을 받겠거니하며 명수를 부르거나 '명수 지금 잠깐 심부름갔어요. 곧 올꺼에요'하고 마치 당연한 것처럼 명수의 부재를 성열에게 말해주곤 했다.
"오늘은 안 왔네?"
일하면서 친해진 차차가 쟁반으로 성열이 항상 앉던 자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게요. 바쁜가보죠, 뭐.
"외람된 말이지만 둘이 되게 묘한 거 알아?"
어색하게 웃으며 항상 성열이 앉던 자리에 앉은 손님들에게 메뉴판을 들고 다가갔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질수록 성규는 초조해졌다. 핸드폰을 열었다가 닫았다가. 거울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가 살짝 웃어도 본다. 입술이 좀 튼 것 같아, 가방에서 립보호제를 꺼내 펴바르자 호원이 그 모습을 빤히 구경하다가 물었다.
"성규씨 소개팅나가요?"
어색하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 성규가 밖을 내다볼 수 있는 창문으로 다가가 닫혀있던 창문을 열고 빼꼼히 고갤 내밀어 아래 로비를 확인했다. 비상등이 켜진 채 로비 앞에 세워져있는 우현의 벤츠를 보자 심장이 또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진짜 기다리고있네."
헉. 익숙한 이 목소리. 고개를 들자 창문을 통해 자신의 뒤에 서있는 우현이 보인다.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화들짝 놀란 성규가 파드득거리며 몸을 움츠렸다.
"어,언제 왔어요?"
우현이 손가락으로 성규의 얼굴을 쿡 찔렀다. 왜,왜 찌르고 그래요! 볼에 박힌 손가락을 쳐낸 성규는 우현을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동우한테 뭘 사갈까 고민을 하며 사무실을 나가려던 호원이 다시 성규에게 다가와 물었다.
"성규씨."
찡긋 손인사를 한 호원이 마트에 있는 바나나를 다 털어버릴 기세로 사무실을 나갔다. 우리도 가죠. 서류를 챙긴 우현이 다가와 가방을 잡은 채, 엉거주춤하게 앉아있는 성규의 등을 툭 쳤다.
"자꾸 툭툭 칠래요? 근데 어딜 가자는 거에요. 할 말 있으면 그냥 여기서 해요."
성규는 자신도 모르게 걱정스러운 어조가 튀어나와버렸다. 근데 전 날 키스한 사람들치고는, 평상시의 모습과 너무 다를게 없었다. 우현은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걸까?
"바빠서 먹을 시간이 없었어요."
저렇게 할 얘기가 있다는 거 보면 그건 또 아닌 것 같고.
"나 그거 먹고 싶은데."
우현의 말에 조수석에 앉아 손장난만 치던 성규가 우현의 옆모습을 쳐다보며 물었다. "어떤거요?"
잡탕? 내가 언제 남우현한테 잡탕을 사줬었나?
"그 있잖아요. 시장가서 먹은거."
우현의 벤츠가 부드럽게 회사 로비를 빠져나와 빽빽한 도로에 접어들고 차가 느릿느릿해지면서 잠깐 대화할 틈이 생겼다. 하지만 우현도, 성규도 입을 꾹 다문 채 각자 다른 곳만 쳐다봤다. 결국 성규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할 얘기 있다면서요." 우현, 빨간 신호등에 브레이크를 잡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태연한 척 하지만 괜히 초조해지면서 핸들 잡은 손에 땀이 고이기 시작했다. 성규의 입에서 무슨 얘기가 나올지 긴장된다.
"어제 일은 없었던 걸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팀장님한테나 나한테나."
우현이 먼저 이런 말을 할까 싶어서 먼저 선수를 치기로 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데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고 그 말을 듣는 우현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먼저 했으니깐, 사과도 내가 먼저 할게요."
창 밖만 보던 성규가 그 말에 고개를 홱 돌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 남자가?
"무슨 소리에요?"
단도직입적인 우현의 말에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그,그건…내가…."
투둥! 두 번의 콤보공격을 받은 성규의 귀가 빨갛게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부,분위기 잡은 건 팀장님 먼저 아니었어요?"
아, 다행이다. 순간 들어오는 안도감에 성규 자신도 깜짝 놀라버렸다. 실수가 아니란 말에 안도감이 왜 느껴지는지 알 순 없었지만 뭔가…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실수는 아니었어요, 난."
우현이 조금 먹먹한 말투로 물었다.
"실수가 아니면 뭔데요?"
용기인지, 오기인지 모르겠다. 대답을 듣고 싶어 우현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한참 고민하던 우현이 솔직하게 대답을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는데, 자꾸 내가 안 하던 짓을 해."
성규, 잠시 생각하다가 뜻을 알아채리곤 빨간 신호등처럼 얼굴이 붉어진다.
"이게 무슨 감정인지 모르겠어."
우현의 반말에 성규의 가슴이 두 배로 뛰기시작하면서 설레임이 폭풍으로 몰아치기 시작했다.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남자한테 이런 설레임을 느껴도 되나 싶다.
"너…."
성규의 손이 우현의 뒷통수를 가격했다. 우현이 황당하단 얼굴로 성규를 쳐다봤다.
"지금 그게 그렇게 중요해요?"
우현은 알고 있었다. 성규가 부끄러워한다는 걸.
"들어가요."
떡볶이 전골로 가득찬 배를 어루만지며 조수석에서 내린 성규가 차에 기대 자신을 보고 있는 우현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그래서 결론이 뭐야."
성규의 억지에 우현이 피식 웃으며 '무슨 결론을 말하는 건데요?'하고 되물었다.
"아까 니가 한 말. 큼…자,자꾸 내가 생각나고 보고 싶다며."
확실히 말해줘요? 우현의 말에 성규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얼른 끄덕였다.
"내 성적취향을 바꾼 사람이에요, 김성규씨는. "
아아, 얼마만에 느껴보는 설레임인가.
"사실 어제까지만해도 몰랐어요. 내가 김성규씨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감정으로 대하고 있는 건지."
쑥쓰러워 괜히 한 허튼 말에 우현이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맘은 그게 아닌데.
"김성규씨는 나 어떻게 생각해요."
끄덕끄덕.
"여태까지 이런 저런 말 하면서 난 안 창피했을 것 같아요? 나 원래 다른 사람한테 내 맘 잘 안 보여주는 사람이에요. 그런데도 다 내보였잖아요. 그러니까 조금이라도 말해봐요."
대답을 마친 성규가 후다닥 대문으로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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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지각쟁이 남위엔=남우이앤입니다.ㅠㅠ
사실 우현과 성규의 키스신은 예정에 없었어요
스토리 라인에도 없었구요 ㅋㅋㅋㅋㅋㅋ 쓰다가 넣고 싶어서 넣었는데
후폭풍은 어떻게 풀어가야할지 막막했다는 점~~~
암튼 이제 사랑을 꽃피울 시기네요~
지금 인물관계도 제작중에 있습니다~
내일이나 화요일 중으로 올릴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