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우유 생각보다는 여름방학 보충을 재미있게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학교에 가기위해 아침 일찍 일어날 때나, 학교 가는 동안의 푹푹 찌는 무더운 거리는 짜증났지만 그런대로 슬슬 적응해가고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허언은 아닌가보다. 시간은 더디지만 꾸준히 미래로 흘러가고 있었고 한 달간의 여름방학 보충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책상에 누운 채로 손을 꼽아보았다. 오늘 수업까지 포함해서 이제 삼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사이 뭐 특별한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다. 경이는 아직도 사과우유 만들기 프로젝트를 포기 못하고 혼신을 다하고 있긴 한데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나마 초창기보다는 먹을 만한 게 나오긴 해도 시범 테스트를 할 때마다 혀가 딱딱 굳고 잔뜩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먹을 수만 있을 뿐이지 맛없는 건 여전히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식초에, 후추에, 간장에, 소고기다시다에 도대체 사과우유에 뭘 넣는 건지 모르겠다. 미래에 생길 경이의 부인이 지금 내 앞에 있다면 진심을 담아 충고해주고 싶다. 박경은 절대로 부엌 근처도 오게 하지 말라고. “대체 누구지?” 나는 책상에 턱을 붙이고 오늘도 서랍 안에 들어있던 종이쪽지를 눈으로 따라 읽어갔다. 여름방학 보충이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부터 꾸준히 오던 편지는 벌써 차곡차곡 모아둔 것 만해도 두께가 꽤 된다. 내용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것도 없다. 틱틱 쏘는 시건방진 말투에 발꼬락체. (발로 쓴 글씨체라는 뜻) 처음 받았을 때는 너무 당황스러웠는데 이것도 계속 받자 적응이 돼서 당황은 무슨,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편지는 재미있었다. 우지호 넌 다 좋은데 코가 너무 커. 물론 그게 매력적이긴 하지만… 편지를 꼼꼼히 읽노라면 발신자가 나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 뿐 아니라 자세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툴툴거려도 결국은 내가 좋다, 멋있다는 쪽으로 결말이 매듭지어지는 이 편지 쓴 사람은, 흠, 츤데레인 것이 틀림없다. 이런 앙증맞은 짓을 한 녀석이 누구일까, 나 나름대로 단서를 부여해가며 범인(?)을 찾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용의자가 없었다. 게다가 아직도 이 편지의 목적을 찾지 못했다. 경이 말로는 러브레터가 틀림없다고 하는데 러브레터 치고는 뭐랄까, 로맨스가 좀 부족하다. 낭만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물론 러브레터와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다. 모든 편지의 공통적인 내용이 내가 좋다- 라는 걸 담고 있으니. 그렇다고 이 편지를 러브레터로 덥석 인정하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하나 뒤따른다. 바로 상대가 게…이…라는 것. 나는 남자가 싫다. 가슴 나오고 엉덩이 나온 쭉쭉빵빵 누님이 훨씬 더 내 취향에 가깝다. 즉 여자가 좋다. 솔직히 같은 남자를 보고 욕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굴곡 없이 판판하고 자기랑 같은 거 달린 놈이 뭐가 좋아?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그냥 간단하게 편지에 대해 정의를 내리자면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뭐.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편지를 읽고 다 읽고 난 뒤에는 다시 꼭꼭 접어서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애인은 되어줄 수 없어도 친구 정도는 되어주지 뭐. 애초에 상대방도 맨날 이상한 개드립이나 치던데 진심이라기보다는 장난 같았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저 편지의 발신자 얼굴이 무척이나 궁금할 뿐이었다. “오, 오늘도 편지 왔어?” 수업이 끝나고 매미 울음소리를 MP3 삼아 듣고 가는데 경이가 툭 내게 말을 던졌다. 난 더위에 지쳐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아, 덥다. 나는 교복 셔츠를 잡고 흔들면서 바람을 만들어 보려고 애써보지만 별로 소용이 없다. 그림자마저 녹일 듯이 지글지글 끓는 태양 덕분에 지금 거리는 사람 하나 없이 무더위로 초죽음이 되어있었다. 수분이 바짝 마른 흙먼지는 발에 살짝만 치여도 훨훨 날아다니고 아스팔트 위로는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나는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비벼 닦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박경 우리 아이스크림 사먹자.”“오키. 진짜 더워 죽겠다, 으으.” 경이는 내 말에 화색이 돌아서 신나게 방방 뛰었다. 이제는 경이와 나 사이의 서먹한 거리감도 거의 없어지고 예전의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온 듯 싶었다.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동네 슈퍼마켓으로 들어가는 경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치 부모님이라도 된 듯 흡족한 기분에 휩싸여서 엄마미소, 아니 아빠미소를 잔잔하게 지어 보였다. “여름에는 하드바가 최고지.” 나는 망설임 없이 덥석 하드바를 집었다. 하드바가 유지방이 없어서 다른 아이스크림보다 시원하기 때문이다. 경이는 망설임 없이 쮸쮸바를 골랐다. 쯧쯧, 꼭 골라도 지 같은걸 골라요. 우리둘은 각자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다시 하교를 계속했다. “으하하, 겨아 이어바. 허가 아이크리메 부터따.” (아하하, 경아 이거 봐. 혀가 아이스크림에 붙었다.) 하드바는 막 껍질을 깠을 때 가장 차가운 상태라서 핥아 먹겠다고 그냥 혓바닥을 가져다대면 큰일 난다. 바로 나처럼 딱 하고 혀가 붙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경이는 멍하니 나와 하드바를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볼이 붉으스름해져서는 휙 고개를 돌렸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어후, 경이의 저런 반응이 한두 번도 아니고. 나는 무안해져서 아이스크림에 떡 하니 붙은 혀를 떼려고 했는데… 이게 왜 이렇게 안 떼져? 아으아앙 차가워. 이러다가 혀 동상 걸릴 것 같다. “겨아, 겨아. 크니나떠. 허가 아떠러뎌.” (경아, 경아. 큰일 났어. 혀가 안 떨어져.) 억지로 아이스크림을 잡아당기니 혀도 같이 잡아 뜯길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거리고 있자 경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본다. “우지호, 장난치는 거 아니지?”“아이야. 디따 아떠러뎌. 느므 타가워 듀그꺼가템. 사려됴.” (아니야. 진짜 안 떨어져. 너무 차가워 죽을 것 같아. 살려줘) 최대한 불쌍한 얼굴을 지어보이자 박경도 내가 장난이 아닌 것 눈치 챘는지 제법 얼굴이 심각해져서 날 본다. 여전히 아이크림은 매미가 나무에 찰싹 붙은 것처럼 혀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많이 아파?” 끄덕끄덕. 점점 혀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이 진짜로 동상에 걸려버릴 것만 같다. 눈물까지 서서히 고이기 시작하는 내 얼굴에 박경은 지레 겁먹고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린다. 그러다가 차선책으로 생각하는 것이…… 내 혀와 아이스크림 사이에 손가락을 딱 끼워 넣는 거다. 으아악, 이게 뭔 짓이야. 그러나 의외로 그 방법은 효과 만점이었다. 뙤약볕 아래서 보기 좋게 구워진 경이의 손은 상당히 뜨거운 상태였기 때문에 혀에 붙은 아이스크림을 녹여버렸던 것이다. 하얀 경이의 손가락을 타고 녹은 아이스크림이 이슬처럼 맺혔다. 날름. 본능이었다. 아이스크림이 눈앞에서 줄줄 녹고 있는데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절약의 본능. 그래서 나도 모르게 혀를 잽싸게 움직여서 경이의 손을 타고 떨어지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버렸다. 따듯한 경이의 손 위에 있는 차가운 아이스크림은, 선명한 대조 때문인지 생각보다 더 달콤했다. “너, 너……!” 경이의 얼굴이 타오를듯이 붉어진 후에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간신히 자각하는 정도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경이의 눈이 주먹만큼 커져있었다. 경아, 눈에 파리 들어가겠다. 나는 별것도 아닌 일에 경이가 당황스러워하자 놀리고 싶은 괜한 욕심이 생겨서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경이의 손가락을 그냥 쓱 핥아 보았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했다. 혀끝에 달콤한 맛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경이의 손가락에는 아이스크림이 없었는데…? 대체 이 달달한 맛은 뭐지. 신기해서 다시 낼름 혀를 내밀어 천천히 경이의 손가락을 쓸어 올렸다. ……달다. “미친놈아!” 어떻게 사람 손가락이 달콤할 수가 있지, 사실 나는 식인종인 것인가, 이런 별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내 정신을 차린 박경이 발로 내 정강이를 퍼억 찼다. 헉, 눈물이 찔끔 고일 정도로 너무 아프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차인 정강이를 두 손으로 감싸고 폴짝폴짝 뛰니까 경이가 쌤통인 얼굴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내가 핥은 자신의 손가락을 가만히 들여보는 것이었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얼굴이 빨개졌다 파래졌다 노래졌다 신호등 색으로 번갈아 바뀌던 경이는 이내 울상인 얼굴을 하고서 후다닥 도망쳤다. 그때까지도 난 정강이가 아파 끙끙거리며 애처롭게 경이가 사라진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 다음날. 괴상망측한 꿈 때문에 늦잠을 잔바람에 교복만 대충 입고 바로 학교로 뛰어왔다. 아씨, 눈곱도 못 뗐는데 망할 꿈 때문에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나는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사방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빗질을 했다. 거울 속에 비친 누군가는 같은 사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남자답게 생겨서 되도 크게 될 놈이었다. 으흐흐, 왜 이렇게 잘생겼지. 나는 갑자기 마음이 관대해져서는 거울 속 누군가에게 잔뜩 칭찬 연설을 늘여놓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어, 지, 지호 지각…….”“안녕하세요.” 시간대로 보면 당연하겠지만 한창 조례 중이었다. 담임은 지각을 하고도 당당하게 들어오는 나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떠듬떠듬 뭐라 말했지만 난 시크하게 씹고 할 말만 한 뒤 자리에 앉았다. 담임은 눈동자를 불안하게 대굴대굴 굴리며 나와 반 아이들의 눈치를 보더니 결국 잔소리 하나도 자신 있게 못하고 전달 사항만 말한 뒤 허겁지겁 반을 빠져나갔다. 이러다 언제 한번 울겠다. “박경 어디갔지?” 내 짝꿍 경군이 어디로 갔는지 증발하고 없다. 가방도 없는 걸 보면 아예 학교에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무슨 일 있나? 10년 지기 친구이자 이미 가족 같은 녀석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으니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전화라도 해봐야지 싶어 휴대폰을 꺼내는데 갑자기 내 앞으로 그늘이 졌다. “뭐야?”“자.” 김유권이 햇빛을 가로막고 서있었던 것이다. 김유권은 나한테 쪽지 모양으로 접은 흰 종이를 내밀었다. 눈빛으로 이게 뭐냐고 물어보는데도 아무 말 안하고 턱짓만 한다. 떨떠름하지만 일단 손을 내밀어 받으니까 김유권이 삐뚜름하게 미소를 짓는다. “이따가 꼭 봐.”“어어 그래.”“아, 그리고 경이는 오늘 안 와. 당일치기로 가족여행 간데.” 내가 박경을 찾는 건 어떻게 알고 용케 말해준다. 그런데 김유권 박경이랑 친했나? 스스럼없이 경이의 이름만을 부르는 김유권의 말투 때문에 나는 갑자기 기분이 확 상했다. 괜히 친한 척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김유권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김유권에게 받은 쪽지를 묵묵히 뜯어보았다. 뭔가 편지 비슷한 게 별로 예감이 좋지는 않았다. 여자처럼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지게 꼼꼼하게도 잘 접으셨다.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쪽지를 폈지만, 내용은 의외로 대수로운 것이었다. 『오늘 수업 끝나고 나 좀 만나자』 4:29엌..........졸려.... 새벽에 완전 하얗게 불태웠네요 ㅠㅡㅠ이거 오늘 안에 완결내는게 목표라.. 좀 자고 있다가 다시 이어서 써야겠네요.. 2편정도 더 쓰면 완결일듯합니다 ^~^! 제 소설을 봐주시는 모든 독자분들 감사해요♥
사과우유
생각보다는 여름방학 보충을 재미있게 보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학교에 가기위해 아침 일찍 일어날 때나, 학교 가는 동안의 푹푹 찌는 무더운 거리는 짜증났지만 그런대로 슬슬 적응해가고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더니 허언은 아닌가보다. 시간은 더디지만 꾸준히 미래로 흘러가고 있었고 한 달간의 여름방학 보충도 서서히 막을 내리고 있었다. 나는 오늘도 책상에 누운 채로 손을 꼽아보았다. 오늘 수업까지 포함해서 이제 삼일밖에 남지 않았다.
그 사이 뭐 특별한 일이 일어났을 리가 없다. 경이는 아직도 사과우유 만들기 프로젝트를 포기 못하고 혼신을 다하고 있긴 한데 별다른 성과는 없었다. 그나마 초창기보다는 먹을 만한 게 나오긴 해도 시범 테스트를 할 때마다 혀가 딱딱 굳고 잔뜩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먹을 수만 있을 뿐이지 맛없는 건 여전히 똑같았기 때문이었다. 식초에, 후추에, 간장에, 소고기다시다에 도대체 사과우유에 뭘 넣는 건지 모르겠다. 미래에 생길 경이의 부인이 지금 내 앞에 있다면 진심을 담아 충고해주고 싶다. 박경은 절대로 부엌 근처도 오게 하지 말라고.
“대체 누구지?”
나는 책상에 턱을 붙이고 오늘도 서랍 안에 들어있던 종이쪽지를 눈으로 따라 읽어갔다. 여름방학 보충이 시작한지 얼마 안됐을 때부터 꾸준히 오던 편지는 벌써 차곡차곡 모아둔 것 만해도 두께가 꽤 된다. 내용은 처음이나 지금이나 별 다를 것도 없다. 틱틱 쏘는 시건방진 말투에 발꼬락체. (발로 쓴 글씨체라는 뜻) 처음 받았을 때는 너무 당황스러웠는데 이것도 계속 받자 적응이 돼서 당황은 무슨,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편지는 재미있었다. 우지호 넌 다 좋은데 코가 너무 커. 물론 그게 매력적이긴 하지만… 편지를 꼼꼼히 읽노라면 발신자가 나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 뿐 아니라 자세히 알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뭔가 툴툴거려도 결국은 내가 좋다, 멋있다는 쪽으로 결말이 매듭지어지는 이 편지 쓴 사람은, 흠, 츤데레인 것이 틀림없다.
이런 앙증맞은 짓을 한 녀석이 누구일까, 나 나름대로 단서를 부여해가며 범인(?)을 찾고 있지만 아직 뚜렷한 용의자가 없었다. 게다가 아직도 이 편지의 목적을 찾지 못했다. 경이 말로는 러브레터가 틀림없다고 하는데 러브레터 치고는 뭐랄까, 로맨스가 좀 부족하다. 낭만적이지 않다는 뜻이다. 물론 러브레터와 비슷한 점이 있기는 하다. 모든 편지의 공통적인 내용이 내가 좋다- 라는 걸 담고 있으니. 그렇다고 이 편지를 러브레터로 덥석 인정하기에는 치명적인 오류가 하나 뒤따른다. 바로 상대가 게…이…라는 것. 나는 남자가 싫다. 가슴 나오고 엉덩이 나온 쭉쭉빵빵 누님이 훨씬 더 내 취향에 가깝다. 즉 여자가 좋다. 솔직히 같은 남자를 보고 욕정을 느끼는 것 자체가 신기하다. 굴곡 없이 판판하고 자기랑 같은 거 달린 놈이 뭐가 좋아?
이렇게 복잡하게 생각할 거 없이, 그냥 간단하게 편지에 대해 정의를 내리자면 내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다는 사실이었다. 그래 그거면 충분하지 뭐. 나는 피식피식 웃으며 편지를 읽고 다 읽고 난 뒤에는 다시 꼭꼭 접어서 가방 안에 넣어두었다. 애인은 되어줄 수 없어도 친구 정도는 되어주지 뭐. 애초에 상대방도 맨날 이상한 개드립이나 치던데 진심이라기보다는 장난 같았기 때문에 나는 별다른 걱정을 하지 않았다. 그저 편지의 발신자 얼굴이 무척이나 궁금할 뿐이었다.
“오, 오늘도 편지 왔어?”
수업이 끝나고 매미 울음소리를 MP3 삼아 듣고 가는데 경이가 툭 내게 말을 던졌다. 난 더위에 지쳐 고개만 간신히 끄덕였다. 아, 덥다. 나는 교복 셔츠를 잡고 흔들면서 바람을 만들어 보려고 애써보지만 별로 소용이 없다. 그림자마저 녹일 듯이 지글지글 끓는 태양 덕분에 지금 거리는 사람 하나 없이 무더위로 초죽음이 되어있었다. 수분이 바짝 마른 흙먼지는 발에 살짝만 치여도 훨훨 날아다니고 아스팔트 위로는 뜨거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나는 구슬처럼 흘러내리는 이마의 땀을 손등으로 비벼 닦다가 도저히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박경 우리 아이스크림 사먹자.”
“오키. 진짜 더워 죽겠다, 으으.”
경이는 내 말에 화색이 돌아서 신나게 방방 뛰었다. 이제는 경이와 나 사이의 서먹한 거리감도 거의 없어지고 예전의 정상적인 관계로 돌아온 듯 싶었다. 강아지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동네 슈퍼마켓으로 들어가는 경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치 부모님이라도 된 듯 흡족한 기분에 휩싸여서 엄마미소, 아니 아빠미소를 잔잔하게 지어 보였다.
“여름에는 하드바가 최고지.”
나는 망설임 없이 덥석 하드바를 집었다. 하드바가 유지방이 없어서 다른 아이스크림보다 시원하기 때문이다. 경이는 망설임 없이 쮸쮸바를 골랐다. 쯧쯧, 꼭 골라도 지 같은걸 골라요. 우리둘은 각자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다시 하교를 계속했다.
“으하하, 겨아 이어바. 허가 아이크리메 부터따.” (아하하, 경아 이거 봐. 혀가 아이스크림에 붙었다.)
하드바는 막 껍질을 깠을 때 가장 차가운 상태라서 핥아 먹겠다고 그냥 혓바닥을 가져다대면 큰일 난다. 바로 나처럼 딱 하고 혀가 붙어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경이는 멍하니 나와 하드바를 번갈아 보더니 갑자기 볼이 붉으스름해져서는 휙 고개를 돌렸다. 또 뭐가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어후, 경이의 저런 반응이 한두 번도 아니고. 나는 무안해져서 아이스크림에 떡 하니 붙은 혀를 떼려고 했는데… 이게 왜 이렇게 안 떼져? 아으아앙 차가워. 이러다가 혀 동상 걸릴 것 같다.
“겨아, 겨아. 크니나떠. 허가 아떠러뎌.” (경아, 경아. 큰일 났어. 혀가 안 떨어져.)
억지로 아이스크림을 잡아당기니 혀도 같이 잡아 뜯길 것 같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끙끙 거리고 있자 경이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날 쳐다본다.
“우지호, 장난치는 거 아니지?”
“아이야. 디따 아떠러뎌. 느므 타가워 듀그꺼가템. 사려됴.” (아니야. 진짜 안 떨어져. 너무 차가워 죽을 것 같아. 살려줘)
최대한 불쌍한 얼굴을 지어보이자 박경도 내가 장난이 아닌 것 눈치 챘는지 제법 얼굴이 심각해져서 날 본다. 여전히 아이크림은 매미가 나무에 찰싹 붙은 것처럼 혀에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많이 아파?”
끄덕끄덕. 점점 혀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이 진짜로 동상에 걸려버릴 것만 같다. 눈물까지 서서히 고이기 시작하는 내 얼굴에 박경은 지레 겁먹고 어쩔 줄 몰라 발을 동동 굴린다. 그러다가 차선책으로 생각하는 것이…… 내 혀와 아이스크림 사이에 손가락을 딱 끼워 넣는 거다. 으아악, 이게 뭔 짓이야. 그러나 의외로 그 방법은 효과 만점이었다. 뙤약볕 아래서 보기 좋게 구워진 경이의 손은 상당히 뜨거운 상태였기 때문에 혀에 붙은 아이스크림을 녹여버렸던 것이다. 하얀 경이의 손가락을 타고 녹은 아이스크림이 이슬처럼 맺혔다.
날름.
본능이었다. 아이스크림이 눈앞에서 줄줄 녹고 있는데 그냥 버리기에는 아깝다는 절약의 본능. 그래서 나도 모르게 혀를 잽싸게 움직여서 경이의 손을 타고 떨어지는 아이스크림을 핥아버렸다. 따듯한 경이의 손 위에 있는 차가운 아이스크림은, 선명한 대조 때문인지 생각보다 더 달콤했다.
“너, 너……!”
경이의 얼굴이 타오를듯이 붉어진 후에야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간신히 자각하는 정도였다. 얼마나 놀랐는지 경이의 눈이 주먹만큼 커져있었다. 경아, 눈에 파리 들어가겠다. 나는 별것도 아닌 일에 경이가 당황스러워하자 놀리고 싶은 괜한 욕심이 생겨서 이번에는 아무것도 없는 경이의 손가락을 그냥 쓱 핥아 보았다. 그런데 뭐가 좀 이상했다. 혀끝에 달콤한 맛이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분명히 경이의 손가락에는 아이스크림이 없었는데…? 대체 이 달달한 맛은 뭐지. 신기해서 다시 낼름 혀를 내밀어 천천히 경이의 손가락을 쓸어 올렸다. ……달다.
“미친놈아!”
어떻게 사람 손가락이 달콤할 수가 있지, 사실 나는 식인종인 것인가, 이런 별 시덥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이내 정신을 차린 박경이 발로 내 정강이를 퍼억 찼다. 헉, 눈물이 찔끔 고일 정도로 너무 아프다.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차인 정강이를 두 손으로 감싸고 폴짝폴짝 뛰니까 경이가 쌤통인 얼굴로 흥, 하고 콧방귀를 뀌더니 내가 핥은 자신의 손가락을 가만히 들여보는 것이었다. 무슨 상상을 하는 건지 얼굴이 빨개졌다 파래졌다 노래졌다 신호등 색으로 번갈아 바뀌던 경이는 이내 울상인 얼굴을 하고서 후다닥 도망쳤다. 그때까지도 난 정강이가 아파 끙끙거리며 애처롭게 경이가 사라진 뒷모습만 보고 있었다.
***
다음날. 괴상망측한 꿈 때문에 늦잠을 잔바람에 교복만 대충 입고 바로 학교로 뛰어왔다. 아씨, 눈곱도 못 뗐는데 망할 꿈 때문에 내 체면이 말이 아니다. 나는 교실에 들어가기 전에 화장실에 들려 고양이 세수를 하고 사방으로 뻗친 머리카락을 대충 손으로 빗질을 했다. 거울 속에 비친 누군가는 같은 사내가 보기에도 참으로 남자답게 생겨서 되도 크게 될 놈이었다. 으흐흐, 왜 이렇게 잘생겼지. 나는 갑자기 마음이 관대해져서는 거울 속 누군가에게 잔뜩 칭찬 연설을 늘여놓고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어, 지, 지호 지각…….”
“안녕하세요.”
시간대로 보면 당연하겠지만 한창 조례 중이었다. 담임은 지각을 하고도 당당하게 들어오는 나를 보고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떠듬떠듬 뭐라 말했지만 난 시크하게 씹고 할 말만 한 뒤 자리에 앉았다. 담임은 눈동자를 불안하게 대굴대굴 굴리며 나와 반 아이들의 눈치를 보더니 결국 잔소리 하나도 자신 있게 못하고 전달 사항만 말한 뒤 허겁지겁 반을 빠져나갔다. 이러다 언제 한번 울겠다.
“박경 어디갔지?”
내 짝꿍 경군이 어디로 갔는지 증발하고 없다. 가방도 없는 걸 보면 아예 학교에 오지 않은 것 같았다. 무슨 일 있나? 10년 지기 친구이자 이미 가족 같은 녀석이기에 눈에 보이지 않으니 덜컥 걱정부터 들었다. 전화라도 해봐야지 싶어 휴대폰을 꺼내는데 갑자기 내 앞으로 그늘이 졌다.
“뭐야?”
“자.”
김유권이 햇빛을 가로막고 서있었던 것이다. 김유권은 나한테 쪽지 모양으로 접은 흰 종이를 내밀었다. 눈빛으로 이게 뭐냐고 물어보는데도 아무 말 안하고 턱짓만 한다. 떨떠름하지만 일단 손을 내밀어 받으니까 김유권이 삐뚜름하게 미소를 짓는다.
“이따가 꼭 봐.”
“어어 그래.”
“아, 그리고 경이는 오늘 안 와. 당일치기로 가족여행 간데.”
내가 박경을 찾는 건 어떻게 알고 용케 말해준다. 그런데 김유권 박경이랑 친했나? 스스럼없이 경이의 이름만을 부르는 김유권의 말투 때문에 나는 갑자기 기분이 확 상했다. 괜히 친한 척 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쨌든 김유권은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나는 김유권에게 받은 쪽지를 묵묵히 뜯어보았다. 뭔가 편지 비슷한 게 별로 예감이 좋지는 않았다. 여자처럼 아귀가 잘 맞아 떨어지게 꼼꼼하게도 잘 접으셨다. 나는 별 대수롭지 않게 쪽지를 폈지만, 내용은 의외로 대수로운 것이었다.
『오늘 수업 끝나고 나 좀 만나자』
4:29
엌..........졸려.... 새벽에 완전 하얗게 불태웠네요 ㅠㅡㅠ
이거 오늘 안에 완결내는게 목표라.. 좀 자고 있다가 다시 이어서 써야겠네요.. 2편정도 더 쓰면 완결일듯합니다 ^~^!
제 소설을 봐주시는 모든 독자분들 감사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