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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염 02

:심연(Abyss)


나는 그 밤의 한가운데서 너와 웃으며 깨달았다.

너는 날 필요로 했고 날 독점하길 원했다.

분명한 너의 욕망을 깨닫고 내가 너에게 유일한 존재라는 사실을 마음껏 기뻐했다.

그때에야 나는 알게 되었지.

그 어린 나이에 너도 알았을까.

우리는 서로를 얽매는 사슬이었다.

그 날, 그 순간에 비로소 죄악이 잉태되었다.





난 초등학교를 일찍 졸업하고 중학교에 갔다.

정확하게 말하면 마녀를 피해서 떠났다.

중학교는 초등학교보다 훨씬 늦게 끝났으니까.

마녀에게로 돌아가기가 싫어서 학교 밖에 머무는 시간은 해질녘 그림자마냥 길었다.

나는 가끔 겁에 질린 너를 안심시켜 주느라 같이 숙제를 하곤 했다.



마녀가 데려온 정원사 아저씨와 너는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다.

너와 비슷한 시기에 여기 온 정원사 아저씨는 사십대 중반이었다.

아저씨에게 너를 맡기고 나는 종종 홀로 소매치기를 하러 갔다 왔다.

너는 소매치기를 시키지 않았지만, 내가 필요해서였다.

그동안 아저씨는 너를 데리고 산을 갔다 온다고 했다.

아저씨와 같이 있으면 너는 맞은 자국은 없었지만 겁에 질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가끔 주저앉아 덜덜 떨기도 했다.



무슨 일인지를 물어봐도 너는 하얗게 질린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말도.



그때의 나는 너무나 멍청해서 네가 낯설어 그러는 줄 알았고,

아저씨는 정원사니까 나무랑 친하게 지내야 하나보다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렇게만 알았다.

오히려 네가 숫기 없는 걸 걱정했다.



내가 좀 더 나빴어야 했는데.

미안해, 용서해 줘. 민형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날이었다.

아이 하나의 다리가 부러졌다.

마녀는 아저씨에게 장난치다 부러졌다고 했지만, 사실은 아니었다.

마녀가 아이를 때리다가 그 사단이 난 거였다.

은혜 아주머니는 더 두고 볼 수가 없으셨는지 아저씨에게 마녀의 실체에 대해 얘기했다고 했다.

아주머니는 우리가 맞을 때마다 감싸긴 하셨지만 우리를 완벽하게 보호해주시지는 못했다.

곤란하셨을 테지.

아저씨에게 말씀드리기까지도.

어른들의 사정이란 돈 몇 푼에 좌지우지되니까.

은혜 아주머니는 아저씨가 믿는 눈치였다고 하면서 한껏 들떴다.

그 뒤로 마녀는 정말 아주머니에게 가까이 가지 못했다.





그로부터 며칠 뒤에, 너는 내게 말을 꺼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망설이다가, 뜸을 들이다가.

[NCT/마크] 청염 02 | 인스티즈



“마녀가, 날 보낼 거래.”



민형아, 그 기분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기분 말이야.



“일 주일 뒤야.
원래는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고 했는데.”



눈앞에 마주한 현실이, 그 아찔한 절망이 믿기지 않아서 멍한 기분.

병신과 머저리 같은 기분.


너는 말없이 내게 금빛 로켓을 건넸다.

네 사진이 들어 있었다.

밝게 웃고 있는 네 모습을 난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네가 뿌옇게 흐려졌다.

난 꼭 울 것만 같아져서, 네가 금방이라도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아서 겁이 났다.

그 때 너를 꼭 끌어안았던 걸 지금에야 후회한다.

오른편 어깨가 축축이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떨리는 네 목소리까지도.

그 때 보냈어야 했다.

가라고, 안 가면 내가 죽어 버릴 거라고 협박해서라도 너를 보내야 했는데.



“심아, 나는…….”



너는 말을 채 잇지 못했다. 울기만 했다.

그런 너를 내가 어째서 안쓰러워 했을까.

그러지 말 걸.




그날 저녁, 네가 정원사 아저씨에게 산으로 불려가고 나서 나는 은혜 아주머니에게 달려갔다.

아주머니의 품에 안기자마자 나는 울음을 터트렸다.

아주머니는 놀란 눈을 하고 나를 달랬다.



“아가, 왜 그러니. 응?”



나는 엉엉 울다가 네가 떠난다고 했다.

그걸 말한 게 마녀라는 것도.

아주머니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채 말을 해봐야겠다고 일어섰다.

아주머니의 손이 덜덜 떨렸다.

나는 직감했다.

아주머니가 마녀를 찾아갈 것임을.

아주머니에게 잘못했다고, 잘못 들은 것 같다고 말했지만 아주머니는 금방 올 거라고 했다.

금방.




날이 새도록 아주머니는 오지 않으셨다.


다음 날 돌아온 건 아주머니였다.

하지만 아주머니가 아니기도 했다.

아주머니는 도저히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으깨져 있었다.

고아원 뒷골목에서, 처참한 몰골로 발견된 아주머니는 아주머니가 아닐 텐데.

멀쩡했던 분이 그렇게 발견될 리가 없는데. 그렇지?


사실이 아니어야 했지만 모두가 사실이라고 했다.

아주머니더러 끔찍한 사고를 당했다고 했다.

마녀가 그랬고, 경찰이 그랬고, 끝내는 아저씨조차 그랬다.

시체를 부여잡고 나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울었다.


하나의 의문만이 들었다.

아주머니는 누가 죽였을까?





아주머니의 장례식은 초라했다.

너무 초라했다.

관을 합판으로 대충 짜고 염습도 건너뛰었다.

누구 짓이었겠니.

나는 까만 원피스를 입고 영정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난 그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미동도 않고 있는 내 곁에서 너는 잠자코 자리를 지켜 주었다.

내 눈물을 닦아 주고, 내게 물을 가져다주면서.




“심아, 이만 가자.”



아저씨의 목소리가 내 등에 얹혔다.


너는 날선 눈으로 아저씨를 쳐다봤다.


[NCT/마크] 청염 02 | 인스티즈




“아뇨, 아저씨.
아주머니가 여기 계신데 어떻게 가요.”



잠긴 목을 열어 쇳소리 나는 말을 뱉었다.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그 때는.



“아주머니는 좋은 데로 가셨을 거야.”



“그건 반칙이에요, 아저씨.”



아저씨는 말뜻을 모른 채 내 어깨를 다독였다.



“진정이 되면 오너라.
먼저 가마.”



아저씨는 빈소를 나섰다.

나는 멍하니 국화꽃을 쓰다듬다가 네게 말했다.



“민형아, 나 담요 좀 갖다 줄래?
나 아무래도 여기서 자야 될 것 같아.
내일 발인이야.”



“심아, 이러는 거 아주머니도 별로 좋아하실 것 같지 않은데.
아주머니는 누나가 조금 더 쉬길 바라시지 않을까요?”



그때의 너는 어렸지만 나를 끔찍하게 생각했다.



“난 아주머니가 싫대도 같이 잘 거야. 오늘이 마지막인걸.”



다리가 저릿했다.

오래 무릎을 꿇고 있다 보니 관절이 모두 굳어버린 것만 같았다.



“알았어요. 오 분만 기다려요. 갔다 올테니까.”



아주머니의 웃는 얼굴이 유난히도 슬펐던 그날이 마지막이었다.

그 다음날 새벽에 발인하는데, 시신을 차가운 땅 속에 묻어야 했다.

미안했다.

내 탓이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아주머니 대신 죽지 못해서 눈물이 났다.

다시 고개를 들어 본 영정에 눈물은 기어이 흘렀다.




요란하게 문이 열렸다.


마녀였다.

마녀는 반쯤 취해서 웃고 있었다.

단정한 검은 정장도 그녀의 성미를 바꾸지 못했다.

마녀는 국화꽃 한 송이를 영정에 놓고선 내 옆으로 다가앉았다.



“너, 우니?
너란 애도 울어?
세상에나, 더 울어, 더 울어 봐.
피도 눈물도 없을 줄 알았는데.”



내가 거기서 도대체 뭐라고 할까.



“이건 뭐야?”



내 목에서 로켓을 채간 마녀는 네 웃는 얼굴을 발견했다.

마녀는 메조 소프라노로 웃으며 하이힐 신은 발로 로켓을 분질렀다.

못됐다. 그래, 정말 못됐다. 나만큼이나 못됐다.
 


“어머, 손이 미끄러져 버렸네.”



뒤늦게 손을 뻗었지만 이미 로켓은 부서진 후였다.



“나쁜 년.”



그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더 잘 어울리는 말이 있을까?



“벌써 남자나 밝히는 천박한 것은 어디다 쓰니. 응?
확 죽여 버릴까 보다.”



“아주머니, 네가 죽였지?”



“다음번엔 너야, 이년아.”



귓가에 마녀가 속살거렸다.

정신이 확 들었다.



“당신 뭐라고 했어?”



내가 멱살을 잡자 마녀가 뒤로 넘어가며 병풍을 엎었다.

내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났을까.



“이 손 치워.
그래, 내가 시켰어.
김 사장에게 이르길래, 내가 꾼들한테 죽여버리라고 했어.”



마녀가 앙칼지게 내 손을 잡아 뜯었다.

립스틱을 바른 그녀의 입술이 비틀렸다.

손등에는 손톱자국이 붉게 남았다.

핏방울이 몽글몽글하게 맺히면서 공중에 녹슨 쇳내를 퍼뜨렸다.

머리가 새하얘졌다.

화끈거리고 얼얼한 볼도, 비릿한 피 맛도, 후들거리는 다리도.

그 사실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녀가 아주머니를 죽였다는 사실.



“넌 인간도 아냐. 너는…”



지옥도 과분해. 그 여자는.

동의하지?


나는 마녀의 뺨을 치고, 마녀는 내 배를 때리고.

엎치락뒤치락하며 희대의 난투극을 벌이고 있던 도중이었다.



“그만두지 않으면 네가 아니라 이민형을 죽여 버릴 거야.”



마녀는 똑똑했다. 정말로.

내 약점은 내 목숨이 아니라, 너였다.

그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저항하는 걸 멈추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마녀가 치마를 걷고 나에게 발길질을 퍼부었다.

마침 들어온 네가 뺨 한 대를 얻어맞고 마녀를 떼어냈다.

마녀는 제 분에 못 이겨 쌔근대다 문을 쾅 소리나게 닫고 빈소를 떴다.

너는 무너진 나를 일으켰다.

올려다 본 너는 눈이 불그스름하게 젖어 있었다.


[NCT/마크] 청염 02 | 인스티즈


무덤덤하게 내 머리를 쓸어넘기고, 내 상처를 살피고, 너는 나를 끌어안았다.

이 비참한 세상의 끝인 네 등 너머로 아주머니가 보였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웃고 계셨다.

눈앞이 점점 흐려졌고 마침내 의식은 어둠 속으로 싹둑 잘려나갔다.



우리는 서로만 남았다.

시간은 계속 흘렀고 마녀는 더 많이 횡포를 부렸다.

아저씨의 직계 상속인이 나라서 더 그랬던 걸지도 모른다.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나는 아주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로 마약 딜러가 됐다.

소매치기는 약쟁이 사촌이란 말이 꼭 맞다.

너는 만류했지만 나는 듣지 않았다.

세상 물정 다 아는 열일곱 살짜리 여자애는 형님들보다 훨씬 장사를 잘했다.

나는 하급 마약을 거래하며 근방의 검은 돈을 제법 모았다.

돈의 액수가 커져 갈수록 그건 또다른 족쇄가 되어서, 우린 고아원을 뜰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마녀가 아저씨 돈을 세탁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어쩌면 아저씨가-

상상하기 싫은 것들이 머릿속을 파고들 때마다 나는 고개를 흔들어 떨쳐냈다.

어찌됐건 아저씨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한 번씩 모양만 바뀐 검은 차를 타고서 아무 일도 없었단 듯 왔다 갈지라도,

아저씨만큼은 의심하고 싶지 않았다.



“도둑년. 네가 훔쳤지 누가 훔쳤겠어? 어서 내놓지 못해?”



짝, 소리와 함께 고통이 얼굴을 후려치면 그 뒤엔 여지없이 발길질이 날아들었다.

나는 머리끄덩이를 잡힌 뒤 질질 끌려 다녔다.

계단의 높낮이를 등 또는 가슴으로 여실히 느끼면서 일층 거실에서 발로 밟혔다.

그러다 결국 제 풀에 지쳐 사라지는 마녀의 발에 안도했다.



나는 방어하는 게 힘들면 시체처럼 축 늘어질 뿐, 결코 반항하지 않았다.

너는 그런 나를 데리고 늘 도망쳤다.

거리로, 거리로.

다른 애들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아무도 이 소란의 원인인 그 마녀를 죽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왜 아무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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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241.13
와 이 다크미 넘치는 작품은 뭘까요.. 한 번도 본 적 없는 차원이 다른 다크한 작품 같아요 고아원이라.. 매개체도 범접할수 없는 것이지만 필력 자체도 너무 좋으셔서 확 몰입도가 높아지는것 같아요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7년 전
독자2
자까님!!! 다크마크 왔어요... 일단 이게 정녕 2화인가 싶고, 이 분량을 감당하는 작가님 다이조부...? 제가 볼 때는 다 똑같아 보여서 너무 불안해요. 둘이 관계도 그렇고. 일 저지를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그 와중에 민형이가 소매치기한다는 거에 발려서 울다 갑니다ㅠㅠㅠㅠ
7년 전
독자3
맹이입니다
진짜 이번 글도 차마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너무 대단한 글인 것 같아요
글의 분위기도 정말 좋고 작가님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껴져요

7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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