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심리 03
집에 오자마자 먹은 것들을 다 토해버렸다. 속이 울렁거리고 답답했다. 그 아이의 햇살같은 미소를 본 순간부터였을까. 노란 조명 아래 밝은 빛을 뿜어내는 듯한 그 아이의 미소가 자꾸 떠오른다. "누나, 오랜만이예요."
침대 위에 아득히 누워있는 내게 퐁당 떠오르는 네 생각 하나. 미쳤어 최여주! 왜 그 애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잘 이해는 안 가지만 해사하게 웃던 그 애가 자꾸 떠오른다. 그리고 오늘 저녁 때 보여줬던 그 애의 태도는..... 아무리 내가 해바라기 같은 연애를 했어도, 이 애가 나한테 관심이 있는지, 아님 수작 부리는건지 조금은 사이즈가 나오는데 말이야... 그 애는 분명히.... 내 직감이 맞다면 그 애는 나를 '좋아'하고 있었다. 그것이 옆집 누나의 이름이던, 7살 연상의 대학생 누나의 이름이던... 그런데 왜? 나를 왜 좋아하는 건데? 날 좋아할 만한 계기가 있었나? 내 느낌이 틀렸나? "에이 몰라!" 왜 내가 그 아이 생각을 하고 있어야 하는건데? 굳이? 요즘 연애를 안 해서 그런거야? 왜 이러니 진짜.... 갑자기 픽 웃음이 나왔다. 몇 달전까지만 해도 한 남자 때문에 죽네사네 하던 내가 나를 좋아하는 것 '같은' 옆집 고딩 생각이나 하는 모습이 퍽 우스웠다. "5년 연애, 별 거 아니네." 그리고 확인한 핸드폰에서는 두 남자의 문자가 와있었다. 첫번째 문자는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에게, 그리고 두번째는....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그 아이에게. '보고싶어.' '누나! 이거 제 번호예요! 꼭꼭! 저장하고 집에 들어가면 연락해요!'
확연히 느껴지는 두 남자의 온도차에 조금 혼란스러웠다. 학원을 가야 한다며 바래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울상이 되어 주절주절 설명하고 달려가던 그 애의 모습이 생각나니 또 한 번 웃음이 나왔다. 넌 나를 항상 웃게 하는구나. 첫번째 문자는 무시하고 두 번째 문자에 답장했다. 나 도착했어! ....... 너무 다정한 것 같기도 하고, 이러니까 나 진짜 애랑 사귀는 것 같기도 하고.... 몇 번을 지웠다 다시 쓴 결과는 '도착'이었다. 깔끔해! 멋있다 최여주! 답장을 보내고 10분이 채 안되고 그 아이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여주 누나! 도착했어요?" "응, 나 지금 집이야." "근데 도착이 뭐예요 도착이! 진짜 무뚝뚝한 누나라니까." 아직 학원인지 주위가 시끌시끌하다. 목소리 사이에 '이동혁! 누구랑 통화해!! 그 너가 좋아한다던 누나?' 이런 말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지만 애써 무시했다. "얌마, 조용히해. 형님 지금 통화 중이시다. 누나 미안해요. 친구들이 자꾸 말 걸어서." "지금 학원이야? 아직 안 끝났나 보네... 공부해 얼른. 나 이만 끊을게. 안녕" "누...ㄴ..!!" 황급히 부르는 그 아이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얼른 끊어버렸다. 볼이 터질 것 같이 빨갛고 심장도 터질 것 같이 두근거렸다. '정말 나 좋아하나'하는 생각이 끊임없이 날 괴롭혔다. 그 아이를 만났을 때부터 헤어지고 방금 통화를 끝내고 난 결론은 '이 아이는 날 좋아한다.'였다. 대체 왜? 언제부터? 혼란스러웠다. 이제 어떻게 대해야 하는 거지? 만나면 뭐라고 말해야 하는거지? 안녕? 그 아이가 자꾸 날 괴롭혔다. 통화를 끊고 30분 정도 후 엄마가 날 불렀다. "여주야, 잠깐 나와봐. 동혁이가 너한테 할 말 있다네." 언제부터 아는 사이였어?라고 눈으로 묻는 엄마를 지나쳐 대문 앞으로 나갔다. "누나! 통화하는데 일방적으로 끊는 게 어딨어요! 통화 예절 몰라요?" ".....무슨 일이야? 할 말 있어?" "굳이 무슨 일 있어야만 누나 보러와야 하는 거예요?" "............." "그냥 우리 밥도 오늘 같이 먹고 번호도 교환하고 그냥 그랬으니까 그래서 음... 뭐 오랜만에 누나 보니까 보고 싶기도 하고 음.... 그냥 그래서 보러왔어요. 왜, 안돼요?" 내 질문이 꽤 상처였던건지, 처음에는 퉁명스럽게 답하다 나중에는 얼굴이 시뻘개지는 그 애의 모습에 추측만으로 남아있던 내 생각이 확신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뱉어버렸다. 필터링 없이. "너, 나 좋아해?" "네?"
토끼 같이 커진 눈과 잔뜩 올라가버린 목소리. 아닌가 싶을 정도로 그 애는 당황하고 있었다. "누나 갑자기 왜 그래요~ 내가 누나 밥 한 번 사준다고 막 그랬다고 너무 나가는 것 같은데...? 혹시 누나 집에서 술 마셨어요? 아님 허깨비가 들었나....?" "........." "아하하...아하하하하하하... 왜 그렇게 봐요.. 사람 주눅들게 말이야.." "나 좋아하냐고. 빨리 말해." ".............." 횡설수설 갑자기 두서없이 말하다 다시 한 번 이어진 내 질문에 얼굴을 굳혔다. 다시 한 번 나타난 남자다운 그 애의 얼굴에 난 심장이 울렁거렸다. 그 아이의 침묵은 꽤나 길었다. "....좋아하면 안 돼요?" "뭐?" "내가 누나 좋아하면 안되냐고요. 내가 좋아한다고 하면 누나 내 얼굴 안 볼거예요?" "무슨 소리야?" "왜 나한테 이런 거 묻는지 물어보는 거예요." "그냥 궁금해서 그런 거야. 내가 보기에 넌 나 좋아하는 것 같은데. 그냥 이런 걸로 헷갈리는 거 딱 질색이기도 하고." 곰곰이 생각하던 그 애는 고개를 푹 숙이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그 사이에 나는 나도 모르게 좋아한다고 말해 라며 그 애를 마음 속으로 보채고 있었다. "아씨...진짜... 이렇게 갑작스러울 지 모르고 준비 안 했는데... 왜 이렇게 사람이 갑작스러워요..." "........" "아니지, 누나가 더 갑작스럽겠지... 5년만에 거의 처음 만나서 이러니까.... 작전을 잘 짰어야 했는데..." "...... 말 안 할거야?" "그럼 여기서 말 안 해요?" "말 하기 싫으면 하지마. 그럼 나 이만 간다." "아니 잠깐만." 고작 고등학생에게 뭔가를 기대하고 또 설레하는 게 우스워서 뒤를 돌려고 했다. 아니, 사실은 좋아하지도 않는 애한테 거절당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가장 컸던 것 같다. 날 부르는 그 아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또다. 또 아이가 아니라 남자다운 얼굴. 그런 모습. "좋아해요."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난 분명히 이 아이를 처음 보는데, 이 애를 좋아하지도 않는데. 연애에 공백이 생긴 탓일까? 남자로도 안 보이는 고등학생에게 가슴이 뛰다니 진짜 말도 안돼 라고 생각하며 망설임 없이 뒤돌았다. "나 좋아해달라는 거 아니예요.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언제부터 좋아했냐면.... 그건 잘 기억이 안 나요." "사실 조금 도도한 남고딩 컨셉으로 애들이 추천해줬는데 누나 보니까 너무 떨려서요. 누나는 이런 모습 싫어할 수도 있지만.... 이게 나니까...." "누나는 나 남자로도 안 보는 거 알아요. 그냥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사실은 좀 더 친해지고 멋있게 말하려고 했는데.... 내가 너무 티를 냈나봐...그쵸?" "내가 누나 왜 좋아하냐면.. 나도 몰라요.... 그냥 어느 순간부터 계속 누나 따라다니고 누나 서울 간 이후에 누나가 너무 보고싶더라고요. 얼굴 보면 나아질까 했는데 자꾸 가슴이 뛰어서... 그래서..." 민망한 지 자기 마음을 쏟아내는 그 애. 이건 조금조금씩 보여주는 것도 아니고... 마음을 쏟아내고 있다. 내 뒷모습이 불안했는지 옷자락을 잡고 가만히 서있다. 위험했다. 자기 속마음 날 것 그대로 모든 것을 보여주는 그 애가 낯설었고, 그 애의 그런 모습에 떨려하는 내 모습은 화까지 났다. 내게 고백하는 그 애의 모습에는 초등학생의 모습도, 고등학생의 모습도, 남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그 애가 나한테 가르쳐 준 그 이름 그대로 '이동혁'만이 남아있는 듯 했다. 내 옷자락을 잡아끄는 그 애의 간절한 손길에 뒤를 돌았다. "대답 안 해줄꺼죠? 상관 없어요. 누나랑 사귀고 이런 거 상상한 적도 없어요." "............." "아니... 그냥 좋아한다고요." 민망한 듯 씩 웃고는 손으로 가볍게 하트 모양을 만든다. 그리고 '이 정도...?'하며 날 바라보고 너털웃음을 짓는다.
"그렇게 큰 마음도 아니고 누나가 싫다 그러면 그냥 안 좋아할 꺼니까 부담스러워 하지 말라는 뜻이예요." 그 애의 목소리에서, 웃음에서 '제발 나한테 좀 웃어줘요.'라고 소리가 들리는 듯 했다. 그래서.....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희망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걸 잘 알면서도 웃어버렸다. "그래, 고마워. 나 이만 자러갈게. 잘자 동혁아." 그 애의 표정이 궁금했지만 그 전에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아서 얼른 돌아섰다. 황급히 방문을 닫고 나도 모르게 주저앉았다. 심장은 여전히 뛰는 중. 쿵쿵대는 울림과 달아오르는 볼에 나도 모르게 내 볼을 감싸안있다. 동혁이가 나를 좋아한다고?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아마도 이건 장난이겠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떨림과 어지러움에 눈을 감지만 머리에는 동혁이의 목소리가 웅웅댄다. "좋아해요." 나...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