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인반고양이 전정국과 아슬한 동거 02
"너 누구세요? 설마 도둑? 어떡해! 사람 살..."
"주잉, 나 꾸기. 꾸기."
정말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어제 데리고 온 고양이는 온데간데없고 내 또래로 보이는 아이가 후드집업만 걸친 채 어눌한 발음으로 말을 하다니. 내가 아직 잠에 취한 것이라고 믿고 싶었다. 아니 이건 전부 꿈이어야 된다. 내 뺨을 스스로 꼬집어보는데
아프다.
역시나 너무 아팠다. 울먹거리는 눈으로 내게 다가와 작은 손을 잡아주는 이 낯선 남자 때문에 눈물은 쏙 들어갔다. 따뜻한 왼손으로는 내 손을, 왼손과 마찬가지로 따뜻한 오른손으로는 내 뺨을 어루만져 주는 그의 손길에 나도 모르는 사이 펌프질을 미친 듯이 하던 심장이 고요해졌다. 마치 경계태세가 심한 어린 고양이를 안아주듯 그 남자는 나를 안심시켰다. 내 숨이 고르게 흘러나오는 것을 본 남자는 귀여운 웃음을 지으며 내 시선을 마주했다.
동그란 눈과 높은 코, 그리고 되게 익숙한 향이 나를 사로잡았다. 가만히 그를 살펴보는데
"주잉, 꾸기 아래 추어. 오시 없어서 주잉이가 어제 준 회색 옷 이버써. 꾸기 잘해써?"
그의 말에 나도 모르게
정말 모르는 사이에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고 순간 정신을 잃을뻔했다. 정신을 가다듬고 그 아이에게 담요 꼭 덮고 거실에서 움직이지 말라는 당부를 하곤 내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멀쩡해진 심장이 다시 튀어나올 듯 요동을 친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황은 평범했던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내가 정말 꿈을 꾸는 것 같아 볼을 꼬집어보지만 돌아오는 건 아픔뿐.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 일단 안 입는 운동복 하나 입혀주고 나가서 옷을 사 오자.
완벽해.
생각을 끝내고 옷장을 열어 운동복을 찾는데 정말 다행스럽게도 내가 살짝 살집이 있을 때 입었던 운동복이 하나 남아있었다. 저 아이에게는 작겠지만 일단... 이 상황을 넘겨야 되기에 눈을 질끔 감고 바지를 던졌다.
아무 말 없이 바지를 입고는 내게 말을 건네는 탓에 눈을 살며시 뜨고 보았다.
역시나 이 아이에게는 작았고 당장 옷을 사 와야겠다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나 지금 옷 사 올 테니깐 제발 움직이지 말고 앉아있어요. 알겠죠?"
"주잉, 지비 너므 더러어. 꾸기가 치우고 있으께. 다녀오세요. 빠빠."
"아니, 그냥 앉아있어줘요..."
"마따, 꾸기 회색이랑 까망이 캡쨩 조아해."
내 말은 들리지 않는 건지 자신의 말만 하고는 내게 손을 흔들어준다. 그래... 일단 옷을 사 와서 입혀놓고 자세한 사정을 들어봐야겠다.
지금 저 상태로 대화를 나누다간 저 아이보다 내가 먼저 기절할 테니깐.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저 아이를 놓고 가까운 매장으로 달렸다. 매장 직원이 어떤 사이즈를 찾냐고 물었는데 난 대충 성인 남자 사이즈를 말했고, 직원은 날 보며 웃었다. 남자친구 선물이냐고 물으면서 포장해드리냐는 말에 손사래를 치면서 그런 거 아니니깐 빨리 계산을 부탁했다.
남자친구는 무슨... 지금 집에 가는 게 최우선이었다.
아마 이 상태로 고등학생 시절 계주에 나갔다면 우리 반이 1등을 먹었을 것이다.
그만큼 모터라도 달린 듯 집으로 뛰었는데
이게 무슨 일이야.
아까 나오기 전의 거실은 쓰레기 집까지는 아니어도 꽤 난잡했는데 굉장히 깨끗해졌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갔는데 소파에는 정체 모를 그 아이가 새근새근 잠을 자고 있었다.
아까 치워준다는 말이 진짜였네. 괜히 고마운 마음에 바닥에 떨어진 체크무늬 담요를 들어 올려 아이의 몸을 감싸주었다. 많이 피곤했는지 내 손길에도 뒤척임 하나 없이 곤히 잔다.
일어나면 물어봐야겠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며 왜 우리 집에 들어왔는지. 그리고 내가 데리고 온 고양이의 행방도 물어봐야지.
그래도 얌전히 잠만 자는 아이가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 소파 옆에 아까 사온 검은색 운동복을 놓고 부엌으로 향했다. 어제저녁부터 아무것도 안 먹은 탓에 허기짐을 느꼈기에. 사실 혼자였으면 대충 라면이라도 끓여서 먹었을 텐데 난장판이 되어있던 거실을 치워준 아이에게 라면은 아닌 것 같았다. 오랜만에 실력 발휘를 해볼까 해서 냉장고를 열었는데
맙소사.
멀쩡한 음식이 없네. 전부 하얀 곰팡이가 인사를 하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음식들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이 며칠 전에 사놓았던 계란으로 요리를 시작했다. 계란말이와 오므라이스를 만들고 있는데 내 귓가에 숨소리가 들렸다.
"주잉, 꾸기 계란 왕 좋아해."
"아... 놀랬잖아요. 칼 떨어트릴뻔했어요... 그건 그렇고 옷은 잘 맞아요?"
"응! 꾸기 사이즈도 어떠케 아라써, 주잉? 정말 꾸기가 입던 옷 가타. 너무 마으메 드러. 주잉아, 고맙숩미다."
내게 마음에 든다며 손을 올려 하트를 그리는 탓에 괜히 웃음이 흘러나왔다.
웃음을 보이는 내가 놀라운지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떠 보이면서 몸을 흔든다. 이상하다. 분명히 나는 우리 집에 들어온 이 사람을 경찰에 신고해야 하는데 낯선 사람 같지가 않다. 게다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약간 어린아이 같았다. 표현력이나 어휘력이 성장한 신체와는 맞지 않아 보였다. 일단 밥만 먹이고 다시 대화해야지...
"주잉, 이거 너므 마시써. 전 주잉보다 더 잘 만드러조써. 사실 꾸기는 녹색 파 시러해. 긍데 전 주잉은 꾸기 몰래 그거 너어써... 지짜 너므 미어."
내게 말을 하면서 곧 울 것 같은 표정 덕분에 안절부절. 다행히 울지 말라는 내 목소리에 금세 눈가를 훔치며 웃어 보이는 아이였다.
설거지를 대신해주겠다는 아이를 간신히 말리고 소파로 데려가 앉혔다.
내가 분위기를 잡고 어제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자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면서 내 시선을 피한다. 분명히 무슨 일이 있었다. 당장 들어야 이 상황이 끝나는데 더 이상 물어보지 못하겠다. 물어보다간 이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생길 것 같아서.
괜찮다고, 진정되면 다시 이야기하자고 등을 토닥여주자 아까보다는 꽤나 진정된 모습으로 바닥만 쳐다본다. 방에서 며칠 전에 세탁해둔 베개와 이불을 들고 나와 소파에 올려주자 그때야 고개를 들었다.
"솔직히 지금 나한테는 이상한 일이 연속이에요. 일단 여기서 자고 일어나요. 말할 수 있으면 방문 두드려요."
내 말에 의미 모를 표정을 보이고는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에게 나름 잠자리를 만들어주고 나니 피곤함이 몰려왔다. 혹시 몰라서 내 방문을 잠가놓고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잤을까.
문을 조심스레 열고 눈만 빼꼼 내밀었는데 문 앞에 아까 그 아이가 두 팔을 뒤로한 채 고민하는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나한테 말을 하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다른 고민을 하는 건지 내가 나온 것도 모르는 눈치다.
괜히 놀래주고 싶은 마음에 문을 벌컥 열었다.
"냐아아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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