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소꿉친구 민윤기를 기록하는 일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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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은 언제나 행복하다. 그게 윤기가 없는 하루여도 행복한 건 변하지 않는다. 어릴 때처럼 하루 종일, 일주일 내내 붙어있을 때는 안 본 영화가 없었다. 평점이 바닥을 치는 영화라도 우리는 함께 봤다. 사실 영화를 보는 게 아니라 팝콘을 먹고, 영화가 끝난 후 이야기를 하려고 본 게 맞겠지만. 오늘은 윤기가 바쁘다고 했다. 뭐 어때. 어제도 봤으니깐 오늘은 혼자서 영화를 볼 생각에 심야로 예매를 했다. 윤기랑 같이 보려고 했던 영화였는데, 바쁜 사람한테 가자고 조르기도 애매해서 기다렸는데 결국 혼자 보게 됐었다. 늦은 오후에 일어나서 윤기에게 연락을 하고는 쿠키를 만들었다. 이따 영화 보면서 먹기도 하고, 남은 건 윤기한테 줄까 해서 꽤 많이 만들었다. 한창 만들다 보니 벌써 저녁시간이 넘어갔다. 도우미 아주머니께서도 퇴근하셨고, 혼자 남은 집에서 밥을 챙기기는 싫었다. 어렸을 때는 이럴 때마다 윤기가 와서 같이 먹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다. 다 큰 애가 바쁜 친구를 부르는 것도 좀 그렇고, 부른다고 해도 올수 있는 상황이 아니니깐 저녁은 대충 우유랑 과자로 넘겼다. 쿠키를 거의 다 만들고, 정리를 끝내는데 윤기한테 전화가 왔었다. '너 또 저녁 거르고 있었지?' 하는 말에 주위를 둘러보게 됐었다. 혹시 우리 집에 몰래카메라라도 달았나 하고. 아무 말이 없는 내가 이상했는지, 들려오는 목소리는 꽤 달콤했었다. '밥 안 먹었으면 나와. 사줄게.' 그 말을 끝으로 윤기는 내 대답도 듣지 않고 끊어버렸다. 윤기는 항상 그랬다. 미안해서 눈치 보는 내가 거절할 것 같으면 전화를 끊었다. 덕분에 내 얼굴에는 웃음꽃이 피어났고, 남은 물건은 다녀와서 치워야지 했으나 일기를 쓰는 지금까지 우리 집 부엌은 엉망진창. 엄마가 오시면 엄청 혼나겠지? 저녁에 만나는 거라서 까만 맨투맨에 바지를 입고 얇은 코트를 걸쳤다. 사실 윤기가 어디쯤인지도 모르지만 미리 준비를 다 했다. 예전에 받은 향수를 두 번 뿌리고, 현관 앞에서 기다렸다. '다 했으면 정문으로 나와. 얼른 나와.' '추워서 그런 거야. 답장하지 마.' 빠르게 오는 문자 두 개에 상당히 추운가 싶어 목도리도 하나 챙겨서 내려갔는데, 윤기가 나를 보고 웃어주었다. 저 웃음은 17년이 지난 지금까지 변하지 않았다. 윤기의 툭툭 뱉어내는 말속에 숨은 다정함도 역시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남들이 보기에는 왜 무뚝뚝한 윤기랑 다니는지 의문이라고 하는데, 나한테는 역시 윤기다. 윤기가 제일 좋은 친구다. 검은 맨투맨에 검은색 항공 점퍼까지 까만 윤기다. 그런 윤기한테 목도리를 걸쳐주니 질색을 했다. 말은 저래도 절대 푸르지 않는 민윤기라서 그 상태로 우리는 걸어갔다. 집 앞에 새로 생긴 음식점에 들렸다. 밥을 안 먹었다길래 닭갈비를 먹으러 갔는데, 윤기가 밥을 끄적거렸다. 먹기 싫은가 해서 물었더니, 사실 아까 먹었다고 했다. 하긴 이 시간까지 안 먹은 게 이상하지. 윤기의 배려에 감동 먹은 눈빛을 보냈더니 물만 들이켰다. 말없이 밥그릇에 양배추를 올려주는 윤기의 귀는 붉어졌다. 그렇게 나만 먹은 닭갈비 식사가 끝나고는 집 쪽으로 걸어가는 윤기의 손목을 잡았다. 오랜만에 잡는 윤기의 손목은 생각보다 얇았다. 경찰학과 다니는 애가 이게 뭐냐는 잔소리를 하곤, 할 일 없으면 영화를 보자는 말을 작게 뱉었다. 내 말에 눈이 커다랗게 변했다. '너랑 보려고 아껴둔 영화인데 오늘 지나면 해주는 상영관도 없고, 그냥 혼자 보면 좀 그럴 것 같아서. 볼래?' 내 말에 윤기의 입동 굴이 나를 반겼고, 잠깐 집에 들러 아까 만들었던 쿠키를 들고 나왔다. 물론 윤기는 몰랐었다. 심야 시간에 예매해둔 거라 아직 시간이 꽤 남았기에 우리는 버스를 타고 갔다. 저녁도 사준 사람한테 영화는 각자 보자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내가 몰래 버스에서 결제를 했다. 우리는 눈빛으로 심심한 고마움을 전했고, 늦지 않게 영화관에 도착했다. 사람은 별로 없었고, 팝콘을 사려는 윤기 눈앞에 내가 만들었던 쿠키를 흔들거렸다. '뭐야, 김여주. 언제 만들었어? 오랜만이다.' 영화가 시작됐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옆자리는 조용해졌다. 부스럭거리는 윤기가 왜 조용한가 싶어 보니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조용히 졸고 있었다. 하긴 저녁 시간까지 학교에서 체력훈련을 하다가 바로 나와준 사람인데 안 졸고 있던 게 이상했다. 윤기가 깨지 않게 조용히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게 했다. 많이 졸렸는지 내 손길에도 깨지 않았다. 영화가 끝나기 전에 윤기는 자연스럽게 일어났었고, 우리는 별 대화 없이 집까지 함께 했다. 어제도 만나고, 오늘도 만나니깐 꼭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는 내 말에 윤기는 짧게 '나도' 라고 말을 하곤 돌아갔다. 많이 피곤해 보였다. 내가 데려다줄 걸 그랬나? 추신. 오늘도 윤기에게는 달콤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저녁 잘 먹었어. [암호닉] 땅위, 찡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