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찬열은 그 이후로 백현의 반에 가지 않았다.그냥 조금 마음을 정리하고 싶기도 했고,또 두려워서이기도 했다.종인에게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게 될까봐.점심시간에 밥을 먹을 때도 찬열은 별 말이 없었다.그냥,찬열은 백현을 보면 우울해졌다.분명 백현은 그대로인데 찬열은 그저 자꾸 불안하고 짜증이 치밀어서 딱히 백현에게 할 말이 없었다.백현은 자꾸만 그런 찬열을 눈치봤고 찬열은 자꾸만 우울해지고.그 반복이었다.
찬열이 식판을 들고 일어서자 백현도 따라일어섰다.백현은 자꾸 저절로 찬열을 향하는 시선을 몇 번이고 거두었다.찬열은 그것을 알기는 하는지 말 없이 식판의 음식물쓰레기를 버리고 밖으로 나왔다.백현은 자꾸만 찬열을 힐끔거렸지만 찬열은 백현이 저를 쳐다보는 것도 모르고 그저 눈을 내리깔고 걸을 뿐이었다.백현은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찬열아"
"..어?"
"왜 그래..나한테 뭐 화난 거 있어?"
찬열의 눈이 불투명했다.대답대신 웃으며 고개를 젓는 모습에 백현은 뭔가 마음이 콕콕 쑤셨다.세훈이랑 있을 때는 웃으면서 잘만 놀더니.입술을 꼭 깨물었다.종인과의 오해를 풀고 나서 백현은 종인과 '친구'라는 이름을 달 수 있을 정도까지는 친해졌다.그때문에 걱정했던 걸 한시름 놓고 이제야 좀 안정되나 싶었더니 이번엔 찬열이었다.그러고 보니 어제도.백현은 찬열에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보이는 모습이 항상 우울모드니 하고 싶은 말을 할 수도 없었다.그리고….백현은 뭔가를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백현아"
찬열이 갑작스레 백현을 불렀다.응?백현은 조금 기대에 차 대답했다.
"..있잖아"
....
아냐,
찬열이 싱겁게 말을 뗐다.백현은 걱정을 넘어서 조금 답답해졌다.찬열에겐 말하지 않았지만 요즘 들어 찬열이 조금 다른 것 같다고 느끼는 백현이었다.원래는 먼저 눈도 맞춰주고,내가 우울해있으면 먼저 밝게 웃어줬는데.백현은 어쩐지 섭섭해졌다.백현은 그렇게 말 없이 걷다가 찬열의 반에 다다르자 가볍게 인사하고 헤어졌다.찬열이 반에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백현은 다시금 복도를 걸었다.휴우.요즘 찬열은 이상했다.그것도 좀 많이.백현은 가슴이 갑갑했다.
..좋아한다며.내가 좋다며.
근데 왜 그러는거야.
백현은 자꾸만 입술이 삐죽거렸다.
-
찬열은 줄곧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이어폰으로 귀를 꽉 막고,제 팔을 베개 삼아 대놓고 수업시간에 잠을 청했다.사실 잠이 오지 않았지만 그랬다.난 도대체 뭘 이렇게 불안해 하는거야?찬열이 스스로 물음을 던졌다.가지지 못했을 땐 몰랐던 두려움이었다.연지에게서 자신에게,또 자신에게서 종인에게 차례가 넘어가는 것 같은 그런 기분을 찬열은 느끼고 있었다.백현이가 그럴 리가 없는데.첫 눈 같이 맞았다고 좋아했던게 엊그제같은데.찬열은 헛된 망상인 걸 깨달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일어나야지"
선생님이 엎드려있는 찬열의 등을 톡톡 두드렸음에도 찬열은 무반응이었다.몇번 더 선생님이 오고 가며 찬열의 등을 두드려주었지만 찬열은 끝까지 엎드려있었다.백현은 사실 찬열에게 종인의 '종'자도 꺼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자꾸만 찬열은 둘의 하하호호 즐겁게 대화하는 모습만 봐도 속에서 부글부글 뭔가가 끓어올랐다.명백하고 정확하게 말해서 질투였다.배연지는 그렇다 치고,이제 남자한테까지 이런 감정을 느껴야 하나.찬열은 한심했지만 종인의 '친한 줄 알았는데,아닌가봐'하는 그 어조가,눈빛이 생각나 어쩔 수 없었다.그냥 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종인의 모든 것이.백현과 눈을 마주하는 모습조차 보기 싫을만큼 그랬다.
쉬는 시간 종이 쳤음에도 불구하고 찬열은 계속 엎드려 있었다.잠은 더럽게 안왔지만 찬열은 오기 부리는 것마냥 그렇게 계속 엎드려 있었다.백현이 보고 싶다.찬열은 아무도 듣지 못하게 작게 중얼거렸다.아까 점심시간엔 데리러 갔을 땐 종인과 대화하는 모습을 봐서 또 금세 우울해지는 바람에 백현에게 말도 잘 걸지 않았다.자신에게 화났냐고 물어보는 백현에 사실 '응'이라고 대답할 뻔한 찬열이었다.꼭 너한테 화난 건 아니야,그냥…너랑 같이 있는 김종인한테 화난거지.
내가 좋아 김종인이 좋아?
이거 뭐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도 아니고,걱정하듯 물어보는 백현의 앞에 대고 찬열은 그렇게 말할 뻔 했었다.그렇게 물으면 분명 당황하며 우물쭈물거릴 백현을 잘 알기에 목까지 차오른 말을 삼켜내고 찬열은 다시 입을 꾹 다문 것이었다.찬열은 바라고 있었다.자신이 일일히 백현을 찾아가지 않아도 가끔은 먼저 자신의 반에 들려주길,또 '네가 내 제일 친한 친구야'같은 조금 오글거리지만 행복할 멘트를 해주기를.내심 바라고 있었다.예전엔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 족했는데,상황이 변하니 역시 바라는 것도 생겼다.내가 너무 큰 걸 바란건가,그런거야?찬열은 괜히 백현에게 또 섭섭해지는 마음을 어찌 할 수 없었다.
"야 박찬열"
시끄러운 잡음사이 제 이름이 불리자 찬열이 귀를 곤두세웠다.오세훈인가?찬열은 별로 궁금하지 않아서 그냥 계속 엎드려 있었다.야-일어나봐!세훈의 목소리가 맞았다.찬열은 조용히 한 쪽 손을 작게 들어 가운데손가락을 치켜세워주었다.잠시 말이 없던 세훈이 조금 웃음 섞인 소리를 냈다.이야,백현아 보여?얘 나한테 맨날 이 지랄한다?세훈이 키득거렸다.뭐?그 말에 찬열은 손을 내리고 책상에서 얼굴을 확 들었다.
"...씨발"
"바로 일어나네,변백현 대단하다 정말.너한테 그정도야?"
"왜 왔는데?"
신경질 섞은 찬열의 말에 세훈이 씩 웃어보였다.세훈이 휴대폰을 흔들어보이더니 곧 찬열의 귀 가까이에 얼굴을 댔다.내가 개쩌는거 받아왔거든.세훈의 표정이 너무 음흉해보여서 찬열은 뭔가 찝찝했다.
"개쩌는거?"
"애들한테 졸라 부탁해서 구해온거야"
뭘 받아왔는데?찬열은 형식적으로 물었다.
"야동"
"..미친놈"
"이거 구하기 어려운거거든?개쩐다고 했잖아.내가 일부러 반까지 찾아와줬구만"
"너 나이가 몇이냐,끊은지가 언젠데"
"아 근데 이건 진짜 대박이야"
"됐다니까"
세훈이 얼굴을 구기더니 '나중에 후회나 마'하고 혀를 찼다.감흥 없다,감흥 없어.찬열은 백현을 좋아하게 된 이후 전라의 여자를 보든,그런 여자들이 열댓명 모여 스트립쇼를 하든 일말의 관심도 없을 것 같았다.세훈이 재미가 식은 듯 다시 몸을 일으켜 바로 섰다.
"맞다,변백현한테 고맙다고는 했냐?"
"..백현이한테?왜?"
"...아 몰랐어?"
세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뭘?찬열이 눈썹을 찌푸렸다.아 맞다,기억 안난댔지.그럴 수도 있겠다.세훈이 중얼거리는 말에 찬열이 뭐냐고-하고 되물었다.
"너 꽐라됐을 때 마침 네 휴대폰에 백현이한테 전화가 왔길래,불렀거든"
"..어?"
"니 몸뚱아리가 너무 무거워서 나 혼자는 끌고 갈수가 없더라.새벽 한 시쯤에 겨우 부탁해서 불러냈다 내가"
"그 시간에 백현이가 나와주든?"
"나와주던데.쫄따구짓한 보람 있다 너 생각해보니까"
"..."
"니 집 다 왔을 때쯤에 걔가 나도 그만 들어가보라고 그러더라.지가 너 데려다주고 오겠다고."
"..."
"그리고 뭐 나중에 잘 데려다주고 왔다고 문자도 왔고.변백한테 고마운 줄 알아"
찬열은 어안이 벙벙했다.백현이가 날 데려다 줬다고?오세훈이 아니라?찬열은 교복차림으로 침대에서 깼던 게 생각났다.순간 찬열은 두려워졌다.
"나 무슨 말했어?"
"아니 거의 기절했던데?"
찬열이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근데,그럼 들킨거네.왠지 좀 아쉬웠다.그럼 날 침대에 눕혀준 것도 백현이었겠구나.침대에...
어?
"백현이가 데려다 줬다고?"
"엉"
"집까지?"
"나보고 먼저 들어가라 했다니까"
그럼 그 꿈은?
"..."
"곧 종 치겠네,나 간다"
찬열은 저도 모르게 입이 벌려졌다.한 번,눈을 깜빡였다.그리고 두 번,또 세 번,다시 네 번,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침대에서,예쁘게 웃는 백현이를 안아주면서 고백했던 것 같은데.백현이는 내가 고백했을 때 뭐라고 했더라….
찬열의 머릿속 노란 전구의 불이 켜졌다.
* *
어제 새벽에 글을 다 쓰고..비몽사몽해서 올리지도 못하고 잠들었네용
일어나보니 거의 저녁..겨우 컴퓨터 키고 올리고 가요ㅋㅋㅋㅋ
찬백행쇼의 길은 머나멀군요 이제 거의 스무화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