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적 모먼트
박우진을 처음 만났던 때는 입학식도, 새 학기도 아닌 어중간한 1학기의 끝자락이었다. 이유는 박우진이 전학생인 탓이었다. 빨갛게 물든 머리는 꽤나 인상적으로 와 닿았다. 두발에 대한 단속이 없는 학교인지라 선생님들도 박우진의 머리색에 대해 고나리를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쟤 뭔데? 머리 열라 토마토 같네.”
옆 자리 김재환이 매점에서 사온 빵을 뜯어먹으며 중얼거렸다. 박우진은 천천히 교탁 앞으로 걸어와 입을 뗐다. 박우진. 잘 부탁해. 그 목소리는 퍽 퉁명스러웠다. 반 여자애들이 수군대기 시작했다. 잘생겼는데? 목소리도 좋은데? 그중에는 박우진의 얼굴만 뚫어져라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기 바쁜 여자애도 있었다.
박우진의 자리는 나의 뒤였다. 학기 도중 자퇴한 친구 탓에 자리가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학급의 학생 수가 박우진을 포함해 홀수였기에 박우진은 짝이 없었다. 빈 옆자리에 제 가방을 올려놓은 박우진은 멀뚱히 창밖만 바라봤다.
"안녕?"
"어, 안녕."
친화력이 꽤 괜찮은 편인 김재환도 박우진의 퉁명스러움에 당황을 하곤 했다. 뭐야, 나 쟤 조금 무섭다. 김재환이 속삭였다. 나는 알게 모르게 뒷자리 박우진을 의식했다. 의자에 걸어놓았던 가방을 옆에 걸고, 내 물건이 뒤쪽으로 굴러간 날에는 그걸 주우러 자리에서 일어나거나 할 수 없었다. 이상하게도.
"박우진! 축구 나갈 거지?"
박우진은 신기할 정도로 말이 없었다. 그런데 친구는 금방 사귀었다. 남자애들 사이에서는 과묵한 편이 아닌 듯싶었다. 박우진을 무서워하던 김재환도 박우진과 어느새 친해져있었다. 박우진이 전학 온 지 2개월 정도가 지났다. 그 사이에는 짧은 여름 방학이 있었다. 박우진은 방학 때 남자애들이랑 놀러를 많이 다닌 모양이었다. SNS를 눈팅한 결과 알아낼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나는.
"어, 나갈게."
은근슬쩍 내게 시선을 던지는 박우진이, 좋아졌다.
나는 더위를 정말 싫어했다. 여름날에는 하루 내리 교실에 처박혀있기 일쑤였다. 살이 타는 듯한 그 더위는 너무나도 끔찍했다. 나는 그래서 차마 밖에 나갈 용기를 내지 못했다. 박우진은 매일같이 운동장에 출석 도장을 찍었다. 구석진 곳에 있는 우리 반의 창문으로는 박우진의 축구하는 모습을 잘 볼 수가 없어 나는 운동장이 전체적으로 제일 잘 보이는 3반에 매일 출석 도장을 찍었다.
"또 왔냐? 우리 반에 꿀 발라놨어? 맨날 와."
오늘도 어김없이 자기네 반에 발을 딛는 나를 본 박지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댔다. 나는 가뿐히 박지훈의 말을 씹고서 창문가로 달려가 앉았다. 정면으로 내리쬐는 햇빛이 내 얼굴을 따갑게 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눈으로 열심히 빨간 머리를 쫓았다. 체육대회 때 축구로 참가를 할 예정인 듯싶었다.
박우진은 축구를 참 잘했다. 사실 2개월이라는 시간동안 박우진에 대해서 알아낸 것은 몇 개 되지 않았다. 운동을 잘 하고, 낯을 가리고, 가끔은 엉뚱하다는 것. 박우진과 친해진 김재환에게서 들은 사실들이었다.
"오늘 자리 바꾸는 날이지?"
시간은 흐르고 또 흘러 다음 달이 되었다. 여태껏 자리를 바꾸면서 나는 박우진과 단 한 번도 짝이 된 적이 없었다. 그렇게 간절하게 빌고 또 빌었는데도. 이쯤 되니 그냥 체념 상태에 이르렀다. 될 대로 되라.
[11번 박우진]
역시나 박우진은 나와 거리가 있는 자리에 배정을 받았다. 나는 맨 앞자리였다. 박우진은 뒷문 바로 앞의 제일 구석 뒷자리였다. 극과 극이었다. 우울해진 나는 책상에 풀썩 머리를 처박았다. 나는 진짜 바보야. 옆자리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걸 보아하니 아직 내 옆자리를 뽑은 애가 없는 모양이었다.
한참이 지나고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줄어들며 내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책상에 처박고 있던 머리를 천천히 들었다. 새 짝꿍인데 인사는 해야겠지, 싶었다. 헝클어진 머리칼을 대충 정리하고서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어?"
고개를 돌리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확 튀는 빨간 머리에 놀란 내가 입을 떡 벌렸다. 박우진은 내 반응에 정면에 꽂혀있던 시선을 내게로 돌렸다.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제 머리를 긁적인 박우진이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건넸다.
"...누가 앞자리 싫다고 바꿔달래서."
원래 자리였던 곳을 턱으로 가리킨 박우진이 제 머리에서 손을 뗐다. 아, 그, 그렇구나. 나는 우습게도 말을 더듬고 말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머리칼을 좀 더 단정히 정리하는 건데. 나는 조심스럽게 내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조금만 움직여도 닿을 듯한 박우진의 팔 탓에 나는 움직임을 크게 할 수 없었다. 짝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을 했으나, 막상 이렇게 짝이 되고 나니 뭐 어떻게 굴어야할지 감이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지우개를 가져오지 않은 척하며 지우개를 빌려볼까. 수업시간에 일부러 존 척을 하고 필기를 보여달라 부탁을 할까. 안타깝게도 내게 그런 용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나는 누구보다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평소에는 잘만 졸던 문학시간에도 눈이 말똥말똥했다. 힐끗 쳐다본 박우진은 가만히 눈을 감고 있었다.
"...저,"
나는 조용히 박우진을 불렀다.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박우진은 감고 있던 눈을 힘겹게 떴다. 제 손으로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하기도 했다.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나는 조심스럽게 내 문학 필기 공책을 박우진에게로 내밀었다. 박우진은 공책을 보더니 다시 나를 쳐다봤다. 그 시선이 심장에 콕, 박혀왔다.
"아, 그러니까, 필요하면 빌려가도 된다고..."
나는 또 말을 더듬었다.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하다 보니 말이 자꾸 뚝뚝 끊겼다. 박우진은 내 손에 들려있는 공책을 또 빤히 쳐다보았다. 거절하려나. 그러고 보니 박우진은 공부를 그렇게 붙잡고 있는 스타일은 아닌 듯싶었는데. 나는 괜한 오지랖을 부린 것 같아 후회가 들기 시작했다. 오늘 급식 뭔지 알아? 와 같은 간단한 물음으로 말을 붙여도 됐을 걸.
"고마워."
"어?"
"금방 필기하고 줄게."
박우진이 내 공책을 받아들었다. 고맙다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뚝뚝한 얼굴이 내 웃음꽃을 피웠다. 높낮이가 있는 그 말투가, 오늘따라 더 좋았다.
*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 박우진과 짝이 된 동안, 나는 용기를 내 몇 번 박우진에게 말을 붙였다. 급식 얘기를 하기도 하고, 다음 시간이 뭐냐는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사소한 질문이었지만 그 때만큼은 전혀 사소하지 않았다. 항상 말을 먼저 붙이는 건 내 쪽이었다. 박우진은 내 질문에 짧은 대답을 뱉거나 묵묵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계주 뛸 사람? 여자."
체육대회가 일주일 후로 훅 다가왔다. 남녀공학인지라 계주 또한 남학생과 여학생이 번갈아 뛰어야했다. 계주 선수 중 박우진은 당연히 포함이었다. 빈자리는 딱 하나였다. 여자 계주 한 명.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반장이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여주 잘 뛰지 않아? 50미터 8초대잖아."
갑작스럽게 불린 내 이름에 화들짝 놀란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계주와 같은 부담스러운 종목은 딱 질색인데. 여주야, 니가 니갈래? 반장이 내게 물었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눈을 도르르 굴렸다. 그러다 박우진과 눈이 마주쳐버렸다. 아, 어쩔 수 없겠다.
"응, 내가 나갈게."
내 말을 끝으로 체육대회 종목 별 선수가 모두 정해졌다. 반 전체 경기를 제외하고서 내가 나가는 건 계주뿐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 지. 벌써부터 몰려오는 부담감에 속이 거북했다.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박우진은 어느샌가 엎드려있었다. 나는 빨간 그 뒤통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체육대회 당일의 날씨는 유난히도 더웠다. 반티를 반팔로 맞춘 것이 다행이었다. 나는 의자에 가만히 앉아있기만 했다. 중간 중간 제공되는 간식들을 받아먹으면서. 체육대회는 꽤나 재미있었다. 굳은 석고마냥 가만히 앉아있던 나는 다음 순서가 축구라는 소리를 듣자마자 의자에서 벌떡 일어섰다.
"야야, 누가 보면 니가 축구 나가는 줄 알겠다."
아이스크림을 쪽쪽 빨던 김재환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는 김재환을 한 번 째려보고서 운동장으로 걸음을 뗐다. 여자애들이 이미 모두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탓에, 나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축구를 관람하기로 했다. 박우진이 빨간 머리라 참 다행이었다. 찾으려 노력하지 않아도 눈에 확 튀었으니까.
"꺄아악! 박우진! 박우진!"
온통 박우진을 응원하는 목소리였다. 나는 조용히 응원 풍선을 흔들었다. 아주 공을 갖고 노는구만. 나는 살풋 웃음을 흘렸다. 괜히 입고 있는 반티를 만지작거리기도 했다. 박우진과 같은 티. 기분이 이상했다.
"어, 거기! 조심해!"
골대 근처에서 응원을 하고 있던 나는 갑작스럽게 내 쪽으로 날아오는 공을 차마 피하지 못했다. 무서운 속도로 날아오는 공에 어깨를 맞은 나는 그 충격으로 바닥에 주저앉아버렸다. 아, 이게 뭐야. 아픔보다 창피함이 먼저 밀려왔다. 일어설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는데, 누군가가 내 손을 잡아 힘주어 나를 일으켰다.
"괜찮아?"
박우진이 놀란 기색을 하고서 나를 이리저리 살폈다. 깜짝 놀란 나는 손에 있던 응원 풍선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모두의 시선이 이쪽으로 꽂혀있었다. 내 손에 묻은 모래를 털어준 박우진이 화난 목소리를 뱉었다.
"야, 공 똑바로 차. 뭐하냐?"
내 옆에 있던 공을 주워든 박우진이 신경질적으로 공을 골대로 던졌다. 박우진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서 다시 운동장으로 향했다. 김여주, 괜찮아? 아이스크림을 아직까지 입에 물고 있는 김재환이 달려와 내게 물었다.
"아, 어..."
괜찮은 건지 안 괜찮은 건지, 분간이 가질 않았다.
한참 멍을 때리고 있다 보니 오지 않기를 빌었던 계주 경기가 성큼 다가왔다. 박우진 때문에 정신이 반쯤 나가있던 나는 계주 선수를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몸을 일으켰다. 김여주 화이팅! 김재환과 그 옆의 박지훈이 내게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나는 그들에게 고개를 끄덕여주고서 운동장 쪽으로 걸음을 뗐다.
나는 첫 번째 주자였고, 박우진은 마지막 주자였다. 각자의 출발선으로 가라는 지시에 나는 힘없이 걸음을 뗐다. 아, 부담스럽다. 나는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차례를 기다리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뱉는 내 어깨를 누군가가 톡톡 쳤다.
"아까 맞은 데, 괜찮아?"
"아, 응! 괜찮아!"
"그래."
반대편 출발선에서 대기를 해야 할 박우진이었다. 나는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빨리 뛰어대는 심장을 애써 외면한 채 나름대로 밝게 웃었다. 박우진은 괜찮다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할 말이 더 있는 걸까? 박우진은 제 머리를 긁적이며 발을 뗐다 붙였다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내게 다시 다가와 입을 뗐다.
"그러니까, 그."
"응?"
"조심하라고."
말을 마치고서 뒤돌아 가는 박우진의 귀가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내 착각이 아니길 빌었다.
우진이로 첫사랑 조작 당하고 싶어서 쓴 글...
처음 올려보는 거라 부족한 점이 많은 것 같아요ㅠㅠ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