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사랑적 모먼트
나는 반대편으로 걸어가는 박우진의 뒷모습을 한참이나 바라봤다. 설마 지금 나 걱정해준 거야...? 자각을 하자마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보다, 박우진의 그 한 마디가 나를 더위로 더욱 몰아넣었다. 왠지 모르게 눈앞이 아찔해졌다. 나는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뜨고서 바통을 건네받았다. 그 순간에서야 실감이 났다. 내가 계주를 뛰긴 뛰는구나.
"준비!"
체육 선생님이 호루라기를 입에 물었다. 나는 긴장감에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바통을 쥐고 있는 손에 땀이 찼다. 혹여나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지면 어떡하지. 내가 제일 느리면 어떡하지. 나는 크게 숨을 내쉬고서 이를 악 물었다. 잘 해야 돼. 박우진이 저 편에서 보고 있을 것이었다. 조심하라고. 아까 전 박우진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김여주 잘한다! 가자!"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김재환이 호들갑을 떨어대며 나를 응원했다. 나는 여전히 이를 악 물고 있었다. 살면서 이렇게 열심히 달려보았던 적이 있을까 생각이 들 정도로, 나는 열심히 다리를 휘저었다. 나는 2등으로 달리고 있었다. 1등과는 정말 미세한 차이였다.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넘기는 순간 머리끈이 풀려버렸다. 긴 머리칼이 내 시야를 가렸다. 다행이 바통터치에는 지장이 없었다.
"와, 김여주 잘 뛰는데?"
박우진과 같이 대기를 하고 있던 옆 반 안형섭이 날 향해 박수를 쳐댔다. 숨을 고르기 바빠 그 칭찬에 제대로 인사를 하지 못하였다. 자꾸만 흘러내리는 머리칼이 짜증날 참에 시야가 탁 트였다. 누군가가 내 머리칼을 내 얼굴에서 치워준 모양이었다. 나는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닦아내며 고개를 들었다.
"아, 그. 머리카락 불편해 보여서."
"아, 고, 고마워."
나와 눈이 마주친 박우진이 황급히 내 머리칼을 제 손에서 놓았다. 발갛게 상기된 두 볼이 다시금 화끈해지는 것을 느꼈다. 두 명. 이제 대기 해야지. 선생님의 지시와 함께 박우진과 안형섭이 출발선에 자리를 잡았다. 열심히 달려오는 3번 째 주자를 집중해서 바라보고 있는 박우진의 눈빛은 퍽 멋있었다. 나는 뜨거운 내 손을 뜨거운 내 볼에 갖다 댔다. 이게 뭐야, 온 몸이 다 뜨겁잖아.
"잘 뛰어!"
어디서 용기가 튀어나온 건지 모를 일이었다. 열심히 손부채질을 하다 박우진과 눈이 마주친 나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주먹을 내쥐어 보이며 박우진에게 화이팅을 외쳤다. 박우진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3번 째 주자가 코앞으로 다가왔다. 박우진은 제 옷에 손을 한 번 닦고서 팔을 뒤로 뻗었다.
"박우진! 박우진!"
어김없이 박우진을 응원하는 목소리들이 운동장을 가득 채웠다. 야, 너는 우리 반을 응원해야지! 다른 반 아이들도 박우진을 응원하고 있었다. 나는 결승선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힘든 건 잊은 지 오래였다. 박우진은 나머지 애들을 모두 제치고서 단연 1등으로 달려고오 있었다. 환호성이 더욱 커져갔다. 멋있다. 나는 그렇게 박우진에게 한 번 더 반할 수밖에 없었다.
"오올, 좀 멋진데?"
김재환이 1등으로 골인한 박우진에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박우진은 가쁜 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김재환의 옆에서 박수만 치고 있었다. 아까 잘 뛰라고 외쳤던 용기는 어디가고. 알다가도 모를 내 행동이 어이가 없었다. 수고했다고 한 마디라도 해주고 싶은데. 나는 여전히 용기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응?"
그러던 와중 박우진의 손이 내 눈앞으로 불쑥 내밀어졌다. 정확히는 박우진의 손등이었다. 나는 조금은 당황스러운 얼굴로 박우진을 쳐다봤다. 1. 박우진의 손등에는 당당하게 그 숫자가 자리 잡고 있었다. 아, 일등. 그제야 박우진의 뜻을 알아챈 나는 그만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1등을 했다고 손등을 내미는 꼴이 꼭 초등학생 마냥 귀여워서였다.
"...나 1등."
"으응, 수고했어!"
나는 그제야 박우진에게 수고했다는 한 마디를 꺼낼 수 있었다. 니 말대로, 잘 뛰었다. 박우진의 목소리가 뒤따라 붙었다. 나는 또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다. 꼭 나를 위해 열심히 뛰었다는 말처럼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무슨 대답을 해야할 지 몰랐던 나는, 근처에 있던 아이스박스에서 물을 꺼내 박우진에게로 내밀었다. 박우진은 내가 건네는 물을 받아들었다.
"뭐야?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더우니까!"
"아, 그래?"
지 반으로 가나 싶더니 언제 또 왔대. 아이스크림을 받아들고서 우리 반으로 다시 건너온 박지훈이 사과마냥 발갛게 익은 나를 보며 의아해했다. 날씨가 날씨인지라, 어색하지 않은 변명이 가능했다. 쟤 때문은 아니고? 쭈쭈바를 쪽쪽 빨아대던 박지훈은 김재환의 옆에 엉덩이를 붙이며 입을 뗐다. 박지훈이 턱으로 가리킨 곳에는 박우진이 서있었다. 나는 손에 들려 있던 물통을 놓칠 뻔했다. 가끔씩, 박지훈이 무섭다.
"아, 뭔 소리야."
"정말 진짜 레알 팩트인 소리."
눈치가 없는 김재환은 우리 둘의 대화에 끼어들지 못한 채 눈만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뭔데? 왜 나만 몰라? 박지훈은 그런 김재환에 한숨을 쉬며 제 앞으로 내밀어진 김재환의 얼굴을 밀쳐냈다. 김재환은 입을 불퉁 내밀었다. 나는 저 멀리서 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박우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땀으로 젖어있던 앞머리는 어느새 다 마른 후였다. 빨간색 머리가 유난히도 밝게 빛났다.
"그렇게 멋있냐?"
"응."
내게 질문을 던진 사람이 박지훈이라는 것은, 반사적으로 대답을 한 후에야 알았다. 뭐야! 화들짝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서는 나를 박지훈은 한심한 눈으로 쳐다봤다. 어휴, 저 소심이. 그러고서는 혀를 끌끌 차는 것이다. 나는 들키지 말아햐할 것을 들킨 사람마냥 창피해했다. 손에 들려있던 물통은 흙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내가 모를 줄 아냐? 너 쟤 축구하는 거 보려고 맨날 우리 반 오는 거잖아."
"아, 모른 척 좀 해."
"니가 모른 척할 정도로만 굴던가. 그렇게 티 내면 어떡해? 쟤도 알겠다, 니가 지 좋아하는 거."
순간 흠칫했다. 내가 그렇게 티 나게 굴었어...? 기어들어가는 내 목소리게 박지훈은 당연하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나는 초점을 잃은 눈으로 땅에 떨어진 물통을 쳐다보았다. 박지훈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우리 앞에서는 부끄럼도 안타는 니가 쟤 앞에서만 쩔쩔 매는데. 누가 몰라, 그걸? 남은 쭈쭈바를 해치운 박지훈이 그것을 쓰레기통에 골인 시키며 말했다.
"김재환은 모르는 것 같은데..."
"쟤는 그냥 바보고."
나와 박지훈의 이야기를 궁금해 할 때는 언제고. 저를 찾아온 정세운과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는 김재환은 우리를 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짝사랑? 박지훈이 넌지시 내게 질문을 던졌다.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짝사랑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비참해서가 아니었다. 단지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박우진을 좋아하고 있는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부끄러움을 많이 탔다. 하여간 박지훈은, 눈치가 빨라도 너무 빨라서 탈이다.
"짝 아니야? 좀 친해져봐. 내가 보니까 쟤도 너한테 영 관심 없어 보이지는 않는구만."
"어?"
"그렇잖아. 너 아까 축구 보다가 공 맞으니까 바로 달려와서는. 관심 없으면 맞거나 말거나 신경이나 쓰겠냐, 공이나 다시 던져달라고 하지."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박우진은 성격이 좋기로 소문이 난 애였다. 그 정도의 친절을 베풀 지 않을리가. 입술을 꾸욱 말아무는 나를 보던 박지훈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모르겠다, 니 연애 니가 알아서 하세요. 그러고서는 다시 의자 쪽으로 걸음을 뗐다. 나는 한참이나 제 자리에 서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굴어야할 지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는 탓이었다. 박우진과 제대로 말을 해 본 적이 없으니, 이 짝사랑은 한계를 몰랐다.
나는 바닥에 떨어진 물통을 주워들었다. 그래, 말이라도 붙여보자. 친구라도 되면 좋잖아. 나는 이내 박우진의 앞에 서기만 하면 소심해지는 나를 지워내 보기로 결심했다. 과연 다짐대로 될 지가 의문이었지만.
"...아, 진짜."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 박우진과 그만 눈이 마주쳐버렸다. 나는 그 시선을 황급히 피했다. 이래서 뭘 하겠다는 거야! 나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나도 내가 이렇게 답답한데, 박지훈은 오죽했을까. 아니나 다를까, 박지훈은 나를 보며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아, 태연하게 손이라도 흔들 걸 그랬다.
체육대회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흠이 있다면 찌는 듯한 더위 뿐이었다. 나는 연신 손부채질을 하기 바빴다. 김재환은 녹은 아이스크림마냥 의자 위에서 흐물거리고 있었다. 박우진은 반에 가만히 붙어있지를 않았다. 무심결에 박우진을 찾으러 두리번댈 때마다 없었다. 그 때문에 말을 걸 핑계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제 자리에 앉아있기라도 하면 사소한 질문들이라도 던져볼 수 있을 텐데.
"단체 사진 찍을 거니까, 운동장 가운데로 모여!"
그렇게 가만히 앉아만 있다가 체육대회가 끝이 나버렸다. 박우진은 체육대회가 끝나기 직전 반으로 돌아왔다. 몰라, 포기해... 시무룩해진 나는 괜히 손에 들린 빈 물병을 찌그러트렸다. 야, 힘 자랑 하냐? 무섭게 왜 그래. 바지에 묻은 모래를 털던 김재환이 경악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는 눈을 흘기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빨리 서, 얘들아!"
더위 탓에 추욱 늘어진 애들은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반장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아, 빨리 찍고 가. 짜증 섞인 목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나는 차마 중간에 낄 생각은 하지 못한 채로, 가장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아, 우진이 근처에서라도 찍고 싶었는데. 나는 고개를 쭈욱 뺀 채로 박우진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응? 어디갔..."
...지.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는 순간, 내가 찾고 있던 그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쳤다. 내 옆에 아무도 없었는데, 언제... 당황스러움에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두 눈을 꿈뻑였다. 박우진도 어딘가 당황스러운 듯 보였다. 머리를 긁적인 박우진이 조용히 입을 뗐다.
"그냥, 서다 보니까."
의아해하는 나를 알아챈 모양일까. 박우진은 말을 마친 후 헛기침을 해댔다. 나는 빨개진 얼굴을 들키기 전에 잽싸게 고개를 앞으로 돌렸다. 뭐야, 뭘까. 박우진과 나란히 서있는 건 또 처음이었다.
"자, 찍을게!"
나는 가장 평범한 포즈를 취했다. 애들은 저마다 꽃받침을 하기도 하고, 요즘 유행하는 노래의 안무를 따라하기도 했다. 나는 곧게 펴진 두 손가락을 볼 옆에 갖다 댔다. 사진은 총 3장을 찍겠다고 했다. 한 장을 찍고서 힐긋 쳐다본 박우진은.
웃고 있었다.
우진이가 머리를 긁적이는 이유 = 부끄러워서
오늘 프듀 막방 실화래요...? 롬곡줄줄...
암호닉은 다음 글 올때 정리해서 오던가 할게요!
모든 댓글 확인했습니다. 좋아해주시는 분들 감사합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