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좋아하는 임영민
w. 5월
"쟤도 정성이다, 진짜."
그러게. 여주는 오늘도 어김없이 제 반으로 쫄래쫄래 걸음 한 영민을 쳐다봤다. 옆에서 사탕을 빨고 있던 재환이 혀를 내둘렀다. 왜 또 왔어? 여주의 물음에 영민은 싱긋 웃어 보였다. 무슨 이유가 있어야 오나. 여주의 앞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영민이 여주의 책상에 손을 얹었다. 여주는 그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할 것도 없으면서 왜 와."
"왜 오기는."
영민은 10반, 여주는 1반이었다. 그야말로 극과 극. 학교도 넓은 편이라 건물의 끝에서 끝까지 가는 데에는 꽤나 시간이 소요됐다. 10반으로 심부름을 가 본 적이 있어서 알고 있는 사실이다. 영민은 할 일없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들기고 있었다. 매번 이랬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찾아와서는, 제 얼굴만 빤히 보다 다시 돌아가고. 대화는 몇 마디 나누지 않았다. 나눌 대화가 없었으니까.
"...내 얼굴에 뭐 묻었어?"
"아니."
여주는 그런 영민의 시선에 당황하는 때가 많았다. 워낙 노골적인 시선이라. 여주는 괜히 제 볼을 문질러댔다. 거울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혹시 얼굴에 뭐가 묻어서 저렇게 쳐다보나, 싶어서. 하지만 제 얼굴은 깨끗했다. 한참이나 그러고 있던 영민은 시계를 한 번 쳐다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제 가야겠다."
쉬는 시간이 3분 남짓 남아있었다.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서는 영민을 올려다보았다. 잘 가라는 인사는 좀 해주면 안 되나. 영민이 입술을 비죽였다. 아, 잘 가. 여주는 영민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래. 짧은 답을 남긴 영민이 교실을 나섰다.
"쟤 너 좋아해?"
"...몰라."
"완전 티 나는데."
어느새 조그매진 사탕을 와작 깨물어 먹은 재환이 여주의 어깨를 톡톡 치며 물었다. 여주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까 전까지 영민의 손이 자리하고 있던 제 책상 위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또 반까지 뛰어가고 있겠지. 여주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복합적인 감정들이 속내를 마구 뒤집었다. 그 감정들의 원인은 모두 영민이었다. 재환의 말대로, 영민은 저를 좋아했다. 인지하지 않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제게 지나치게 호의를 베푸는 영민의 모습을 보면, 안 들던 확신도 들곤 했으니까. 우스운 착각일 수도 있었다.
- 임영민.
- ...
- 너,
- ...
- 나 좋아해?
어느 날은 영민이 운동장 벤치에서 제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서 잠이 든 적이 있었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서 우러나온 질문이었다. 너는 나를 정말 좋아하는 걸까. ...으응. 고른 숨소리를 내뱉던 영민이 내놓은 답변이었다. 잠에 잔뜩 취한 목소리가 여주의 마음을 마구 흔들었다. 영민은 기억하지 못하는 사실이었지만, 그것은 고백이나 다름없는 거였다. 사귀자, 라는 답변이 따라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니까.
"얘 자나?"
"그런가봐."
고개를 들고 있기가 싫어서 책상에 머리를 처박고 있을 때였다. 영민의 목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졌다. 여주는 괜히 눈을 꼭 감았다. 어차피 제 얼굴은 보이지 않을 텐데. 영민이 책상 위로 길게 늘어진 여주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는 손을 들어 여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낮은 목소리가 잠들지 않은 귓가를 울렸다. 더럽게도 다정한 그 손길에 눈물이 왈칵 쏟아져나올 것 같았다. 차라리 잠이 들었으면 싶었다. 한참이나 여주의 머리를 쓸어내리던 영민의 손길이 멎었다. 가야할 시간이 온 모양이다. 고개를 들어 잘 가라고 하기에도 이상했다. 영민은 제가 잠든 줄 알 테니.
영민의 인기척이 사라지고 나서야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뭐야, 안 잤어? 서랍 속에서 교과서를 꺼내던 재환이 어느새 일어나있는 여주를 보며 흠칫했다. 아니, 잤어. 여주는 짧은 대답을 던졌다. 다음 시간이 문학이구나. 문학책을 꺼내려 책상 서랍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아."
손을 넣자마자 만져지는 건 책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었다. 고개를 갸우뚱 한 여주는 그것을 꺼내들었다. 평소 제가 좋아하는 사탕이었다. 이 사탕을 좋아하는 자신을 알고 있는 건 영민 뿐이었다. 이건 또 언제 넣어놓고 간 거야. 여주는 사탕을 교복 치마 주머니에 넣었다. 다정한 너는, 나를 항상 눈물짓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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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생 때였다. 어느 정도의 판단은 가능한 나이. 세상에 대해 웬만해서는 다 알고 있다 착각하고 있는 나이. 여주는 친구들과 두루두루 잘 어울려 다니는 그런 쾌활한 학생 중 하나였다. 그래서 인지, 아이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예쁘장한 얼굴도 한몫했다. 어린 나이에 그런 인기는 저를 충분히 자만하게 만들었다.
- 여주야.
- 응?
- 나랑 사귈래?
고백을 받는 것도 일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들의 연속이었다. 중학교 3학년에 올라오고 나서, 여주는 B를 만났다. 이름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순진하게 고백하던 그 얼굴이 꽤나 마음에 들었던지라, 고백을 냉큼 받아들었다. 활짝 웃으며 기뻐하던 그 순진무구한 얼굴이, 왠지 믿음이 갔었다.
- 뭐? 걔랑 사귄다고?
- 응.
아이들은 여주와 B의 소식을 듣고서 놀란 표정을 짓기 일쑤였다. 왜? 여주는 그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아무것도 아니겠지. 그저 그렇게 생각할 뿐이었다.
꽤나 괜찮은 날들이었다. B는 저에게 잘 해주었고, 참 재미있는 아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밤 늦게 B가 여주를 밖으로 불러냈다. 집 안에서 단속을 잘 하지 않는 편이라 밤에 바깥으로 외출을 하는 것 또한 쉬운 일이었다. 씻으려던 것을 그만 두고 옷을 다시 챙겨 입은 여주는 아무런 의심 없이 B가 불러낸 그 곳으로 걸음을 뗐다.
- 왜?
- 야.
- ...뭐야?
어두컴컴한 골목길이었다. 주변의 인적이 드문. 겁이 많은 편이 아니라, 그깟 어둠쯤은 무섭지 않았다. 캄캄한 시야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건 B가 아닌 B의 친구들이었다. 뭐하는 거야? 여주의 동공이 초점을 잃고서 마구 흔들렸다. 가장 뒤늦게 모습을 보인 건, B였다.
- 마음대로 해.
다짜고짜 무슨 말인지. 여주는 이 상황이 도통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야, 뭐하는 거야! 놔! 여주의 옆으로 다가온 B의 친구들이 여주의 몸에 손을 댔다. 그제야 상황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나를 상대로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려고 하는 구나. 필사적으로 제 몸에 닿아있는 손들을 모두 쳐낸 여주가 B를 노려보았다.
- 병신같긴.
- 뭐?
- 소문 못 들었나 봐?
중학생의 생각 선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더러운 행동이었다. 지금까지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그래야만 했는지. 그 개새끼는, 왜 그리도 악하게 사는지. B는 흥미로운 미소를 걸치고 있었다. B가 말한 소문이란, 여태껏 B와 만남을 가진 여학생들이 지금 저와 같은 상황을 한 번씩 겪었다는 것이었다. 여주는 그 소문을 알지 못했다. 주변 아이들의 소문은 한낱 바람과 같다고 생각한 탓이었다.
- 내 몸에 손 대지마!
어깨는 이미 붙잡힌 후였다. 몸을 마구 비틀었지만, 빠져나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무리 중학생일 지라도, 상대적으로 남학생의 힘이 훨씬 강했으니까. 왜, 나한테 왜 그래! 두려움에 북받친 목소리가 덜덜 떨려왔다. B는 어깨를 으쓱했다. 내 마음이야. 원망스러움의 연속이었다.
애초부터 불순한 의도로 저에게 접근했던 B를, 제 친구들은 아마 모두 알고 있었을 것이었다. 그럼에도 왜 말을 해주지 않은 걸까. 괜찮을 것이라 생각했던 걸까. 제 친구가 B에 대해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을 때, 대수롭지 않게 여기지 말았어야 했다. 찝찝함을 조금이라도 가졌었더라면.
- 야, 씨발. 튀잖아!
저를 붙잡고 있던 남학생의 팔을 깨문 여주가 남학생이 제 몸에서 손을 뗀 틈을 타 도망쳤다. 잡히면 안 된다. 여주는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새도 없이 달렸다. 달리다 몇 번이고 다리에 힘이 풀릴 뻔 했지만, 다시 이를 악 물었다. 넘어지면 안 돼.
집으로 돌아온 여주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서 소리 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제 몸을 더듬던 그 더러운 손길이 아직까지도 느껴졌다. 빠져나오지 못했더라면. 여주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여주야, 어디 아파?
- ... 아니.
그 후로 학교에서 말을 하기가 싫어졌다. 아이들은 그런 여주를 의아하게 여길 뿐이었다. 아무도 여주가 당하지 말아야 할 것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 지 못했다. 여주는 시야에 B가 보일 때마다 도망쳤다. 우습게도 B는, 그세 다른 여학생을 사귀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일종의 트라우마였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고, 깊은 상처로 남아버린. 그래서였다. 저를 좋아하는 영민에게 선뜻 다가갈 수가 없었다. 영민은 그럴 사람이 아닐 걸 알면서도.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B의 얼굴을 떠올리면 몸이 사시나무 떨듯 떨려왔다. 끔찍했다. 저를 더듬던 그 손길들은, 고등학생이 된 지금까지도 생생했다. 언제 지워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이번엔 안자고 있네?"
문학 시간 내내 수업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복잡한 마음 탓이었다. 쉬는 시간 종이 치자마자 또 여주의 반으로 온 영민이 여주를 향해 반갑게 웃었다. 신기하게도 쉬는 시간이 되면 앞자리 친구는 자리를 비웠다. 어쩌면 매일 오는 영민을 알고 있어 일종의 배려를 해주는 지도 몰랐다. 영민은 어김없이 여주의 앞에 앉았다.
"뭐야."
"..."
"야, 왜 우는데."
시야에 영민이 들어서자마자 진정할 틈도 없이 눈물이 흘렀다. 당황한 영민이 여주의 볼을 감싸 쥐었다. 누가 괴롭혔어? 여전히 다정한 그 목소리가 여주를 더욱 울게 만들었다. 영민아. 나는,
"왜. 왜 우는데. 무서운 꿈 꿨나."
무서워. 네가 자꾸만 좋아지는 내가.
안녕하세요! 영민이와 우진이 글은 언제 다시 올리게 될 지 모르겠구...
이런 스토리 한 번쯤은 써보고 싶어서 올리게 되었어요!
영민이로 인해 다시 변하는 여주? 이런 느낌?
사실 잘 모르게써요... 그냥 다정한 영민이가 최고야
제가 현생이 좀 벅차서... 글 올라오는 주기는 따로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요근래에는 아마 텀이 좀 길 것 같아요ㅠㅠ 노잼글 읽어주시는 천사림들.. 감사합니다..
+) 연재는 미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