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근처에서 자취한다고 했죠?”
“네. 교육관 근처 살아요. 민현 씨는요?”
“저는 통학이에요. 벌써 밤 늦었는데, 가요 우리. 데려다 줄게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저 집 잘 가요. 별로 안 늦어서 각자 가도 돼요.”
“제가 마음이 불편해서 안돼요. 골목까지라도 데려다 드릴게요.”
만약 남자형제가 있었다면 이런 다정한 사람에 대한 로망이 없을 수 있었을까? 끊임 없이 밀려오는 그의 다정함에 숨이 멎을 것만 같다.
* * *
너무 골목 깊숙이 있는 내 방 때문에 골목 입구에서 이만 그를 보내려 입을 열었다. 날씨가 너무 춥다며 가는 길에 가방에서 주섬주섬 자신의 가디건을 꺼내 내 허리에 둘러주기까지 한 황민현씨였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셔서 감사해요! 오늘 진짜 진짜 즐거웠어요. 정말로요.”
“저도 마찬가지로요. 또 연락 할게요.”
“여기 가디건..!”
“다음에 만날 때 돌려주세요. 치마 입으셨는데, 들어가는 길도 춥잖아요.”
이 말을 남기고 긴 다리에 걸맞는 긴 팔을 들어 손을 흔들어 보이는 그였다. 입꼬리가 예쁘게 올라간 미소는 덤으로 장착하고 말이다. 나도 그에게 살짝 손을 흔들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저렇게 완벽한 사람이 소개팅은 왜 나왔지. 다음에 또 만나자고 하는 건 그냥 예의상 애프터 신청 하는 건가. 머릿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들어 빨리 집에 가 침대에 몸을 뉘이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여주가 골목을 잘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고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돌린 민현은 어디론가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어, 미년아. 소개팅은 잘 해써?]
“응 덕분에. 그나저나 종현아, 나한테 할 말 없어?”
[응? 왜?]
“너 아까 미행했지.”
[무.. 무슨 소리야!! 미행이라니. 내가 아무리 니 소개팅이 궁금해도 그렇지 밥먹는데까지 따라가서 앉아있을까봐?]
“밥 먹는데서 봤다고 안 했는데.”
[헉..]
“하여간에 김종현.. 건너편에 앉은건 최민기였지?”
[헉..]
아까 여주가 눈치껏 모르는 척 한 것 같지만, 그 눈치의 수준을 넘어 이미 동행인까지 파악한 민현이었다. 알면서 일부러 모른 척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냥 소개팅 자리의 예의로? 그 여자와의 첫 만남에 친구들도 함께하는 게 싫어서? 작은 입으로 조잘조잘 자기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계속 보고 싶어서?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드는 그였지만, 뭐든 상관없을 것 같다는 생각과 오늘 만난 여주의 귀여웠던 모습에 짧게 웃고는, 다시 8년지기 친구를 나무라기 시작했다.
“내가 모를 줄 알고?”
[그냥 심심하기도 하고.. 궁금하기도 해서 따라와봤어. 하핫.]
“하여간 못 말린다.”
혀를 차면서 못 말린다는 투로 말하는 그였지만, 전혀 싫은 기색이 없어 보이는 민현이었다. 그의 오랜 친구 종현이 갑자기 제대도 했으니 연애도 할 겸 소개팅을 나가보는 게 어떻냐 했을 때, 뭔 뜬구름 잡는 소리인가 생각하고 무시했던 그였다. 워낙 쓸데없는 소리를 많이 하는 친구가 종현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번에는 허투루 하는 소리가 아니었는지, 대학에 와서 연애 한 번 제대로 못 해본 친구가 불쌍했는지(정작 김종현 본인 생각은 안 하고) 이곳저곳 물어 물어 소개팅 할 사람을 찾았다며 무조건 나가야 한다며 밀어붙였을 때 그냥 밥 한 끼나 같이 먹고 오자는 생각이었다.
[미년아. 난 너가 연애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내가 보기엔 우리 과에서 너가 제일 잘생겼어. 스물세 살 먹고 연애 한 번 못 해본 게 말이 되냐? 고등학교땐 공부한답시고 안 했고, 1학년 때는 곧 군대갈 거라면서 예의가 아니랍시고 안 했고. 이러다 연애 못해. 너가 어디 문제 있는것두 아니구우..]
“거 참. 내가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랬지.”
[그래서 어땠어 어땠어?]
“뭐가?”
[오늘 소개팅. 여자 분 마음에 들어?]
“아. 여주 씨.”
다시 오늘 만난 그녀를 생각하자 입가에 미소가 자연스레 지어지는 민현이었다. 봄 같은 여자였다. 겨울이 덜 가신 봄의 아직은 조금 쌀쌀한 공기와 길가에 조금씩 핀 꽃이 만들어낸 풍경에 잘 어울리는 여자. 작고 하얀 얼굴에 예쁘고 새초롬한 눈, 긴 연갈색 웨이브 머리를 가진 그녀였다. 도도할 것 같은 첫인상과는 달리 털털한 성격에 가식이란 건 찾아볼 수 없었고, 잘 웃고 잘 먹고 이것저것 열심히 말하는 그녀가 예뻤다.
“되게 예쁘신 분이더라. 나랑도 되게 잘 맞고..”
[오. 좋았나보네.]
소개팅을 나오기 전 대화소재가 없으면 어떻게 하지, 했던 작은 걱정도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너무 잘 맞아 굳이 대화소재를 끄집어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서로의 이야기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녀도 가벼운 마음으로 소개팅을 나왔을 테지만, 오히려 그래서 그녀의 진짜 모습을 볼 수 있었다는 생각에 그것마저 좋았다. 호감이 생겼으니, 내가 다가가면 되니까. 소개팅 자리를 마련해준 종현에게 고마울 정도로 그녀가 마음에 쏙 든 민현이었다.
“나 노력하려고.”
[오, 무슨 노력?]
“그런게 있다. 아무튼 고마워.”
[헐. 진짜 마음에 들었나보네.]
“응. 아무튼 내일 보자.”
[내일 꼭 얘기 해줘야해 !!]
“잘 되면 얘기해줄게. 내일 봐.”
연애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상대를 찾은 것이 아닌, 연애하고 싶은 상대를 먼저 찾아 연애라는 게 하고 싶어졌다. 오죽하면 평소에 아끼는 가디건까지 그녀에게 빌려주고는 다음에 만날 빌미를 만들지 않았는가. 첫 만남부터 너무 빠져버린 건 아닌지 살짝 신기하면서도 걱정되었지만, 그것마저도 처음 느껴보는 설렘의 일부였다.
지하철을 타고 평소처럼 이어폰을 꽂아 노래를 들으려는데, 확인하지 않은 카톡 메시지가 있다는 알림이 떴다. 이야기가 궁금해진 민기의 독촉 카톡이려니 하고 확인하려 들어갔으나 그의 예상과는 다른 사람이 보낸 메시지였다.
[김여주씨] 저 집에 잘 들어갔어요! 다음에 꼭 옷 돌려드릴게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안부 메시지에 춤추는 토끼 이모티콘 하나를 함께 보낸 그녀의 모습에 자연스레 귀여워, 하고 생각한 자신의 모습에 놀라며 그녀와의 다음 약속을 하루빨리 잡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는 민현이었다.
* * *
띠리릭- 띠리릭-
어느 때와 다름없이 단조로운 알람에 인상을 찌푸리며 잠에서 깼다. 원래는 좋아하는 노래를 알람 소리로 해두었다가 그 노래마저 싫어질 정도로 잠이 많은 나는 이제 단조로운 이 기계음을 극도로 혐오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잠에서 깨야 학교에 가니까.. 하는 생각으로 침대에서 몸을 겨우 일으킨다.
“5분만 더 자고싶다..”
5분만 더 자면 분명히 10분은 넘게 더 자서 씻는데도 시간이 부족하고 화장도 못하겠지. 그건 안 된다. 왜냐하면 황민현씨를 학교에서 볼 수도 있으니까.. 라는 생각에까지 미치자마자 갑자기 정신이 말끔해졌다.
어제는 뭔가 하룻밤사이의 꿈같았다. 남자친구의 바람 후 일주일만에 찾아온, 김여주의 21년 인생 중 가장 완벽한 남자. 그 남자와 밥을 먹고, 후식을 먹고 학교를 산책하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즐겁게 하는, 정말 꿈같은 꿈. 현실이 아닌 것 같은 현실.
“하.. 정신 차리자.”
어제 일을 생각하다가는 잠에서 깨고도 준비시간이 촉박할 것 같아 허겁지겁 씻으러 발걸음을 향했다. 가볍게 씻고, 대충 널부러진 화장품들 속에서 하나하나 찍어바르며 평소 하던대로의 화장을 마쳤다.
“... 뭔가 좀 부족한데.”
하필 또 정경관과 교육관이 가까운 탓에 마주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계속 머릿속에 그 남자 얼굴만 맴도는 것이다. 그 얼굴에 대충 견주기라도 하려면 블러셔도 하고, 마스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섀도우도 더 진하게 바르고, 아이라인도 더 공들여서 그려야 하는 거 아닐까? 결국 고민하다 내 능력치 안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예쁜 화장을 하고 나온 나였다.
* * *
“여주야, 오늘 어디 가?”
“응? 아니아니. 약속도 없는데.”
“뭔가 오늘 풀세팅이길래. 옷도, 화장도.
“하하.. 그러게. 그냥 기분 좀 내봤어.”
.. 결국 만족스러울 때까지 화장을 하고 그 화장에 걸맞는 새로 산 원피스를 입고 나온 나였다. 오늘 수업은 겨우 두 개 뿐인데도. 결코 그 남자를 의식해서가 아닌, 풀메이크업에 청바지를 입는 것보다 원피스를 입는 게 더 예쁘니까, 라고 합리화하며 나온 내 자신이었다.
이제 4월인데, 마냥 놀 수도 없는 2학년이니 이달 말에 있을 중간고사 공부도 시작해야 하는데. 워낙 스펙타클한 한 주를 보낸지라 수업도 간 게 기적일 정도로 정신이 없었다. 수업 마치면 좀 잤다가 복습이나 해야지. 주말에 공부 시작하면 그래도 학점 잘 나올거야- 라고 생각하던 찰나,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평소라면 귀찮으니 대충 이따가 확인하겠지만, 오늘 내내 맴돌았던 그 남자가 생각나 누구보다 빠르게 핸드폰을 확인하는 나였다.
[예경] 주것냐? 왜 답장이 없어
... 맞다. 어제 집에 들어오자마자 피곤해서 쓰러지듯 자느라 답장을 안했었지. 김여주는 바보다. 소개팅 끝나고 누가 바로 다음날 애프터 신청을 해. 브레이크 없이 엑셀만 밟아서 직진하는 것도 아니고- 라고 생각하던 찰나, 다시 진동이 울리는 내 핸드폰이었다.
[소개팅남] 여주씨. 주말에 약속 있어요?
미쳤다. 설마 했는데 진짜 오다니.
메시지와 함께 내가 어제 보낸 이모티콘과 똑같은 춤추는 토끼 이모티콘을 보낸 그가 귀여웠다.
“누가 애프터를 하루 만에 바로 잡아..”
말도 안된다는 듯 작게 읊조렸지만, 이렇게 말하는 내 입가에는 이미 미소가 가득했다.
그가 어제 말한 ‘다음’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주말에 중간고사 공부를 미리 하겠다고 다짐한 나였지만, 이미 내 손은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요. 약속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