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여주는 바보다. 소개팅 끝나고 누가 바로 다음날 애프터 신청을 해. 브레이크 없이 엑셀만 밟아서 직진하는 것도 아니고- 라고 생각하던 찰나, 다시 진동이 울리는 내 핸드폰이었다.
[소개팅남] 여주씨. 주말에 약속 있어요?
미쳤다. 설마 했는데 진짜 오다니.
카톡과 함께 내가 어제 보낸 이모티콘과 똑같은 춤추는 토끼 이모티콘을 보낸 그가 귀여웠다.
“누가 애프터를 하루 만에 바로 잡아..”
말도 안된다는 듯 작게 읊조렸지만, 이렇게 말하는 내 입가에는 이미 미소가 가득했다.
그가 어제 말한 ‘다음’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다. 불과 몇 분 전까지 주말에 중간고사 공부를 미리 하겠다고 다짐한 나였지만, 이미 내 손은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아니요. 약속 없어요!]
* * *
정말 직진만 하는듯한 황민현씨 덕분에 이미 수업 흐름은 놓친지 오래요, 정신은 카톡으로 다 팔려버린 상태였다. 너무 답장을 보내자마자 했나 싶어 살짝 고민하던 찰나, 또 답장이 왔다.
[그럼 토요일에 저랑 놀러 가요. 책도 보고, 영화도 보고, 밥도 먹어요.]
[좋아요! 광화문 가실래요?]
[좋죠. 저도 자주 가요. 몇시쯤 보실래요?]
[한시쯤이면 좋을 것 같아요. 광화문역에서 볼까요?]
[아니요. 제가 학교 근처로 갈게요. 거기서 출발하실 거죠? 같이 가요.]
...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세심하게 챙기는 이 사람. 연애를 많이 해 본건가? 태어날 때부터 다정한 사람도 있나. 아무리 그래도 귀찮을 것 같아 괜찮다고 답장하려던 찰나,
[어차피 가는 방향이니 괜찮아요.]
헉. 독심술이라도 하나. 아직 답장도 안 보냈는데 괜찮다고 하려는 거 어떻게 알았지.
[ㅋㅋ 괜찮다고 하려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뭔가 그럴 것 같았어요.]
[들켜버렸다.. 흐 그러면 열한시 반쯤에 정문에서 보실래요?]
[좋아요. 그럼 토요일 12시 반까지 학교로 갈게요!]
[네~]
[남은 수업 잘 듣고 토요일에 봐요.]
[민현씨도요!]
“하아..”
겨우 카톡하는 건데도 너무 떨려서 긴장의 끈을 놓지 못하는 나였다. 가만 보니 오늘이 목요일이니, 내일만 지나면 바로 약속날인 것이다. 머릿속에 옷은 뭘 입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하늘하늘한 새 옷을 좀 사둘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집으로 가는 내내 맴돌았다. 겨우 이틀밖에 남지 않았다는 사실에, 계속해서 심장이 요동치고 떨리는 기분이었다. 그 때였다. 별로 받고 싶지 않은 느낌의 전화가 모르는 번호로 온 것은. 원래 070으로 시작하는 전화는 안 받지만, 010으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라 혹시 몰라 그냥 받은 것을, 받자마자 후회하게 하는 목소리.
[너 진짜 나랑 한 마디도 안 하고 이렇게 끝낼거야?]
“...”
[아니 어떻게 전화, 카톡 정말 하나도 안 받을 수가 있냐. 정말 내 번호로 오는 연락은 다 끊은 거야?]
... 적반하장이라는 말이 왜 생겼는지 절실하게 깨닫게 해주는 전화의 주인공이었다.
“당연히 그래야 되는 거 아니야? 새 여자랑 지지고 볶고 잘 살아.”
[아니. 여주야.]
“누구 입에 내 이름 올려? 정말 다시는 연락 안했으면 좋겠다.”
[너 나 잊을 수 있어?]
“응. 나 정 떨어지면 그때 이후로 끝인거 잘 알잖아. 1주일동안 내 인생에서 너 잘 지웠으니까 구질구질하게 하지 마. 끊는다.”
전화를 끊자마자 이 번호 또한 빠르게 차단했다. 사실 연락이 이런 식으로 올 것이란 걸 상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내가 바람 현장에 쳐들어갔고, 그 녀석이 마지막 예의라도 지키려는 셈이었는지 날 따라왔으니 그 여자랑도 분명히 잘 안됐겠지.
평소 맺고 끊음이 확실한 성격의 나인지라 그 쓰레기를 잊는 데 3일이면 충분했다. 처음엔 펑펑 울다가, 술도 먹고, 울다가 모든 사진을 지우고, 그 녀석이 준 선물들을 다 가져다가 버리고. 냉정하게 봤을 때 구구절절 슬프고 애절한 사연으로 헤어진 연인도 아니고, 이미 마음을 떠난 사람이기에 지금은 괘씸함만이 남았다. 내 첫 연애를 짓밟았다는 것에 대한 모욕감과 함께 말이다.
“짜증나.”
그래도 다시금 그 때의 기억을 되새기게 하는 것은 기분을 더럽게 한다. 다시는 모르는 전화번호 받지 말아야지. 누구 맘대로 여주야 라고 부르는지. 어제 그 예쁜 목소리로 여주씨, 여주씨 라고 불러주며 날 설레게 했던 황민현씨와 정반대다. 한숨 자고, 공부나 미리 해둬야겠다.
* * *
“야 항미년! 소개팅 했대매! 빨리 얘기해봐.”
“비밀이야.”
“아. 오늘 얘기해 준다며 ~~”
“몰라. 으하핳.”
“뭐야아 ~~”
특유의 부산 사투리 억양으로 어제의 일에 대해 묻는 민현의 동기 민기와 그에 쉽게 답해주지 않는 민현이었다. 또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평생 놀려먹을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여주와 잘 되었을 때 이들을 소개시켜주었을때 또한 반응도 뻔했기 때문에 조용히 하고 있는 것이 나중을 위해 이로웠다.
“그럼 애프터는 언제쯤 잡을거야? 원래 애프터 신청은 예의인거 알지?”
“연애 잘 아는 티 내기는. 안다, 알어.”
그런데 말은 어떻게 꺼내지. 소개팅이나 연애를 해 봤어야 말이지. 자기 좋다고 하는 여자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다가가보는 것은 처음인 민현은 살짝 막막한 마음도 들었다. 그 마음에 민기에게 살포시,
“근데 뭐라고 말해야하지?”
“뭘?”
“또 만나자구.”
민현의 말에 민기는 가소롭다는듯 풋- 웃으며, 예쁘장한 얼굴을 들어 자신이 한 수 가르쳐주겠다는 태도를 취한다.
“자. 민현아. 따라해봐.”
“응.”
“전화를 딱 걸어.”
“응.”
“그리고.. 부산 상남자답게 통보식으로 말하는기다.”
“뭐라고?”
“니, 주말에 나랑 만나자. 하고.”
민기의 농담인 듯 농담아닌 멘트에 으하핳- 하고 웃는 민현이었다.
“대충 주말에 약속 있으세요, 하고 물으라는거지?”
“바로 그거야.”
“알았어. 고마워 민기야.”
민현은 평소 아무말이나 막 뱉는 4차원 민기의 습관에 워낙 익숙해진지라 핵심만을 뽑아 대외용으로 수습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민기의 조언(?)을 받아 여주에게 카톡을 보낸 후 묘하게 교차하는 설렘과 떨림에 한동안 핸드폰을 붙잡고 있다가, 생각보다 빨리 온 답장에 화들짝 놀라는 그였다.
[아니요. 약속 없어요!]
답장을 확인한 후 눈꼬리가 예쁘게 접히며 입꼬리가 활짝 올라간 민현이었다. 아, 주말이면 또 그녀를 본다.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을 선사해준 그녀를.
* * *
“이정도면.. 됐다.”
거울 속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단언컨대 내 능력 안에서 꾸밀 수 있는 수치의 최대치였다. 큰 맘 먹고 산 체크무늬 원피스에 꽈배기 가디건을 입고 은은한 화이트 머스크 향수를 뿌린 후, 심플한 팔찌를 하니 나름 만족스러운 코디가 완성되었다. 나가기 전 전신거울 앞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황민현씨의 가디건을 담아둔 쇼핑백을 들고는 집을 나서는 나였다.
시간 여유가 있어 정문으로 터벅터벅 걸어가는데, 저 멀리서 누가봐도 ‘내가 황민현이오’ 라고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얼굴이 잘 안 보여도, 저 피지컬이 멀리서 눈에 안 띌 리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셔츠를 받쳐 입고 니트를 입었는데, 평소 니트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눈을 즐겁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소리 없이 외칠 뿐이었다.
“민현 씨!”
다가가며 손을 흔들며 그를 부르자, 휴대폰을 향해 있던 그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그리고 이내 날 내내 설레게 했던 그 예쁜 미소를 지어주며, 나에게 터벅터벅 걸어온다.
“오늘도 일찍 오셨네요.”
“네. 생각보다 눈을 일찍 떠서요. 그나저나 여주씨.”
“네?”
“오늘 예뻐요.”
갑작스러운 칭찬에 놀란 내가 눈이 동그래져 그를 빤히 쳐다보자, 그는 또 그 특유의 으하핳- 하는 웃음소리를 내며 날 본다.
“놀랐어요?”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오랜만에 들어보는 말이라.”
“진짜예요. 이거 제 옷이죠? 제가 들게요.”
그를 다시 힐끔 보자 확신에 찬 두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나는 진심이에요- 하는 표정으로 내 손에 들려 있던 쇼핑백을 들어주는 그였다.
“그럼 이제 갈까요? 버스 타면 바로 가더라고요.”
“아, 맞아요. 항상 광화문 갈 때 그 버스 타요.”
“점심 먼저 먹을래요? 식사 안 하셨죠.”
“네 아직이요. 맛있는 거 먹어요 우리.”
* * *
평소 책 보러, 영화 보러 자주 오는 동네라 자칭 광화문 잘알인 나였는데 황민현씨도 못지않았다. 첫만남 때는 양식을 먹었으니 오늘은 한식을 먹자는 나의 뜬금없는 제안으로 한식집에 가 불고기를 먹고, 후식으로 음료 하나씩을 입에 물고 교보문고로 향하는 우리였다.
카페에서 그가 주문한 것은 수많은 커피종류 중 하나가 아닌 자몽주스였다.
“민현 씨는 커피 안 드세요?”
“네. 저 커피 안 먹어요. 별로 안 좋아해요.”
“그렇구나. 그럼 뭐 좋아하세요?”
“주스나 차 이런거 좋아하는데. 자몽주스 좋아해요.”
그렇게 해서 서로 주스 하나씩 입에 물고 오게 된 교보문고. 나는 읽고 싶었던 책을 집었고, 민현씨는 자기개발서 하나를 손에 들고 다른 책들을 구경하며 주변을 서성이고 있었다.
평소대로 바닥에 철푸덕- 앉아 책을 보려 했지만, 오늘은 평소 내 복장과는 사뭇 다른 무릎 위까지 올라오는 원피스였다. 살짝 난감해 그냥 서서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찰나, 한 손에 책을 들고 나에게 오는 민현씨였다.
“책 고르셨어요?”
“네. 이거 보려고요. 저기 가면 앉아서 볼 수 있는 책상 있어요. 저기로 가요.”
하며 나를 이끄는 그였다. 책을 구경하느라 내 잠깐의 난처함을 못 본 줄 알았는데 그새 그걸 또 본 세심한 황민현씨다.
보려고 했던 책은 기대만큼 재밌었다. 두껍지 않은 책인지라 몇 시간만에 다 읽을 수 있었다. 괜히 베스트셀러가 아니지- 하는 생각을 하며 건너편에 앉은 민현 씨를 살짝 바라보자 그도 책에 집중하고 있었다.
손등에 턱을 괴고 집중하는 그의 모습을 살짝 쳐다보았다. 삐죽삐죽 자란 앞머리에 집중하느라 살짝 찌푸려진 미간이 귀여워 살짝 웃음이 날 정도였다. 자신을 보고 있는 나를 눈치 챘는지, 이만 책에서 눈을 떼고 건너편에 앉은 나와 눈을 맞추는 그였다. 그러고는, 똑같이 손등에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본다. 두 번 만난 사이인 나를 그렇게 예쁘다는 듯 하염없이 쳐다봐주는 눈빛에, 평소라면 빠르게 눈을 피하거나 아무 말이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겠지만, 괜히 용기를 내 나도 눈을 피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았다.
“...”
“...”
둘 중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지만, 눈빛만으로도 서로의 감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 이 사람이 좋아졌다.
그리고 이 사람도 나를.. 좋아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