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어디야? 더워 죽겠다고!!!"
- 아 미안 미안. 다 왔다니까?
"웃기시네. 이제 집에서 나오고 있겠지, 또."
- 아니 진짜 다 왔어. 너 뒷모습 보인다.
"하여튼간에 남자들 군대 갔다오면 사람 된다던데, 니는 뭐 하나도 변한 게 없어. 오랜만에 본다고 기대한 내가 바ㅂ.."
툭-
"요!"
"김수민!"
오랜만에 보는 너는,
날 내려다 보는 눈높이가 조금 더 높아진 것도 같았고, 하얬던 얼굴이 조금 탄 것도 같았지만.
눈을 반 접어서 웃는 표정은 그대로였다.
너를 보자마자 괜히 또 온 몸이 간질간질 거리는 느낌이 들어, 너의 시선을 피하고.
"머리 짧으니까 못생겼다. 너도 결국 머리 빨이였네."
"오, 그거 반대로 하면 머리 길었을 땐 잘생겼다는 거네."
한 마디도 안 지고 능글맞게 받아치는 것 까지 똑같다, 아주.
그렇게 거의 2년만에 보는 너와 같이 걷는 길은, 새삼스레 조금 어색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정적을 피하고 싶어서 나는 입에서 아무 말이나 내뱉어 버렸고.
"..내가 니 여자친구도 아니고, 무슨 제대하는 것 까지 마중을 나오래?"
"..."
이번에도 니가 장난스레 뭐라고 받아치겠지, 했지만.
넌 그저 나를 가만히 내려다 보면서 어떤 말도 내뱉지 않았다.
아까보다 더 어색해진 분위기에 난 또 괜히 길거리에 산책하고 있는 강아지 한마리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음, 나 헤어졌다."
"...뭐?"
"또 차였어 (웃음). 벌써 차이는 것도 세 번째라 이젠 익숙하다, 야."
녀석은 고등학교 때 한 번, 대학교에 들어오고 나서 두 번. 꾸준히 연애를 해왔지만.
1년을 채우지 못하고 번번히 상대방에게 차이곤 했다.
주위에서는 황민현이 도대체 여자한테 차일 이유가 뭐가 있냐며 의문을 가졌지만.
난 왠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고,
차라리 그 이유를 모르고 싶기도 했다.
'아직도, 우리 언니 좋아해?'
차마 입 밖에는 꺼내지 못했지만,
또 마음 속으로 수백번 외치는 질문.
*
"황민현은 군대 갔다오니까 더 잘생겨진 거 같다. 남자다워진 느낌?"
"그치. 에휴, 이번 학기는 쟤 얼굴 구경하는 재미라도 생겼으니까 다행이다."
"쟤 혜린언니랑 헤어졌다던데. 이번에 또 차인거라며? 진짜야, 수민아?"
"..몰라, 나도."
개강을 맞이해서, 또는 돌아온 황민현을 맞이해서 열린 동아리 모임 자리에서 여전히 여자아이들의 가쉽거리는 황민현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질문이 쏠리는 것도 항상 녀석과 학창시절을 같이 보낸 나 쪽이였다.
황민현을 따라 이 동아리에 들어온 건 나였지만, 이런 순간만큼은 항상 자리에서 뜨고 싶다.
항상 그랬다. 녀석은 화제의 중심이였고, 난 이렇게 녀석에 의해서 가끔씩이나마 주목을 받는 그런 부차적인 존재.
괜히 또 비참해지는 기분이 들어, 몸에 잘 받지도 않는 술을 들이켰다.
알딸딸한 기분이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야, 혜민아. 걔 좀 적당히 마시게 해."
"어? 어, 그래.."
점점 흐리멍텅해지는 기분에 턱을 괴고서 앞에 있는 마른 안주와 눈싸움을 하고 있는데, 옆 테이블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는 옆에 앉아 있던 혜민이가 내 등을 퍽퍽 치기 시작했다.
"아! 아파.. 씨!"
"야, 적당히 좀 마셔라! 너 취하면 또 민현이가 챙겨야 되니까 저러잖아."
"...씨. 내가 알아서 가면 되지, 뭘 챙겨.."
이럴 때만 챙기는 척 해주지...
한참을 혼자 궁시렁 궁시렁 거리다가, 괜히 분한 마음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야, 어디가 혼자!'
혜민이의 외침이 들렸지만 대충 손을 휘젓고는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왔다.
"...어씨, 추워.."
아직 이른 봄이라 그런지 밤바람이 쌀쌀했다.
그래도 찬 바람을 맞으니 조금 정신이 깨는 느낌이 들어 문 앞 계단에 걸터 앉았다.
그렇게 멍하게 앉아있다가 나도 모르게 뒤를 슬쩍 돌아봤다.
사람들 틈에서 하하하 하고 웃고 있는 듯한 황민현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왜 저렇게 얄밉지.
생각해보면, 쟤가 나한테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말이야.
녀석을 한 번 흘겨보고는, 갑자기 울리는 진동에 핸드폰을 확인했다.
[어디야?] - 김민아
보통 같으면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답장을 보냈겠지만,
머릿속에 자꾸만 겹치는 황민현과 언니의 얼굴 때문에 그냥 핸드폰을 끄고 주머니에 넣었다.
내가 봐도 내 자신이 엄청 찌질해 보여, 그냥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눈을 감았다.
*
"민현아, 수민이 좀 잘 부탁해. 매번 고생이다, 니가."
"아니야, 다들 조심히 들어가고."
주위에서 들리는 소란스러운 소리 때문에 잠깐 눈을 떴다.
눈을 떠도 내게 보이는 건 칠흑 같은 어둠 뿐이였다. 뭐야, 왜 앞이 안 보이지. 난 분명 눈을 떴는데.
눈을 비벼보려고 팔을 드는데,
"어, 깼어?"
익숙한 목소리가 바로 앞 쪽에서 들려오고, 그제서야 알아차리게 된 익숙한 향기.
황민현 냄새네. 나 지금 업혀 있는 거구나.
제정신이라면 빨리 황민현의 등에서 내려와야 하겠지만, 술기운 때문인지 그냥 다시 잠든 척 녀석의 등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는척하네, 또."
"..."
"너 진짜 나 없을 땐 누가 데려다줬냐. 물어나 보자."
"...너 말고도 데려다 줄 사람 많거등.. ㅏㅊ참나..아.."
계속 모른 척 자는 척을 하려다가 그만 또 말도 안되는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내 중얼거림에 살짝 웃은 황민현이 나를 한번 고쳐 업고는 다시 걷는다.
"야, 항미년.."
"왜."
"너 아직도오.. 김민아 좋아하냐..."
"..."
머릿속으론 미쳤네, 김수민. 하면서도, 술이란 게 참 무섭다.
입은 사정없이 마음 속에 있는 말을 필터링없이 내뱉고 있다.
"...대답 못하능거 보니까.. 맞네, 빼..박.."
"다 왔다."
말 돌리는 거 봐. 그냥 그렇다고 말 하면 될 걸.
비겁하고 치사한 황민현은 또 이렇게 날 두 번 죽인다.
"집에 민아누나 있어?"
"..몰라"
내 괜한 심술에 황민현은 살짝 한숨을 쉬고는 조심스레 비밀번호를 누르고 우리 집으로 들어간다.
짜증나, 내일부터는 비밀번호 바꿔 버려야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황민현의 등에서 또 잠으로 빠져들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