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봄. 정재현 입대 하루 전.
“…실감이 좀 난다 이제.”
집 앞에 도착해서야 정재현을 올려다본 내가 한 말이었다. 정재현은 잡고 있던 손을 살짝 당겨 내 몸이 아예 저를 향하도록 했다. 볼캡을 눌러 쓴 정재현의 옆머리가 사라져있다. 분명 오전까지는 옆머리가 살짝 삐져나왔었는데 지금은 옆머리가 없다고….(울컥) 마음이 쑤셔서 걸어오는 동안 정면만 봤었다. 마주한 내가 계속 제 머리에만 시선을 두는 걸 알았는지 작게 웃음을 터뜨린 정재현은 곧 볼캡을 벗었다.
“나 머리 빡빡 밀어도 잘생겼지?”
“야 빡빡…이라고 하지마. 그거 정신에 좀 해롭다.”
옆머리 뿐만 아니라 그냥 다. 머리카락이 싹다 짧아진 정재현의 모습이 드러났다. 멋쩍은 듯 머리를 만지는 모습에 입술을 달싹이던 나 역시 천천히 손을 뻗었다. 빡빡이라니. 빡빡이라니까 번쩍거리는 머리 같잖아. …그 정도는 아니라고. 정재현을 덮친 거침없는 바리깡이 생각난다. 요란한 소리를 내면서 눈 깜짝 할 사이에 길을 내던 바리깡.. 전과는 다르게 까끌거리는 촉감에 바로 손을 뗐다. 손끝을 통해 온 신경이 곤두서 외쳤다. 정재현 정말, 내일 입대다!
“모자 다시 써..”
내 말에 정재현이 다시 볼캡을 썼다. 입을 삐쭉인 나는 한숨을 푹 쉬며 정재현의 품을 파고들었다. 군대 다 엎고싶다. 그러자 정재현이 엎어달라며 나를 더욱 꽉 안았다. 시간은 왜 이럴 때만 빠른걸까. 영장 나왔다고 한게 엊그제 같은데. 우리는 끌어안은 채로 한참을 부둥부둥거렸다. 그 사이에 오가는 말들은 하고 하고 또 한 말이였다. 보고싶으면 어떡해? 몰라 나도. 너 두고 어떻게 2년을… 정재현이 귓가에 대고 칭얼거릴 때였다. 툭 소리가 작게 들리더니,
“너네 뭐하니..?”
귤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와 발 앞에서 멈췄다. 좌우로 흔들던 몸을 일순 멈췄다. 정재현과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천천히 몸을 떼며 고개를 돌렸다. 분명 늦는다고 하셨는데.
“어, 어어.. 엄마..”
엄마와 이모가 놀란 얼굴로 우릴 보고계셨다.
“….”
“…”
“…언제부터야?”
꿀꺽. 조용히 침을 삼켰다. 팔짱을 낀 채로 나와 정재현을 바라보는 엄마와 이모에 우리는 무릎을 꿇어 앉은 채로 슬쩍 눈치를 봐야했다. 아, 왜 하필이면 그때 딱 보셔가지고.
“한… 오개월 정도…”
잠시간 눈을 굴리던 내가 꾸물거리며 말했다. 정재현이 힐끔 내 쪽으로 고개를 돌린게 느껴졌지만 모른 척 바닥에 시선을 박았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연애를 하는게 잘못된 것도 아닌데 고개를 당당히 들지 못하겠다. 정재현은 몰라도 나는 그랬다. 그동안 정재현과 붙어다니면서 들었던 말들을 내가 어떻게 부정했는데. 하물며 엄마가 장난식으로라도 정재현을 사위감으로 추천할 때마다 진저리를 치던 나였다. 근데 이제와서 사귄다고 하니 엄마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할까. 이모도 그렇구. 그래서 가만히 눈치만 보고 있는데 갑자기 정재현이 내 손을 덥석 잡는다. 절로 고개를 돌릴 수 밖에 없었다.
“엄마, 이모.”
정재현의 얼굴을 한 번, 잡힌 손을 한 번 바라보며 눈을 크게 떴다. 미쳤나봐. 손은 왜 잡아? 당황한 마음에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빼내려는데 정재현은 그런 내 손을 더 꽉 쥐어왔다. 어머머. 이모가 작게 중얼거리며 엄마를 살짝 때리셨다. 정재현은 하, 하고 길게 숨을 내뱉으며 나와 눈을 마주하더니 곧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제가 여주 많이 좋아해요.”
“…”
“오래 좋아했어요.”
조용하던 거실에 정재현의 목소리가 울렸다. 꽤나 진지한 어투에 꼼지락거리던 손을 멈추고 물끄러미 녀석을 바라봤다. 문득 오래 좋아했다고 내게 처음 말을 꺼내던 정재현의 몇 달 전 모습이 겹쳐보였다. 그때도 저렇게 보조개가 들어갔었는데. 오개월이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시간이지만 짧아진 머리 빼고는 변한게 하나도 없구나 정재현.
“저희 안 헤어지고, 잘 만날게요.”
“..그래. 너네 둘이 좋으면 됐지 뭐.”
내가 이럴 줄 알았다니까? 우리 이제 사돈이네, 사돈. 그제서야 환하게 웃으시며 장난스럽게 말을 꺼내는 이모와 엄마의 말에 고개를 숙이며 픽 웃었다. 아, 곧 아빠도 아시겠네. 정재현도 같은 생각인지 한 손으로 얼굴을 반 쯤 가리는게 시야 끝에 걸렸다.
“재현아.”
그때 엄마가 정재현을 불렀다. 네? 뒤이어 바로 정재현이 대답했고, 나는 고개를 들었다. 왜, 또 무슨 말 하려구...(불안) 큰 눈을 끔뻑이는 정재현을 잠시간 바라보던 엄마는 아이고, 라며 작게 중얼거리더니 대뜸 정재현에게 손을 뻗었다. 그렇게 내 손을 잡고 있던 정재현의 손이 엄마에게로 넘어간 건 순식간이였다. 당황한 마음에 얼이 빠진 채로 엄마를 바라봤지만 엄마는 아랑곳 않고 손을 쓰다듬었다.
“이모가 여주 쟤 딴 놈 못 만나게 잘 감시할게.”
우리 사위는 군대 2년 조심히 잘 다녀와. 이어지는 발언에 끝끝내 넉다운 해버렸다. 정재현이 크게 웃는 소리가 귀를 찔렀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진짜 놀랬네.”
“그니까.”
정재현과 단 둘이 집에 남겨졌다. 엄마와 이모가 원래 짐만 놓고 갈 계획이였다며 다시 나가셨기 때문이다. 덕분에 긴장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거실 바닥에 드러누웠다. 내가 눕자 정재현도 벌러덩 누워버린다. 그렇게 한참을 뒹굴거렸다. 잠깐 티비도 틀고 껴안기도 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다 문득 눈이 마주친 정재현이 입꼬리를 씩 올렸다.
“야 김여주.”
“왜.”
“너 진짜 나랑 결혼해야겠네.”
그러더니 뜬금없는 소리를 한다. 결혼이라는 말에 미간을 좁히며 정재현과 반대쪽으로 두어번 굴렀다. 내가 제게서 멀어지자 녀석은 왜 떨어지냐며 내가 했던 것처럼 데굴 굴러오더니 또 내 옆에 착 붙어 나를 바라봤다. 아 뭔 소리야 진짜! 그런 정재현에게 괜히 빽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별 상관 없다는 듯 팔을 뻗어 나를 제 쪽으로 끌어당긴 후 또 장난스럽게 웃어보인다. 아까 못 들었어? 이모가 나 사위라고 하신 거.
“억울해.”
“뭐가.”
“엄마가 적어도 열 번은 연애하고 결혼하랬단 말이야.”
사람은 경험이 중요하다며 결혼도 하기 전에 이런저런 남자들 다 만나보고 하라던 엄마를 떠올렸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너랑 하는 연애가 고작 두 번째라고. 약을 올리기 위해 일부러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리자 정재현이 어이가 없다는 듯 어깨를 들썩였다.
“야, 나는 첫 연애거든?”
…그리고 정적. 그 한마디에 나는 삐쭉이던 입술을 고이 집어넣었다. 저러면 내가 할 말이 없잖아. 머쓱해진 탓에 정재현의 티셔츠만 만지작거리는데 그런 나를 보며 웃음을 터뜨린 정재현이 곧 손을 뻗어 구르느라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귀 뒤로 넘겨줬다.
“…군대 기다리는 거 힘들대.”
녀석은 그렇게 내 머리를 살짝씩 쓰다듬으며 나지막이 말했다. 목소리에 걱정이 한가득이였다. 그러니까, 내가 못 기다리는 걸 걱정하는게 아니라 정말 내가 힘들어 할 걸 걱정하는 중이였다, 정재현은. 당장이라도 품에 얼굴을 묻고 칭얼거리고 싶었다. 너무너무 보고싶은 날에는 어떡해? 휴가 나올 때까지 어떻게 기다려. 남자친구의 제대를 기다린 적이 있는 주변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정재현이 말 한 것 처럼 힘들다는 말밖에 없었다. 2년 동안 마음대로 보지도 못하는데 또 싸우기도 한다고. 나 역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지만 굳이 티를 내지는 않았다. 그저 머리를 팔로 벤 채 정재현과 눈을 마주했다.
“그럼 나 기다리지 말고 다른 남자 만날까?”
“…야.”
“농담이야.”
일순 표정관리에 실패한 정재현의 모습에 바람 빠진 웃음을 내뱉었다. 힘들어도, 기다리는 것밖에 더 있나. 나는 이제 너가 너무 좋은데. 정재현의 옆구리를 주먹으로 쿡 치며 말했다. 걱정하지마 인마. 누나 믿지? 내 말에 정재현이 픽 웃는다. 가만히 그런 정재현을 눈에 담았다. 우리 육학년 되면, 우리 중학생 되면, 우리 고삼 되면, 우리 스무살 되면 하던게 엊그제 같은데. 정재현. 어느새 군대도 가는 나이가 됐네. 너, 진짜 어른이 됐네.
“야 너 울..어? 울어??”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고였나보다. 정재현이 놀래서 손을 뻗는다. 안 울어 멍청아 누가 울어! 정재현보다 빨리 손을 들어 눈가를 비볐다. 내 행동에 정재현은 잠시 벙찐 듯 가만히 있더니 곧 내 쪽으로 조금 더 가까이 몸을 옮겼다. 울지마. 나 너 안 울리기로 했는데. 내가 문질렀던 눈가를 쓸어주는 손길이 조심스럽다.
“…다치지 말고.”
“응.”
“아프지 말고.”
“응.”
입술을 살짝 짓이겼다. 결국 정재현의 목에 팔을 둘렀다. 속상한 마음을 감춰보려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애처럼 부비적거리니 정재현이 또 머리를 쓰다듬는다. 너야말로 걱정하지마. 잔잔한 음성이 닿았다. 나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였다.
정재현이 군대를 간지도 일년이 흘렀다. 이만큼 기다린 것도 정말 대단한 거라고 정수정이 그랬다. 아직 한참 더 기다려야 했지만 생각했던 것 보다는 나았다. 괜찮다는 건 아니고 그냥… 생각 했던 것 보다는…(훌쩍) 나는 자주 편지를 써서 보냈다. 이메일로도 편지를 보낼 수 있다는데 손으로 말을 전하고 싶어서 항상 직접 쓴 편지를 전달했다. 답장은 한참 후에야 왔다. 애초에 편지를 받는 절차가 복잡해서 답장이 느릴 수밖에 없다고 한다. 가끔씩은 큰 박스를 먹을 거로 알차게 채워 보냈는데 그때마다 정재현에게 너가 최고라는 편지가 날라왔다.
그 사이 달라진 거라면 정재현과 내가 사귄다는 사실이 밝혀졌다는 것? 전부 내 실수였다. 엠티에 가서 술에 취한 나머지 엉엉 울어버렸다니까. 술게임이 판을 치는 도중에 느닷없이 울음을 터뜨리고는 정재현이 보고싶다고 난리를 쳤었다고. 태용 선배는 내가 다음날 머리를 쥐어뜯을 것 같다는 생각에 황급히 내 입을 막아봤지만 역부족이였다며 어깨를 으쓱였었다. 갑자기 군대 간 정재현은 왜 찾냐는 동기의 물음에 내 남자친구니까! 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성경이의 핸드폰에 생생한 비디오로 잘 보관돼있다. …(한숨) 그렇게 정재현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공식적인 커플이 돼버렸다. 언제까지 비밀로 하려 했냐며 많은 사람들한테 시달렸지만, 괜찮았다. 다들 한 마디 한 후에 기다리는 건 어떻냐며 도리어 어깨를 토닥여줬다. 그때마다 나는 답했다. 보고싶어 죽겠어.
정재현이 없는 동안 나는 그 존재가 내게 얼마나 큰지를 절실히 깨달았다. 평일이고 주말이고 매일 보던 얼굴을 못 보는 것부터가 기분이 이상했다. 가고싶은 곳이 생기면 바로 정재현에게 공유하고 가자 가자 졸랐는데 그것도 못하고 혼자 가고싶다 가고싶다 하는게 제일 서러웠다. 다치거나 아프면 제일 먼저 달려온 것도 정재현, 흘리듯 말 한 걸 귀담아 듣고 챙겨주던 것도 정재현, 다른 남자가 조금만 찝적거리면 나서서 퇴치해준 것도 정재현. 다 정재현인데. 인생이 허전했다.
아, 최근에 정재현네 부대에 유명한 배우가 입대했다. 군대 가기 바로 전 방영한 드라마가 초대박이 나서 갑자기 뜬 입대 소식에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파했었다. 그 중에 한명이 나였고, 곧 익숙한 부대 이름에 입을 틀어막았지. 나는 오랜만에 보낸 편지에 배우의 안부를 물었다. 실제로 보면 얼마나 잘생겼어? 아 나도 진짜 보고싶다. 어쩌고 저쩌고. 반이 넘는 내용이 그 배우에 대한 말이였는데, 대략 일주일 후에 날라온 답장엔 딱 두 줄이 적혀있었다.
야.
난 너가 보고싶어.
“아 진짜 알지도 못하는게! 짜증나서 죽을 뻔 했다니까?”
“우리 부대 사람들도 물어보더라. 김여주랑 친구냐고.”
치타폰엔 여전히 재즈 음악이 흘러나왔다. 가게를 들어오면 텐 오빠가 있었고, 칵테일은 환상이였다. 그리고 역시나, 나는 오늘도 정수정 콤마 김동영과 함께다. 김동영은 정재현과 비슷한 시기에 입대 했는데 휴가라고 연락이 와서 오랜만에 셋이 모이게 됐다. 아아, 좋겠다 김동영. 정재현은 휴가 나오려면 아직 2주나 더 있어야하는데. 나는 안주로 시킨 참치 카나페를 입에 넣으며 열이 잔뜩 오른 정수정을 바라봤다.
“김여주가 너보다 백배천배 예쁘다고 한 마디 해주려다가 간신히 참았다.”
“오~ 감동인데~”
“감동같은 소리하고 있네… 너는 속 안 타냐?”
정수정이 저렇게 화를 내는 건 태일 오빠 때문이였다. 문태일은 그때 그 방송을 탄 후 많은 기획사에서 러브콜을 받았다는 기사가 속속 뜨더니 얼마 안 가 대형기획사와 계약했다는 소식이 떴었다. 그러고나서 데뷔한지는 한.. 반 년 됐나.
“문태일한테 따져!”
혼자 데뷔한 게 아니라 한솔 오빠, 유타 오빠, 영호 오빠 다 같이 밴드로 데뷔해서 지금도 얼마 전 발표한 신곡으로 음원차트 1위를 휩쓸고 있는 연예인이 돼버렸다. 영호 오빠는 아이돌은 싫다더니 밴드로 대성공을 해 더 잘생겨진 것 같았다. 아, 아무튼 그게 문제가 아니고. 문제는 그때 태일 오빠가 방송에서 했던 멘트에서 시작됐다. 데뷔를 하고 팬이 확 늘어나자 그때 노래를 불러주고 싶다던 사람이 전 여자친구가 아니냐, 라는 말이 나왔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말이 나오기 무섭게 예전에 오빠가 나를 데리고 게임에 나갔던 축제 일화와 함께 내 사진이 인터넷에 뜨며 한바탕 소동이 났었다. 때문에 나는 잘 하지도 않던 SNS를 몽땅 탈퇴했고, …또 시달렸다. 진짜 문태일이랑 사귀었었냐고.
“오빠가 직접 사과 했다니까. 해명도 했잖아.”
“그럼 뭐하냐고. 아직도 생각없이 말하는 애들이 한 둘이 아닌데. 엉?”
칵테일을 홀짝였다. 이번에 텐 오빠가 새로 넣은 메뉴라고 추천해준 칵테일인데 정말 맛있었다. 이름이, 피치크러쉬. 벌써 세잔째였다. 짧게 목을 축인 나는 정수정을 향해 손을 저었다. 처음에는 스트레스가 컸는데 지금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있다. 문태일이 전 여자친구 김양에게 바치는 노래라며 기사까지 떴을 때 오빠한테서 전화가 왔었다. 오랜만인데 이런 일로 연락해서 미안하다고. 조심했어야 했는데, 배려가 없었다고.
“상황이 좀 난처하기는 해..”
-어떡하냐. …진짜 미안해.
“아냐 뭐.. 오빠도 이렇게 될 줄 몰랐잖아. 그냥 오빠가 알아서 잘 정리해줘.”
-여주야.
“나 그때 방송 봤어.”
-….
“오빠.”
-응..
“…다시 노래 해줘서 진짜 고마워.”
굉장히 짧은 통화였다. 5분 정도였나.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었는데 첫마디에 오빠라는 걸 알았었다. 덤덤하게 통화를 끝낸 후 얼마 안 가 문태일은 개인 SNS에 피드백을 올렸다. 현재 행복하게 살고있는 친구입니다. 긴 피드백 중 한 문장이였다. 한때는 함께 행복을 꿈 꿨던 사람과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지금.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걸 느꼈다. 어쩌면 정말, 우연히 만나게 되면 웃으면서 인사할 것도 같았다. 정수정은 나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하여튼 물러터졌다니까 김여주.
“근데 김동영 너는,”
그때 별안간 핸드폰 하나가 진동했다. 엎어두고 있던 정수정의 핸드폰이였다. 김동영에게 무어라 말을 걸려던 정수정이 손을 뻗어 화면을 확인했다.
“뭐야.”
미간이 확 좁혀진다. 왜 저래. 땅콩을 씹던 김동영이 작게 중얼거렸다. 정수정은 화면을 한 번, 나를 한 번 보더니 곧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얼굴이 물음표다. 그런 정수정을 바라보다 카나페를 하나 더 먹었다. 맛있냐 묻는 김동영에게 고개를 끄덕여보이자 녀석도 하나 집어 먹더니 으음 소리를 낸다.
“어, 같이 있어. 너 뭐냐?”
누구길래 저래. 혼란스럽게 통화를 이어가던 정수정이 몇 번 더 대답 하더니 얼마 안 가 전화를 끊었다.
“나 이것만 마시고 가야될 것 같아.”
“왜? 누군데?”
“아, 동기.”
과제 때문에. 정수정의 말에 입을 쩝 다셨다. 결국 지금 마시던 거만 마시고 일어나기로 했다. 김동영은 술기운이 조금 올랐는지 평생 휴가였으면 좋겠다며 웅얼거렸다. 많이 힘든가보네. ..그래, 많이 힘들겠지. 또 정재현 생각이 났다. 절로 한숨이 나와 결국 남아있던 칵테일을 한 입에 털어넣었다. 지금 뭐하고 있냐. 어디 아픈 건 아닌가 모르겠네. 조만간 면회 가야지. 다짐했다.
방향이 같은 정수정, 김동영과 헤어진 후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치타폰에서 나오면 항상 정재현이랑 같이 돌아갔는데, 오늘따라 더 보고싶다. 아, 술 마셔서 그래. 도수 약하다고 계속 마셨더니 살짝 취한 것 같았다. 그래도 집이랑 가까워서 다행이지. 옅게 부는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가 마저 걸어가는데, 동 앞에 서있는 익숙한 체형의 사람이 시야에 차올랐다.
“정재현..?”
계속 보고싶다고 생각해서 헛것을 보는 건가 싶었다. 나는 천천히 주머니에서 손을 빼냈다. 밤이라 그런지 조용히 중얼거렸는데도 크게 들렸다. 줄곧 핸드폰만 내려다보던 사람이 고개를 들었다.
“왔어?”
그러더니 나를 향해 제 두 팔을 벌린다. 정재현이다. 정재현이 분명하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쟤가 왜 저깄지? 쟤 지금 군대에 있어야하는데..? 건조해진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이며 잠시간 바라보기만 하다 서서히 발을 내딛었다. 뭔데에! 작게 소리치며 그대로 달렸다. 달려서 품에 와락 안겼다. 코끝에 정재현의 향이 닿았다. 아, 진짜 정재현이네.
“뭐야 진짜? 휴가 다다음주라며!”
“놀래켜주려고. 근데 너가 하필 오늘 술을 마시러 가서 계획 실패야.”
“..그럼 아까 정수정한테 전화 건 사람이 너야?”
정재현은 내가 제 품에 달려들자마자 활짝 벌렸던 팔로 나를 꽉 안았다. 나는 안긴 채 고개를 들었다. 정재현이 나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정수정이 나를 계속 쳐다보더라니. 가까이에서 본 얼굴은 전보다 조금 더 탄 것 같았고, 다행이도 살은 안 빠진 것 같았다. 아 진짜, 뭐야. 그냥 이번주에 온다구 하지. 보고싶었는데. 옷자락을 쥐며 투정 아닌 투정을 부리자 정재현이 푸스스 웃었다.
“나도 보고싶었어.”
곧 나직하게 말을 한다. 여전히 시선히 맞물린 채였다. 정재현은 그 말을 끝으로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더니 느닷없이 이마에 입을 맞췄다. 쪽 소리와 함께 내가 눈을 크게 떠보이자, 입술을 깨물다 또 쪽 하고 닿았다 떨어진다. 이마. 코. 볼. 입술. 입술. 입술. 온 얼굴에 뽀뽀를 하는 걸 살짝 밀어냈다.
“왜 이래?”
“태일이 형.”
“…아.”
“짜증났어.”
한참 난리일 때 옆에 못 있어줘서. 정재현이 큼직한 손으로 뒷머리를 감싸며 나를 더욱 끌어안았다. 나는 옷자락을 쥐고있던 손을 위로 뻗어 정재현의 등에 얹었다. 맞아 나 사실, 너가 정말 필요했어. 너무너무 보고싶었어 정재현. 녀석은 늦게나마 나를 달래주듯 한참을 안아줬다. 그리고 그 상태로 대화가 오갔다. 대놓고 이상한 말 하는 사람은 없었지? 있으면 말해. 다음 휴가 때 총 들고 나오게. 이거 완전 위험한 놈이네. 없었어. 괜찮아.
너가 이렇게 와줘서 괜찮아.
2021년 가을. 김여주, 스물 여섯.
“아 선배. 진짜 결혼 축하드려요.”
“축하드려요 형.”
“고맙다, 바쁜데 와줘서. 재현이 너도. 뷔페 맛있게 먹고 가. 알았지?”
“네~!”
태용 선배가, 결혼 했다.
“오늘 언니 너무 예뻤어, 그치?”
“너가 더 예뻐.”
“아 진짜..”
상대 역시 우리 학교 수학과였던 선배였다. 두사람이 오랜 씨씨였다는 걸 안지는 얼마 안됐다. 어떻게 그렇게 조용히 사귈 수 있는지 알고있던 사람이 한 명도 없어서 태용 선배가 청첩장을 돌릴 때 모두들 입을 떡 벌렸던게 생각난다. 까만색 턱시도를 멋있게 차려입은 선배는 먼저 가시는 어른들을 배웅한다며 저 멀리 걸어갔다. 와, 이제 내 주위 사람들도 한 명씩 결혼 하는구나. 내심 실감이 났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정재현을 바라봤다. 여전히 내 손을 잡고 있는 정재현. 나와 눈을 맞추는 정재현.
“왜?”
“아니 그냥. 배고프다.”
배고프다는 말에 정재현은 얼른 먹으러 가자며 뷔페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가 싶더니 문득 걸음을 멈췄다. 나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러면서 야무지게 쥐고있던 식권 두 장을 내 손에 꼭 쥐어줬다.
“아, 정재현. 배고프니까 빨리 갔다와.”
나는 그런 정재현을 흘겨보며 한숨을 푹 쉬었다. 여기서부터 맛있는 냄새가 진동을 하는데. 꽤 멀리 위치한 결혼식장에 오느라 아침도 먹는 둥 마는 둥이였다. 입맛을 쩝 다시며 빈 속을 대충 손으로 문지르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 친다.
“안 가?”
“가. 정재현 기다리고 있어.”
“아아, 우리가 자리 잡아줄까?”
“헐. 사랑해.”
성경이였다. 옆에는 남주혁. 4년 전인가, 남주혁은 초등학교 동창회에 성경이를 데리고 와 여자친구라고 소개 했었다. 계속 좋아하는 것 같더니 어떻게 잘 다가갔나보다. 아직까지도 잘 사귀고 있고. 하긴 남주혁이 챙기는 걸 보면 헤어질 수가 없는 사이였다. 저거 봐. 지금도 자기 외투 벗어주잖아. 먼저 뷔페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 몸을 돌렸다. 지금쯤 정재현이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꽤 쌀쌀한 날씨에 팔을 쓸어내리며 길게 늘어진 머리를 손으로 넘기는데, 이쪽을 향해 걸어오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
“…..”
아. 작게 소리가 터져나왔다. 마주친 사람도 적잖이 당황했는지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그 날 후로 한 번도 본 적 없던, 민형이였다.
“…”
“..”
“..잘 지내셨어요?”
열 걸음 정도를 사이에 두고 잠시간 말이 없던 중에 민형이가 다시 걸음을 내딛었다. 가까워졌다. 원래도 나보다 훨씬 컸지만 전보다 키가 더 큰 것 같았다. 앞머리를 올려 이마를 드러낸 모습이 낯설었다. …어, 잘 지냈지. 나는 그렇게 답하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아아, 민형이가 올 거라고 왜 생각을 못했을까.
“민형이 너는..? 잘 지냈어?”
“저도 뭐.. 잘 지냈어요.”
아.. 그렇구나. 한동안 적막이 흘렀다. 어쩔 수 없이 흐르는 어색한 기류에 목울대를 긁적이다 큼, 하고 목을 가다듬었다.
“그.. 수능..! 만점 축하해..”
“…언제적이에요 수능이.”
픽 웃는다. 아무 말이나 해야겠다는 생각에 멋대로 뱉은 말이였는데 뒤늦게 민망함이 몰려왔다. 민형이는 고개를 숙이며 미간 새를 만지작거리더니 곧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아니 그때 내가.. 축하도 그.. 제대로 못해주고.. 그럴동안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다, 나도 모르게 입을 멈췄다. 기억도 안 나요. 민형이가 그렇게 말을 꺼냈기 때문이다.
민형이가 보냈던 편지를 기억한다. 정재현이 입대 한 후 한창 정신없이 생활하던 중에 불쑥 도착한 하얀 편지 봉투, 그 위에 꾹꾹 눌러 쓴 이민형 이름 석자를 아직도 기억한다. 완전히 잊고 있었을 때 받은 편지라 편지지를 더 꾹 쥐어야했다. 간결하게 적힌 내용이 참 이민형 답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랬는데 민형아.
“선생님.”
이 편지 읽고 있을 때 선생님이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아까 식장에 그 형이랑 들어오는 거 봤어요.”
첫사랑은 아니지만 첫사랑보다 좋아했어요.
“잘 어울리던데.”
그래도 언젠간 잊겠죠.
“이걸 이제서야 말씀 드리네요.”
저도 행복할게요.
크으. 진한 키스신을 끝으로 드라마가 막을 내렸다. 16부작의 미니시리즈였는데 첫화부터 시청률 1위를 찍었던 어마어마한 작품이였다. 지금 나오는 오에스티도 음원차트 1위더만. …태일 오빠가 부른 거.
“아 정재혀언. 나 이제 뭐 보냐.”
이렇게 삶의 낙 중에 하나가 또 끝이 났다고 생각하니 괜히 울적했다. 리모콘을 좌우로 흔들며 칭얼거렸다. 내가 이러면 어차피 후속작 볼 거잖아; 라고 타박하는 목소리가 들려야하는데 어째 잠잠하다. 휙 고개를 돌렸다. 아까까지만 해도 쇼파에 반듯하게 앉아 같이 드라마를 시청하던 녀석이 언제부터 이러고 있었는지 길게 누운 채 눈을 감고 있다. 아니 얘는.. 어떻게 저 드라마를 눈 앞에 두고 잘 수가 있지? 야 정재현, 부르며 손을 뻗다 행동을 멈췄다. 생각해보니까 정재현 얘 어제 새벽까지 일 했잖아.
“…”
쇼파에 걸친 팔로 턱을 괸 채 정재현을 바라봤다. 진짜 많이 컸네 정재현. 어릴 땐 이렇게 누워도 발도 안 닿았던 놈이.
“진짜 너랑은.. 죽을 때까지 친구일 줄 알았는데.”
머리카락에 조심히 손가락을 가져갔다. 그대로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을 살살 넘겼다. 헤어지면 어떡하냐고 걱정하던게 무색할 정도로 두 번째 연애가 오래 지속되고 있었다. 정재현은 나를 잘 아는만큼, 나를 대했다. 좋아하는 건 넘치게 주는 반면 싫어하는 건 말을 하기도 전에 피했다. 여전히 친구 같지만 그 안에 달달히 녹아있는 무언가가 있다. 눈이 마주치면 웃고, 손이 스치면 잡고, 옆에 서면 발 맞춰 걷는, 그런 거.
“안 잔다.”
그때 정재현이 입을 열었다. 그 탓에 화들짝 놀라며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던 손을 뗐다.
“아 왜 안 자면서 자는 척..!”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입꼬리만 끌어올리는 모습에 급히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나보다 정재현이 빨랐다. 손목을 잡아채더니 그대로 제 쪽으로 당겨버린다. 눈을 크게 뜨며 전보다 더 가까이 정재현을 마주하게 됐다. 코 앞에서 정재현이 눈을 떴다. 천천히 드러나는 눈동자에 내가 담겨있다.
“김여주.”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침을 꿀꺽 삼켰다. 정재현은 올곧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숨을 내쉬면 숨결이 닿을 것 같았다.
“응.”
작게 대답했다. 그러자 고개를 살짝 들더니 입술에 빠르게 입을 맞추고 떨어진다. 입술 새를 살짝 벌렸다. 정재현이 씩 웃는게 보였다.
“여주야.”
그 순간만큼은 꽤나 크게 틀어놨던 티비 소리도 귀에 들어오지 않고 눈 앞에 있는 정재현만 들렸다. 나는 녀석을 따라 웃었다. 왜 불러. 두 손으로 정재현의 볼을 감쌌다. 보조개가 들어가는게 느껴졌다. 예쁘게 눈이 휘어진다. 너는 아직도 이만큼 설레게 해. 쿵쿵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았다. 정재현은 내 손 위로 제 손을 겹치더니 몸을 일으켰다. 그에 따라 고개를 들어올리며 시선을 좇았다.
“사랑해.”
“..”
“사랑해 진짜.”
눈만 봐도 알 수 있는 걸 입술로 말 할 때, 나는 생각했다.
평생을 함께한 너가 내 마지막이라 다행이야.
정재현 너를 사랑해서, 너무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