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름 치환은 받침있는 이름이 좋습니다! *
천둥번개가 치던 날, 우리답지 않게 유난히 어색했던 그 날 이후로 너와 등하교를 하지 못하게 된 것도 어언 한 달이 다 되어갔다.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회피가 아닌 쌍방이었다. 하루는 내가 널 피했고, 하루는 네가 날 피했다. 오지 않는 건 너였고 피한 것도 나였지만, 이상하게도 제 3자인 너와 내 친구들이 마치 제 일인 마냥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나를 걱정해주는 친구들의 호의는 고마웠지만, 그런 말을 들을 수록, 자꾸 네 얘기를 들을 수록 네가 떠올랐다.
보고싶었다.
불X친구가 남자로 보이면 어떡하죠?
해라 씀.
해라 씀.
" 야 너네가 안 만나니까 왜 내가 서럽냐. "
" 그거 나도. 근데 진짜 왜 그러는건데? "
" 뭐 누가 고백이라도 했냐? "
급식실에서 친구들과 열심히 밥을 먹고 있으면, 우리의 뒤로 박우진네 무리가 지나갔다. 분명히 눈이 마주쳤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박우진은 끝내 가벼운 눈인사조차 나누지 않았다. 그리고 그 때부터 친구들의 궁금증이 폭발해버린 것이었다.
" 고백은 무슨, 밥이나 먹어. "
" 난 너네 사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을거라고 생각해. "
" 그래, 남녀 사이에 진정한 친구가 어디있냐? "
친구들의 말이 백 번 옳았다. 남녀 사이에 친구란 것은 없었고, 반드시 어느 한 쪽이 호감 이상의 감정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굳이 따지자면 나와 박우진의 관계 속에서는 그 '한 쪽'이 내가 되는 꼴이었다.
내가 18년 동안 봐온 너는, 적어도 아무 이유 없이 누군가를 피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누군가와 조그만 마찰이라도 있다면 그 날 당장 풀어야 하는 성격이었고, 약간의 어색함 조차 견디지 못했다. 그런 네 성격 때문에 우리는 조금만 싸워도 당장 화해했고, 하루 이상 냉전을 유지했던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런 네가 먼저 나를 피한다는 것은, 네가 내 마음을 알아차렸다는 것으로 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나는 그것이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었다.
" 야 저거 박지훈 아니야? "
" 헐 그러게, 와 진짜 잘생기긴 했다. "
" 근데 쟤 왜 이 쪽으로 와? "
" 그러게 쟤 친구들 저 쪽에 있지 않아? "
" 너밤누나 "
뜬금없이 불린 내 이름에 놀라 고개를 들어보면, 1학년 탑이라고 불려도 절대 부족하지 않은 박지훈이 내 앞에 서 있었다
지훈이는 정말 어쩌다 알게된 사이였다. 우연히 지훈이네 반과 체육이 겹친 날이 있었는데, 그 날 지훈이가 축구공으로 내 얼굴을 강하게 맞췄다. 그 이후로 지훈이는 미안하다며 매점에서 무언가를 사주기도 하고 가끔 심심하다며 카톡을 보내고는 했다. 요즘도 가끔 연락이 오길래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넘어갔는데 갑자기 이렇게 직접 찾아왔다고?
" ..어? "
" 오늘 학교 끝나고 놀러갈래요? "
" 오늘? 어.. 그래 뭐 "
" 어 알겠다고 했어요? 그럼 끝나고 누나네 반으로 갈게요. 밥 맛있게 먹어요! "
지훈이와의 이 대화가 급식실에 미친 영향은 몹시 컸다. 그렇게 시끄럽던 급식실이 지훈이의 '놀러갈래요?' 한 마디에 이렇게 조용해질 수가 있나. 사실 지훈이는 어딜가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었다. 지훈이의 외모 정도면 주변에 제가 좋다며 쫓아다니는 여자애들이 여러명이 있어도 놀랍지 않은데, 평소에 철벽으로 유명한 박지훈이 여자한테 데이트 신청을 한다? 내가 생각해도 그건 충분한 이슈거리였다.
" 야 미친 이거 지금 무슨 상황이야? "
" 박지훈이 김너밤이한테 데이트 신청한거 맞지? 그것도 대놓고. "
" 아 미쳤다 진짜 대박. "
" 야 이제 박우진은 어떡해? "
역시 이번에도 당사자인 나보다 친구들의 반응 속도가 훨신 빨랐고, 덕분에 모든 아이들의 관심은 내 쪽으로 쏠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많은 아이들 사이에서, 얼핏 박우진과 눈이 마주쳤다. 한 달 만에 마주한 박우진의 모습은 여전했지만, 그 눈빛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담겨있는 듯 했다. 그렇게 눈이 마주친 우리는, 한참이 지나도록 피하지 않았다.
*
*
*
어색했다. 오늘 지훈이와의 하루를 한 마디로 설명하자면 이거였다. 원래 그닥 친한 사이도 아니었던지라, 갑작스레 보내게 된 하루는 어색함의 극치를 달렸다. 지훈이도 어색함을 풀어보려 애를 쓰는 것이 눈에 보였지만, 미안하게도 이 분위기는 풀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여느 연인처럼 영화를 보고 간단히 밥까지 먹으면, 어느새 시간은 8시를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지훈이는 나를 집에 데려다주겠다며 함께 버스에 올랐다.
" 누나 오늘 재미있었어요! "
" 응응 나도! 오랜만에 잘 놀았다. "
" 근데 요즘은 왜 우진이형이랑 같이 안 다녀요? "
" ..어? "
갑작스레 지훈이의 입에서 나온 '우진이형' 이라는 단어는 나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다. 어색하긴 했지만 지훈이와의 하루도 나쁘지 않았고, 심지어 그 속에서 네가 밀려 들어올 틈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를 떠올리지 않도록 애를 썼던 것 같기도 하다. 어찌 됐든 나는 너를 잠시나마 잊고 있었는데, 지훈이의 한 마디에 하루동안의 나의 노력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듯 했다. 결국 나는 네 앞에서 또 이렇게 작아지는구나.
" 아 누나 기분나쁘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기분 나빴어요? 미안해요 누나 "
" 뭘 미안하기까지.. 아니야 괜찮아. "
" 그냥 궁금했어요. 맨날 같이 다니길래 어떻게 하루도 안 빠지고 그럴 수 있는지. "
" ... "
" 우진이 형이랑 누나랑 많이 각별한 사이라는 건 진작에 알고 있었어요. 근데, "
" ... "
" 솔직히 조금 질투도 났어요. 누나가 너무 우진이 형만 보고 있는 것 같아서. "
" ..어? "
" 아 이러려던게 아닌데.. 이거 지금 고백해야 되는 타이밍이죠? "
" ..그 지훈아 "
" 근데 지금 고백 안 할거예요. 벌써 차이기에는 내가 아직 한게 아무것도 없거든요. 나는 그냥 누나가 옆에 나도 있다는 것만 알아줬으면 좋겠어요. "
" ... "
" 맨날 우진이 형이랑 같이 있어서 말하고 싶어도 틈이 없었는데, 얘기하니까 엄청 후련하네요. "
갑작스럽게 제 마음을 꺼낸 지훈이는, 내 반응이 어떻든 아랑곳하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말을 끝까지 이어나갔다. 그런 지훈이의 한 마디 한 마디를 들을 수록 나는 점점 복잡해져왔다. 예상치도 못한 전개였다. 저에게 남자는 박우진밖에 없는 줄로만 알고 있었는데, 박지훈이라니.
결국 그 날 집 앞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입도 뻥긋하지 못했다. 옆에서 어색하지 않게 간혹 말을 붙여주던 지훈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한 마디도 받아쳐주지 못했다. 그렇게 어색한 적막 속에서 집 앞에 도착하면, 지훈이는 애써 살풋 미소를 지어보이며 조심히 들어가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이내 나도 내일 보자는 짧은 인사만을 남기고는 곧장 엘레베이터에 몸을 싣었다.
박우진, 박지훈
박지훈, 박우진
아무리 머리를 꽁꽁 싸매도 혼자서는 도저히 결론이 나오지 않는 문제였다. 18살에 첫사랑을 시작한 나로서는 이 모든 상황이 갑작스럽고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리고 엘레베이터의 문이 열리자마자 보이는 계단에 쪼그려 앉아있는 박우진의 모습도, 갑작스러웠다.
*
*
*
" 넌 기집애가 이 시간까지 어딜 싸돌아다녀. "
" ..야 "
" 지금까지 박지훈이랑 있었냐? "
" .. 그럼 어쩔건데 "
" 김너밤 능력좋다? "
엘레베이터의 문이 닫히면, 칠흑같은 어둠 속에 박우진과 나의 묘한 분위기만이 남아있었다. 나를 마주했음에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박우진에 그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가려고 하면, 나를 붙잡는 박우진 특유의 중저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 예상과는 철저히 반대로, 내가 설렜던 그 목소리는 온데간데 없고 차가운 목소리만이 나를 반겼다.
한 달만에 마주한 박우진은 다른 사람인 마냥 나를 쌀쌀맞게 대했다. 보고싶었다는 말이 무색하게, 너는 그렇게 내게 잔 상처들을 남겼다. 결국 나를 비꼬는 듯한 말투에, 결국 먼저 폭발해버린 것은 내 쪽이었다.
" 야, 너 뭐하자는 건데. "
" ... "
" 갑자기 먼저 쌩 깔 때는 언제고, 너 지금 존나 이해 안되는거 알아? "
" ... "
" 내가 친구가 너 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
" 야. "
" 쌩 깔거면, 그렇게 계속 아는 척 하지마. 기분 엿같으니까 진짜. "
그 말을 끝으로 나는 그를 지나쳐 집으로 들어왔고, 그동안 꾹꾹 쌓여왔던 서러움에 목이 메여왔다. 이 지독한 짝사랑은, 도대체 끝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너는 차가운 말로 나를 밀어냈지만 나는 보고싶었던 네 얼굴을 마주해 반가움이 먼저였다. 그 짧은 순간에도, 나는 네가 온갖 감정이 휘몰아쳤었다. 하지만 그런 나를 너는 감정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겠지.
억지로 거짓말을 꺼내 놓기란 참 어려운 것이었다.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으면서, 나 자신이 먼저 아차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나는 이렇게 네 앞에만 서면 한 없이 작아지기만 했다. 그깟 박우진이 뭐라고.
그깟 박우진은, 결국 내 온 하늘이었을까.
불X친구가 남자로 보이면 어떡하죠? B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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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해라입니다!
우선 첫 화부터 많은 관심 가져주신 독자님들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부터 드리고 싶네요ㅠㅠ
아직 많이 부족한 글솜씨임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들어하시니 몸 둘바를 모르겠습니다..ㅎㅎ
앞으로도 독자님들께 자주 뵐테니 기대해주세요!
그리고 암호닉도 감사한 마음으로 받고 있습니다!
암호닉 분들께는 중간중간 메일링 해드리는 소정의 조각글이 있을 예정이오니 부담없이 신청해주셔도 됩니당ㅎㅎㅎ
다음 편은 아마 우진이의 번외편이 될 것 같네용!
그럼 조만간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 암호닉 ]
챰새 / 0226 / 꽃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