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벌써 겨울이 성큼 다가왔다. 물론, 아직 겨울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이르지만 워낙 추위를 많이 타는 체질이라 벌써부터 두꺼운 가디건을 챙겨다녔다.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더 쌀쌀한 날이었다. 정말 안타까운 일은 내가 가디건을 챙겨오지 못했다는 거. 회사에는 미리 갖다 놓은 담요 덕분에 추위를 피할 수 있었지만 ㅡ이것도 부장님이 흔쾌히 허락해 주셨으니 다행이다.ㅡ 문제는 퇴근 때다. 행복해야 할 퇴근 길이 이렇게 싫을 수도 있을까.
퇴근 시간이 되어 짐을 챙기고 1층으로 내려오자 벌써부터 느껴지는 추위에 몸을 살짝 떨며 팔짱을 끼고 최대한 몸을 움츠렸다. 겨울에 진짜 어떻게 버티지. 종종걸음으로 회사를 빠져나오는데, 회사 앞에 낯익은 사람이 서있었다.
" ... 다니엘? "
제 목소리가 들린 건지 이름을 부르자 나를 바라보고 환하게 웃으며 달려왔다. 이건 뭐, 대형견도 아니고. 아니, 그나저나 쟤 왜 여기에 있지? 이런 의문이 들어 물어보려 입을 열기도 전에 순식간에 내 앞으로 와서 나를 꽉 껴안아준다.
" 누나! 마쳤어요? 오늘도 칼퇴네. "
" 언제부터 와있었어? "
" 음, 한 15분 전에. "
" 연락이라도 하고 오지. 약속이라도 있었으면 어쩌려고. "
내가 약속이라도 있었으면 헛걸음이었을텐데. 하여튼, 귀엽다니까. 쌀쌀한 날씨와 다르게 따뜻한 온기에 폭 기대어 있자 내가 저에게 파묻힐 수 있도록 안아준다.
" 따뜻하죠. "
" 응... 오늘 가디건 안 챙겨왔거든. "
" 내가 그럴 줄 알았지. "
" 응? "
몸을 살짝 떼어내더니 들고 있던 종이 가방을 흔들어보인다. 저게 뭐야? 종이 가방을 받아 안을 슬쩍 봤더니,
" 헐, 다니엘. "
" 왠지 안 가져왔을 것 같아서. "
가디건 하나가 종이 가방 안에 들어있었다. 얘 어떻게 알았지? 놀란 눈으로 다니엘을 올려다보니 안에 들어있는 가디건을 꺼내어 내 어깨에 걸쳐주었다.
" 뭔가 느낌이 안 들고 갔을 것 같아서요. "
그리고, 이거 우리 커플 가디건이예요. 걸쳐준 가디건과 색깔이며 디자인까지 똑같은 가디건을 입고 샐쭉 웃어보인다. 커플 아이템 이런 건 솔직히 부끄러워서 조금 피하려고 했는데, 막상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우리 모습을 보니 나쁘지 않았다. 걸쳐준 가디건을 똑바로 입고 단추까지 꼭 잠그고 다니엘의 팔에 팔짱을 꼈다.
" 고마워. 예쁘다. 자주 입고 다닐게. "
제 대답이 맘에 들었는지, 아님 같은 옷을 입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좋았는지. 아, 둘 다 일 수도 있겠구나. 소리 내어 웃으며 내 팔짱을 빼내고 어깨를 감싸안는다. 오늘은 따뜻한 전골 먹으러 가요. 소소하디 소소한 이 일상이 , 너와 함께 해서 더 따뜻하다.
옆 집 동생
" 아, 미치겠네. "
돌아버리겠다. 우연히 달력의 다음 페이지를 넘겨보았고, 한 해의 마지막인 12월이 나왔고, 그리고 내 고민의 시작이었다. 10일에 동그라미가 쳐져 있었고 적혀 있는 말, 강다니엘 생일. 오 마이 갓. 완전 까먹고 있었다.
혼자서 침대에 누워 끙끙 앓고 있었다. 얘 생일에 뭘 해줘야 하는 거지. 이 나이 먹도록 애인 생일을 제대로 챙겨준 적이 없어서 더 고민이었다. 내가 아는 다니엘이라면 분명히 뭘 해주어도 와, 누나. 고마워요. 진짜 감동. 이럴 게 뻔하지만. 그래도 그러면 안 되지. 몸을 일으켜 책상에 걸터앉아 빈 종이에 끄적이기 시작했다. 다니엘 생일날 해줄, 깜짝 생일 파티 준비.
*
" 누나. 요즘 바빠요? "
" 응? 으응, 아무래도 연말이다 보니. "
" ... 이제 12월인데. 회사 너무하네. "
이 놈아, 회사가 너무한 게 아니라 네 생일이 너무하다. 다니엘의 생일이 평일이라 당일과 그 다음 날 휴가를 내기 위해서 내가 지금 이렇게 야근을 하고 있다는 걸 너는 알려나. 주중 내내 야근을 하고 토요일까지 일을 하고 있는 터라 일요일에, 그것도 우리 집에서 겨우 얼굴을 보게 된 탓에 얼굴에 심술보가 그득한 다니엘이다. 아, 못난 얼굴. 소파에 누워 있다가 몸을 일으켜 옆에 나란히 앉아 볼을 잡아 쭈욱 늘였다. 아프다는 듯 내 손을 찰싹, 하지만 아프지 않게 때리는 다니엘.
" 누야ㅡ 내 아파요. "
" 미안. 갑자기 일이 많아져서 그래. "
" ... 누나. 모믄, 갠차는거져? "
" 응, 괜찮아. 걱정 하지마. 일 끝나면, 데이트 꼭 하자. "
" 매일 데이트 하자 하꺼... 이거 쫌... "
" 아, 미안. "
잡고 있던 다니엘의 볼을 놔 주었다. 밉지 않게 흘겨보는 눈빛에서도 느껴지는 너의 사랑. 나도, 중증인가보다. 조금 빨개진 볼을 살짝 쓰다듬다가 기습적으로 볼에 짧게 입 맞추었다. 짧게 입 맞추고 도망치듯 부엌으로 자리를 옮겼고 입 맞춘 자리에 손을 올린 채 멍하니 앉아 있다 재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 그렇게 기습적으로 훅, 다가오지 말라니깐요. 이 누나 진짜 위험하네. "
" 왜에ㅡ 너 놀리고 싶어서 그랬어. 표정 진짜 웃겼거든. "
" 하여튼, 이 누나는 종잡을 수가 없어. "
물 마시는 내 옆으로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 다니엘. 생일만 기다려라, 누나랑 꼭 재밌게 놀자.
*
드디어, 다니엘의 생일이다. 일주일 넘게 야근한 끝에 이틀 휴무를 뺄 수 있었다.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그래도 다니엘을 깜짝 놀래켜 줄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오늘도 어김없이 등교하는 옆 집 총각의 문소리가 들렸다. 오늘 분명히 발표 있댔으니까, 아마 오후까지는 연락이 없겠지. 새벽에 12시 되자마자 축하한다고 장문의 카톡을 보내자 저녁에 봐요, 누나. 보고싶다. 사랑해요. 라며 귀엽게 답장을 해왔다. 그럼요, 오늘은 볼 수 있어요. 단, 장소는 너희 집일테고.
늘 자기 집에 놀러오라며 끊임없이 비밀번호를 알려준 단순한 다니엘 덕분에 너무나도 손쉽게 옆 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어제 미리 사다둔 음식 재료들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가는데,
" 히익ㅡ 이게 무슨 사람 집이야, 개판이야. "
집이 무슨 돼지 우리도 아니고, 개판도 아니고. 아무리 남자 혼자 사는 집이라지만 이렇게 더러울 수 있단 말이야? 일단 사온 재료들을 냉장고에 어찌저찌 쑤셔놓고 ㅡ물론 냉장고는 텅텅 비어있었다. 얘 뭐 먹고 사는 거지.ㅡ 집 정리부터 차근차근 시작했다. 널부러진 옷가지들은 세탁기에 한 번에 때려놓고 돌려서 널고, 이불이랑 베개는 베란다에서 한 번 털어서 다시 침대에 깔아놓고, 구석에 쳐박혀있던 청소기로 바닥도 한 번 쓸고. 나 여기 가정부로 취직한 줄. 이 정도면 돈 받고 치워줘야 하는 수준이네. 나중에 혼내야겠다.
집이 사람 사는 곳처럼 바뀐 후에야 사온 재료로 요리를 시작했다. 생일이니까 미역국도 끓이고, 좋아하는 고기 반찬이랑 밑반찬들도 좀 만들고. 평소에 나도 이렇게 안 해먹는데, 초록창에게 물어봐서 하나씩 하나씩 만들었다.
겨우 준비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와 화장을 하며 준비하는데 수업이 끝났는지 다니엘에게 카톡이 와있었다.
다니엘
누나
나 발표 끝났어요
오늘 오후 4:53
언제 마쳐요?
데리러 갈게 오후 4:54
수고했어
아 근데
나 오늘 연장 근무 잡혔어
오후 4:54 ㅠㅠ
추우니까 회사로 오지마
오후 4:55 집 갔다가 나중에 밖에서 만나자
다니엘
아...
오늘도 연장이예요?
진짜
너무하네
회사 오후 4:55
...
일단 알겠어요
나중에 마치고
연락줘요 오후 4:58
미안해
ㅠㅠ
오후 5:00 조금 있다가 만나자
다니엘 삐졌다. 회사 일이라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 혼자서 시무룩해하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조금 미안했지만, 더 놀래켜주고 싶었는걸... 지금 학교에서 출발하면 버스 타고 15분 정도 걸리니까...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구나. 평소에 다니엘이 그렇게 입어 달라고 해도 안 입던 화이트 원피스를 입고 부랴부랴 다니엘 집으로 넘어갔다. 식탁 위에 생일상을 차려놓고, 사두었던 케익을 꺼내어 24개 초를 꽂아두고 소파에 앉아 다니엘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20분이 지나도,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다니엘을 기다리다 지쳐 소파에 눕듯 기대어 있었다. 어느새 밖은 어둑어둑해졌고 테이블 위에 케익만 덩그러니 놔둔 채 가만히 기대어 있자 그 동안 쌓여있던 피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아, 미쳤어. 김여주. 정신 차려. 정신, 차려야, 하는데... 푹신한 소파에 파묻히는 느낌에 꾸벅 졸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도어락 누르는 소리에 번쩍 눈이 떠졌다. 아, 어떡해, 어떡해. 케익을 들고 식탁 뒤로 부랴부랴 숨어서 초를 켜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안 켜지지. 당황한 탓인지 불이 잘 안 붙는다. 그 사이, 띠리릭ㅡ 소리와 함께 다니엘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식탁에서 탁, 멈췄다. 고개를 돌리자 식탁 다리 사이로 멈춘 다니엘의 다리가 보였다.
" ... 뭐야? "
당황한 목소리가 역력했다.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려 집 안 여기 저기를 살펴보는 다니엘. 불이 안 붙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멈췄다. 순간, 내 눈 앞에 다니엘의 다리가 보였고 고개를 들자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발견한 다니엘과 눈이 마주쳤다. 식탁 뒤에 불도 못 붙인 케익을 들고 뻘쭘하게 숨어있다 몸을 일으키며 어색하게 웃어보였다.
" 하하하, 안녕. "
" ... 누나. 여기서 뭐 해요? 오늘 연장 근무라며. 근데 왜... "
" ... 너 오늘 생일이라서, 휴가 냈어. "
" 에? "
" 겁나 야근하고 휴일에도 일해서, 너 생일날 1박 2일로 휴가 냈다고. 축하해주고 싶어서, 바보야. "
" ... ... "
" 그나저나, 너는 무슨 집이 이렇게 더럽냐? 내가 청소 다 했, "
뚫어질 듯 바라보는 다니엘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몸을 돌리는데 말을 다 잇기도 전에 등 뒤에서 세게 껴안아오는 다니엘. 안겨서 가만히 있는데 허리를 강하게 감는 손길과 귓가에서 들리는 얕은 숨소리가 제법 놀랐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 뭐야. 서프라이즈였어요? "
" 그럼. 완전 속았지? "
" ... 이런 거 안 해줘도, 같이 밥만 먹어도 좋았는데. "
" 내가 싫거든요. 너, 솔직히 서운했지? "
" ... 조금요. 그래도 다 풀렸어요. "
" 자, 이제 이거 받아. 초 불어야지. "
다니엘에게 케익을 건네주고 차분하게 불을 붙였다. 24라는 숫자 초에 불이 붙고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불러주었다.
"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
" ... ... "
" 사랑하는 강다니엘ㅡ 생일 축하합니다. "
" ... ... "
" 소원 빌고, 어서 불어. "
눈을 감고 잠깐 생각하더니 곧 후, 불어 초를 껐다. 박수와 함께 일렁이는 촛불 연기 사이로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껏 없이 환하게 웃었다.
" 24번째 생일 축하해, 다니엘. "
" ... 고마워요. 누나. 진짜로. "
손가락에 크림을 콕, 찍어 다니엘의 볼에 살짝 묻혔다. 아ㅡ 미끌한 느낌에 미간을 찌푸리며 옆에 있는 티슈로 닦아내는 다니엘. 원래, 생일에는 하는 거야. 다시 크림을 찍어 이번에는 내 입으로 쏙 넣었다. 달달한 느낌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 으음, 달다. "
" ... ... "
" 너도 먹을래? "
저를 빤히 바라보길래 한 입 콕 찍어 다니엘 입 앞에 가져다 대자, 골똘히 생각하다 고개를 살짝 저으며 들고 있던 케익을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어쩔 수 없이 다시 내 입으로 쏙 넣는데, 그와 동시에 내 뒷목과 허리를 감싸안고 잡아 당겨 입을 맞춰오는 다니엘. 이걸 노리고 있었던게 분명하다. 입을 깊게 맞춰오는데, 크림의 미끌거림과 따뜻한 숨결이 엉켜 제법 야한 느낌이었다. 저번에는 술을 마셨었지만, 이번에는 맨 정신이기 때문에 더 아찔했다. 입 안에 있는 크림이 없어질 때 즈음 맞닿아 있던 입술이 떨어졌다.
" ... 하아ㅡ... 너 이거 노렸지. "
" 어떻게 알았대. "
" 모르는 게 이상하지, 바보야. "
" 너무 예뻐서. 그냥. "
내 얼굴이 빨개졌을 게 분명하다. 매번 예쁘다, 사랑한다 말해주어도 빨개지는 얼굴은 어쩔 수가 없었다. 잡고 있던 내 뒷목을 살살 쓸어주는데, 간지러워 몸을 바스락거렸다.
" 누나. "
" 응? "
" 밥은 나중에 먹고, "
" 아, 왜... "
" 오늘은 내 소원, 들어주면 안 돼요? 생일이잖아."
" 으, 으응? "
평소보다 짙은 눈으로, 나를 빤히 내려다보는 다니엘. 그 눈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한 번 눈이 마주치자, 계속 너만 바라보게 되었다.
" 1박 2일이니까, "
" ... ... "
" 오늘 여기서 자고 가요. "
" 어, 어? "
" 이렇게 예쁘게 입고 와서 예쁜 짓만 하고, 그냥 집에 가겠다고? "
" ... ... "
" 나 오늘 너 못 보내요. 자고 가. "
... 오늘은 정말, 집에 못 가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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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댕뭉이입니다!
오랜만에 찾아왔습니다ㅠㅠ 늦어서 죄송해요. 오늘도 역시나, 분량 조절 실패입니다. 오랜만에 와서 조금 길게 쓰고 싶었는데, 너무 길어지는 것 같아서ㅜㅜ 여전히 분량 조절은 어렵습니다ㅜㅜ 앞뒤도 잘 안 맞는 것 같고요... 다니엘의 생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부끄) 다음 편이 남아있다구요! 저번 화에서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고 응원까지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많은 힘이 되었어요. 역시 독자님들은 제 힘, 제 원동력입니다♡ 옆 집 동생은 3화 안에, 마지막은 K화로 마무리할 예정입니다. 더 짧아질 수도 있지만 더 길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요. 부족하지만 남은 이야기도 다니엘과 함께 해주세요♡ 이제 많이 더워진다고 하네요. 건강 조심하세요!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
암호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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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나 빠지신 분 있으시면 꼭 말씀해주세요! 읽어주시는 모든 독자님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