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 사랑의 불청객 - 목격
GOT7 - Q
"아... 너무 아파..."
아침부터 화장실 신세를 못 벗어나고 있다. 안 그래도 날씨도 더운데다 습하기까지 한데 한 달에 한 번 오는 마법까지 걸려버리니 딱 죽겠는 거다.
더군다나 첫째날이면 한 달 동안 응어리진 스트레스가 확 밀려오는 것처럼 종일 아파 정신을 못 차리는 나는, 오늘도 이렇게 화장실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으으..... 아...."
누가 듣기라도 할까봐 크게 소리는 못 내고,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면서 앉아있는데 정말 할 수만 있다면 '살려주세요'라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분명 출근길에 약을 먹었는데도 약이 말을 안 듣는 건지, 아니면 좀 더 기다려야 하는 건지 통증이 가실 생각을 안 한다.
그러고 보니 한 달 동안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잠도 제대로 못 자서 몸이 고장난 모양이다. 내가 몸을 함부로 다뤄가며 일했다는 건 인정해야 하는 부분이다.
그래도 이건 좀... 안 그래도 오전에 클라이언트랑 3차 회의도 있는데. 하필 이런 날 터질 게 다 뭐야...
딱 울고만 싶어서 한참을 얼굴을 감싸고 있다가, 옹과장님이 출발하자고 한 시간이 거의 다 되어 주섬주섬 일어났다.
"하아...."
얼굴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머리카락은 땀에 젖어 죄다 달라붙어 난리도 아니다.
누가 보면 악몽 꾼 줄 알 것 같은 몰골이다 싶은데 세수도 못 한다. 급한대로 땀만 좀 닦아내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벌써부터 몸이 축 늘어지는 게 상태가 메롱이다.
아픈 티를 안 내려고 제대로 걸어보려고 해도, 걸음에 힘도 들어가지 않는 게 출근하자마자 퇴근하고 싶은 마음이 이런 걸까.
사무실 천장을 바라보며 신이시여, 제발 클라이언트 회의만이라도 잘 마치게 해주세요 하고 빌었다.
"○사원, 몸 안 좋아요?"
걸음마다 아픈 티를 죽죽 흘리고 다니니 안 물어보실래야 안 물어보실 수가 없었을 거다. 한껏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어오시는 옹과장님이다.
나는 아, 네에... 컨디션이 별로 안 좋아서요. 했다. 옹과장님은 땀 좀 봐, 하면서 손을 내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주셨다.
나는 그러지 않으셔도 된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옹과장님의 걱정스러운 눈빛은 걷혀질 생각을 안 했다.
"괜찮겠어요? 어떡하지..."
"...괜찮아요, 과장님. 일단 출발..."
출발이라는 단어가 나오기 무섭게 배에서 또 신호가 올 건 뭔데...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먼저 내려가 계시라고, 금방 따라가겠다고 하고 또 화장실로 왔다.
오늘 아침에만 집에서부터 벌써 이게 몇 번째인가 싶다. 몸이 고장난 것만 같은 기분에 마음까지 너덜너덜해졌다.
울고 싶다, 진짜.. 월차나 병가도 급한 일이 없어야 내는 거지 이거 원, 이렇게 중요한 날에 아파버리니까 정말이지 답이 없다.
하아아, 깊은 한숨을 쉬곤 얼굴에 잔뜩 맺힌 땀을 꾹꾹 찍어 닦아냈다.
-
"그러면 이번주 내로 액션플랜 작성해서 이메일로 드리겠습니다.
본사 회의는 언제가 편하세요?"
"아무래도 제주 왕복 일정이니까 옹과장님께 저희가 맞춰야죠.
편한 날짜 알려주시면 저희가 비행편 잡겠습니다."
"네, 그러면 이메일 드릴 때 같이 말씀 드리겠습니다.
오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살펴가세요-"
지난주에 있었던 2차 회의에 이어, 오늘 예정되어 있던 3차 회의도 무사히 끝났다. 무사히 끝났다고 볼 수 있는 건 나 말고 옹과장님이 아주 하드캐리를 했기 때문이다.
원래 내가 클라이언트 회의 때 말을 많이 한다거나 역할을 많이 한 건 아니었지만, 오늘은 정말 그럴 만한 시도조차 할 수가 없어 요지부동으로 자리만 지켰다.
가만히 있어도 아파서 땀이 주룩주룩 흐르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리 없... 다만 다음주 제주도 출장이라고 하니 안 그래도 아파서 아득한 머리가 더 아득해지는 기분.
당일이겠지? 당일이어야만 해... 이 덥고 습한 날에 제주도 며칠 다녀오고 하면 정말 몸이 축날 것 같단 말이다..
회사는 내 건강 팔아 돈 버는 거라는 말이 이렇게 뼈저리게 공감될 줄이야. 오늘 만큼 가슴에 사무치는 날이 없었던 것 같다.
"○사원, 얼굴 진짜 안 좋은데.
안 되겠다. 집에 데려다 줄게요. 반차 내줄 테니까 집에 들어가서 쉬어요."
"과장님..."
"일단 급한 건 다 끝났잖아. 액션플랜은 이번주 내로만 하면 되니까 괜찮아요.
○사원 좀 쉬어야겠어. 너무 무리했나봐."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과장님은 회사로 가는 방향이 아니라 우리집 가는 방향으로 고속도로를 타셨다.
나는 더 이상 말을 할 힘도 없어 그냥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런데 왠지 눈을 감으면 그대로 탈진해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겨우겨우 눈을 다시 떴다.
과장님은 운전을 하는 틈마다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얼굴을 확인하셨다.
"병원으로 가야 하나?"
"아닙니다, 과장님.. 그냥 쉬면 될 것 같아요. 집에서요."
"걱정되네... 이렇게 아픈 건 처음 봐서.."
"........"
어쩐지 또 한 번 뱃속이 요동치는 느낌에 큽, 하면서 배를 끌어안고 미간을 확 좁혔다. 아아... 돌아가시겠다. 이럴 때마다 내가 왜 여자로 태어났는지 한스럽기 그지없다.
과장님은 조금만 참아요. 속도 좀 더 낼게. 라고 하시면서 평소보다 힘있게 액셀을 밟으셨다. 속도가 무섭게 느껴지지 않으리만치 극심한 고통이었다.
"다 왔다."
우리 집 앞에 차를 세우신 과장님이 다시금 내 얼굴을 확인했다. 차 안에서 에어컨을 틀었는데도 또 흐른 식은땀 때문에 얼굴 언저리에는 머리카락이 붙어 있을 거다.
과장님은 손을 들어 머리를 넘겨주셨다. 나는 보나마나 창백해졌을 얼굴을 하고 과장님께 꾸벅 인사를 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죄송해요. 라며 고개를 숙였더니 과장님은 아프지 말라고, 요즘 너무 힘들게 일 시켜서 본인이 아프게 만든 것 같다고 미안해 하셨다.
뭔가 차 안에 오래 있는 게 더 민폐인 것 같기도 하고, 과장님도 빨리 회사로 돌아가셔야 할 테니 내가 얼른 내려야겠다고 생각하며 조수석 문을 열었다.
"....누나?!"
그런데 조수석에서 내리자마자 저-기 박지훈이 보이는 거다. 편의점에 다녀오는 건지 왼손에는 검은색 봉다리가 달랑달랑 들려있고, 오른손에는 요즘 핫한 '거꾸로 수박바'를 든 채다.
박지훈은 너무 자연스럽게 나를 향해 걸어왔고, 내가 내림과 동시에 운전석의 문을 연 옹과장님도 밖으로 내려 박지훈을 바라봤다.
옹과장님과 나를 스캔하는 박지훈의 미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아... 왠지 뭔가 피곤해질 느낌인데. 이제는 머리까지 아픈 것 같아서 손을 내어 머리를 짚었다.
"누나? 왜 지금 와?"
"아... 동생이에요. 사촌동생이요."
박지훈은 거꾸로 수박바를 쪽쪽 빨며 내게 왜 지금 오냐고 물었고, 나는 옹과장님께 박지훈을 소개시키는 투로 사촌동생이라 이야기했다.
옹과장님은 살짝 고개를 숙이며 안녕하세요, ○사원과 같이 일하는 옹성우 과장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가벼운 미소도 함께.
박지훈은 한 3초간 옹과장님을 보며 멍을 때리더니 이내 고개를 탈탈 흔들며 아, 안녕하세요. 하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미국 사는 사촌동생인데 방학 때마다 놀러온다며 별로 할 필요도 없는 구차한 설명을 이어갔고, 옹과장님은 아픈 나를 걱정하는 표정으로 끄덕거리며 들어주셨다.
"누나가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아서요.
오늘 쉬라고 제가 퇴근시켰는데, 지훈씨가 간호 좀 잘 해주세요."
간호요...? 쟤가요....? 아이고, 퍽이나... 떨떠름한 표정으로 박지훈을 보는데, 세상 착하고 천사같은 표정으로 눈을 또랑또랑 뜨며 고개를 끄덕인다. 가식적인 놈..
네! 저만 믿으세요! 하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왜 저래... 못마땅한 표정을 차마 가릴 생각은 못 하고 서 있으니, 과장님은 내가 더워서 그런 줄 알고 얼른 가보신단다.
"날씨도 더운데 오래 서 있으면 안 돼요.
얼른 들어가서 쉬어요. ○사원. 지훈씨도 다음에 또 봐요."
박지훈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녀석의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며 오늘도 꿀밤을 한 대 적립해놓았다.
운전석에 자리잡은 과장님은 안녕- 하는 입모양과 함께 손을 흔들며 집 앞으로부터 멀어졌고, 나는 박지훈을 데리고 집으로 향했다.
남은 거꾸로 수박바를 쪽쪽 빨아 끝장낸 박지훈이 검은 봉다리에 남은 막대기를 쑥 집어넣었다. 그래도 바닥엔 안 버리네. 다 컸네.
"누나."
"왜."
"양다리냐?"
"미친......"
같지도 않은 말에 되려 흥분해서 미친, 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박지훈은 고개를 갸웃, 하더니 좀 고민하는 듯하다가 입을 열었다.
"겁나 잘생기셨네."
"...뭐.. 그치."
"근데 왜 저런 사람이 누나를 좋아하냐."
"....어떻게 알았어. 너?"
"눈이 하트 모양이던데 뭐."
꿀꺽, 마른 침이 삼켜졌다. 역시 눈치 하나는 신기할 정도로 빠른 놈이다. 함부로 속이려 들면 나만 된통 당하겠다 싶어 굳이 숨기려 하지는 않았다.
진짜 잘생겼더라. 어떻게 사람 얼굴이 저렇게 작은데 그 안에 눈, 코, 입이 다 있냐. 부터 시작해서,
누나는 일할 맛 나겠다. 직속 상사야? 대단하다. 대박일세. 보기 드문 비주얼이야... 와 같은 감탄사가 줄줄이 이어졌다.
본인 기준에 엄청 잘생겨 보이고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박지훈은 제 마음에 드는 것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찬사를 내뱉는 습관이 있다.
"여튼 누나 아파서 반차 낸 거니까, 집에서 조용히 해야 돼."
"피씨방 갈 건데."
"좋네."
"....정 없긴."
녀석이 제 손에 들린 검은 봉다리에서 뭐가를 꺼낸다. 지렁이 젤리다. 내가 환장하는 것.
오래간만에 보는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져 두 손으로 받아내니 쯧쯔, 먹을 거면 그저 좋아서.. 하고 중얼댄다.
대충 무시하고, 뜯자마자 입에 바로 하나를 넣었다. 아아... 아픈 게 나아지는 기분이야. 행복하다.
"아침에 누나 아픈 것 같아서 왠지 중간에 집 올 것 같았어."
"스애끼.... 고맙다."
"그래도 양다리는 안 된다. 누나."
"아 무슨. 자꾸 헛소리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와 집으로 들어왔다. 박지훈은 식탁에 검은 봉다리를 내려놓더니 저녁쯤 오겠다고 이야기를 하곤 금방 나갔다.
나는 대충 손을 휘저으며 다녀오라고 이야기했고, 이내 화장실로 들어가 최대한 빨리 화장을 씻어냈다.
그 잠깐 출근해서 회의 좀 한 게 전부인데 몸이 이렇게 천근만근일 줄이야. 한시라도 빨리 자야겠다고 생각하며 행동을 서둘렀다.
-
암막커튼을 친 데다가 에어컨을 틀어놓았으니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도통 감이 안 왔다. 눈을 뜬 건 방 밖에서 무언가 낯선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뭐지... 지훈인가. 하면서 나왔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부엌에서 요리를 하고 있다.
공교롭게도 박지훈은 아니었고,
"일어났어? 아직 다 안 됐는데."
하얀 와이셔츠 위에 내가 매일 쓰는 분홍색 앞치마를 두른 강과장이 있었다.
나는 낮잠 자고 일어난 직후 느끼는 그 특유의 두통을 가지고 과장님에게 걸어가 그의 품에 안겼다. 그는 자연스럽게 나를 받아주었다. 아팠지.. 하는 따뜻한 목소리와 함께.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하면서 잔뜩 잠이 묻은 목소리로 내가 칭얼댔고, 그는 말없이 나를 품에 안아 토닥토닥 등을 두드려주었다.
"지훈이는?"
"피씨방이요. 저녁 때 온댔는데."
"3인분 했는데. 같이 먹으려고."
"전화해볼까요?"
"아냐. 오겠지."
과장님은 나를 안은 팔을 풀어 뒤로 돌아 하고 있던 요리를 마저 했다.
냄비 뚜껑을 열어 국자로 휘휘 저어도 보고, 뭔가가 구워지고 있는 프라이팬에 대고 뒤집개로 볶아도 보고 하면서.
나는 잠이 통 깨지를 않아 과장님의 등을 안아 잠투정을 했다. 아픈 동안 이 너른 등이 얼마나 그리웠는지... 보고 싶어서 혼났다.
"반차 낸 거 어떻게 알았어요?"
"부서 문서에 올라온 거 봤어. 휴가 신청서가 네 이름으로 되어있길래."
"아..."
"클라이언트 회의 끝나고 옹성우가 데려다 준 거야?"
"......"
그의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목소리가 그다지 나쁘지는 않은 걸 봐서 화가 난 건 아닌 것 같아 다행이었다.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그래도 편하게 왔겠네. 하며 마른 소리를 냈다. 무언가 어색해진 기분에 그의 등에 볼을 부볐다.
그는 간지럽다. 하면서 잘게 몸을 떨었고, 나는 입을 쭉 내밀어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그와 동시에 삐빅삐빅- 하며 현관문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후다닥 아무 짓도 안 했다는듯 떨어졌고, 박지훈이 들어올 현관문으로 마중을 나갔다.
"왔어?"
"어... 뭔 냄새야 이거? 밥 해?"
"아, 과장, 아니, 니엘, 다니엘.. 오빠.. 왔어."
습관은 절대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는다. 진즉에 고쳤어야 했는데... 한 번 입에 붙은 말이라 쉬이 안 떨어진다.
박지훈은 어, 형님! 하면서 부엌으로 가 살갑게 인사를 했고, 과장님은 특유의 사람 좋은 웃음으로 박지훈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야아... 형님 요리 잘하시나봐요."
"잘하는 건 아니고.. 그냥. 하하."
"맛있는 냄새 나요. 와-"
"아직 좀 덜 됐어. 누나랑 거실에 가 있어."
두 사람 이번이 두 번째로 보는 거 맞지...? 최소한 3년은 알고 지낸 것 같은 노련함에 혀가 내둘러졌다.
박지훈이 저 비빌 언덕 잘 아는 기회주의자인 건 알았는데 내게는 첫인상이 차갑기 그지없던 과장님이 저렇게 서글서글하니 신기할 따름이다.
과장님은 거의 다 되었을 때 부르겠다며 우리에게 거실로 가 있으라고 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으나, 박지훈이 내 손을 끌고 내 방으로 향했다. 제 입에는 검지손가락을 올려놓고 쉬, 하는 소리를 내면서.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는 나는 박지훈을 따라 방으로 들어왔다. 방문을 닫고 내게 온 박지훈은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우편함에 있었어."
"뭔데?"
약봉투였다. 진통제부터 소염제, 감기몸살약까지 한 봉투 안에 다 담겼다.
그리고 또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꾸깃꾸깃 접어놓은 노란색 포스트잇이다. 내게 건네주어 얼핏 보니 옹과장님의 글씨다.
내용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다. 차를 돌려 약국에 들렀다 우편함에 약봉투를 넣고 갔을, 그 뒷모습이 상상이 되어 눈이 질끈 감겼다.
"해명해, 누나.
양다리 아니면 뭐냐 이거."
박지훈의 표정이 단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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