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태기 온 남자친구와 이사 온 옆집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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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무척 내리는 날이었다. 제 몸집보다 훨씬 큰 우산을 써도 비에 흠뻑 젖을 정도로 세차게 내리는 비에, 다음에 비가 오면 우비를 입으리라. 다짐을 하며 집으로 향하는 길이었다. 집에 거의 다 왔을 즈음, 가로등 아래 비를 맞아 쫄딱 젖은 생쥐 같은 꼴을 하고 있는 다니엘이 보였다. 처음에는 빗줄기 때문에 긴가민가했었는데 점점 가까워질수록 핑크빛 머리 색이 선명해져갔다.
" 다니엘? "
항상 올라가있던 눈꼬리는 아래로 축 처져있었고, 얼마나 비를 맞고 있던 건지 연붉은 색이었던 입술은 투명하다 못해 새파랬다. 한 걸음에 다가가서 우산을 씌우자 그제야 고개를 들어 내게 시선을 옮기는 그였다. 대체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 나 기다렸어? 안에 들어가 있지. 왜 비를 맞고 있어, 응? "
초점 없는 눈으로 나를 응시하던 다니엘은 말없이 내 어깨에 제 고개를 떨구었다. 덕분에 다니엘이 내 품에 안긴 자세가 되어버렸고, 우산을 들고 있지 않은 손은 방황하다가 다니엘의 넓은 등짝에 안착했다. 토닥토닥, 왜 토닥이고 있는 건지도 모른 채 한참을 그렇게 움직였다.
" …김여주. "
드디어 내 어깨에서 벗어난 다니엘은, 이번엔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제 눈을 맞추었다. 그리곤 말했다.
" 사귀자, 우리. "
그게 시작이었다. 한 여름 쏟아지는 소나기처럼 내게 다가온 너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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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몸을 감싸고 있는 후드집업이 불편해서 지퍼를 쭉, 내렸다. 한결 시원해지는 기분에 눈을 비비며 기지개를 펴는데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맞다. 나 약국 가는 길이었는데.
" …미쳤네. "
자동차 안에 있는 시계가 잘못된 게 아니라면, 벌써 오후 2시가 넘었다는 건데. 믿기지 않아 주머니 어딘가에서 휴대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해보았지만 역시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그러니까, 옆집 남자가 나를 약국까지 태워다 주기로 했고, 나는 차에 탔고. 그리고 잠이 들었다…, 후. 민폐 제대로다. 김여주. 오래 걸려봤자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인데 그새를 못 참고 잠에 든거다.
" ..그냥 깨우지. "
어차피 약도 먹어야 하고, 수트까지 쫙 빼입은 걸 보니 멀리 나가는 것 같아 보였는데 굳이 다시 아파트로 돌아와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다니. 게다가 옆자리에 놓인 각종 약들을 보며, 이걸 배려심이 깊다고 해야 할지 바보 같다고 해야 할지 잘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집에 얼른 가기로 했다.
뭔진 모르겠지만 옆집이 좋은 사람인 건 확실했다. 어제 처음 본 옆집한테 이 정도로 친절을 베풀어준다는 게 쉽지 않은 일인데 말이다.
약을 먹고 침대에 누워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는데 카톡 알림음이 울렸다. 오늘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보내 놓았던 내 카톡 메시지에 몇 시간이 지난 지금, 다니엘에게서 답장이 온 거였다.
- 이따 저녁에 시간 괜찮아?
오랜만의 약속이었다. 그래도 방학하기 전엔 매일 학교에서 마주쳤었는데 방학을 하고 나니까 내가 먼저 만나자고 하지 않는 한, 먼저 약속을 잡은 적이 없던 다니엘이었다.
그런 그가 먼저 데이트 신청을 해왔다.
- 시간 돼
왜?
- 영화 볼래?
어제까지만 해도 술에 취해 제 이름을 부르며 머릿속을 복잡하게 만들었던 그였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 영화를 보자며 카톡을 보내왔다. 살짝 떨리는 손으로 키패드를 꾹꾹 눌렀다. 이 떨림이 설렘인지, 불안함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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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대박. "
별로 기대를 하고 있지 않았던 영화였는데, 초반부가 지나고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에게 박력 넘치는 키스를 할 때, 이미 나는 영화 속 여주인공이 된지 오래였다. 극장을 나오는 내내 입가에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고, 이 부분에서는 어땠고 저 부분에서는 어땠다.하며 조잘거리는 날 내려다보며 그저 아빠 같은 웃음을 띄우는 다니엘이었다.
꽤 늦은 시간에 본 영화라, 밥을 먹기엔 애매해서 결국 각자 집으로 가는 걸 선택하고 우리는 발걸음을 옮겼다. 연애 초창기에는 수업 끝나고 집까지 데려다주는 게 일상이었는데. 눈만 마주쳐도 행복했던 우리가 지금은 많이 달라진 것 같아 쓴웃음이 지어졌다.
사실 다니엘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어제 하루 종일 연락이 없던 건 뭐고, 술도 별로 안 좋아하면서 그렇게 진창 마신 이유는 뭔지.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연결되어 있는 너와 나 사이가 두려운 것도 있었고 ,솔직히 어두운 얘기는 하고 싶지도, 듣고 싶지도 않았기에.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자, 누구랄 것 없이 잘 가라고 인사를 건넸고 다니엘은 나와 반대 방향으로 걸어갔다.
" 하아, 후, 김여주. "
5분 정도 지났을까, 잘 가라며 인사까지 하고 분명 제 집 쪽으로 걸어가던 그가 바람에 머리가 마구 헝클어진 채로, 숨이 차 헉헉거리며 내 앞에 섰다.
" 어? 뭐 놓고 갔어? "
" 하아, 아니. 아, 다행이다 아직 버스 안와서. "
" 뭐야, 그럼 왜 왔어? "
" 데려다 줄게, 어둡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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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같이 집으로 가는 길이 어색했다. 살짝 살짝 스치는 손등때문에 더 어색해지는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결국 팔짱을 껴버렸다. 연락도 뜸하고 가끔 만나도 휴대폰만 들여다보기 일쑤였던 그가, 갑자기 약속을 잡고 집까지 데려다준다. 갑자기 사람이 안 하던 짓을 하면 무슨 일 난다던데. 혹시 그 무슨 일이 우리가 헤어지는 결말일까봐 괜히 눈물이 찔끔 나올 것 같았다. 그렇게 우리는 한마디 말도 없이 버스에 올랐고, 내렸고, 집까지 걸었다.
" 벌써 다 왔네.. "
" 그러게. "
" 있잖아, 다니엘. "
나는 비참해지는 게 싫었다. 이렇게 연락만 기다리는 내 신세도 싫었고, 그냥 전부 다 싫었다. 집에 오는 길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해봤지만 이 결론보다 더 나은 결론은 없을 것 같아, 더 비참해지기 전에 먼저 이별을 고하기로 했다.
" 우리-, "
" 우리 여기서 또 만나네요? "
" .......? "
" 누구 덕분에 걸어 오느라 고생 좀 했는데. 하핫. "
(작가) |
저 제목에 오타났었는데 왜 아무도 말 안해주셨어요...........(롬곡 그리고 암호닉ㅠㅠㅠㅠㅠ..고마워요진짜..ㅠㅠㅠㅠㅠㅠㅠ제 비루한 글에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엉엉 암호닉 받으니깐여 이 글에 남겨주시면 됩니다! 저 댓글 다 읽어요ㅠㅠ고마워요ㅠㅠㅠㅠㅠㅠ 그리고 이번 화 포인트 있다고 막 안 읽고 그러는 거 아니죠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