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쪽의 히카리
w.로스트
“...히카리.”
너의 말에 따르면 나는 너를 히카리, 하고 불렀다고 했다. 희미한 기억 속, 나는 처음 눈을 떴던 그 날의 상황을 천천히 떠올려 본다. 멀리서 나지막이 들려오는 계곡물 소리. 바람에 스쳐 흔들리는 나무 그림자. 덥수룩한 나뭇잎들 사이로 듬성듬성 고개를 내미는 말간 달빛. 그리고, 그 모든 것들 사이에서도 단연 돋보인,
하얀 털과 냉철한 눈을 가진 백호 한 마리.
그 그림 같은 모든 것들이 내 기억의 첫 시작이었다. 그것 외에 다른 기억들은 형태를 잃고 어딘가 먼 곳에 구겨져 있을 뿐이다. 내 생명을 잉태시킨 부모의 얼굴, 여지껏 내가 보내온 세월의 기억. 또한,
“어이, 계집.”
“빨리 좀 오지.”
남들에겐 그저 어린 계집 정도로만 보이는 내 나이와 그 흔한 이름까지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히카리. 좀만 천천히,”
“야.”
내게서 스무 걸음 정도 멀찍이 떨어져 나를 재촉하던 네가 채 한 걸음을 다시 떼기도 전에 불쑥 고개를 돌린다. 내가 또 한 번 잘못 입에 올린 너의 이름 때문이다.
“너, 한 번만 더 내 이름 그딴 식으로 부르면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어.”
순식간에 내 앞으로 다가온 네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이며 나를 내려다본다. 청명한 공기 소리와 함께 불어온 바람이 조금 전 가시넝쿨에 찔려 생채기가 돋아난 내 발목을 건드린다. 그럼에도 여전히 피부로 느껴지는 쓰라림 따윈 없다. 나는 너를 향해 감히 겁 없는 투정을 부린다.
“거 봐. 수호신이라더니 순 거짓말이잖아.”
“......”
“매번 이렇게 날 잡아먹을 궁리나 하고 있으면서.”
숲을 벗어나면 드러나는 거대한 마을에선 매 보름달이 뜨는 날 밤, 서쪽의 사방신 백호를 숭배하는 의례가 열린다. 내가 너를 처음 만났던 그 날도, 하늘엔 눈이 부실 정도로 밝은 보름달이 덩그러니 걸려있었던 것으로 나는 기억한다. 내 단조로운 어투에 너는 보란 듯이 인상을 구긴다. 구름이 달빛을 가려 진한 어둠이 깔리자 너의 푸르스름한 눈동자가 비로소 제빛을 발한다.
“그리고 그렇게 겁줘봤자 소용없어.”
“......”
“그 이름이 내겐 유일한 기억이라는 거, 정국이 너도 잘 알잖아.”
그러니까 이번엔 네가 양보 좀 해.
꽤나 단호하게, 나는 그런 너의 두 눈을 마주하며 말을 잇는다. 그 뒤로 이어진 짧은 정적도 잠시, 이내 솨아아, 하는 차가운 소리와 함께 늙은 나뭇잎들이 비처럼 우리의 주변으로 우수수 쏟아져 내린다.
“...내가 무슨 굶주린 호랑이 새끼도 아니고.”
“네까짓 것 잡아먹어 봤자 맛도 없어.”
결국 이번에도 백기를 든 건 네 쪽이다. 달을 가렸던 구름이 바람에 실려 빠르게 옆으로 쓸려내려 가고, 그 말을 끝으로 내 앞에 무릎을 굽혀 앉은 너는 돌연 내 두 허벅지를 한 손으로 끌어안으며 불쑥 제 어깨에 나를 들쳐 올린다.
“꽉 붙잡아.”
내 발목의 상처를 본 것임이 틀림없다.
“왜 오늘은 백호로 변해서 가지 않아?”
그게 더 편하잖아. 나는 그런 너를 향해 고마움을 전하는 대신 괜스레 영양가 없는 질문을 내던진다. 너의 단단한 어깨를 꾹, 움켜쥔 채로. 발을 빨리하는 네 탓에 속절없이 뒤로 밀려 나가는 주변 풍경들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그때보다 송곳니가 더 자랐으니까.”
그날 백호의 모습을 한 너는 숲 한편에 쓰러져 있던 내게로 조용히 다가와 투박하지만 다정하게, 나를 제 입에 물었다. 때문에 나는 간신히 붙잡고 있던 그 막연한 기억들 속에서도, 내 피부로 닿아오던 너의 그 숨결만큼은 유독 선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요즘 들어 자꾸만 이 근처까지 마음대로 넘어오는 마을 사람들이 있어. 그래서 더 조심해야 하고.”
“...마을 사람들?”
나는 너의 대답에 살풋 고개를 갸웃거리며 조심스레 네 옆얼굴을 살핀다. 적도 아닌 마을 사람들을, 대체 왜? 그리고 마침내 이어진 너의 무심한 목소리에서 나는,
“막연히 상상 속에서만 보았던 수호신이, 그것도 백호가. 실제로 생시에 존재한다는 걸 알게 되면 어떨 거 같아?”
“그것도 입엔 너 같은 어린 계집애 하나를 물고 선.”
여지껏 네가 느껴왔을 약간의 외로움을 느낀다. 아마도 그 지독한 숭배심은 부지불식간에 지옥 같은 적개심이 되어 너를 궁지로 몰아넣고 말겠지.
“...히카리.”
어쩌면 히카리가 인간의 모습으로라도 숲을 나서지 않는 이유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서 일지도 모른다. 애초에 신이라 함은 막대한 부와 능력을 갖춘, 마음만 먹으면 이 세상을 제 손에 쥐고 제멋대로 뒤흔들 막대한 존재로 보이기 십상이나 그건 그저 인간들의 선입견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하다.
“난 네가 조금도 두렵지 않아.”
내가 본 히카리는 모든 것이 평범했다. 심판하는 자는 히카리와 같은 신이 아니라 하늘이며, 불행과 지옥, 불안 앞에서만 신을 찾는 자들에게 있어 오히려 히카리는 그들의 욕망을 하늘에 전하는 한낱의 꼭두각시일 뿐이다. 나는 천천히 네 어깨를 쥔 손에 힘을 줘 상체를 일으킨다. 그런 내 행동에 너는 서서히 걸음을 늦추고, 고개를 들어 올려 나와 시선을 맞춘다.
“오히려,”
“......”
“자꾸만 네게서 익숙한 기분이 들어.”
마침내 조금씩 느려지던 네 두 발이 온전히 제자리에 멈춘다. 나는 지긋이 마주한 네 얼굴을 한 손으로 천천히 쓸어내린다. 푸른 끼를 띤 네 두 눈, 금방이라도 내 허벅지를 파고들 것만 같은 네 두 손톱, 그리고,
“...이 날카로운 송곳니마저도.”
나는 고개를 숙여 어렴풋이 드러난 네 송곳니에 입을 맞춘다.
그리고 너 또한 기꺼이, 눈을 감는다.
-
“살아있었네, 너?”
너는 그를 내게 반갑지 않은 손님, 이라 소개했다. 한 시도 얼굴에서 장난기 섞인 웃음을 지워내지 않던 그는 방에서 나오던 나를 보며 자연스레 아는 채를 해왔고, 나는 그를 향한 인사보다도 제일 먼저 의구심이 드는 눈으로 그의 앞에 앉아있던 너만을 멀거니 바라볼 뿐이었다.
“널 처음 발견한 애야.”
“......”
“그날 숲에서.”
하지만 너의 입에서 나온 건 꽤나 의외의 대답이었다. 숲에 쓰려져 있던 나를 처음 발견한 사람이 네가 아니라 바로 저 능글맞은 독수리였다니. 나는 개구진 표정으로 나를 향해 브이를 그려 보이는 그를 보며 작게 인상을 구겨보인다. 대체 뭐가 그리 좋다고 저렇게 웃는지. 하여튼 진짜 맘에 안 드는 독수리...
...잠깐. 독수리?
“어이.”
“......”
“내가 맘에 안 드는 건 알겠는데, 굳이 꼭 그렇게 표정으로 티를 낼 것까진,”
“저기요.”
혹시, 그쪽도 동물로 변해요?
정신이 아득히 멀어진다. 또 한 번 순간의 무의식 속에서 움직인 무언가가, 흐릿한 내 기억을 쥐고 이리저리 뒤흔들기 시작한다.
“...뭐야.”
내 갑작스런 물음에 그의 입가에 띄워져 있던 미소가 단번에 자취를 감춘다. 만약 저 사람이 진짜 독수리라면,
“나 독수리인 거, 티 나?”
난 대체 그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단 말인가.
*
자, 이제 이걸 아련한 판타지라 쓰고 개막장이라 읽읍시다.
그나저나 흰 배경 어색하네요.
中편은 월요일 밤 10시에 올라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