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코/재코]빼앗긴
W.지호야약먹자
당황한 건지 반응없이 딱딱하게 서있는 지호를 다시 몸에서 떼어냈다. 형이야? 진짜? 아직도 못믿겠다는 듯 내 옷깃을 잡아온다. 내가 많이 변했다면 변했다고 할 수 있는 6년간 지호는 변한 게 하나도 없어보인다. 날카로운 눈매에 강해보이는 인상과 달리 꽤나 순수한, 아직도 소년티를 미처 벗어버리지 못한 얼굴엔 6년 전 어린 우지호가 고스란히 남아있었다. 그게 그리웠는데, 이 모습을 그려왔었는데도 세상에 때묻고 달라져버린 나와 다른. 그대로의 우지호의 모습에 조금, 느낌이 이상히다. 억울했다. 난 그대로가 아닌데 넌 왜 그대로야?...아니, 지금은 이런 사사로운 감정에 휩싸여있을 시간이 없다. 나도 모르게 울컥 올라오는 물음들을 애써 눌러 삼키고 어찌할 줄 모르는 지호를 향해 환히 웃어줬다. 내 속이 어떻게 변했던, 지호의 앞에선 난 예전 조선을 옹호하던 안재효다. 증오심따위 털 끝만큼도 보여선 안돼.
"나, 다시 왔어."
내가 웃는 모습을 보고도 망설임에 일렁이던 눈이 이내 웃음을 담아 접혔다. 보고싶었다고, 잘 왔다고, 어떻게 된거냐고 두서없이 물음들을 쏟아내는 지호의 목소리엔 물기가 서려있다. 경계심없이 마냥 안겨오는 지호에 다행이다 싶었다. 사실 나도 내 속을 잘 모르겠다. 혼자 그대로인 우지호때문에 억울한데, 그대로인 우지호라서 날 무조건적으로 믿어주는 우지호가 아직 그대로라서 마음이 놓인다. 그래, 지호야. 앞으로도 나만 믿어. 누구 말도 듣지말고.
"그럼 아예 여기에 있어? 일본엔 안가는 거지?"
문득 생각났는지 꼭 붙어있던 몸을 떼고 묻는다. 뭐가 그렇게 궁금할까, 난 이렇게 참고있는데. 자꾸 뒤틀리는 속을 꾹 눌러 이제 안가. 자유야. 라고 답했다. 그 속에 부모님이 이젠 돌아가셨다. 라는 의미는 찾지 못했는지 다행이다, 라며 얕은 숨을 밷어낸다. 그게 야속하면서도 하얗게 뿜어지는 입김에 떨고있는 우지호가 안쓰러워 빨갛게 언 손을 잡아 끌었다. 그런데 지호는 뭐가 그렇게 걸리는지 급히 손을 잡아뺀다. 의아함에 텅 빈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었더니 경계하는 표정으로 바라본다.
"어디...가는데?"
추우니까 따뜻한 거라도 마시러 가자. 의아함은 미뤄두고 일단 지호의 경계심을 풀어주려 살짝 웃었다. 이상하다. 내가 잡아끈다고 이렇게 경계할 우지호가 아닌데. 기분이 나쁘다. 우지호가 변하지 않아서 오는 불쾌감과는 달리, 지호가 나랑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경계심을 푸는 듯 하다가 이번엔 난처한 얼굴로 선약이 있다고 자리를 피한다. 우물쭈물 말하는 우지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럼, 너희 집이라도 알려줘."
집을 알려주는 것도 난처한 건지 손만 까딱까딱, 푹 숙인 고개가 들려질 생각을 않는다. 집...알려주기 싫어? 대답을 재촉하자 그제야 고개를 들고는 손을 내젖는다.
"그게 아니라...내가 혼자 사는 게 아니라서! 얹혀살거든. 그래서..."
누굴까, 우지호랑 사는 사람이. 분명 우지호도 나와 같이 부모님이 안계신데. 묻고싶은데 또 묻질 못했다. 아직 아니다. 겨우 첫번째 만난 건데. 조급해 하지말자. 그래도 나빠지는 기분에 웃음이 나오지않아 자꾸 눈을 내리까는 지호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럼 내일 아침 신문사 앞에서 다시 만나자. 그렇다고 순사들이 들락거리는 내 집을 알리기엔 위험이 많아 결국 신문사 앞을 택했다. 그제야 웃으며 대답하는 우지호에 마음이 놓인다. 만나는 건 확실하고 이제 어떻게 글을 쓰게하지...만남을 약속하고 서둘러 걸음을 재촉하는 지호의 모습을 바라봤다.
오랜만에 만나 반가움에 젖어있어서 잘 모르겠지만 뭔가 달랐다. 처음보고 웃어주는 웃음도 말투 하나하나, 손짓 하나하나. 어릴 적 그 때와는 많이 달라져있어 자연스럽게 대하려는 나를 어색하게 만든다. 점점 재효와 거리가 어느정도 멀어짐이 느껴지기까지 혹시 아까처럼 갑자기 손을 잡아끌까 싶어 연신 입술을 깨물며 괴롭혔다. 내가 과잉반응하는 거겠지. 요즘 혼자 지내다보니 신경이 너무 곤두서있는 거다. 형이 이상한 게 아냐. 자기암시를 하면서도 아까 잡혔던 손목 부근을 문질거렸다. 찬바람에 빨개진 입술이 더 빨개져 혓가에 피맛이 감돌 때 쯤 민호가 보였다.
"형!"
언제와도 송민호의 집은 편하다. 내가 묶고있는 곳과는 달리 작았고, 따뜻하다. 항상 올 때면 민호가 있어 혼자가 아니기도 하고. 민호는 뭘 그렇게 할 말이 많은지 옆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한다. 요즘은 그냥 잠잠해요. 오늘 경부보가 왔는데 쇼...아무튼 그 사람이였어요. 그냥 이름만 띡 말해줘서 외우지는 못하고...내일 정확히 알아올게요. 그리고 저번에 말해준 놈 친일파인지 뭔지 만주에서 밀고한 게 맞아떨어져서 독립운동 하나를 미리 집압했다던 그 인간이요. 그 사람들을 잡지는 못해도 큰 일했다고 경성으로 와서 상도 주고 그럴려나봐요. 일단 자기들이 친절하다는 것도 보여줘야하니까, 보여주기 식으로 만든 것 같은데...이 자식 이름 기억나요? 표지훈이라고 했잖아요. 거기서 이중첩자였다는데...여기서도 그럴 작정으로 데려왔나봐요. 아마 내일이나 모레정도에 도착한다던데요. 표지훈. 익숙한 이름에 벽에 등을 기대고 앉아 낮은 민호의 목소리를 듣다가 슬금슬금 몰려오던 잠이 확 달아났다.
"누구라고?"
어...표지훈이요? 민호의 팔을 잡고 다그치자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왜 그러는데요? 아는 사람이에요? 어...확실한 건 모르겠는데, 곧 알게될 것 같아. 정말 이중첩자야? 뭐, 일본 경찰에서 그렇게 믿는데 맞겠죠. 정말 표지훈이 이중첩자라면 여기서 이럴 때가 아니다. 박경부터 성빈이 형까지 전부 얼굴이 노출되고 내 이름 정도야 알테고...보민회의 존재에 앞으로의 계회까지 빠져나갈게 틀림없다. 만약 내일이나 모레 도착하는 형들까지 밀고했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건 안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표지훈의 입을 막는 게 우선이다.
"민호야. 우리 새로 온다는 사람이 있어. 근데 그 사람이 표지훈이래. 하...일단 자세한 건 다 알고나서 말할게. 일단 난 박경을 만나야겠어."
성빈이 형이 이렇게 일을 허술하게 할 리가 없는데...뭐가 잘못된건지, 자꾸 꼬이는 생각들에 머리를 헝크렸다.벗어둔 윗옷을 챙겨입으며 민호의 집에서 나왔다. 나올 때까지 벙쪄서 제대로 배웅도 못하는 민호의 얼굴을 보면서도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단원들의 얼굴에 걱정이 되어 걸음을 빨리했다. 발을 더디게 만들던 찬바람따위 다 잊어버린 채 마구 달려 숨이 턱끝까지 찼을 때야 겨우 집에 도착했다. 자꾸 떨리는 손으로 애써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땐 여유롭게 안경을 끼고 책을 읽는 김유권과 쇼파에 몸을 파묻고 잠든 박경이 날 반겼다.
"어, 우지호."
걱정했던 일과는 반대로 너무 평온한 모습에 맥이 탁 풀려 주저앉았다. 부족한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아직은, 아무 일도 없어.
"김유권, 넌 표지훈에 대해 아는 거 있냐."
혹여 우리 쪽에서 이중첩자를 하는 거겠지, 하는 생각에 물었는데 아니. 라고 딱 자른다. 입술을 물었다. 너무 괴롭혔는지 바로 툭 하고 피맛이 터져나온다. 성빈이 형은 정말 그 놈이랑 같이 와? 제대로 아는 것도 없잖아. 뭘 믿고 데리고 온다는 건데. 걱정되서 이렇게 달려온 거냐? 무슨 얘길 들었길래? 적개심을 강하게 드러내며 말하자 유권은 그제야 관심이 생긴건지 책을 향하던 눈을 내 쪽으로 향한다. 민호 알지, 송민호. 순사로 들어가있는데 거기서 표지훈한테 상을 준대. 이중첩자로 독립운동을 막았다나봐. 마음에 걸려서...혹시나 그 놈이 이 놈일까. 우리가 다 까발려진 걸까. 불안해서. 근데 너넨 아무렇지도 않아보이네.
"그게 진짜든 가짜든 아직 오고있을 놈을 지금 걱정해서 나오는 거 없다. 오자마자 잡아다가 물어봐야지. 넌 걱정하는 것 좀 없애야해. 경계심을 가지라니까 안가질 때는 가지고, 가질 때는 안가지고. 성빈이 형이 어떤 사람인데...알아서 잘 하셨겠지."
태평하게 대꾸하는 김유권이 부럽다. 난 조급해 죽겠는데. 무슨 일 있을까봐...그래도 정말 지금 할 수 있는게 없으니, 손 놓고 있을 수 밖에 없나. 머릿속에서 볶잡하게 엉켰던 생각들을 그냥 놔버렸다. 일단 실타래를 푸는 건 성빈이 형이 오고나서. 멍하니 유권을 올려보다 다시 눈이 마주쳤다.
"어...잘 지냈냐"
"일찍도 물어본다"
바보같은 대답에 한 쪽 입꼬리를 올리는 김유권은 그대로다. 조금 더 크고 조금 더 자라긴했어도 그대로. 박경도 그대로. 잘은 모르겠지만 나도 그대로. 다들 그대론데 왜 안재효만 그렇게 바뀐 걸까. 다시 둥둥 떠오르기 시작하는 재효의 모습들에 신경이 쓰인다. 그 동안 생각도 안하고 있던 것에 대한 벌인지,오랜만에 밀려드는 골치아픈 생각들에 머리가 띵하다. 그런 내 머리위로 턱-하고 책이 올려졌다. 또 무슨 머리아픈 생각하고 있지. 그럴 바에야 지하 청소나 해라. 잊어먹고 있었지? 정신을 깨는 유권의 목소리에 쳐다봐도 다시 자리로 돌아갈 뿐 책에서 눈을 떼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잊고있었다. 우선 몸을 움직여야겠다는 일어나긴 했는데 지하로 내려가는 방법은 전혀 모르겠다. 유권아. 유권은 왜 부르는 건지 안 들어도 알 것같은 느낌에 책을 덮었다. 우지호가 손이 많은 가는 사람이란 걸 잊고있었다.
우지호-. 나지막하게 불리는 이름과 살짝씩 흔들리는 몸에 눈을 떴다. 깨우는 유권의 뒤로 들어오는 빛에 눈쌀을 찌푸렸다. 눈부셔...어제 청소를 하고는 잠에서 깨어나질 못하는 박경의 옆을 얼쩡이다 그대로 잠들었는지, 맨바닥에서 일어나려니 여기저기 뻐근하지 않은 곳이 없다. 몸이 으슬으슬한 것같기도 하고. 비몽사몽으로 씻는 것까지 마치고 나서야 재효와의 약속이 생각났다. 거의 말라가는 머리를 털던 수건을 아루렇게나 휙 던지고 두툼한 코트를 찾아 입을 새도 없이 자켓 하나만 든 채 집을 나왔다. 붙잡는 박경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안재효를 다시 만났는데, 어떻게 그걸 잊고있어. 아무리 변했다고해도 재효형인데.
한참을 걸었을까, 뭔가 허전한 느낌에 걸음을 멈췄다. 혹시나 있을까 여기저기 뒤적여봐도 아무것도 없다. 총을, 놓고왔다. 추위에 얼어버린 손에 땀이 나는 것 같다. 항상 가지고다니던 물건이 없으니 허전함과 불안함이 밀려왔다. 괜찮겠지. 가만히 멈춰서있는 나를 여기저기서 훑는 느낌에 아무렇지 않은 척 다시 길을 걸었다. 당황함에 잊었던 추위가 다시 느껴지고 코 끝이 빨개지는 게 느껴질만큼 칼바람이 분다. 골목을 돌고 빼꼼히 재효의 머리가 보인다.
"재효형!"
반가움에 부르는 지호의 목소리를 들었는지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는 재효에 지호가 더 당황한 얼굴을 한다. 뭐가 잘못됐는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지호의 입을 막고 몸을 숨긴다. 순사가 있어. 나지막하게 귓가에 속삭이는 말에 그제야 움직임을 멈추는 지호를 내려다보던 재효는 안도했다. 주변에 순사가 있었다. 물론 자신에게 보고를 하려던 순사였지만 지호가 한글을 쓰는 것을 듣기라도 하는 날엔 우지호에게 제가 무슨 일을 하는지 들키는 것 뿐만 아니라 첫째로 우지호가 안전하지는 못할 것이다. 우지호는 다치면 안된다. 내가 경부보라는 게 알려진다한들 그게 지금이여서도 안되고.
간간히 들려오던 일본어들이 더 이상 들리지않자 지호는 힘이 풀린 팔을 풀어내며 재효에게서 떨어졌다. 뒷걸음질치는 지호로 인해 둘의 사이에 거리가 생겼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거리를 내려다보던 재효가 한 걸음 다가갔다. 움직이진 않았지만 움찔하는 지호가 느껴져 쓰게 웃었다. 지호와 언제부터 거리가 생긴거지. 씁쓸하던 재효의 표정이 굳어갔다. 지호야. 아침도 안먹은 것같은데 간단히 뭐 좀 먹을래? 재효는 굳은 얼굴을 감추려 앞서갔다.자신도 모르게 움추렸던 저의 모습에 멍하니 발만 바라보던 지호는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이상해. 재효형, 우리 이렇지 않았는데.
"그래서 신문사에 그 글을 투고하는 게 너였던 거야?"
다시 풀어진 분위기에서 지호의 눈치를 보며 슬쩍 소설에 대한 얘기를 꺼냈다. 지호는 분위기에 휩쓸린건지 요즘 글이 막히기 시작한다부터 솔직히 둘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얘기까지 털어놓기 시작했다. 따로 방을 마련하는 곳으로 오길 잘한 듯 싶다. 탁 트여있는 곳이였으면 일어도 써야하고 입조심도 해야하니 말도 제대로 안하고 눈치만 보고있었을텐데. 적당히 경계심을 풀었다고 생각하고 지호의 말들에 대꾸해주며 글의 방향에 대해 말할 기회를 살피는 재효의 생각과는 달리 지호는 경계심을 전혀 낮추지 않고있었다. 소설의 얘기가 나올 때부터 곤두선 신경에 땀이 찬 손을 바지에 문질렀다. 소설때문에 찾아 온건가. 아니, 재효형이 왜? 어렸을 때 형을 생각하면 일제의 경찰과 손을 잡을 성격은 아니다. 그렇다면 왜? 의문점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길어지는 꼬리잡기에 혼란스런 머리를 감추려 더 말이 많아졌다. 지호가 입을 다시 열다 밖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입을 다물었다.
"안재효님께 전갈이라고...여기 놓고가겠습니다."
전형적인 일본여자의 목소리다. 전갈엔 급한 일이 써있던 듯 재효가 서둘러 짐을 챙겼다. 지호야, 일이 좀 생긴 것 같은데. 이만 나가야겠다. 짐작을 했던 듯 미리 자켓을 걸치던 지호가 먼저 문을 나섰다. 몇번 경험해보진 않았지만 일본식 다다미방은 여전히 적응이 되지않는다. 일 잘보고. 앞으론 연락할 때 어떻게...앞으로도 신문사를 이용해야하나 싶던 지호의 손으로 번호가 적힌 종이가 놓여졌다. 여기로 전화해. 아마 거의 내가 받을거야. 내가 아니면 그냥 끊고. 알았지?...그리고 이거 걸치고 가. 지호의 어깨 위로 덮여진 두툼한 코트가 따뜻하다. 그래, 이런 사람이 무슨...잠깐이라도 의심했던 내가 너무 날카로웠던 거다. 뛰어가는 재효의 뒷모습을 보면서 코트의 깃을 여몄다. 습관적으로 손을 넣은 주머니 속에선 익숙한 느낌의 물건이 잡힌다. 내가 놓고 온 물건과 유사하지만 다른...
재효형을 의심하는 건 여전히 터무니없다고 생각되긴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건, 안재효는 확실히 예전과 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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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어.......울고싶음..... 너무 어려운 소재를 택했나요. 시대가 시대니만큼 잘쓰고있는 건지 의문인... 그래도 열심히 쓰고 있어요!ㅎ 계속 읽어주시는 고마운 독자님들 너무 사랑해요!!ㅠㅠ 울님. 노숙자님. 오댕님. 이불님. 크롬님. 그리고 댓글 달아주신 독자님들 진짜 고맙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