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 죽겠다... ”
어떻게 온 걸까. 분명 어제 최리나한테 따진 건 기억이 나는데 그 이후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미쳤구나 워너밤.
여태 3년 동안 주량을 안 뒤로 넘은 적은 없었는데 사고 제대로 쳤네. 양말도 벗겨져 있고 옷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잠옷이고, 화장은 그대로고.
쓰린 속을 부여잡고 일어서 냉장고까지 기어가듯 걸어가는데 해가 떠있다. 몇 시야 대체... 물을 마시고 정신을 차리려는데 바로 화장실로 뛰어갈 수 밖에 없었다.
몇 번을 비워내고 양치질을 하는데 몰골이 말이 아니다. 아, 술병 날 것 같아.
“ 못생겼다, 못생겼어. ”
씻는 내내 기억을 더듬어보니 분명 데려다준 건 우진이 같은데 오는 길이 기억이 하나도 안 난다. 뭐 실수한 건 없으려나. 술 주정은 딱히 없었는데...
계속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다는 걸 깨닫고 그냥 물어봐야겠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씻고 나와 휴대폰 화면을 키는데 충전을 안 하고 자서 그런지 검은 화면만 나를 반겼다.
여러 가지 안 도와주네 정말. 휴대폰을 꽂아두고 그냥 드러누우니 천장이 핑글핑글 돈다. 아, 어지러워. 죽겠네 진짜. 내가 다시는 그 인간들이랑 술 마시나 봐라.
벽에 걸린 시계를 보니 해만 떠있을 뿐 아직 7시다. 나는 술을 마시면 항상 이 시간쯤 일어나서 변기랑 친구를 먹더라...
[ 누나, 냉장고에 술 깰만한 거 사놨으니까 일어나면 챙겨 먹어요. 깨면 연락해요. 아, 그리고 별일 없었으니까 걱정 마요.
옷도 누나 혼자 갈아입었어요. 넘어지는 소리는 들렸는데 멍 안 들었는지 확인하고. ]
가만히 멍 때리다 옆으로 누우니 낯선 글씨체의 메모가 하나 보인다. 우진이가 적고 간 건가. 하긴 누나라고 하는 건 걔 밖에 없으니... 넘어지기까지 했구나...
어쩐지 무릎에 멍이 하나 있더라... 못 볼 꼴 보여줬다는 생각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왜 술을 그렇게 마셔서, 아니 왜 그 자리에 그 인간들이랑 기싸움을 해서.
끝부분에 뭐라고 더 적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뭘 적으려고 한 거지... 죽죽 그여 져 있어서 알아볼 수가 없네.
“ 다... 니... 다니? ”
다니가 뭐야. 다니... 다니지 말라는 건가. 메모를 계속 읽고 있는데 이름 하나가 떠올랐다. 다니엘. 강의건. 아, 큰일 났다. 분명 카톡 본 건 기억나는데 답장한 기억이 없다.
한 마디로 난 뒈진 거지 이제. 이불을 걷어차며 몸부림치다가 일단 옆집을 가봐야겠다 싶어 바로 일어나는데 아직 술이 덜 깬 건지 휘청거린다.
제발 주인 말 좀 들어줘라 다리야. 중심을 제대로 잡고 난 후 옆집으로 가 조심스럽게 비밀번호를 치고 문을 여는데 뭔가 휑한 느낌이다. 방에서 자고 있나.
문을 조용히 닫고 방문에 귀를 대는데 뭔가 이상하다. 거실도 어수선하고, 방에도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고. 그냥 문을 여니 선호도, 다니엘도 없고 텅 비었다.
뭐야, 이거. 차 키는 있는데 휴대폰과 항상 들고 다니는 가방도 없다. 이 아침에 나간 건가?
얼른 다시 집으로 돌아와 조금 충전된 휴대폰을 키고 기다리니 부재중 전화 와 문자, 카톡들이 연달아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뜨기 시작했다.
[부재중 22통, 문자 11개, 카톡 83개, 음성 메시지 3개]
뭘 이렇게 많이 연락을 했대... 카톡을 제외한 모든 것은 다니엘이 보낸 것이었다. 이건 거의 집착이 아닌가...
문자부터 하나씩 읽기 시작한 나는 지갑을 챙겨 그대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기와 너 12
W. 22개월
“ 아저씨, 대학병원으로 가주세요! 빨리요! ”
문자와 카톡 확인하는데 선호가 아프다. 응급실이다. 이 두 내용을 보자마자 잠옷을 갈아입을 정신도 없이 뛰어 내려와 택시를 탔다. 상상도 하지 못할 내용이었다.
대체 왜, 어디가. 새벽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다행히도 아침이라 가는 길이 막히지는 않았고 나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음성 메시지를 하나씩 듣기 시작했다.
“ 니 어디고. 안 들어오나. 카톡 읽은 것 같드마 답이 없노. 뭔 일 있는 거 아이제. 선호 재우고 내 혼자 집에 있으니까 쪼매 심심하다. 조심해서 놀다 온나. ”
“ 너밤아, 와 전화를 안 받는데. 선호 지금 열 나가꼬 우찌 해야 할 지 모르긋다. 내 좀 도와주라. 내 지금 불안하다 진짜. 이거 듣는 대로, 확인 하는대로 빨리 전화해주라. 알긋나. ”
“ 지금 대학병원 응급실이다. 우진이한테 연락받았다. 우리 없어도 놀래지 마라. ”
음성 메시지를 다 듣고 나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첫 번째는 그냥 심심한 마음에 남긴 것 같고, 두 번째는 불안한 게 목소리에 느껴져 나도 불안해졌고,
마지막은 차분한 것 같지만 화난듯한 목소리였다. 미안하다. 그리고 불안하다. 내가 없어서 선호가 아픈 것 같아 죄책감도 들었다.
다시 전화를 해서 어디인 지 묻고 싶었지만 쉽게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서웠다. 불안해서 그런 건지 다니엘의 화난 목소리를 처음 들어서 그런지 먼저 전화를 할 수가 없었다.
택시에 내리자마자 응급실로 달렸다. 달리면서도 다니엘을 찾는데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 혹시 여기 윤선호 환자 접수됐나요? ”
“ 윤선호 환자분이요? 죄송한데 어떤 관계 신가요? ”
“ 아, 그... ”
보호자라고 말해도 되는 걸까. 과연 내가 선호의 보호자가 맞을까. 살짝 머뭇거리니 간호사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는 눈빛에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나올 수밖에 없었다.
끝도 없는 자괴감이 몰려왔다. 어제 밤부터 난리구나. 세수하고 정신 차려야겠다는 생각에 화장실로 가는데 피곤한 얼굴로 나오는 다니엘이 보였다.
“ ...의건아. ”
“ ...... ”
“ 그... ”
“ 503호다. 아동 병실. 올라가 있어라 먼저. ”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표정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행동이다. 화가 단단히 난 건지 그대로 스쳐 지나가 밖으로 나가는 걸 잡을 수 없었다. 503호... 그럼 선호 혼자 있는 건가?
그러면 안 되는데? 일단 올라가야겠다는 생각에 엘리베이터 쪽으로 가는데 다 고층에 머물러 있는 걸 보고 계단으로 가 뛰기 시작했다.
“ 아, 너밤아. 왔어? ”
“ 성우 오빠... ”
숨을 고르고 문을 조심스럽게 여니 다행히도 성우 오빠가 있었다. 그래서 다니엘이 1층에 있었구나.
그리고 그 옆에는 해열 시트를 붙이고 손등에 링거를 맞고 있어 손 전체를 붕대로 감고 있는 선호가 보였다.
작은 몸으로 숨을 색색거리며 쉬고 있는 모습을 보자니 또다시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성우 오빠 손에 이끌려 선호 앞에 앉게 되었는데 차마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이불 끝자락을 쥐고 숨죽여서 우는데 토닥거리는 성우 오빠의 손길에 더 미안한 마음이 커져 한동안 울고만 있었다.
“ 다니엘이 너 걱정 많이 하더라. ”
“ ...화난 것 같던데요. ”
“ 보고 왔어? ”
“ 1층에서 찾다가 잠깐 마주쳤어요. 근데 그냥 호수만 말해주고 나가더라고요... ”
“ 아, 아마 아기 수첩 때문에 집 갔다 온다고 그런 것 같은데. 금방 올 거야 아마. ”
“ 오빠는 언제 오셨어요... ”
“ 나는 새벽에 다니엘이 전화 왔는데 불안해 보이길래 바로 왔어. ”
“ 죄송해요... 괜히 고생하시고... ”
“ 뭐가 죄송해.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선호 열이 높아서 왔는데 일단 경과를 지켜봐야 해서 입원한 거야. 아까 되게 울었는데 자기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됐어. 한 30분 정도. ”
“ 네... ”
아무래도 직접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성우 오빠에게 선호를 부탁한 뒤 병실 밖에서 기다리는데 얼마 안 있어 다니엘이 걸어온다.
여전히 무표정으로 나를 지나친 채 병실로 들어가려는 다니엘에 당황해 덥석 손목을 잡았다.
“ 얘기 좀 해. ”
“ 뭔 얘기. ”
“ 연락 안 된 건 미안해. ”
“ 알았다. 가서 쉬라. ”
“ 야, 강의건. ”
“ ...... ”
“ 왜 그래. 나도 가서 일이 생겨서 어쩔 수 없이... ”
“ 술을 퍼마시고 박우진한테 업혀왔나. ”
“ 뭐? ”
“ 와, 업혀 온 건 기억 안 나나. 대체 뭔 일이 있어가꼬 그리 술 퍼마시고 연락도 안 되고 2차, 3차까지 갔다가 금마한테 업혀오는데. ”
“ 야. ”
“ 선호 열이 40도까지 올라갈라 캤다. 어쩔 수 없이 그리 술 마셨으면 고마 집에 있지 와 오는데. ”
“ ...... ”
“ 그리 술 마시다가 그리 늦게 들어오고. 사람 걱정하는 건 생각 안 하나 니. ”
다니엘이 하는 말 하나하나가 꽂히는 기분이었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제대로 모르면서 여기까지 와서 다니엘에게 저런 말을 들으니 더 서러워졌다.
니가 뭘 알아. 내가 어제 어떤 일을 겪었는지, 어떤 말을 들었는지 니가 뭘 아냐고. 여기서 울면 지는 거다. 참자, 참자.
이 말을 속으로 반복하며 주먹을 꾹 쥐고 덜덜 떨며 눈물을 참는데 한숨을 쉬고 들어가려는 다니엘에 울컥해 입을 열었다.
“ 니가 뭘 아는데. ”
“ ...... ”
“ 니가 무슨 상관인데. ”
“ ...마. ”
“ 내가 박우진한테 업혀오든, 안겨오든, 끌려오든 니가 무슨 상관이야. ”
“ 워너밤. ”
“ 내가 밤에 늦게까지 술을 처마시든, 연락이 안 되든 니가 무슨 상관이냐고. ”
“ 말 가려서 안 하나. ”
“ 넌 말 가려서 했어? ”
너도 나한테 상처 줬잖아.
“ 내가 어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데. 최리나, 최우성 사이에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무슨 일을 겪었는지 니가 그 현장에 있었어?
아니면 현장 브리핑이라도 하나하나 세세하게 받았어? ”
“ ...... ”
“ 제대로 모르잖아. 그러니까 이런 말을 했겠지. ”
어제 나는 그렇게 서러우면서도 니 생각이 먼저 났는데.
“ 나보고 너랑 사고 쳤냐고 묻더라. 내가 이런 소리를 왜 들어야 해. 단지 니 동생 하나 본다는 이유로 내가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해? ”
“ ...... ”
“ 나보고 싫대. 그냥 내가 싫대. 내 행동 하나하나가 다 싫대. 그리고 더럽대 나 보고. 남자 꼬시고 다닌다더라. ”
내가 왜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해. 난 그냥 부탁 들어준 게 끝인데. 아무 말도 없는 다니엘을 보니 더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진정하자. 욱하면 안 돼. 막말하면 안 돼.
내가 가지고 있는 최대 단점은 욱하면 앞뒤 안 가리고 막말하는 것. 다니엘 실수로 한 번은 화가 엄청난 적이 있었다.
그때 딱 한 번 겪고 나서부터 다시는 안 그러기로 했는데... 분명 그랬는데... 머리로는 계속 진정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터져버린 입은 막을 수가 없었고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가 나와버렸다.
“ 니 동생이잖아. 내 동생이야? 난 그냥 도와준 것뿐인데 왜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데. 진짜 하나하나가 후회돼. 내가 왜 부탁을 들어줬는지. 왜 선호를 만났는지. ”
“ 진심이가. ”
진심 아닌데, 그만해야 하는데...
“ 내가 너 때문에 그런 소리 들었는데 왜 너한테 연락을 해. ”
“ ...... ”
아니야, 의건아. 너 때문에 그런 소리 들은 게 아닌 거 아는데...
“ 니가 내 남자친구야? 너 뭔데. 왜 그런 거 하나하나까지 신경 쓰는데? 신경 쓰지 마. ”
“ ......”
제발 주둥아리야 좀 닥쳐봐 진짜.
“ 내가 뭘 먹든, 누구랑 있든, 니가 상관할 거 아니잖... ”
“ 그만해라. ”
“ ...... ”
“ 좋아한다. ”
“ 뭐? ”
“ 내가 니 좋아한다고. ”
“ ...... ”
“ 그라니까 마음에도 없는 말 그만해라. 두 번째라도 이리 겪는 건 힘들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난 그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22개월입니다!
정말 울고 싶습니다...☆ 왜 계속 영어가 뜨지요...? 눙물...
연속으로 두 편이 올라왔습니다. 죽겠어요 8ㅅ8
드디어 마지막에 다니엘이 자기 마음을 표현했네요!
사실 이번 화는 제가 아기와 너의 주제를 생각하는 것과 동시에 생각해둔 장면입니다!
물론 대사는 저게 아니었는데 기억이 잘 나질 않네요... 대사가 미스...
그리고 고백과 동시에 얼마 안 있어 완결로 잡고 있었죠 ㅎㅅㅎ...
초반에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으나 이제 어떻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ㅎㅅㅎ..
11화와 12화 모두 재밌게 봐주시고 다들 감기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밤에 이제 춥더라구요 8ㅅ8)
그럼 전 다음 편에서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