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한 시간들」
㈜솨솨
너 소개팅 안 받을래? 쟤가 웬일로 커피를 사준다 했다. 그래, 사실 예측은 하고 있었다. 이지은이 항상 소개팅의 여부를 물어볼 때마다 커피를 사준다는 것은 나 뿐만이 아니라 내 동기들이 전부 알고 있는 사실이었고, 난 그만큼 애인이 생기지 않았다는 것. 이지은의 물음에 나는 커피를 쪽쪽 빨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사람들의 옷들이 점점 짧아지는 게 눈에 보여 이제 여름이구나 싶었다.
"전처럼 넘어가지 말고. 너 언제까지 걔 생각할래?"
"내가 뭐."
"김태형. 이제 잊을 때 됐잖아. 언제까지 갇혀 살래."
"잊었어, 걔."
"진짜 너 볼 때마다 답답해서…!"
이지은이 아차하며 말을 멈췄다. 아마 내 표정을 보고 그랬겠지. 우물쭈물하면서 사과를 하기에 나는 바람 빠진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 진짜 잊은 것 같아, 걔. 정말로. 잊은 적 없는 기억을 잊으려 노력하는 중이니까. 김태형. 그 석 자만 들어도 마음이 쓰라리는 건 어쩔 수가 없구나.
아빠의 전근으로 어쩔 수 없이 도시에서 촌뜨기로 이사를 가게 된 나는 몇 날 며칠을 아빠를 미워했다. 심지어 그 촌구석에는 편의점이라는 고귀한 것도 없었고, 시내로 나가려면 버스를 타고 1시간을 갔었어야 했으니, 도시로 온통 물들인 도시녀인 나에게는 그것이 지옥이었다. 내가 갈 고등학교의 전교생 수는 100명도 안 된다고 했다. 우리 학년의 반 수는 한 개였으니, 그걸로 말이 끝난 거다. 우울한 마음으로 일찍 등교를 했다. 아이들하고 절대 친해지지 말아야지. 교무실에 가니 그냥 반에 가라는 담임에 말에 욕을 읊조리며 반 문을 거세게 열었을 때에는,
"……."
"……."
강아지상의 남자가 한 명 있었다. 뭐를 훔쳐 먹다가 걸린 사람마냥 입에 있던 과자를 뚝 떨구며 나를 바라보는 게 영 부담스러워 대충 새 책상으로 보이는 책상으로 가 자리에 앉아 휴대폰을 켜 얼굴책에 들어갔다. 그런데 날 자꾸만 빤히 쳐다보는 남자에 나는 폰을 내려놓고 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귀찮으니까, 대충.
"왜."
"너 누구야? 전학생?"
"응. 전학생."
그렇구나~ 라며 내 옆자리에 앉은 남자를 무시하고 다시 폰을 들어 서울 친구들과 연락을 주고 받는데, 갑자기 건네어진 과자 하나에 얼굴을 잔뜩 찡그리고 남자를 쳐다봤다. 그러나 내 표정과는 반대로 남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 원래 내 과자 잘 안 주는데, 넌 주고 싶어서!"
"그냥 주지 마. 왜 주는 건데."
"예뻐서!"
예쁘다는 말과 함께 건넨 환한 웃음은 내 귓가를 화끈하게 만들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었고, 나는 그 날 김태형과의 처음 만났다.
그 날 이후, 김태형과 사는 동네가 같아 같이 등 하교를 하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서로 말이 트면서 장난도 많이 치고, 또 김태형 주변에는 친구가 늘 많아 그 친구들은 곧 내 친구가 되면서 나는 시골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익숙해지지 않을 것 같던 김태형도, 모든 환경들, 심지어 나의 감정들도.
그 날따라 학교가 너무 일찍 끝났길래 나와 김태형은 주변 마트에 들러 반지 캔디를 입에 꼬나물고 놀이터 그네에 앉아 이리저리 발재간을 치며 시시콜콜한 장난들을 치고 있을 때, 김태형이 뜬금 없는 말을 꺼내었다.
"탄소야, 서울 아들은 다 그렇게 예뻐?"
"뭐?"
"너 서울 아잖아. 예쁘잖아."
"내가 제일 예쁜 거야."
"그지? 내 눈에도 너가 제일 예쁠 것 같아."
갑작스럽게 치고 들어오는 김태형 때문에 또 내 귀가 화끈거리는 게 느껴질 때, 김태형이 다 먹은 반지 캔디를 물티슈로 닦은 후 내 손을 가져가더니 이내 내 네 번째 손가락에 조심스레 끼워주었다. 뜬금 없고 황당한 행동에 당황스러워 하고 있자니, 김태형이 내 손을 꼭 잡고 말했다.
"나 이제 진짜 못 참을 것 같아서 말하는데, 나 너 좋아하는 거 너도 알잖아."
"…어."
"그러니까! 내가 나중에 너한테 꼭 이거보다 므찐 다이아반지 끼워줄게. 그 때까지 나랑 연애하자, 탄소야."
애 같기도 하고, 아들이 엄마한테 효도하는 기분이라서 웃긴 마음에 고개를 숙이고 웃으니 김태형이 새빨간 얼굴로 왜 웃냐며 화를 냈고, 나는 웃는 얼굴로 김태형에게 말했다.
그래, 하자. 연애. 너라면 괜찮을 것 같아.맞잡은 손이 깍지 손으로 바뀜으로써 우리의 연애의 시작을 알렸다.
소개팅은 거절했다. 아직은 혼자 있고 싶다는 내 말에 지은이는 한숨을 쉬었다. 지은이와 헤어진 후, 집에 식용유가 떨어진 것을 기억한 나는 마트에 들러 식용유와 군것질 거리를 카운터에 얹어놓았다. 계산을 기다리고 있을 때, 카운터 앞에 있는 반지 사탕에 눈길이 가 슬쩍 집어 쌓인 짐들 위에 얹어놓았다. 계산을 다 한 후, 사탕 껍질을 바로 까 내 입에 넣었고, 김태형이 고백한 그 날의 추억에 젖은 채 집 앞 언덕을 올라갔다.
나와 연애한 지 1년 후, 김태형은 우리 집 앞에 찾아왔다. 왜 찾아왔냐고 묻기도 전에 김태형의 얼굴은 곧 눈물을 터트릴 기세였다. 그리고 나를 끌어안고 말했다.
나 금방 올게. 그 때까지만 기다려줘.
그리고 김태형은 그 날 이후 쥐도새도 모르게 사라졌다. 김태형의 휴대폰은 항상 꺼져있었고, 사람들이 말하기를, 해외로 가다 교통 사고로 죽었다고 말했다. 나는 부정했다. 김태형이 온다고 했으니까, 나는 김태형을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거다.
어느새 바닥이 난 반지 사탕을 바라보다 반지 사탕을 나의 네 번째 손가락에 끼고는 멍하니 바라보다 빈 웃음을 터트렸다.
"웃기다. 너 잊는다고 했는데."
나 아직 너 잊지 못해서 이렇게 살아. 울컥하는 마음이 치솟아 올라 반지를 빼 멀리 던졌다. 아랫입술을 깨물고 구두 굽 소리를 크게 내며 자취방인 원룸 빌라 앞에 들어섰을 때, 입구를 막고 있는 사람에 나는 물고 있던 아랫입술을 놓았다. 그리고는 주저 앉았다.
"늦어서 미안해."
익숙한 목소리, 날 끌어당겨 나를 네 품에 안기게하는 그 손, 익숙한 향기, 익숙한 얼굴, 내가 잊지 못한 모든 것. 늘 내가 품어뒀던 너를 사랑한 시간들이 다시 되돌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