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헨 왈츠」
㈜솨솨
너는 김남준이랑 대체 어떤 관계야? 반 여자애들끼리 모이면 하는 얘기는 항상 김남준이었고, 그러면 꼭 내게 묻는 질문 중 하나였다. 뭐라고 정의를 내려야 할까. 솔직히 잘 모르겠다. 친구 관계? 그건 너무 진부한 것 같고, 그렇다고 썸 타는 관계도, 연인 관계도 아닌데 뭐라고 말해야 할지…. 일단 김남준은 날 좋아하는 게 확실해. 봉지 안의 과자를 집어 먹으며 관계에 대한 정의를 정리하고 있자니 어서 불으라며 화를 내는 친구들에게 알았다며 소리를 치고는 입을 닫았다. 음, 이라며 운을 띄우다 입을 열었다.
"그냥."
"그냥?"
"진짜 뭐라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진짜 그냥인 것 같아."
"그냥인데 그렇게 사이가 좋아?"
입술을 앙 다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재미 없다는 친구들의 비난에 나는 헤벌쭉 웃어보이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점심 시간이 끝나고 수업 종이 치니 아이들은 약속한 듯 재빨리 과자를 치우고 자리에 앉았고, 나도 자리에 앉아 공책을 폈다. 샤프를 들어 김남준의 이름을 썼다. 그러게, 우리는 무슨 관계지. 나는 김남준을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지? 머리를 긁적이며 입술을 깨물다 그제서야 정의가 내려졌다. 그래, 메르헨. 김남준은 내게 메르헨 같은 존재지. 메르헨이라고 두껍게 쓴 글씨에 동그라미를 크게 치고는 공책을 덮었다. 그 때부터였을까, 내 메르헨 왈츠가 시작된 것이.
***
반장을 괜히 했다. 고 3 때 반장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 중얼거리며 가위로 별을 오렸다. 그러니까, 이게 뭔 상황이냐면, 종례가 끝나고 신나게 교실에서 나가려고 했는데, 날 붙잡는 담임에 물음표가 가득 차 있는 얼굴을 한 내게 담임은 정말 미안한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학급 미화. 그래 그 개 시발 거 때문에 혼자서 교실을 예쁘고 아주 아름답게 꾸미고 있는 거 아니겠냐고. 심지어 김남준도 학원 간다고 기다려주지도 않고 쌩 가버렸다. 그래~ 메르헨은 무슨, 동화는 다 모순이야 모순. 김남준 모순덩이리 새끼. 아무 죄도 없는 김남준을 욕하고 있는 게 나름 심심하지도 않고 괜찮아서 김남준의 비판 오조오억가지를 입 밖으로 꺼내고 있었는데,
"언제까지 할 거냐?"
뒷문에서 우산을 들고 슬금슬금 걸어오는 김남준에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다 들었나? 아니야 안 들었겠지. 저 질문은 이 미화가 언제 끝나냐는 질문이겠지? 그렇겠지? 식은땀이 주륵 흐르는 기분에 얼굴을 닦았고, 김남준의 얼굴을 애써 안 보는 척 대답했다.
"어, 아마, 음, 1시간 뒤...?"
"그 때까지 내 욕하고 있게?"
"헉, 다 들었구나."
"나는 비가 와서 너 데리러 왔는데, 욕이나 하고 있고."
진짜 너무하네, 이 친구. 김남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천둥이 쳤고, 몸을 움찔거렸다. 비가 오는 줄도 몰랐는데. 학원 끝나자마자 데리러 온 김남준이 고맙기도 한데 욕한 게 미안해서 잔뜩 미안한 표정을 지으니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는 김남준 때문에 심장이 떨렸다. 그래, 김남준. 메르헨 아니란 거 취소. 김남준은 의자를 빼 앉았고, 나도 쉴 겸 의자에 앉았다. 가위로 하트를 잘랐고, 김남준은 나를 돕겠다며 펜을 들었다. 아마 김남준은 나를 돕겠다는 그 순간을 엄청나게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아니, 메르헨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를 쓰라고!!!"
"그래 매르헨!"
"아니, 어이 라고 어이!! 아이 아니고 어이!!!"
사람이 실수할 수도 있는 거지! 나 안 해! 펜을 냅다 던지는 김남준을 보고 도와주는 사람한테 너무 심했나? 라는 생각이 들어 펜을 다시 주워들어 김남준에게 전했다. 메르헨 하니까, 아까 여자애들이 한 얘기 생각나네.
"아까 우리 반 여자애들이 너랑 나랑 뭔 관계냐고 물었어."
"뭐라고 대답했는데?"
"그냥이라고 대답했지. 근데 생각을 해 봤는데, 메르헨인 거 같아."
"그게 뭔데."
"독일어로 동화라는 뜻이야."
내 말에 김남준이 피식 피식 웃었다. 웃을 거면 한 번에 좀 웃지 왜 저렇게 웃는대? 왜 그렇게 웃냐고 화를 내자 김남준은 가위를 내려 놓고 턱을 괴었다. 뭐, 그렇게 쳐다보면 뭐 어쩔 건데.
"너 동화 좋아하잖아."
"어."
"그럼 너 나 좋아해?"
뜬금 없기도 뜬금 없고 갑작스럽기도 갑작스러운데 차마 부정은 못했다. 메르헨이라고 생각을 했을 때, 어쩌면 나는 오래 전부터 김남준을 좋아했을 수도 있었겠다 싶어서. 부정의 대답도, 긍정의 대답도 하지 못했다. 글쎄. 라는 애매모호한 답만 내려놨다. 입술을 내밀고 고민에 빠져 보이는 김남준에게 어색한 웃음을 던졌다. 어색하게 이런 얘기 말고 다른 얘기를 하자고 했지만 김남준은 나의 말을 싹둑 잘랐다.
"김탄소. 나는 너 좋아해."
"..."
"너는?"
김남준의 고백에 입을 앙 다물었다. 머릿속이 시끄러웠다. 나는 김남준을 좋아하나? 어쩌면 갑작스레 생긴 일시적인 감정일 수도 있어. 그러니까, 좋아하는 감정은 아닌 거잖아 이게. 판단을 끝마친 후 대답을 하려 김남준의 두 눈을 마주하는데, 그 두 눈이 너무 올곧아서, 너무 깊고 선명해서, 동화 속의 그림 같아서 두 눈을 느릿하게 감았다가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일시적인 감정이 아닌 것 같아. 나 사실은, 오래 전부터 널 좋아하고 있었던 것 같아. 시끄럽던 머릿속이 어느샌가 잔잔해졌다.
"나도."
"..."
"너 좋아하나봐."
내 말이 끝나기 무섭게 김남준은 내게 입을 맞췄다. 그래, 내가 그렸던 동화의 결말은 이랬다. 결국은 너와 내가 주인공인 메르헨. 시끄러웠던 나의 메르헨 왈츠가 이렇게 끝이 났고, 새로운 메르헨이 그려졌다.
작은 소녀가 집에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품에는 소중한 것을 품고 있다는 듯이 한 물건을 꼭 끌어안고 있었고, 소녀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크게 소리쳤다.
"어마 어마! 나 김남주니 책 읽어조써!"
"우리 딸, 남준이가 그렇게 좋아?"
"으응! 나 남주니 진짜루 조아!"
내 왕자님이고, 내 동화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