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인도에서 탭댄스를
W.스며드는 문달
16. 체감 시간으론 한 시간 정도 걸린 것 같았다. 대가리가 흔들거려 칼이 빠질까봐 조마조마 하며 던진 작살에 걸려준 멍청한 물고기 한 마리를 그대로 꽂아둔 채로 위풍당당하게 치타폰에게로 갔다. 멀리서부터 내가 걸어오는 걸 보고 신나하며 박수를 치던 치타폰이 작살에 관통 당해서는 겨우 발악하는 물고기를 보더니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 "애걔, 한 마리?" "지금 겨우 한 마리 잡아왔냐 이러고 있는 거예요?" "채리씨, 우리 입 두 개 잖아요. 근데 물고기는 한 마리요, 왜?" 진짜 이게 나를 봉으로 아나. 원래는 한 마리라도 같이 나눠 먹자고 하려 했는데 치타폰의 반응을 보니 그런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일부러 발을 세게 구르며 다 타버린 검은 장작 앞으로 가 앉았다. "채리씨, 삐졌어요?" "아니요. 이건 제가 잡은 제 꺼니까 치타폰씨 배고프시면 알아서 잡아오세요. 자.급.자.족!" 단호하게 자급자족을 외친 뒤 다시 미친듯이 불 피울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내 손바닥을 불살라서라도 물고기를 노릇노릇 구워먹고 말리라. 작살에서 빼낸 물고기를 꼬챙이에 끼고는 구덩이를 작게 파서 꽂아 세워놓았다. "테니가아~잘못했어요오~모두 다 테니 잘못이죠~" 용케도 루그의 죄 라는 노래를 아는지 자기 이름으로 바꿔 두 손을 모으고 부르는 치타폰에 나는 말을 잃고 즉석 재롱잔치를 구경했다. 내가 당신의 팬이었다면 지금 대포를 들고 아이고 내새끼 하며 찍고 있었을거요. 대포 대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맞아, 잊고 있었는데 나 휴대폰...어어? "으어어!" "왜 그래요,채리씨? 혹시 별로 였," "내 폰!" 바지 주머니에 넣어놓고 감히 깜빡한 죄로 나는 물고기와 핸드폰을 바다와 물물교환 했다. "미쳤나봐..아아아! 어떡해애애애!" 치티폰은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자기의 애교가 통해서 내가 제 몫의 물고기를 잡아주러 간다고 생각했는지 부리나케 작살을 들고 뒤따라와 내 손에 쥐어주었다. "아..시발.." 누구는 유일하게 붙잡고 있던 한 떨기 희망이 물거품이 되었는데 누구는 천진하게 물꼬기 물꼬기 하며 노래나 부르고 있었다. 17. 결국은 사이좋게 한 마리를 나눠먹었다. 치타폰은 못내 아쉬운 티가 역력했지만 그래도 모래알 같은 눈치는 남아있는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있었다.아마 남이 지금 내 모습을 본다면 턱수염이 풍성하게 자란, 초췌한 그지새끼라고 여길 지도 모른다. 피폐해진 몰골로 팔 다리는 힘 없이 축 늘어뜨리고는 핸드폰이 없다고 중얼거리다 옆으로 픽 쓰러지듯 누웠다. "채리씨, 무슨 일인데 그래요." "몰라요..말 걸지 마요.." "..나 심심한데."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는 말을 지금 이 순간 절절하게 느끼고 있다. 어느 정도 친해진 것 같으니 본격적으로 몸싸움을 시작해볼까 하고 손을 짚고 일어나 찌뿌둥한 어깨를 돌렸다. "채리씨,오늘은 집 지어요." "에?" 내 마음은 알고 심심하단 소릴 하느냐며 머리를 쥐뜯을 작정이었는데 자리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더니 치타폰이 집 짓자는 소리를 했다. 이번에도 내가 앞장 서서 족장처럼 고생을 해야하나 미리부터 얼굴을 구기고 있는데 웬일로 먼저 숲으로 들어가기까지 했다. "채리와 테니의 러브 하우스~따란!" "그런 소리 하지 마요!" 바나나 나뭇잎을 엮어서 대충 그럴싸한 집을 만들었다. 그래도 신체적인 조건이 월등하다고 치타폰은 충분히 제 몫을 다 해냈다. 약간의 허술한 면은 내가 다시 손 봐야하는 번거로움이 있었지만.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러브 하우스 어쩌고 하는 거에 씩씩 거리니까 채리가 토마토가 됐다며 키킥 거렸다. "핸드폰은 잃어버렸지만 채리씨는 치타폰이 있잖아요." 말장난인데도 불구하고 잠깐이나마 설렜다. 마냥 애 같았던 사람이 갑자기 의젓해보이면서 후광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햇빛을 받으며 눈부신 미소를 드러내는 치타폰에 나는 괜히 심술을 부리며 나무 그늘 아래로 밀었다. 체리가 토마토가 됐네. 18. 핸드폰 대신 치타폰이란 말의 어느 부분에서 위로를 받았는지는 모르겠지만 잃어버렸다는 허탈함 대신 배고픔과 심심함이 파도처럼 밀려오는걸 보니 전보다 상태가 괜찮아지긴 했나보다. 전에는 냉장고에 저장 반찬이 그득그득 있어도 귀찮다고 세끼를 다 안 챙겨먹고 그랬는데, 이 곳에 오니 시도때도 없이 배 안에서 물내려가는 소리가 났다. 대충 점심 때 같아서 치타폰과 함께 좀 더 깊이 숲 안으로 들어가보기로 했다. "치타폰씨는 어쩌다 여기 오게 된거예요?" "어응, 그냥 스케줄 때문에 며칠 잠을 못 잤었는데 그래서 아, 어디 휴양지 섬 가서 혼자 푹 쉬고싶다 생각했는데 눈 떠보니 여기였어요." "헐. 저도 아! 로빈슨 크루소처럼 무인도 들어가서 혼자 살고 싶다 이랬는데 눈 떠보니 여기였어요." "와, 신기하다. 그거 아니에요 우리? 운명." 운명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운명일거면 그냥 서울에서 만나도 됐거든요. 빈정대는 마음의 소리를 음식 대신 삼키며 깊이 깊이 들어갔다. 치타폰은 호기심이 많은건지 그냥 말이 많은 사람인지 뒤에서 쉴새없이 조잘댔다. 덕분에 오디오가 꽉 차서 귀가 심심할 틈은 없었다.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아무거나 따 먹고 그러면 안돼, 뭐 먹어요!?" 어느 순간 조용해지길래 싸해서 뒤를 돌아봤는데 역시나 입을 먹을걸로 막고 있었다. 치사하게 혼자 먹는건 둘째치고 그저 먹을 수 있게 생긴거라면 의심 않고 손부터 가는 저 고얀 버릇을 좀 고쳐줘야겠다 생각하며 손등을 찰지게 쳤다. "우으뜨르으으!" "함부로 아무거나 주워먹지 말란 말이에요!야생이 얼마나 위험한데 정말.." "흐흥~나 걱정해요, 채리씨?" 능글맞은 표정을 짓고서 팔꿈치로 툭툭 쳐오는거에 일부러 냉담한 반응을 보이니 뻘쭘한지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예쁜 초록색이다 소리나 하고 앉았다. 뒤에 세워놓으면 아까처럼 딴짓이나 할 것 같아서 아예 손목을 잡고 끌고 갔다. "오, 터프해요." "뭐라는거야 진짜, 치타폰씨 여기 놀러온거 아니라구요." 치타폰은 자세하겐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보기론 참 유들유들한 사람이었다. 어딜가나 사랑받을 타입이고, 쭉 그래왔겠지만 치명적인 문제는 그게 상황을 가리지 않는 능청스러움이라는 점이다. "채리씨, 나 아까 바나나 땄는데 다 안 먹었어요. 채리씨 먹으라고. 나 착하죠?" 라며 아직 덜 익어 목청빛이 도는 바나나 하나를 내밀어 왔다. 분명 짜증나는데, 밉지는 않았다. 19. 채ㄹ 쉿 조용히! 소리없이 입술로만 짧게 대화를 쳤다. 나와 치타폰은 풀숲에 숨어서 띄엄띄엄 서 있는 나무들 아래에서 머리를 까딱거리는 닭 두 마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처음엔 너무 크고 위풍당당한 풍채에 닭인지도 모르고 저게 무슨 동물인가 싶었는데 옆에서 치타폰이 치킨 치킨 거리니까 그제야 좀 닭 같아보였다. 채리씨..치킨 먹어요.. 나도 먹고싶어요.. 어떻게 잡아요? 그러니까요..엄청 빠르게 생겼어. 새 부리를 가지고 있는 애들한테 약간의 공포증을 가지고 있던 터라 좀처럼 나설 수가 없었다. 마지노선을 두고 대치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느껴질 때 즈음 닭들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안되는데 하며 쭈그린다고 땀이 난 다리를 천천히 펴고 있는데 바람을 휙 가르더니 내 옆으로 무언가가 지나갔다. 뀌이익 하는 괴성을 지르며 빠르게 달리는 닭을 멍하니 보고 있는데 옆에 있던 치타폰이 어느새 야계들을 쫓아 달려가고 있었다. 그 뒷모습에 나도 같이 숨어 있던 풀숲에서 나와 뒤쫓았다. "치타폰씨이! 대체 뭘 한거야 이자식아아!" 20. 치타폰의 맥가이버 칼에 제대로 맞은 닭은 피를 뚝뚝 흘리며 그래도 질기게 한참은 뛰다가 결국 절벽 끝으로 몰리고 말았다. 나는 반쯤 이성을 잃은 것 같은 치타폰에게 위험하니 그냥 포기하라고 멀찍이 떨어져 외쳤지만 내 말은 깔끔하게 무시하고 절벽 끝에 있는 닭에게로 한발짝씩 다가갔다. "물고기 잡아줄게! 제발 이리 와 미친놈아!" 겁대가리를 상실하지 않고서야 저 아슬아슬한 절벽 끝으로 제 발로 걸어 갈 수는 없다. 우리에게 먹히는건 죽기보다 싫었는지 닭이 공중에서 날갯짓을 하고, 치타폰도 같이 날았다. 미쳤나봐. 후들거리는 다리로만 겨우 서 있던 나는 치타폰이 뛰자마자 주먹을 꽉 쥐고 그에게로 달렸다. "치타폰!!" - 다..다음엔 좀 더 양심있는 분량으로 오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