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Mantic
: an incurable romantic
: 기약없는 로맨티스트
03
하나의 문제, 하나의 답!
남준이가 잠에 들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면, 결코. 절대. 입을 맞추지 않았을 것이다. 녀석은 내가 저를 좋아하는 사실을 모를 뿐더라 무엇보다 우리는 한 집에 살아서. 고백을 했다가 차이면, 피할 때가 없다. 학교부터 집까지 같은데. 어디로 도망을 가. 가기를. 녀석과 눈이 마주친 그 찰나의 시간동안 무수한 변명과 함께 단 하나의 진실을 떠올렸다. 그냥 저지를까. 좋아하는 것 같다고. 나는 일단 이 순간을 무슨 방법으로든 덮어야겠다 싶어, 순간의 실수 혹은 일말의 호기심으로 둔갑 시킬 예정이었다. 하지만 늘 나의 궤도 밖에 있는 당장 내 눈 앞의 이 아이는.
소파 아래 기대로 있던 제 등을 곧게 펴다 못해 내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내게 입을 맞췄다. 내가 선수친 입맞춤과는 분명히 다른 느낌이었다. 조용히 어둠이 내려 앉은 거실에서 낯설고 간지러운 소리만이 오갔다. 그렇게 얼마나 입을 맞췄을까. 내 위로 거의 엎어져 있던 아이가 몸을 일으키며, 내 팔을 잡아 당겼다. 그리고는 내게로 몸을 틀어, 내가 제 눈을 피하기 직전까지. 올곧게 나를 바라보았다. 또 저렇게 무해하고 정직한 눈이다. 지금 이 상황에서까지도. 나는 내 나름의 사랑이 허무하게 무너진 것만 같아, 억울한데 그 와중에도 조금 전의 입맞춤이 좋아 설레는데.
"들어가서 자. 감기 걸리지 말고."
김남준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김남준 같은 표정으로 저답게 말했다. 들어가서 자. 감기 걸리지 말고. 나는 내게 먼저 등을 보이는 녀석의 등만 하염없이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나쁜 놈. 하지만 깨문 입술에도 김남준의 향이 묻어있는 것 같아서, 고개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03 ; 01
남준 View
잠시 눈을 떴다가 다시 감을 생각이었다. 어떤 표정으로 내게 입을 맞추는지 궁금했으니까. 여주가 눈을 뜨고 있을 거라는 건, 내 계산에 없었다. 오래 전부터 이런 식이었다. 최근 들어서는 더더욱. 제 딴에는 감춘다고 감추는 그 마음이 서툴러서 자꾸 신경이 쓰였다. 어설프게 포장된 선물상자 같아서, 더 궁금했다. 차라리 다 감추던지 다 보이던지. 둘 중 하나만 했으면 좋겠는데.
눈이 마주친 순간,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더, 더 하고 싶다. 그 생각은 모든 사고 회로를 지배했고, 정말로 그렇게 행동하게 만들었다. 몸이 아이 쪽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느끼면서도, 제자리로 돌아가고자 하지 않았다. 더 입을 맞추고 싶었는데, 이미 입을 맞추고 있었다. 그래서 답답했다. 무언가 더 하고 싶은데, 실수였어. 라고 말할 수 있는 선에서의 행동은 이미 다 하고 있었다. 그래서 주먹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 순간까지도, 이 아이의 마음이 어떤 방향인지 알면서도. '실수'라고 수습하려는 생각을 하는 내가. 지독히도 싫었다. 복잡한 마음을 재우고 아이를 일으키며, 해줄 수 있는 말은. 별로 없었다. 그래서 그냥 떠오르는 아무 말이나 뱉었다.
아침 알람이 울릴 때까지, 잠을 자지 못했다. 잡생각을 없애면 나아질까 싶어 책상에 앉아 수학 문제집을 펼쳤지만, 문제도 제대로 읽지 못했다. 아이는 잡생각이 아니었으니까. 나는 노트 위에 아이의 이름을 썼다가 지우기를 몇 번 반복했다. 사랑이냐고 물으면 '응'이라고 답할 자신이 없었다. 사랑까지는 아닌 것 같았다.
문제를 제대로 읽지도 않았는데, 답만 보고 문제를 유추할 수는 없었다. 입 한 번 맞췄다고, 사랑이라고. 그렇게 단정 지을 수 없었다.
03 ; 02
남준 View
내가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티나게 몸을 굳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지금도 역시나. 또 다 숨기지도 못하고, 다 보이지도 못하고. 나는 나를 부르는 아이들의 무리에 섞이며, 하루의 시작으로 들어갔다.
여주는 쉬는 시간에는 엎드리거나 제 몇 안 되는 여자 친구들과 함께 팔짱을 끼고는 복도를 벗어났다. 여주가 반에 없을 때면 아이들은 내게로 다가와 물었다. '싸웠냐?' '야. 싸웠겠냐.' '김남준이 무조건 지는 게임인데.' 우석이는 속없는 아이들의 대화에 혀를 차며, 내 어깨 위로 손을 둘렀다. 뭘 했는 지는 모르겠는데, 잘했다. 임마.
"미쳤네."
녀석의 말에 실소와 함께 미쳤다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그렇게 허무하게 마지막 수업시간을 시작하는 종소리가 울렸고, 문학 책을 가지러가기 위해 반 뒷편 사물함으로 향했다. 그리고 때마침 뒷문을 열고 들어오는 아이 무리와 마주했다. 아이의 친구들은 아이로부터 무슨 이야기를 전해 들은 건지, 그냥 내가 얄미운 건지 내 복부를 힘없이 한 번씩 치고 지나갔다. 아이는 그런 제 친구들의 장난에 어색하게 자리를 피했다. 답지 않게 행동하는 아이에게 나 역시 답지 않게 행동했다. 문학 책을 가지고 오는 걸 잊었다.
오늘따라 기분이 별로 좋지 못한 문학 선생님은 책 준비 안 된 사람 복도로 나가라. 하고, 수업을 진행하셨다. 나는 얼른 다시 사물함에 가서 문학책을 챙겨와야겠다 싶어, 의자를 뒤로 밀었다. 동시에 뒷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주인공을 찾았다. 그리고 주인공을 찾자마자, 나도 책 찾는 걸 포기하고 그 뒤를 따라 나섰다. 주인공은 김여주였다.
선생님은 나까지 나가는 걸 지켜 보시더니, 해가 서쪽에서 뜨겠다고 말씀하시며 그래도 나가라고 손짓하셨다. 교과서를 안 가져와서 복도로 나가는 건, 처음이었다. 김여주는 제 뒤를 따라 나오는 나를 보며, 제 작은 손으로 사물함을 가리켰다. 그리고는 입을 벙긋였다. 저기 있잖아. 너. 나는 아이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고는 선생님께 고개를 푹 숙이고 복도로 나섰다. 교실과는 다른 공기가 제법 시렸다. 교실과는 다른 마음이 멋대로 들떴다.
"옆으로 오지?"
"... 됐어."
됐다니까, 내가 가야지. 그럼. 수업이 시작한 복도에는 우리 둘 뿐이었다. 아이는 나로부터 족히 세 걸음은 떨어져 있었다. 내 걸음으로 세 걸음이니까, 거리가 꽤 됐다. 아이는 내가 제 옆으로 향하자, 좀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물었다. 너 교과서 있잖아. 왜 나왔어. 나는 아이의 물음에 답했다. 궁금한 거 그거 아니잖아.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아이의 눈동자가 바쁘게 움직였다. 아직 문제도 못 읽은 주제에 해설지부터 보려는 내가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근데 나한테 얘는 너무 어려워서.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둔 선생님의 목소리만이 크게 들렸다가 작게 들렸다가. 그러기를 반복했다.
'무슨 이유보다는 어떤 마음이 나에게는 소중하다.'
- 용윤선, 13월에 만나요. 인용. -
선생님의 음성 중, 유독 뚜렷하게 들려온 구절이었다. 무슨 이유, 이유.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이유가 몇이나 될까. 입맞춤에 잠 못 이룬 거? 괜한 핑계를 대고서 너를 따라 나온 거? 이 모든 물음이 사랑으로부터의 이유가 아니면, 네게 상처일 텐데. 네게 상처이고 싶지 않은데. 네 마음이 내 마음보다 중요하니까. 네 마음이 내 마음보다,
소중하니까.
'무슨 이유보다는 어떤 마음이 나에게는 소중하다.'
나는 네 마음이 소중하구나. 그래서 서툴게 감춰진 선물 상자를 섯불리 뜯어내지 않았구나. 날 향한 네 마음이 소중해서, 어떻게 대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내 마음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아졌다. 네 마음이 사랑이면, 나도 사랑일 것 같아서. 사랑이 확실하지도 않으면서, 고백하는 건. 너무 나쁜 놈 같기는 한데. 사랑이라면 지금부터 인지해야 네 마음을 부지런하게 따라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어제 ㅇ,"
"없던 걸로 하자."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없던 일로 하자는 아이의 말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대답이었다. 있었던 일을 없었던 일로. 어떻게 그래. 손목을 들어 시간을 살폈다. 수업이 끝나기까지 십 분도 남지 않았다. 나는 벽에 기대어 있던 몸을 틀어, 아이의 앞에 섰다. 당황한 아이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뭐해. 돌아가. 하지만 나는 돌아가는 대신, 허리를 굽혀 아이의 입술에 짧게 입을 맞췄다. 복도에 나오는 순간부터 멋대로 들뜨던 마음이 동했다.
"어제 일이 없던 일이면, 지금 일로 이야기하자."
"... 야."
"이것도 없었던 일 할 거면."
또 한 번 입을 맞췄다. 그리고 말했다. 이걸로 기억하던가. 순간, 어젯밤의 기억이 떠올라 손끝까지 열이 퍼졌다. 아이의 얼굴도 붉었다. 이런 억지를 부리는 성격은 아닌데, 마구 억지를 부리고 투정을 부리고 싶은 걸 보니. 내 사랑이 늦었구나 싶었다.
네 마음이 소중해서, 네 마음 살피느라. 내 마음을 못 살폈구나. 네 사랑 보느라, 내 사랑을 혼자 뒀구나.
수업을 마치는 종이 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복도가 소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와 반대로 내 마음은 안정을 찾았다. 문제를 읽을 필요가 없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매일 같이 풀었던 문제였다.
답은 너였다. 해설은 나였다.
***
겨울입니다. 이번 회차를 쓰면서 많이 고민했어요. 서툰 마음을 깨닫는 아이의 과정을 어떻게 보여야, 공감하실 수 있을까. 하구요. 사랑이 별 건 아니잖아요. 나보다 상대방이 중요하지면, 그게 사랑이지. 그래서 그걸 깨닫기까지의 아이로 그려보았습니다. 이번 회차로 여러분도 조금은 마음이 간질간질 하셨으면 하네요.
늘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암호닉은 정리해서 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