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텅 빈 교실 안. 해는 점점 저물어 노을빛을 띄고 있었고, 잠을 청하던 흥수는 삭막한 정적이 감돌던 교실이 이상해 눈을 떴다. 벌써 끝났나. 하루종일 책상에 엎드려 있던 터라 온 몸이 쑤시다. 흥수는 책상 옆에 걸어두었던 가방을 꺼내 들었다. 아무것도 들어있지는 않지만 이건 '평범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기본적으로 등교를 할 때 가지고 오는 것 이므로 귀찮음을 뒤로하고 늘 꼬박꼬박 가방을 챙기는 흥수였다. 가방을 한 쪽 어깨에 대충 둘러매고 오른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흐트러놓았다. 그리고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미련없이 교실을 나가려고 할 때 였다.
「…미안.」
순간적으로 온 몸이 딱딱하게 굳는것을 느꼈다. 자신의 뒤에서 낮게 들려오는 목소리에 흥수는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몸의 온 세포가 제 자리에 멈춰버린 듯,흥수는 아무 말도,아무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
「미안해 흥수야….」
다시한번 들려오는 목소리에 흥수는 하,하고 낮게 쓴웃음을 지었다.뒤를 돌아봐 목소리의 출처가 누구인지는 딱히 확인 할 필요가 없다.전학온지 얼마 되지도 않은 자신에게 방과 후 까지 남아 미안하다고 할 인물은 없다. 예전 같았으면 미안하다고 하는 새끼들은 수두룩 했다. 왜 맞는지도 모르고, 그저 미안하다고만 되풀이하는 놈 들. 하지만 이미 그 쪽에서 손을 뗀 지 오래다. 그러므로 지금 자신을 부르는 사람은 2반의 회장이란 직위를 맞고있는 고남순이다. 라고 정의를 내린 흥수다. 하지만 이건 변명일 뿐이였다.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에도 그 목소리라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물론 지금도 변함없이. 허나 흥수는 안타깝게도 그 사실을 부정했다. 그런 새끼, 몰라. 누군지도 모르고.목소리 같은 것도 알 필요 없어.
타박타박. 평소에는 아무런 느낌을 미치지 못했던 발소리가 지금은 너무나도 큰 느낌으로 변해왔다. 흥수는 지금 이 상황이 못견디게 짜증이 났다. 이상한 감정들이 피어오른다. 자신도 주체 할 수 없는, 이상한 감정이 가슴 속에서 꾸물꾸물 올라온다. 흥수는 그런 감정들을 애써 제어하며 발소리가 가까워지는 쪽 으로 몸을 돌렸다.
「…….」
방금 전 까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던 삭막한 교실에 처음으로 온기가 돌았다. 어느 새 다가 온 건지, 두 발 자국 다가가면 닿을 거리에 남순이 서 있었다. 남순은 더 이상 다가가지 못했다. 마치 이게 너와나의 거리야. 라고 말 하는 것 같아 기 알 수 없는 느낌에 사로잡힌 흥수였다.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 지 몰라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던 남순은 용기를 내 시선을 올려 흥수에게로 향했다.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흥수의 모습에 흠칫 하며 다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까는 남순이였다.
흥수는 지금 자신의 앞에 고개를 숙이고 눈 한 번 제대로 못 마주치는 사람이 정말 자신이 아는 고남순이 맞는지 의심을 가했다.박흥수가 아는 고남순은 절대로 미안하다는 낯간지러운 소리를 입에 담지 않는다. 오랜 시간 같이 지내 본 경험자는, 끝을 모르는 자존심과 굽히고 들어가는 것을 찾아 볼 수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의 고남순은 다르다. 처음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편의점에서 도둑으로 몰렸을 때 아무 말 없이 남순이 깬 유리값을 배상 해 주고, 형이라며 당당히 소리쳐 남순을 끌고 나와 도와주었을 때도, 남순이 사사건건 저지른 일을 대신 변명 해 주며 이리저리 뛰어다녔을 때도. 남순은 한 마디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런 낯간지러운 말 쯤, 하지 않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으니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만으로도 온갖 감정이 샘솟았었다. 고맙다,박흥수. 미안하다 박흥수. 눈빛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근데.」
「…….」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박흥수.」
「내 이름 부르지마.」
「…….」
「존나 엿 같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지금은. 너는 내게 잊을 수 없는 기억들을 심어주었다. 잊으려고 해도 각인을 하듯 너는 불현듯 내 눈앞에 나타나 일렁거렸다. 차라리 나타나지 말지. 나를 끝 없는 바닥으로 내 던질 때, 너는 그저 방관만 해야 했다. 추락하는 나를 보며 욕을 하든, 비웃음을 짓든 너는 그저 바라만 보아야 했다. 그래야 더 이상 너를 봐도 가슴이 울렁이지 않을테니까. 그래야 너를 보는 시선이 이토록 뜨겁지 않을테니까. 그러나 고남순은 망가진 자신을 보며 헛바람을 들이쉬었었다. 아니야. 나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흥수야. 크게 뜬 두 눈은 쉴세없이 흔들리며 말 해 주고 있었다. 시간이 가면 갈 수록 추락했다. 끝도 없는 바닥으로. 다리가 점점 괜찮아져 왠만한 생활은 할 수 있다고 들었을 때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상하게 가슴 한 쪽이 먹먹 할 뿐, 별 다른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눈물을 흘리며 제 손을 꼭 잡아주던 누나를 볼 때, 그제야 실감이났다. 그리고 네가 지금 내 옆에 없다는 것도 실감이 났다. 네가 나를 찾아왔던 밤, 그 때 내게 뒷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지금쯤 달라졌을까.
무언가 결심을 한 듯 교복바지에 손을 꽂은 채 남순에게 한 발 다가 선 흥수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지 못하는 남순을 쳐다보았다. 눈가가 빨개진 것을 보니 화가난다. 눈이 일렁이는 것을 보니 분명 눈물이 아슬아슬하게 걸쳐있을거다.
「고남순.」
「…….」
「고개 들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화가난다.지금 흥수는 할 수만 있다면 터질 것 같은 감정들을 모조리 찢어버리고 싶었다. 하고싶었다. 지금 자신의 말에 감정이 복받쳐 눈물을 흘리는 남순에게, 사내새끼가 이런거에 우냐고, 웃음지으며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언제부터 나한테 미안하다는 말을 다 했냐며 장난 끼 어린 목소리로 화도 내고 싶었다. 하지만 할 수 없다. 지금의 박흥수는, 병신같은 박흥수는 할 수 없다. 아니, 할 수 없는게 아니라 못한다. 자신의 인생을 한 순간에 쓰레기로 만들어 버린 고남순을 박흥수는 용서해서는 안된다. 하면 안 된다.
「…흡,흐윽.」
「…….」
「미안해…,윽..미안해,흥수야.미안해.」
기분이 이상했다. 끅끅 거리며 그칠 줄 모르고 눈물을 쏟아내는 남순을 보며. 하염없이 미안하다고 되풀이하는 남순을 보며, 흥수는 기분이 이상해지는 느낌이었다. 왜, 왜 우는건데. 지금 울 사람이 누군데, 왜 니가 내 앞에서 울고 있는건데. 왜. 가슴 아프게 왜, 니가 울고있어.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안 하는 건지, 남순은 그저 흥수를 향해 미안하다는 말 만 되풀이 할 뿐이였다. 가슴이 답답했다. 남순이 서럽게 울고있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답답했다. 무언가가 가슴을 숨도 못 쉴 만큼 짖누르는 것 같았다.
「고남순.」
「후윽…끅,미안해.내가 ….」
남순은 말을 잇지 못 하였다. 남순에게 한 발 더 다가간 흥수가 그대로 남순의 어깨를 잡고 자신 쪽 으로 강하게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남순은 힘 없이 흥수의 품에 안기게 되었고, 남순은 지금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 하는 듯 울어서 빨개진 두 눈을 크게 떴다. 흥수는 자신보다 약간 작은 키를 가지고 있는 남순을 으스러질 듯 꽉 껴안았다.
허허 나중에 시간나면 이어쓸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