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오후가 되어서야 같은 방을 쓰는 동료가 돌아왔다."루한 아침부터 인터뷰 하러 갔다."와인이 진하게 묻은 하얀 티를 벗으며 동료는 태연하게 말했다."...""걔 이번에 스카웃 많이 들어올것 같더라. 감독님이 벌써부터 유난이셔.""..부럽냐?""어?""루한 부럽냐고."크리스를 한심하단듯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설령 그게 아니더라도 크리스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자신에 대한 냉정한 평가였을지도 몰랐다."..야, 됐어. 이 팀에 있는것만 해도.."동료는 그제야 크리스의 상황을 잡아낸듯 옷을 재빨리 입고 방을 나갔다. 일부러 상황을 피한것이 분명했다. 크리스는 두 손을 쫙 펴 앞뒤로 살핀 뒤 두어번 쥐었다 피는것을 반복했다. 공의 단단한 가죽이 생생히 다가왔다.-저녁은 다같이 먹자는 감독의 말에 크리스는 병원에 간다는 핑계로 슬쩍 호텔을 빠져나왔다. 루한을 보기도 감독을 보기도 껄끄러웠다. 깜깜한 밤임에도 거리는 밝았다. 사람들은 많았지만 아무도 자신을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간편한 티셔츠와 츄리닝 차림이라 그렇겠거니 생각하며 자연스레 발을 옮겼다. 쌀쌀한 가을 바람을 따라 돌아간 고개가 지나가던 버스에 쓰인 **야구 경기장에 머물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주머니를 뒤져보았지만 주머니에선 겨우 오백원 정도가 나왔다. 차비라도 좀 된다면 편하게 갈텐데. 아쉬운 입맛을 다신 크리스는 버스가 간 방향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이러나 저러나 시간은 많았으니까.저녁 시간이 끝나갈 즈음에 크리스는 야구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신이 아무리 용을 써도 갈곳이 여기밖에 없다는 사실은 허무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었다. 어차피 늦은 시간에 푸른 잔디를 구경하는것은 불가능한 일이어서 크리스는 그냥 경기장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조금 걸어서 경기장의 동쪽 입구에 도착했을때 크리스는 소년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은색의 차가운 펜스 위에 앉은 소년은 닿지 않는 다리로 헤진 운동화코를 바닥에 부딪히고 있었다."여기서 뭐하냐 꼬마야?"소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까만 머릿결에는 초저녁의 달빛이 반짝였고 소년의 눈에서 다른 빛이 반짝였다."어....""오늘 경기도 없는데 왜왔냐."크리스가 천천히 자세를 낮췄다. 부드러우면서 느릿한 동작에 소년은 곁눈질로 크리스를 따랐다. 펜스에 앉는쪽보다 그 앞에 쪼그려 앉는것을 선택한 크리스는 소년을 달랬다."집은 어디야."소년은 살짝 졸린듯 반쯤 감긴 눈을 하고선 인형처럼 앉아만 있었다. 크리스가 자꾸만 대답을 재촉하자 소년은 작은 입술을 옴짝거리며 시선을 회피했다. 죄를 지은 아이처럼 구는 모습에 크리스는 되려 미안해졌다."말 안할꺼야?...꼬마야?""....레이요.""레이..레이 여기 왜 왔어?"크리스는 애써 레이를 읽지 못한듯 떠냈다. 레이는 어린 울보처럼 목이 멘 소리로 말을 했다."그냥..오고 싶어서요..."크리스는 그 말에 바보같은 감탄사만 아-하고 소리낼 수 밖에 없었다. 레이는 크리스를 한번도 보지 않고 동그란 구슬같은 눈물만 떨궜다. 처음 야구장에서 만났을때의 그 느낌은 온데간데 없었다. 까만 먹구름이 해를 가린듯이 레이는 낮은 색을 띄었다."....죄송해요."레이는 펜스에서 내려왔다. 그에따라 레이의 까만 머리카락이 사르르 움직였다."..."레이는 하얀 옷인 소매를 끌어다 눈물을 닦았다. 좋지 않아보이는 면이 레이의 여린 눈가를 빨갛게 물들였다."갈께요.."펜스 앞에 쪼그린 정성도 무색할만큼 레이는 금새 등을 보였다. 처음 만난날의 주황빛 노을도 없이 걷는 뒷모습은 금방이라도 자신처럼 사라질것만 같았다."저기, 레이.."작은 목소리에도 레이는 기다렸다는듯 걸음을 멈추었다. 바람에 흔들리던 촛불하나가 바로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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