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거 내 마음대로 해석해도 돼요...?"
"네. 저 관심 있어요."
말을 하고 상균은 다시 정자세로 침대에 눕는다. 이번에는 그의 진심을 제대로 들은 것 같다. 심장이 이상했다. 방망이질을 한 듯 가슴이 마꾸 뛰었다. 그리고 기분이 좋음과 동시에 아무 여자한테나 저러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이 잠깐 솟구쳤다. 그 의심은 지금껏 보여준 자연스러운 친절함도 그렇지만 역시 여자들을 혹하게 만드는 이 얼굴에서 비롯된것이 아닐지. 턱을 괴고 김상균의 얼굴을 본다. 동그랗게 호선을 그린 이마에서 잘 떨어지는 콧대, 말랑한 염낭주머니 같은 입술과 긴 속눈썹을. 사람이 이렇게 잘생겨도 되나 싶었다.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얼마나 많은 호감을 받을지 궁금하다. 인기가 당연한 사람에게 사랑받는 기분은 어떤 기분일까. 그는 과연 사랑하는 기분을 느껴본 적은 있는 걸까. 20년만에 주체가 돼 본 로맨스의 역사에서 지대한 관심사로 떠오른다.
"으음..."
이런 다비드 조각을 가진 김상균의 유전자는 평생 많은 여자들이 따라다니며 보필할 상이다. 혹은 연예인으로 발탁되서 돈으로만 점철된 길을 걷거나. 어느 쪽이든 좋지만 나는 김상균이 되어 하루종일 얼굴만 감상하고 싶었다. 맨날 자긴 잘생겼다고 하던데 괜한 자부심이 아니다. 지인짜 그는 잘생기고 예뻤다.
"사장님 잘생겼어요."
"..넌 예뻐."
김상균은 무심결에도 진심인지 아닌지 모를 말들을 내뱉었다. 김상균이 몸을 이리저리 뒤스르며 잠꼬대를 했다. 웃음이 나왔다. 잠자면서 하는 말에 기분이 좋아져도 되나 싶었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김상균이 자면서 미소를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처럼.
***
아침에 일어나 눈을 비비니 김상균 집이었다. 허왕된 꿈이 아니라는 것에 감사하며 큰 방문을 열자, 김상균은 이미 앞치마를 두르고 식기를 부딪히고 있었다. 어제 그렇게 신랄하게 열병을 앓더니, 오늘은 좀 괜찮은 모양인가보다. 출근은 하실 수 있으려나. 괜찮냐고 묻기도 전에 그가 그릇을 흰 원형 식탁에 두었다. 열어 보니 파와 고추가 후끈하게 들어간 김치찌개였다. 이윽고 사장님이 반찬을 더 꺼냈다. 향의 아귀들이 내 코끝을 야금야금 집어먹는다. 하기사 카페 디저트를 그가 총 책임하고 있으니 요리를 못하는 게 아이러니지 싶었다.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젓가락을 들자, 김상균이 말했다.
"많이 먹어요."
"앗, 고맙습니다. 사장님 괜찮으세요?"
"응, 저 괜찮아요."
젓가락이 두 번 딱딱 식탁에서 부딪히는 것을 시점으로 나는 식사를 시작했다. 국을 넘기고, 밥을 뜨는데 술술술 식도로 미끄럼을 타는게 맛이 예술이다. 티비에 나오는 웬만한 셰프와 견줄만한 맛이었다. 또 한 번 나는 체면을 잊고 젓가락 숟가락을 놀렸다. 찬탄을 보내기도 전에 김상균이 걱정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특유의 짙은 눈썹이 아래로 뚝 떨어진다. 보니까 그는 밥도 못먹고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젓가락을 들고 발을 동동 굴렀다.
"맛이 어때요? 제가 집 밥을 누구한테 주는 건 처음이라.."
"맛있어요!"
엄지손가락을 들고 그의 노고에 칭찬을 건네자, 위로 힘껏 굳어졌던 근육이 스르르 풀어지며 입꼬리가 저절로 승천했다.
"다행이다. 저 진짜 긴장했어요. 맛 없을까봐."
김상균이 그제서야 숟가락에 밥을 가득 담아 펐다. 기분이 좋은지 웃으며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사장님. 코피터지게 그런 씹덕 터지는 행동 하지 마십쇼. 슈발. 벌써 오조오억번 코피가 흐른다. 좆됐다.
***
"이년아, 감히 외박을 해?"
"엄마 잘못했어요. 저도 성인이니까 자비점."
문지방을 넘자마자 엄마의 잔소리 우박이 주르르 쏟아졌다. 이럴 때는 대피가 최우선일터. 내 방에서 문을 잠가 방벽을 쳤다. 엄마는 기성세대의 보수파 답게 문 뒤에서 자꾸 책망하는 말씀을 되뇌였다. 잠긴 문 뒤에서 주저앉아 생각했다. 이제 썸인가? 어제 그 김상균이 한 일련의 말들을 꼽아보니 이제 어렴풋이 관계의 정의를 내려도 될 것 같았다. 그가 한 말과 내 심증을 결부하여 판단을 내린다. 이건 썸이다! 설레는 마음으로 화장실에서 머리를 흰 수건으로 대충 싸매고 이제는 시계말고 기능을 하지 않는 폰을 보았다. 썸이 너무 오랜만이라 그런지 무엇을 해야할지 모르겠다. 문지르다 카톡창을 넘기니 [사장님] 이라고 표시된 카톡이 떴다. 사장님과 카톡으로는 한 번도 대화를 해 본적이 없다. 그 이유는 전에 한 번 물어 본적이 있었다.
"사장님은 카톡 안하세요?"
"네. 저 카톡 안해요. 보긴 보는데. 음..."
"왜요?"
"그냥 너무 귀찮아서요. 번호 저장도 안 해요."
김상균에게 친목행위란 귀찮음이다. 오죽하면 그는 오는 전화란 전화는 다 받는다고 할 정도였으니. 한숨을 쉬었다. 이런 사람한테 카톡 보내면 열의 열 번은 까일 것 같았다. 카톡을 읽을리 없었지만 혹시나 하여 카톡창을 꾹 눌렀다.
[사장님 뭐하세요?] 1
괜히 나 혼자 설레발을 치며 카톡을 보내고 침대에서 발을 힘껏 찼다. 미친 답장오면 뭐라고 또 보내지. 꼬리를 문 수많은 답변의 선택지에 머리가 아득해진다. 답장 오기만을 기다리다 땀 때문에 이불이 축축했다. 워, 나 이렇게 긴장하고 있었나. 누구 때문에 이렇게 긴장해 본 건 야자를 잡으려 한 담임의 눈초리 이후로 처음이다. 커뮤니티 인XXX의 이성/사랑방 에 이거 그린라이트 인가요? 하고 올려볼려다 걱정이 되어 뒤로가기를 누르고 수많은 사례들을 꼼꼼히 정독했다. 그리고 내 상황과 대입하여 이 정도 수준이면 과연 몇 프로 확신의 썸인가를 마름질 하였다. 사장님 빨리 카톡 오세요...
"여윽시, 카톡 없네. 에이 사장 새끼야."
내 설레발이 무색해질만큼 오랜 시간 그는 답장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전화를 걸어보기로 결심한다. 뚜르르-- 아련하게 끊기어 들리는 통화음이 1분 넘게 지속된다. 혹시나 전화를 못 받은게 아닐까 두 번이나 전화를 해 보았지만 결과는 참담했다. 에이씨- 침대에 아무렇게나 머리를 처박으며 김상균을 원망했다.
"이럴거면 결근할 때 전화하란 말은 왜해?"
-뚜르르
전화가 왔다. 거의 반사적 신경으로 초록색 통화버튼을 누르고 귀에 갖다 댔다. 사장님 사장님이다!
"사장님!"
"나 김동한이다."
"아, 뭐야 김동한."
"너 무슨 일 있냐?"
"무슨 일 있기는..."
한껏 업된 나의 기분이 발 끝까지 추락한다. 나의 실망한 목소리에 더 기운 빠진 김동한이 왜에..하고 말꼬리를 늘렸다. 자신하고 술이나 한 잔 하자고 전화를 했단다. 지금 기분이라면 주량 3병은 넘는다는 김동한과 다이다이를 할 수 있겠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김동한에게 내 속마음을 실토하고 카톡을 보낸 나의 손가락을 자책하자, 늘 그랬듯 나를 뜯어 말렸다. 하지 말랜다. 무조건 하지 말랜다. 그런 사람과 연애, 특히 인기남과의 첫 연애는 무조건 독이라면서. 김동한은 내가 썸을 탄다 통보하면 늘 이런 일관된 반응을 보여주었다. 덕택에 내 우유부단함이 썸남들을 괴롭혀 한두 명 떠나보낸 게 아니었다. 지난날의 허송세월과 과오가 떠오르면서 김동한에게 정당한 의심을 가져본다. 남사친으로서의 걱정인지 이성으로서의 질투인지. 무슨 생각이냐 김동한.
"너 나한테 관심있냐?
"퉤."
"꺼져, 개새끼야."
하하하. 그럴 리 없지. 마음을 추스리고 쓰잘데기 없는 김동한과의 대화를 종료하려 작별인사를 건넨다.
"나 끊어도 되냐."
"넌 진짜."
"뭐."
"넌 10년전이나 지금이나"
"..눈치 없다 참"
헛소리야 미친놈. 나 멍청하다 인간아. 김동한은 끊을게란 말도 없이 일방적으로 통화를 종료한다. 이윽고 통보식으로 받은 끊김 통화음에 어이가 없어 휴대폰을 얼굴에서 떼고 낮게 욕을 읊조렸다. 김동한에게 카톡을 보냈다. 동한아 나 멍청이라 잘 몰라. 나 잘못한 거 있어? 어쩐지 기분이 찝찝해지지만 또 뭔가 나한테 서운한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지레짐작했다. 이상하네. 칼답의 귀재라 불리는 김동한이 3시간 넘게 카톡이 없다. 물론 김상균도 마찬가지였다.
***
"어!! 일찍 나왔네요"
"....."
그렇다. 나는 어제의 그 일화로 김상균한테 퍽 섭섭해졌다. 카페 문을 열자마자, 나에게 웃으며 인사를 하는 김상균을 무안하게 지나쳐갔다. 김상균의 손이 어깨 끝까지 올라왔다가 시무룩하게 내려간다. 그래, 아마 카톡을 확인도 안했을것이다.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그럼에도 이 섭섭해지는 기분은 뭐냔말이다. 나는 김상균의 시무룩함을 무시하고 김용국에게 걸레를 받았다.
"야, 똥개. 좋은아침."
"예스. 용국쓰."
"오빠 안하냐? 까불지 이게"
"용국오빠."
무미건조하게 답정을 시전한 나는 바닥을 닦기 시작했다. 사장님을 힐끔 쳐다보니 우리 둘을 이상한 눈빛으로 보고 계셨다. 왜 꼭 그런거 있잖은가. 강아지가 주인한테 버림받은 듯한 표정. 김상균의 미간이 구겨지며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어쩐지 김상균의 저 촉촉한 소눈을 보고 있자니 어제의 서운함이 용해되는 것 같다. 안된다. 이러면 안돼. 상대는 김상균이다. 썸에서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서 이정돈 희생은...
"왜 내 인사는 안 받아줘요..."
내 등 뒤에서 다가와 귀에 대고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
"아 코피 미친."
"네??코피 나요???"
나는 속으로 욕을 열 백번을 읊조렸다. 그냥 김상균이 너무 귀엽고 좋아서 코피난다는 표현을 뇌리 속으로만 씹고 있었는데 그걸 무의식중에 방출해 버렸다. 입을 헙 막는 순간과 동시에 사장님의 검은 동공이 외부로 손을 뻗친다. 김상균의 붉은 혀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며 입이 벌어진다. 휴지를 찾는 손길이 다급하다. 김상균이 허둥지둥 하다가 조리기구 몇 개를 떨어뜨린다. 뭐 겨우 코피 하나에 저렇게 허둥지둥이람. 사실 글의 표현이야 이렇게 하지만 입은 벌써 정도를 모르고 방방 뛰고 있었다. 김상균이 너무 귀여워서.
"어디 봐요, 어디."
"왜 내 카톡 안봐요."
"카톡 했었어요...?"
김상균이 그제서야 휴지를 구기고 휴대폰 창을 확인했다. 카톡 창을 확인하니, 그의 카톡창에 빨갛게 1256이라는 숫자가 쓰여져 있었다. 얼마나 읽음 처리를 안 한거야. 그 엄청난 숫자에 입이 벌어졌다. 사장님의 메시지 창에는 김용국과 권현빈의 아련한 카톡이 혼자 뒹굴었다. 권현빈의 마지막 카톡은 이거였다.
[아 사장님 진짜 카톡 더럽게 안 읽으시죠]
[현빈이 삐져또 흥]
권현빈 뭐냐고. 저 타자를 치면서 입을 헤실거렸을 권현빈을 생각하니 속이 메스꺼워진다. 김상균은 모든 카톡을 꼼꼼히 읽씹하고 마지막으로 내 카톡을 들어갔다. 그리곤 함지박만하게 벌어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예상하지 못했던 일인듯 손을 입에 대고 부끄러움을 감추기 바쁘다. 뭐야 이렇게 좋아할 거였으면서. 카톡창 한 번만 들어가주지. 괜히 김상균의 허리를 아프지 않게 툭 치자, 김상균이 다시금 말했다.
"아 미안해요, 제가 진짜 카톡을 잘 안해서..."
김상균이 카톡창을 다시금 닫더니 나를 보고 웃음을 터뜨렸다. 긴 밀걸레 막대 끝에 얼굴을 걸치고 나를 향해 다시 환하게 웃었다. 그리곤 말을 꼼꼼히 씹으며 내 볼을 아프지 않게 살짝 꼬집었다 놓아주었다.
"이거 때문에 제 인사 안 받았어요?"
"전화도 안 받으시고..."
"아, 어제. 일찍 잤어요. 너무 피곤해서."
김상균은 제 해명을 마치고 개운한지 다시 뒤를 돌아 카운터로 직행했다. 이미 읽씹된 내 카톡을 보고 뭐가 그렇게 좋으신지 아주 입이 헤벌심하게 벌어진다. 젠장. 이렇게 까지 했는데 이제 앞으론 카톡 보시겠지? 이제 다시 한 번 안보면 그 땐 작정하고 말할 것이다. 사장님. 연락 좀 하세요. 김상균은 카운터에까지 가서도 휴대폰을 쥔 손을 놓지 않았다. 답장은 못받았지만 결과는 해피엔딩인가. 팔불출처럼 휴대폰만 보고 실실대는 김상균이 귀엽다. 나도 한결 업된 텐션으로 커피를 만들기 위해 뒤를 돌자, 아름이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저를 마주보았다. 그리곤 가게 바깥의 창고 뒤로 나를 이끌었다.오래된 창고 문이 끽-하고 기분 나쁜 울음을 울었다.
"왜 그래 아름아."
바싹 마른 입술 사이에 자글자글 주름이 낀다. 이내 꾹 문 입술이 터질듯이 빨개졌다. 화가 났다는 증좌였을 터. 신경을 쓰지 않고 넘어가기엔 그 어둑한 아우라가 씹어먹을 듯 강렬하여 사뭇 공포가 느껴졌다. 아름이가 마침내 입을 떼는 것으로 김상균을 차지하기 위한 전초전이 시작되었다.
"야, 너 사장님이랑 왜 이렇게 친하게 지내?"
"어?"
"너 내가 사장님한테 차였을 때 위로까지 해줬잖아."
"그게...."
그렇다. 나는 아름이의 차임에 위로를 해주며 술 한 잔을 나누었던 여러번의 전적이 있었다. 그 때는 사장님에게 대한 호감 정도라 그냥 잘되라고 응원만 해주었다. 어차피 못 넘을 벽. 못 먹을 그림자의 떡이었으니. 지금은 다르다. 김상균이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확언을 받아냈으며 그렇게 된 이상 아름이와의 이 개운찮은 관계는 정리해야만 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말했다.
"나 사장님이랑 잘 될지도 몰라."
"너한텐 진짜 미안하다 야."
"됐어."
아름이의 눈이 붉어졌다. 이윽고 그 매운 눈초리에서 가련하게도 투명한 방울들이 점점 번져갔다. 그녀의 울먹거림에 이제와서 생뚱맞은 미안함이 들었다. 누구라도 아프지 않도록 사랑을 반으로 갈랐으면 좋았을 걸. 안쓰러운 마음에 미안하다고 나직히 말하는 시선과 아름이의 서러움이 공중에 맞아 떨어진다. 그녀는 자존심이 상한 듯 소맷부리로 얼굴을 쓱쓱 닦았다.
아름이는 생각해보면 굉장히 예쁜 얼굴이었다. 큰 눈에 오똑한 코. 김용국 권현빈을 제외하곤 카페 남자 알바생들이 모두 그녀를 눈독 들였을만큼 예뻤다. 그 정도의 인기녀가 사람을 갖지 못해 저렇게 애닳은 표정을 하다니. 어쩐지 회의감이 들었다. 아름인 내 말을 듣고도 끝내 항기를 들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직 김상균이 확실한 내 남자가 아니였으므로 만반의 준비를 갖춰야만 했다. 아니면 또
"사장님!! 내일 뭐하세요?"
저런식으로 나올테니. 발랄한 목소리가 카페 안을 울렸다. 소리가 얼마나 컸는지 일에 집중하고 있던 권현빈과 김용국도 뒤돌 정도였다. 아름이가 또 다시 아양을 피우며 김상균의 팔 안쪽에 제 팔을 쏙 붙였다....안쓰럽다고 한 건 존나 취소다. 너 뒤졌어 개년. 당장 다가가서 저년의 모가지를 꺾으리라. 결연하게 살벌한 생각을 하며 다가간 순간, 김상균은 팔을 빼고 다시 식탁보를 닦았다.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자로 잰 듯한 철벽이었다.
"시간 없어요."
"저 아직 뭐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시간 없어요."
"무슨 일 하신다고 시간이 없는..."
"저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아름이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그려진다. 김상균은 테이블보에서 서서히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이윽고 먼 거리에 있는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검정 구두소리가 급격하게 가까워지며 김상균이 다가왔다. 내 어깨 위로 따뜻한 감각이 올라왔다.
"그래서 안돼요."
내가 뒤를 돌자, 물을 부어주고 싶을 정도로 빨개진 김상균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아름이는 뒤집어졌다. 그대로 두 걸음 후퇴하더니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평소 같았으면 걱정되서 손부터 내밀었을 매너남 김상균이 뒤도 안 돌아보고 카운터로 돌아간다. 어, 어서오세요! 말까지 더듬는다. 김상균은 제 부끄러운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계산실수까지 하고 말았다. 그 홍당무 같은 얼굴에 내 심장도 몽글몽글해진다. 권현빈과 김용국이 사장님이 미쳤다며 손가락으로 골뱅이 표시를 했다. 아름이는 결국 조기 퇴근을 진행하고 만다.
"야, 현빈아. 오늘 우리 사장님 피부가 너무 빨갛지 않냐."
"진심 인정. 아깐 폰만 보면서 존나 계속 실실 웃어대더니. 나 미친 줄 알았음"
***
카페 직원들 왈. 김상균의 이상현상은 그걸로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나는 잔을 집기 위해 찻장에 손을 뻗었다. 그러나 내 짧은 한 쪽 다리는 아련하게 공중에서 바둥거렸고, 내 손은 잡을 듯 말듯 찻잔을 애태웠다. 도와줄까? 토스트를 만들고 있던 김용국이 다가온다. 그리곤 한 쪽 손을 내 어깨에 올리고 모로 튼 몸을 내 몸에 갖다 붙였다. 김용국의 숨이 느껴질 가까운 거리였다. 뭐 아무 감정이 없다면 아무도 신경쓰지 않을 상황이었다. 딱 한 사람.
"뭐합니까."
"네?"
김상균만 빼고. 그는 삐딱하게 벽에 기대어 나와 김용국을 쳐다보았다. 단호하게 팔짱을 낀 김상균의 얼굴이 한껏 일그러져 있었다. 그 눈치빠른 김용국도 김상균이 나에게 호감이 있다는 사실은 몰랐나 보다. 냉정한 목소리에 겁을 집어 먹은 탓일까, 김용국이 내 어깨를 더 세게 쥐었다. 그리곤 정말 무구한 표정으로 김상균에게 물었다.
"얘 키가 쪼꼬매서 제가 찻잔 좀 내려주고 있었는데. 왜 그러세요?"
"아니이...그, 거기."
김상균의 손이 공중에서 갈팡 질팡한다. 내 어깨에 있는 김용국손을 가리킬 듯 말 듯 주저하였다. 어느 누가 눈치를 못 채겠는가. 눈치 빠른 김용국이 복부를 잡고 한 바탕 웃음을 흔들었다. 김용국이 내 어깨 위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곤 김상균에게 다짐 받듯이 되물었다.
"이제 됐죠, 사장님?"
"네에...아, 아니 일하세요 일!"
김상균의 얼굴이 귀까지 빨간 꽃을 피웠다. 헛기침을 두어 번 한 김상균이 황급히 카운터를 나갔다. 김용국과 권현빈이 그 모습을 보고 배를 잡고 미친듯이 처웃었다. 현빈이는 엎드려 테이블 저변을 주먹까지 치면서 웃음을 쏟아낸건 비밀. 비밀인데 왜 말해요? 김상균 네 얼굴이 말하고 있어요. 권현빈이 김용국의 어깨를 흔들며 잡담을 나누었다.
"형, 사장님 표정 봤어요? 나 조온나 웃겨 디지는 줄 알았어요. 아핰핰핰"
"아 그러게. 얼굴에 써 놓지라도 말던가."
***
마침내 퇴근이다. 대충 정리를 갈무리라고 유니폼을 걸자, 피곤이란 것이 훅 쏟아졌다. 겉옷을 대충 걸치고 휴대폰 함을 보니 김동한에게 문자가 몇 통 와있었다. 오늘은 술 좀 마셔달란 소리였다. 어제의 김동한에게 보낸 카톡은 여전히 안읽씹 된 상태로. 뭐. 김상균이랑 많이 놀았으니 오늘 하루쯤은 내 남사친에게 시간을 쏟아도 되겠다 싶었다. 손가락을 놀려 대충 알겠단 답장을 보내니 10초도 지나지 않아 김동한에게서 칼답이 왔다.
[나 너네 카페로 간다]
[네가 왜?]
이 놈은 뭐 퇴근시간에 맞춰서 오는지 모르겠다. 안 그래도 질투 심한 김상균에게 또 무슨 눈초리를 받을려고. 아이씨, 술 몰래 마셔줄려고 했는데. 통화로 전화를 걸려고 보니까 하필이면 또 바테리가 5퍼밖에 되지 않는다. 아 미친. 이놈의 휴대폰은 정말 시계기능 밖에 없나. 왜 꼭 중요할 때만 도움이 안되는지 묻고 싶다. 대충 목도리를 걸고 나가자, 가게 벽 뒤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옆으로 몸을 돌리자, 익숙한 그림 하나가 한파 서린 흰 입김을 둥글게 불고 있었다. 그림은 자주보던 갈색 더플코트가 아닌 얇은 검정색 항공점퍼와 스키니진을 입고 있었다. 이렇게 춥게 입고 누굴 기다려..
"야."
"어? 김동한."
"전화 왜 안받냐."
"아 바테리가 없어서."
세상에 이 한파에 이렇게 춥게 입고 오다니. 나는 서둘러 내가 걸고 있던 목도리를 벗어 김동한의 목에 둘러주었다. 야 이자식아. 뭐이렇게 춥고 입고 다녀. 매서운 추위에 굴복한 김동한의 코가 빨갛다. 분명히 피부가 따가울텐데 김동한은 날 보며 실없이 웃고 있었다. 눈꼬리까지 샐쭉히 접으면서 웃는게 내가 김상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필시 그에게 반했을 웃음이었다. 김동한이 목도리를 둘러주는 내 손목을 아프지 않게 그러쥐었다. 그리고 내 얼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와서 낮게 속삭였다.
"나 추워."
"그래서?"
"안아주라."
질겁한 내가 반사적으로 어깨를 때렸다.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저런 망언을 하냔 말이다. 너랑 내가 알고 지낸 사이가 몇년인데 징그럽게! 김동한은 눈치가 빠르다. 금방 내 표정을 읽고 아까보다는 조금 더 개구진 웃음으로 말했다.
"됐어. 징그럽게 안긴 뭘 안냐. 술이나 마셔줘. 돼지야"
뭐야 이샛기, 또 장난이야? 나는 김동한의 허리를 아프지 않게 때렸다. 동한이가 간지럽다는 듯 허리를 구겼다. 그 때였다. 누군가 김동한과 나의 사이를 뚫는 목소리가 들린다.
"나도 너 기다렸는데."
"....."
***
1편 2편 아님 완결이에요!
2편으로 나뉜다 싶으면
다음편은 상균이와의 달달한 장면 하나도 없을 것 같은 그런 예감이...ㅎㅎ ㅠ
암호닉 : [베리] [뽀쨕] [빙구] [Qsi] [상뀨니] [끝의 시작] [뿜뿜이] [1216]
뭐 이정도는 스포 아니겠죠? 다음편엔 상균이와의 달달한 장면이 안나옵니다ㅠㅠㅠ(싸..싸울지도)
이제 2편 남았어요! 댓글 달아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항상 흐뭇하게 읽고 있어요.
그리고 관심없었는데 제 글 읽고 상균이만 보면 설렌다고 하셨던 비회원님...저 광대 폭발하는 줄 알았읍니다..
영업력이 샘솟더라고요...(입덕해)(입덕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