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를 밀쳐내려는 성규의 손길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푸스스 웃은 두준이 무심코 앞을 처다봤다. 저 멀리 덤불 사이로 어스름히 보이는 한 남자의 인영이 보였고, 그것이 우현이란 것을 두준이 알아차리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남우현? 무슨 낯짝으로 여길. 이를 악 문 두준이 우현을 무섭게 쏘았다. 여길 왜 와, 당신이.
‘여전히 귀엽긴. 아직도 날 질투하고 있어?’
자신을 쏘아보는 두준을 느낀 우현이 두준이 볼 수 있도록 또박또박 입모양으로 말했다. 처음에는 알아듣지 못 한 건지 입으로 조용히 되씹던 두준이 이내 알아듣고는 이를 부득 갈았고, 우현에게 정신이 팔려 두준의 팔 힘이 잠시 빠진 사이 성규는 품에서 쏙 빠져나왔다. 윤두준, 이게 형한테 자꾸 덤빈다?
“형. 혹시 형한테 남우현이란 사람 온 적 있어요?”
“남우현..? 너가 우현님을 어떻게 알아?”
우현니임? 골 때리네. 그 호칭은 또 뭐야. 헛웃음을 지은 두준이 왜인지 모르게 풀이 팍 죽은 성규의 어깨를 잡고 흔들거렸다. 형, 남우현 만나지 마요. 그 사람 나쁜 사람이야. 만나면 안돼. 응?
“씨잉, 너 진짜 짜증나!”
“뭐야, 갑자기 왜요.”
“아까부터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감 놔라 배 놔라! 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거라고!”
“아, 어쨌든. 남우현은 만나지 마요. 응? 걔가 어떤 애냐면-”
“시끄러! 나 갈래. 윤두준 너 다음부터 나한테 오지 마!”
그리고 너- 우현님 욕하지마. 기생집으로 뛰어들어가다 말고 얼굴을 붉히며 빽 소리친 성규가 달음박질쳐 쌩하니 사라졌다. 뭐야 저 형. 왜 저래. 골 때린다는 표정을 지은 두준이 싱글 웃고 있는 우현을 한 번 쏘아보곤 그도 쌩하니 사라졌다. 하- 김성규 귀엽네.
“이런 식으로 나오면 내가 더 안달나잖아. 너무 귀여워서.”
사실 두준이 성규의 어깨를 흔들거리며 제 욕을 시작하려 했을 때만 해도 우현의 얼굴은 급속도로 팍 굳어 있었다. 안 그래도 성규 머리 복잡할 텐데 저러면 내 계획이 다 수포가 될 수도 있어! 입술을 깨물며 성규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성규의 입에서 나온 말에 잠깐 멈칫 했다. 씨잉 이라니. 그런 귀여운 언사는 다 어디서 배워 오는 거야. 다시 발을 땅바닥에 붙힌 우현이 결국 맨 마지막 말을 듣고 남몰래 웃음을 죽였더랜다. 김성규, 진짜 넌 예부터 그랬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
화끈거리는 얼굴을 잡고 방에 들어온 성규가 요를 뒤집어쓰고 누웠다. 내가 왜 그랬지? 난 분명 우현님이 싫었는데에- 으으. 복잡해진 머리 옆에 자신의 손을 둥글게 말아쥐고 갖다댄 성규가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또 다른 사람 입에서 우현님 소리가 나오는 건 죽어도 싫어! 왜 그러지? 씨- 나쁜 사람. 내 머리만 죽어라 복잡하게 해놓고.. 오지 말라니까 또 오지도 않지. 진짜. 됐어, 이제 나도 생각 안해.
“그나저나 머리만 더 복잡해졌네... 하- 손님 맞을 준비나 해야겠다.”
아른하게 떠오르는 해를 바라본 성규가 결국 잠을 자지 못해 멍해진 머리를 두드리며 요를 개켰다. 꼼꼼히 분을 바르고 있던 중 갑자기 문이 드륵 열리며 성종의 새된 목소리가 들렸다. 규형, 오늘도 꼭두새벽부터야. 손님 들어가셔요! 손을 까딱이며 성의없이 대답을 해 보인 성규가 손님이 들어오는 듯 약간 무거운 발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돌렸다. 며칠 만에 습득한 눈웃음도 잊지 않으며. 안녕하세요- 으..어?
“오랜만이구나, 성규야.”
“우, 우현니임?”
순간 으어? 하는 멍청한 소리를 내보인 성규가 우현을 멍하니 쳐다봤다. 뭐야, 방금 제가 한 말 때문에 헛것이라도 보는 건가. 눈을 비비던 성규의 손을 탁 챈 우현이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앉았다. 왜, 다신 오지 말란 네 말을 듣지 않고 온 것에 언짢느냐?
“아, 아닙니다. 그 때의 제 무례한 언사는 사과드리겠습니다.”
사실 제가 우현한테 이래라 저래라 소리친 것은 돌이켜 보면 손님에게 엄청난 결례였다. 오히려 저를 벌하지 않은 우현에게 제가 무릎이라도 꿇고 감사하다고 빌어야 할 터. 그런데도 불구하고 다시 웃으며 저를 대하는 우현에 성규는 가슴 한구석이 괜시리 알싸해졌다.
“성규야. 이것을 보거라.”
“이, 이것이 무엇입니까?”
“네 글은 읽을 줄 알겠지. 한 번 읽어보거라. 내 꽤 재밌게 읽었던 서책이니.”
목하열애담. 원본이 아닌 필사가 된 책인듯 깨끗한 표지에 정갈하게 쓰여 있는 다섯 글자를 성규가 조용히 읽었다. 뭔가 익숙하면서 따뜻한 제목이다. 허, 헌데 이것을 어찌 저에게 주십니까?
“그냥, 네가 이것을 읽으면 좋을 것 같았다. 내일 이 시경에 다시 올 터이니 그때까지 다 읽어 놓도록. 난 이만 가보지.”
“에? 벌써 가시는 겁니까?”
“난 네게 그것을 전해주려 왔을 뿐이다. 그럼.”
“저, 우현님!”
밀쳐내던 그때와는 또 사뭇 다르게 저를 계속 잡아오는 말꼬리를 들으며 진짜 종잡을 수가 없어. 라고 생각하며 우현이 뒤를 돌았다. 왜 부르느냐, 성규야.
“오, 오늘은 어찌하여 경어체이십니까?”
“...어?”
“지난 번 저를 찾으셨을 때는 반어이셨지 않습니까. 헌데 왜 오늘은 경어체를 쓰시는지..”
은근 맘에 걸렸던 듯 눈썹을 팔자로 추욱 내리며 묻는 성규에 우현은 푸- 하고 낮은 웃음을 뱉었다. 성규야. 되돌릴 수 없다면 처음 시작하는 게 좋을 때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 두거라. 초면에 반어는 경우가 아니지 않느냐?
“에?”
“내일 올테니 그 책을 꼭 다 읽어 놓도록 하여라. 내 꼼꼼히 확인할 것이야!”
문을 탁 닫고 나간 우현을 멍청히 바라보던 성규가 목하열애담. 이라는 책에 눈을 돌렸다. 어딘가 익숙한 이 기분, 뭘까라고 생각하며 성규가 첫 장을 폈다. 원체 책 읽는 것을 즐거이 하던 성규였기에 오랜만에 보는 책이 더욱 반가웠다. 그림쟁이 장동우와 지체 높은 양반집안 호원의 이야기라... 음? 장동우, 이호원?
“성규야, 뭐 해?”
아, 도, 동우님? 제 방문을 열고 들어오는 동우를 보며 성규가 황급히 책을 닫았다. 여담이지만, 처음에 성열과 같이 있길래 저와 같은 기생인 줄 알았던 동우는 알고보니 기생집 주인인 호원의 정인이었더랜다. 남몰래 호원을 연모하고 있었다던 성종이 그 사실을 알게 된 후 저에게 울음을 쏟아부으며 얘기했던 말을 들은 이후로 성규도 안 사실이었다. 아, 어쩐지 기생치고는 밝아 보이더라니.
“또, 섭섭하게. 그냥 동우라 하라 했잖아.”
“하..하지만.”
“한 번만 더 그러면 나 진짜로 화낼거야. 근데 뭐 하고 있었어?”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니, 아니야.”
흐응-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던 동우가 성규의 발 밑에 엉거주춤 깔려 있던 책을 발견하고 슬금 다가가서 확 채갔다. 이게 뭐야, 어? 목하열애담?
“아, 이 책을 아십.. 아니, 알아? 우현님이 주고 가셨어.”
“..성규야, 너 이 책 누가 썼는지는 아니?”
“아니. 필사본이라 그런지 그런 건 안 적혀 있어.”
당연히 필사본이겠지- 원본은 누구누구가 호원이랑 나한테 선물로 줬으니까. 말을 꾹 삼킨 동우가 성규를 향해 웃어보이며 책을 돌려주었다. 그래, 열심히 읽어. 난 이만 갈게.
“으응-”
문을 탁 닫고 나온 동우가 한달음에 호원과 제 방으로 달려가 농 속에 고이 모셔둔 서책을 꺼내었다. 약간은 빛바랜 책 위에 쓰여있는 깔끔한 글자. 목하열애담. 그리고 그 밑에 조그마하게 쓰여진 세 이름.
“김 성 규.”
남우현- 머리 좀 쓰네? 피식 웃으며 다시 책을 넣은 동우가 아직도 자는 호원을 흘끔 바라보며 방문을 나섰다. 이호원 요즘 나한테 관심이 없나. 내가 품에서 빠져나가도 모르고.
“장동우, 동작 그만.”
문을 열고 나가려던 동우가 호원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발걸음을 뚝 멈췄다. 호, 호원아. 안 잤어? 자긴 누가 자. 누가 내 허락도 없이 일어나래, 어? 좀 혼나야겠네?
“으아, 호원, 워나!”
동우의 발목을 잡아채 휘청거리는 동우를 폭 안은 호원이 으르렁거리며 동우의 눈을 마주했다. 장동우, 너 오늘 많이 혼난다. 하, 하하. 어색하게 웃는 동우의 목소리를 끝으로 그들의 위에는 두꺼운 요가 덮였다.
*
안녕히 가십시오! 인사를 하기가 무섭게 제 옷을 추스린 성규가 목하열애담을 집어들었다. 제 기대를 넘어서 꽤 재밌는 책이 계속 읽지 않고는 배기지 못하게 만들었다. 달콤한 장면에선 저 혼자 헤헤 웃기도 하고 슬픈 장면이 나오면 눈물을 글썽이며 매다는 모습이 꽤나 웃겼다. 오죽하면 소준과 성종이 그 모습을 바라보다 말고 동우에게 쪼르르 달려가 말했을까. 형아, 성규형이 미쳤어요!
*
“프- 다 읽었다!”
결국 어젯밤에 이어 오늘 밤도 꼴딱 샜다. 손님들 상대하랴- 목하열애담 다 읽으랴. 눈을 비비며 한 손으론 허리를 통통 두드린 성규가 다시 어스름히 피어오르는 해를 지그시 바라봤다. 우현님이 이쯤엔 오신다고 한 것 같은데.
“규혀엉.. 손님.”
하암- 하품을 하며 손님 소식을 알린 성종이 졸린 눈으로 제 방으로 들어갔다. 이성종 요새 저거 좀 한가하네? 동우형한테 손님 좀 붙이라고 해야겠어.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성규가 이내 우현이 자신의 방으로 들어서자 자세를 가다듬었다. 안녕하세요-
“그래, 책은 읽어보았느냐?”
“예. 참으로 재밌는 책이었습니다.”
“그 책의 마지막 부분, 기억하느냐?”
“타국으로 떠나던 동우가 무수한 화살에 꽂혀 죽는 사람을 호원으로 오해하고 2년 동안을 돌아오지 않다가 결국 돌아온 곳엔 여전히 호원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내용 말씀하시는 겁니까?”
말솜씨가 뛰어나구나. 살풋 웃은 우현이 성규에게 말했다. 넌 그 장면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라 생각하느냐?
“음.. 단순히 동우를 2년이나 기다리던 호원대군의 순애보 같은 사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마는.”
예? 어, 그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눈을 반짝이면서 물어보는 성규에 우현은 나름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내 생각엔 말이다.
“동우는 제 자신의 눈만을 믿고 2년 동안이나 호원을 기다리게 했어. 때로는 제 자신만의 눈을 믿지 말고, 타인의 눈도 빌려 봐야 한다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난.”
“예?”
“말이 너무 어려운게냐? 쉽게 말하면 자신의 눈만을 믿지 말고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들어 볼 줄 알아라- 이거지. 읽느라 수고했다. 여기..”
됐습니다. 돈을 건네는 우현의 손에 괜히 부루퉁해진 성규가 돈을 거부하고 일어섰다. 좋은 책 보여주셔서 감사한데 돈까지 받을 순 없죠.
“..그래, 그럼. 다음에 다시 오마.”
성규의 마음이 괜히 싱숭생숭했다. 자신의 눈만을 믿지 마라? 우현이 저에게 그런 말을 해주는 의도가 무엇일까. 단지 책을 읽고 담소를 나누기 위함인가. 프- 한숨을 흘린 성규가 나중에 저를 찾아올 동우가 볼 수 있도록 문 옆에 '죄송하지만 오늘은 몸이 좋지 않아 손님을 받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모든 손님에게 전해줘.'라는 쪽지를 내걸고 누웠다. 오늘 하루 정도 돈 못 벌면 어때. 일단 잠이나 자야지.
작가의 말 |
한 가지 말씀드릴 게 있다면 목하열애담은 실제로 존재하는 팬픽입니다! 제가 굉장히 좋아하는 픽 중 하나죠.. 흐흐 달달해서 죠음. 죠스바 죠아쥬금. 난 사실 기생사가 아직 해피로 갈지 새드로 갈지 갈피를 못 잡겠어.. 으앙 왜냐하면 원래는 해피로 잡았는데 요즘은 새드가 끌리기 때문에! 죠스바는 요즘 우울우울해요. 암호닉 확인 강냉이/쭈규리/바카루/핑까루/찹쌀떡/꾸꾸미/감성/우동/31/써니텐/푸딩/설이/스마트폰/연두/익명인/파리/빵형/규리다규/용마/비회원/다락방/퓨어/감규/현대문학/규니/초코푸딩/새우깡/크림빵/김빤찌/다락방/김성귱/수산물/몽몽몽/케헹/오일/3분카레/석류/우현성규/지나가던 나그네/즈치/뀨뀽/ 아참 당부의 말씀 한 가지 암호닉 신청하시고 댓글 안 다시는 분들이 좀 계세요! 메일링은 암호닉 계신 분들께 전부 다 가긴 하지만 같이 가기로 했던 번외(글잡담엔 올라오지 않습니다. 오직 메일링에만 포함되어 있는 특!전!)과 꽁쳐뒀던 단편 3편은 제 기준으로 댓글 꼬박꼬박 잘 다신 분들께만 갈겁니다.ㅇ<-< 암호닉은 8화까지만 받아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