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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THE PRINCESS









철저한 귀족사회. 그들이 살고 있는 세상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이것이 아닐까. 절대왕정 속 오직 귀족들만이 상류에 속하는, 지독히도 상하적인 관계의 귀족과 평민들. 귀족들은 평민들과 말도 섞지 않으며, 눈을 마주하지도 않는다. 만일 그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 평민은 즉시 밑바닥으로 내쳐지리라. 시기를 셀 수 없을 때부터 전해져온 왕정체제는 평민들이 어떠한 반항심을 갖지도 못할만큼 당연시 되었다. 쿠데타를 입 밖에 내는 순간, 모든 것을 잃게 될 테니.



온 나라를 가진 왕에게는, 나라 최고의 미모와 지성을 갖춘 왕비와 그 왕비를 쏙 빼닮은 아들과 딸이 있었다. 아들, 석진은 수려한 외모와 아버지의 후대를 이을 능력, 야망을 가진 장남이었다. 석진도 왕에게는 귀한 아들이었지만 왕은 공주를 누구보다도 아꼈다. 덕분에 손에 물 한번 묻히지 않고 곱디 곱게 자랐다. 뽀얀 피부에 동그랗고 큰 눈을 가진 여주는 어떤 사람이라도 홀릴 수 있는 미인이었다. 방긋 웃는 모습은 귀여움이 묻어나는 얼굴인데도, 어딘지 모르게 색기가 흘렀다. 그 묘한 분위기에, 왕실을 호위하는 근위병들은 자진하여 일을 그만두기도 하였다. 공주에게 더 큰 마음을 품었다간, 자신들의 목이 잘려나가기 십상이니.



올해로 스물 둘. 제법 성숙함까지 묻어나는 나이가 된 여주는 가식적인 왕실에 질려가고 있었다. 매일 아침마다 차려입는 긴 드레스와 구두. 머리를 옭아매는 무겁고 값비싼 장신구들. 어긋나지 않아야 하는 걸음걸이, 움직임. 모든 것들이 공주의 몸 전체를 옭아매었다. 지친 몸으로 아침식사를 마친 여주가 방에 들어와 소파에 털썩 앉으니, 노크소리와 함께 호석이 들어와 여주에게 고개숙여 인사한다.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아니. 완전 피곤해."

"다행히 오늘은 저녁 일정만 있으십니다."

"그것도 없애면 안돼?"

"가족 분들과의 만찬입니다. 친척 분들이 다 오실 겁니다."



아, 개같네. 호석이 아닌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금세 왕의 귀에 들어갈 공주의 비속어. 한두번 듣는 것이 아닌 호석은 그저 담담히 공주의 옆에 서있었다. 머리에 잔뜩 꽂혀있는 악세서리를 빼던 공주가 호석이 팔에 걸고 있는 옷들을 보며 뭐냐 물으니, 호석은 갈아입으실 옷입니다. 하고 공손히 대답한다. 항상 있는 일이지만 항상 귀찮은 일이었다. 여주가 싫은소리를 내며 눈을 꾹 감자, 호석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방문 밖에 대기하던 여자 시중들을 불렀다. 여전히 소파에 널부러진 채 옷시중들이 머리를 만지는 대로 가만히 있는 여주를 잠시 보다, 방 밖으로 나오는 호석이다.



20분 정도가 흘렀을까, 아직도 방 밖으로 나오지 않는 시중들에 호석이 손목시계를 한 번 쳐다보고 노크를 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대답이 없는 공주에 호석은 조용히 문을 열었다. 혹시 했던 일이 벌어졌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여주는 온데간데 없고, 울상을 지은 옷시중들만 호석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끔 있던 일이라 놀라지도 않은 호석은, 아마 여주가 열고 나간 듯 보이는 작은 쪽문을 힐끔 바라보곤 말했다.



"오늘 있었던 일을 입 밖에 내는 순간,"

"..."

"너희를 아는 모든 이들의 혀가 잘려나갈 것이다."













몰래 왕궁 밖으로 나온 여주는 오랜만의 나들이에 기분이 들떴다. 평민들과 비슷한 청바지에 후드, 모자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고 다녔다. 사람들을 살펴보기도 하고, 옷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버블티를 하나 사서 야외 테이블에 앉은 여주는 말캉한 펄을 야무지게 씹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교복을 입은 학생들, 정장을 입고 바쁘게 걷는 직장인들, 길거리에서 악세사리를 파는 노점상들.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다, 카페 맞은편의 약국을 발견했다.



'더 드시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내가 괜찮다니까? 잠이 안 오는 걸 어떡하냐고. 아버지께 말씀드릴거야.'

'전하께서 공주님께 수면제 처방을 금하라고 하셨습니다.'



여주는 약국의 하얀 간판을 보니 며칠 전 왕실 주치의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여주는 종종 수면장애에 시달렸다. 하지만 너무 자주 수면제를 복용하다 보니 몸에 이상이 생겨 왕이 수면제 처방을 금하고 잠이 오게 하는 따뜻한 차 종류를 밤마다 들이게 하곤 했다. 여주에게는 남모를 고민이자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병이었다. 멍하게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버블티는 바닥을 보였다. 옆의 쓰레기통에 던져넣은 여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건너편의 약국으로 향했다.



"어서오세요."



여주는 나름 얼굴이 알려져 있는 터라, 무슨 괴소문이라도 날까 싶어 모자를 더 눌러쓰고 약사가 서있는 카운터로 다가섰다. 어디가 아프세요? 낮은 남자 목소리가 들리고, 테이블만 바라본 채 여주가 작게 웅얼거렸다. 수면제 주세요. 잘 듣지 못한 약사가 고개를 숙여 키를 맞추자, 그 움직임에 흠칫 놀란 여주가 뒤로 살짝 물러나며 수면제요. 하고 좀 더 크게 말한다.



"아, 수면제요?"

"네."



수면제를 달라고 하는 소리를 분명히 들었을텐데, 약사는 그저 멀뚱히 그 자리에 서있었다. 의아함에 여주가 고개를 들어 약사와 눈을 맞추자, 여주의 얼굴을 보곤 약사가 흠, 하는 소리를 낸다. 설마 알아챈건가 싶어 여주가 당황하지 않은 척 모자를 더 깊게 썼다. 약사의 하얀 가운 가슴께에 '김남준'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남준은 다 알겠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여주를 바라보았다.



"고딩?"

"..네?"

"공부 힘든 거 아는데, 수면제 몸에 안 좋아요. 따뜻한 차 같은 거 마시면 잠 잘 올거에요."

"아니,저.."

"그리고 수면제는 약국에서 처방 안 돼요."



남준의 입에서는 전혀 뜻밖의 말이 나왔다. 남준은 여주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저 수면제를 사러 온 고등학생으로 착각한 것이다. 이런 경우가 적지 않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여주는 처음 들어본 '고딩'이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 지 몰라 네? 하고 되물었지만, 이어지는 남준의 말에 학생이라는 뜻인가보다 어림짐작했다. 뜻을 알아채고 아니라 부정하려는데, 계속되는 남준의 목소리가 퍽 다정해서 입을 꾹 다물었다.



"..."

"..이건 조금만 줄테니까, 정말 안 되겠으면 먹어요."

"..."

"힘들면 털어놓으러 와요. 다 들어줄게요."



남준은 말없이 서있는 여주가 안쓰러워 약한 성분의 수면유도제를 쥐어주었다. 여주가 이 나라 왕실의 공주라는 사실은 꿈에도 모른 채. 여주는 약국을 조용히 나와 걸었다. 아까보다 약해진 햇빛이, 왕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 했다. 왕실로 돌아가는 짧지 않은 시간동안, 여주는 약을 쥐어줄 때의 남준의 온기가 계속해서 느껴지는 듯 했다. 작은 약봉투를 만지작거렸다.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공주의 방 안을 울렸다.
















잠시 가벼워졌던 공주의 몸이 다시 무거워졌다. 온 가족들이 모이는 저녁 만찬 준비 때문이었다. 감쪽같이 방으로 돌아온 여주를 본 호석은, 어떠한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별 탈 없이 돌아온 것이 다행이다, 속으로만 생각했을뿐. 반을 묶고 반을 늘어뜨린 머리에 빛을 받아 반짝이는 장신구들을 끼워넣고, 차분한 딥블루색의 드레스를 입은 여주는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온 몸으로 풍겼다.



"가시죠."



호석의 뒤를 따라 들어간 공간에는, 넓은 테이블에 둘러앉은 친척들과 부모님, 석진이 보였다. 얼떨결에 가장 마지막에 등장해버린 여주는 쏠리는 시선에 걸음을 서둘러 석진의 옆 자리에 앉았다. 앉자마자 싱긋 웃으며 어른분들의 인사를 받았다. 금세 앞에 놓여지는 샐러드를 겸한 스테이크를 천천히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든 여주가 작게 썰어 입에 넣었다. 가식적인 사람들 사이에서 체할 것 같은 기분에 제대로 배를 채우지도 못했다. 그 와중에도 간간히 웃음소리가 들리는 풀어진 분위기 속 왕이 목을 가다듬었다.



"놀라지 마."

"뭐?"

"지금부터 아버지께서 하시는 말."



옆에서 여주의 손을 테이블 밑으로 살짝 잡으며 조용히 말하는 석진에, 여주는 의아한 듯 되물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알게 되었다. 가히 충격적인 왕의 발언으로.



"공주를 혼인시키겠다."



그야말로 날벼락이 따로 없었다.
















"정정할 생각 없으니 물러가거라."

"아버지!"

"..네가 가끔씩 외출하는 것을 안다."

"..."

"오늘도 그러더구나."



여주가 마음편히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정말 왕이 알 거라곤 생각도 못 한 전개였다. 당황한 여주가 말을 잇지 못하자, 왕은 실망감이 담긴 눈빛으로 공주를 바라보았다. 믿었던 만큼, 예뻐했던 만큼 배신감도 컸다. 어릴 적부터 평민들과 말도 섞지 말라 일렀건만.. 고개를 숙인 채 왕의 말을 듣던 여주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왕과 눈을 맞추었다.



"저의 결혼은, 그 행동에 대한 벌입니까?"

"네가 왕궁에 정을 붙이지 못하니 내린 결정이다."

"제가 원하지 않으니 벌이죠."

"..그럼 그렇게 생각하거라."



왕은 처음 보는 공주의 날 선 눈빛에 나즈막히 대답하곤 자리를 떴다. 여주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서 왕의 뒷모습을 끝까지 바라보았다.
















"김태형입니다."

"..."

"만나뵙고 싶었어요. 공주님."



여주는 온 몸으로 거부하는 중이었다. 태형과의 첫 만남에 머리장식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것도 나름의 반항이었다. 태형도 다른 나라의 귀족인데, 귀한 손님을 갖춰지지 않은 상태로 마주했으니, 왕이 알게되면 매섭게 화를 낼 것이 분명했지만 여주의 고집을 그 누구도 꺾을 수 없었다. 태형도 그런 여주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다. 마주하고 앉았을 때부터 자신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공주의 모습이 흥미롭게 다가온 태형은 살짝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네."

"알아요. 이 결혼 달갑지 않죠."

"그럼 안 하면 되잖아요. 그쪽도 말해요, 파혼하겠다고."

"이 결혼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거 충분히 알고 있잖아요."



태형이 부러 공주님에 강세를 두어 말하자, 그제서야 태형을 바라본 여주가 시큰둥히 네. 하고 대답했다. 여주의 태도는 부모님이 본다면 기겁할 정도로 예의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태형은 시종일관 여유로운 미소를 얼굴에 띄우고 여주를 바라보았다. 자신과 같은 마음을 가졌다는 태형의 말에 발끈하며 반응한 여주는, 놀란 기색도 없이 되받아치는 태형에 입을 꾹 다물었다.


다시 의자 등받이에 기댄 공주는, 태형을 제대로 쳐다보았다. 여주 못지않게 고급진 분위기를 풍기며 귀와 옷에 달린 금빛의 악세서리를 마치 원래 달고 태어난 양 잘 소화했으며 석진만큼 수려한 외모를 가졌다. 나긋한 듯 강단있는 목소리도 꽤나 듣기 좋은 편이었다. 얼굴 뿐 아니라 몸 여기저기에서 자신은 귀족일 수 밖에 없다 외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좀 괜찮아지려고 하거든요. 이 결혼."

"뭐요?"

"방법은 썩 마음에 들지 않지만,"

"..."

"상대가 마음에 들어서."



장난이 조금 섞인 태형의 말에 여주는 경악스럽다는 생각을 온 얼굴에 드러냈다. 그걸 태형이 눈치채지 못할리 없고, 결국 크게 웃음이 터져버리고 말았다. 여주는 인상을 찌푸렸다. 둘 다 강력히 거부해야 파혼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오갈텐데, 태형은 그럴 생각이 없어보이니. 멀리서 태형과 공주를 바라보던 왕과 왕비는, 태형이 웃는 모습에 만족스러움의 고개를 끄덕였다. 공주의 얼굴은 미처 보이지 않았다. 어째 상황은 여주에게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방으로 돌아온 여주는 신경질적으로 장신구들을 빼버리고, 옷을 팽겨쳤다. 덕분에 옷시중들만 우왕좌왕 분주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태형은 그저 여주를 놀리느라 신이 난 것 같았다. 태형에게 놀아났다는 생각에 쉽게 분이 풀리지 않았다. 취침용 옷으로 갈아입고 화장까지 다 씻어낸 여주는 침대에 풀썩 지친 몸을 뉘였다. 오늘따라 넓게 느껴지는 침대에 이리저리 몸을 뒹굴거리다, 침대 옆 탁자에 놓인 작은 약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



자연스레 낮에 보았던 남준이 떠올랐고, 다정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히는 기분이었다. 조심히 손에 쥐자, 한순간에 머릿속을 채우던 온갖 생각들과 스트레스가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보다 조금 잦아진 심장박동에 여주는 눈을 꾹 감았다. 모자 때문에 남준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게 아쉬웠다. 손에 쥔 약봉지 소리가 바스락, 하고 들리자 점점 몸이 편안해지고 졸음이 느껴졌다.

다시 보고 싶다.

남준을 떠올리며, 공주는 정말 오랜만에 수면제 없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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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헐 재밌어 보여요 신알신하고 다음 글도 읽으러 올게요!
6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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