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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민] 시작은 우연으로, 끝은 필연으로.

 

루한 X 시우민
(루한 X 김민석)
w.순백

 

 

 

 

 


00

 


 땅거미가 어둑어둑하게 밤하늘로 퍼져간다. 눈물이 짙은 밤갈색 속눈썹을 적신다.
김민석은, 오늘부로 루한을 잊을 것이다.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린다. 동시에 그와의 추억도 함께 흘러내린다. 머릿속엔 그의 말소리가 울려퍼진다.

 

 

'헤어지자.'

 

 

 자그마치 삼 년간 좋아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 남자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냥 형 동생 사이로 지내고 싶어.'

 

 

 루한은, 민석에게 있어 평생에 가장 사랑했던 남자였다. 하지만 그가 김민석을 버렸다. 민석의 가슴이 걸레조각처럼 너덜너덜해졌다. 굳게 다문 눈에서 도록,하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뒤로하고 힘겹게 말을 짜냈다. 네, 그래요. 억지로 말하는 입이 덜덜 떨렸다. 머릿속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심장이 공허했다. 그는 헤어지자는 이별의 말을 건넨 뒤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민석을 쳐다보던 그는 민석의 대답을 듣곤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뒤를 돌아 떠났다. 그런 그를 보는 민석의 가슴이 저려왔다.

 헤어진지 며칠도 채 되지 않아, 루한은 민석에게 새 애인이 생겼다며 안소희라는 여자를 소개시켜주었다. 옛 애인에게, 현 애인을. 루한은 잔인했다. 민석이 슬피 웃었다.

 

 

 


01

 

 


 갑자기 김민석의 자취방으로 찾아온 루한과 소희는, 자신들의 연애소식을 알리기 급급해보였다. 처음 보자마자 와,하는 탄성이 나올 정도로 소희는 예뻤다. 짙은 검고 긴 생머리며, 그녀의 머리에서 반짝이는 분홍빛 머리띠며 모두 그녀의 외모를 빛내주었다. 자신과 닮은 거라곤 불그스름한 볼밖에 없는 소희에, 김민석은 고개를 푹 숙이곤 마음에 없는 입에 발린 칭찬의 말을 내뱉었다.

 

 


"축..하해요, 루한."
"우리 잘 어울리지?"

"..네."

 

 


 저같은건 비교도 안 될 정도로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뒷말을 꿀꺽 삼켰다. 루한의 얼굴엔 함박웃음꽃이 잔뜩 피어있었다. 저와 헤어진 이후에도 잘 먹고, 잘 살고, 예쁜 여자까지 만나는 그가 얄미웠다. 슬픔과 동시에 부러움과 질투가 밀려왔다. 눈 앞에 서있는 그녀에 대한 미움이 피어났다.

 

 


"안녕하세요? 민석씨에 대한 얘기는 많이 들었어요. 반가워요!"

 

 


 하지만 이미 루한은 자신의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한 여자의 어엿한 애인이고, 자신은 헤어진 옛 연인이자 친한 동생일 뿐이었다. 그렇기에 저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저도 반갑습니다."
"김민석. 너 우리 소희한테 왜 그리 딱딱해?"

 

 


 루한의 입에서 나오는 그녀의 호칭, 우리 소희. 민석이 머릿속으로 루한이 '우리 민석이!'하고 매력적인 목소리로 자신을 부르던 과거를 회상했다. 김민석의 고개가 푸욱 내려갔다. 눈물이 차올랐다. 눈물이 마르도록 연신 눈을 깜박였다. 민석이 살짝 코를 훌쩍였다. 그러거나 말거라 달달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앞의 둘의 모습에 민석이 시무룩해졌다.

 

 


"바쁘실텐데 저희가 너무 갑자기 찾아왔나요?"

 

 


 미안한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하는 소희를 보며, 민석이 '알았으면 얼른 가주시죠.'라며 퉁명스레 대꾸했다. 당황한 눈을 크게 뜨곤 허둥지둥 자리를 뜰 준비를 하는 소희를 잠시 응시하던 루한이 민석에게 지나가듯 티나지 않게 살짝 귓속말했다.

 

 

 


"너 왜 그래? 우리 이미 깨진 사이야."
"...."

"너랑 사귀었던거 말 안 했으니까 티 내지마, 알았지?"
"네.."

"그리고 루한이라고 부르지마. 앞으론 루한선배, 라고 불러."

 

 


 민석의 고개가 다시 툭, 떨어졌다. 루한은 완벽주의자였다. 정, 미련따위 마음에 두지 않는, 그런 사람이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괜히 슬퍼지는 마음을 추스르긴 힘들었다. 루한은 민석과 헤어질 때처럼 위로의 말이나, 다정한 말 하나 없이 바로 소희를 쫓아갔다. 그런 그를 보는 김민석의 눈꼬리가 슬피 휘어졌다. 눈에 고인 물방울들이 간당간당 눈꼬리에 매달렸다.


 그 뒤로 꽤 오랜 시간동안 루한을 볼 수 없었다. 아니, 의도적으로 보지 않았다. 그와 마주치고, 그들의 다정한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또다시 그들의 사이를 질투하고, 예전처럼 돌아가고 싶어할까 두려웠다.

 루한은 자신을 점점 잊어가는 것 같았지만 루한에 대한 자신의 감정은 더욱 커져만 갔다. 밥을 먹을 때도 그의 손길이 생각났다. 잠을 잘 때조차도 꿈에 그가 나왔다. 한 시도 저를 가만히 두질 않았다. 새하얀 침대에 누운 김민석의 갈색빛 머리카락이 여기저기 흩어졌다. 요즘들어 눈물이 많아진 듯 싶었다. 민석이 몸을 일으켜 침대에 아슬아슬 걸터앉아 우울히 생각했다.

 

 

 


 과거의 그는 다정했다. 그는 모든게 완벽했고, 사귀던 동안에 한해서는,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와 모든 일에 냉철한 사람이었다. 자신과 헤어진 이후 그는 민석에게도 냉철해졌고, 딱 하나, 소희에게만 다정했다. 일년 간, 동성애자를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사회 속에서도 남들에 뒤쳐지지 않게 사랑했다. 갑작스러운 그와의 이별은 금방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한순간의 변심이리라 생각하고 다시 자신을 사랑해주길 기다렸으나, 돌아오는건 새 애인이 생겼다는 비참한 소식 뿐이었다. 사람이 사랑을 하고 이별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일 뿐이지만 그게 자신의 경우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서, 선배. 이년 간 좋아했어요..!"

 

 


 고등학교에 들어온지 삼년 째 되던 봄, 김민석은 루한에게 고백했다. 남자라고 차여도 괜찮으니 자신의 마음을 알았으면 싶었다. 분홍색 벚꽃 아래의 시원한 금발을 소유한 그는 정말 멋들어져보였었다. 그 황홀한 광경에 민석은 넋을 놓았었다.

 

 


"나도 너 호감이었는데. 우리 사귈래?"
"네..네?"

"네라고 했으니 이제 사귀는거다?"
"...네!"

 

 


 우리 사귈래? 하며 싱긋 눈웃음 짓던 그의 모습이 머릿속을 헤집는다. 그리고 일 년 후, 루한은 민석에게 이별을 선고했다. 과거를 회상하자 어느 새 어질해진 머리를 붙들고 김민석이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전혀 실감이 나지 않던 이별도 소희를 소개받고 난 이제서야 차츰 실감이 난다. 그와 함께 웃던 안소희라는 여자의 얼굴도 떠오른다. 인정하고싶지는 않지만 그 둘은 자신따위는 끼어들지도 못 할 정도로 너무 잘 어울렸다. 그래서 더욱 서글퍼졌다. 남녀의 벽이 이렇게 큰 것일까. 김민석은 그들이 행복하길 바랬다. 자신과 루한이 사랑할 수는 없더라도 그들이, 아니 루한이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느새 '질투'가 사라지고 그의 행복을 빌어주는 생각이 가슴과 머릿속에 자리잡았다.

 김민석은 정말, 바보같은 남자였다.

 

 

 

 

 


 

 


02

 

 

 


 대학교에 들어온지 어연 오개월 째였다. 헤어질 때 가슴에 못이라도 박은건지, 도장이라도 찍어둔 건지 루한, 그가 남긴 흔적은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아른거리는 그의 잔망이 일상생활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인지 학교고 뭐고 하나도 재미가 없었다. 애초에 공부도 못했던 저가 루한을 따라가기 위해 악착같이 공부해 들어간 대학교이니, 그와 함께가 아니라면 다 무용지물인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책상에 턱을 괴고 연필을 잡았다. 이왕 의자에 앉았으니 공부나 할까.

 

 

"에..그러니까 삼십삼 루트....젠장."

 

 

 근 한두달 간 거의 없다시피 등하교를 했으니 수업 내용이라곤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고등학교 문제도 풀지 못하다니. 젠장 소리와 함께 침대로 기어올라 풀썩 누웠다. 새하얀 천장엔 언젠간 루한이 어린아이 같다며 놀려대던 야광별이 보였다. 루한의 웃는 모습을 떠올리며 김민석이 살짝 입가에 미소를 그리다, 이내 몸을 뒤척이며 잘 준비를 했다. 순간, 딸랑, 소리와 함께 침대와 매트리스 사이에서 금빛 물체가 튀어나왔다. 민석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방바닥에 굴러다니는 금빛 물체로 손을 뻗었다.

 

 

"...웬 목걸이?"

 

 

 목걸이가 민석의 하얀 손 사이에서 금속끼리 맞부딫히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달랑거렸다. 정체모를 물체를 유심히 쳐다보던 민석이 아!하는 소리와 함께 과거를 떠올렸다. 사귄지 백 일 째 되던 날, 루한이 저에게 선물해준 목걸이. 그에게서 처음으로 받았던 선물인지라 애지중지 모셔놨는데, 이틀만에 잃어버려 한참을 울었던 그 목걸이가 침대 매트리스 사이에서 발견되다니.

 

 

"...이제 와서 뭘."

 

 

 하지만 이젠 찾아봐야 아무 소용 없다. 순식간에 낯빛이 어두워진 김민석이 인상을 찌푸리곤 눈을 감았다.

 

 

 

 

 

 이른 아침, 오랜만에 멀쩡하게 등교를 해보자는 마음으로 일어나자마자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뻗친 머리와 지저분한 얼굴을 바라보던 김민석이 화장실로 들어섰다. 세안과 샤워를 하고 물이 뚝뚝 흐르는 머리를 말리기 위해 다시 거울 앞에 섰다. 한결 나아진 모습에 웃음을 짓곤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기 시작했다. 한참이 지나 머리를 모두 말린 김민석이 관리를 하지 않아 덥수룩해진 앞머리를 들춰올렸다. 커다란 눈망울이 시야에 가득 찼다. 아무 말 없이 작은 고무줄로 앞머리를 묶어 올린 김민석이 옷을 갈아입곤 현관을 열었다.

 

 

"...아."

 

 

 맞다, 목걸이. 김민석이 탁자 위에 조심스레 올려놨던 목걸이를 목에 걸곤 카라를 다듬어 목걸이가 보이지 않도록 만들었다. 살결과 쓸리는 목걸이는 살짝, 따가웠다.

 

 

 

 


"김민석! 오랜만...헉!"
"..왜 그러시죠?"

"너 여자였냐! 아, 아닌데?"
"....?"

 

 

 같은 과 선배 지용이 헐레벌떡 뛰어 와선 말을 걸었다. 여자..? 이 선배가 못 본 사이에 눈이 장애가 되셨나. 멋대로 판단짓곤 다시 무심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무표정을 고수하며 저를 지나치자, 지용이 뒤쪽에서 외쳤다. 기분 나빴으면 미안! 여전히 그에게서 등을 돌려 앞으로 걸어가며, 민석이 살짝 웃음지었다. 하여간 귀여운 선배시라니깐. 교실로 들어서기까지 반응은 전부 비슷했다. 지용을 시작으로 최승현, 구희수 등 다들 자신더러 여자냐고 묻는 모습에 민석은 묘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하루 내내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지겹도록 들은 '너 여자야?' 때문인지 민석은 집에서마저 저의 성 정체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기까지 이르렀다. 내가 그렇게 여자같나? 하던 김민석이 거울을 보곤 한숨을 푹 쉬었다.

 오늘은 학교에서도 루한을 보지 못했다. 김민석이 씁쓸히 웃었다. 그가 보고싶었다. 저와 만나주지 않아도 좋았다. 그냥, 그의 웃는 얼굴과, 행복한 모습을 보고싶었다. 헤어진 직후 자신에게 냉소한 그를 보면 헛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동안의 정은 다 사라진걸까. 그는 무섭도록 냉정했다. 아무리 헤어졌다지만, 과거의 일은 까맣게 잊은 채 그는 정확히 친한 형과 동생. 으로 딱 선을 그어논 듯 싶었다.

 

 

 

 


 

 

 

03

 

 

 

 민석은 항상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목걸이를 옷 안쪽으로 걸고 다녔다. 부적, 비스무리한 용도로. 루한과 사귀던 도중에도, 그와 헤어진 이후에도 꽤나 귀여운 인상에, 저에게 고백하는 여자들은 몇몇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민석은 정중히 거절하며 옷 위로 드러난 목걸이의 윤곽을 만지작거렸다. 아직까진 누군가를 사귈 정도로 마음의 여유가 남아있지 못했다. 일년이라는 시간이 그렇게 영향력이 큰 시간이었나. 아니면 루한이 저에게 있어 그렇게 영향력이 큰 사람이었던 것이었나.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사건은 정말 갑작스럽게 들려왔다. 민석과 루한이 헤어질 때보다도, 김민석이 루한을 사랑하게 됬을 때보다도 더 갑작스러웠다. 그렇기에 민석은 이에 대처할 방도 또한 없었다. 혼자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민석은 대부분의 시간을 카페에서 지냈다. 커피를 좋아하는 이유도 있었고, 루한 또한 커피를 좋아했었다. 그윽한 향기가 멤도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홀짝이며 노트북을 켜놓곤 과제를 하던 도중이었다. 아침 일찍, SNS에 오늘 50일이라며 소희와 데이트하러 간다는 둥 한껏 자랑을 하던 루한을 떠올렸다. 왠지 작업이 잘 되지 않았다. 더불어 졸음도 밀려왔다. 정신을 차리고 공부를 하기 위해 뜨거운 커피를 을어 입에 대는 순간, 옆쪽에서 들려오는 벨소리에 손을 내린 민석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전화벨 소리가 채 들리기도 전에 금세 받아버렸기 때문에 발신자를 확인하지 못했었다. 민석은 발랄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건만, 발신자의 음성을 계속해서 듣던 그의 얼굴이 점차 석고상마냥 굳어갔다. 그의 손이 달달 떨려오고 동공은 풀렸다. 하는 말이라곤 예, 예.. 뿐이던 민석이 핸드폰과 커피를 던져놓곤 급히 뛰쳐나갔다. 덩그러니 놓여진 카페 안의 종업원이 큰 소리로 돈을 내라 외치건 말건, 짐을 챙겨가라 하건 말건, 민석은 들리지도 않는지 이에 개의치 않고 큰길을 향했다.

 

 

 

 

 

 

 

 

 

 


'전화번호부에 김민석님께서 먼저 보여서 전화드려요. ㅇㅇ병원입니다. 루한씨께서 교통사고로 의식 불명 상태이십니다만, 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ㅇㅇ병원. 입 속으로 이름을 되뇌었다. 상당한 충격이었는지 여전히 식은땀이 줄줄 흐르고 사시나무 떨듯 온 몸을 떠는 민석이 후들거리는 다리를 애써 움직였다. 태, 택시. 거의 쓰러질 직전으로 정신을 놓고 있는 제 모습에 택시기사가 의심스럽게 저를 쳐다보는 듯했다. 힘겹게 택시를 잡아타곤 ㅇㅇ병원을 향했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민석은 루한의 병실을 찾았다. 머리에 붕대를 감곤 곱게 누워있는 루한에, 지금껏 애써 참아왔던 눈물이 민석의 눈에 가득 고이기 시작했다. 옆에 있던 의사가 민석에게 말을 걸었다. 김민석씨 되시나요?

 

 

"두 눈을 잃으시고 한 쪽 다리를 꽤 오랜 시간동안 쓰시지 못하시겠지만 곧 의식은 돌아오실껍니다. 질문 있으신가요?"
"...저기, 이 분 발견되었을 때 한 여자 못 보셨나요?"

"못 봤습니다. 신고를 하신 분도 성인 남성이셨어요."
"...그런가요."

 

 

 이내 입을 다문 민석은 의사가 나간 후에도 눈에 피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붕대를 감고 있는 루한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루한의 곁은 빈자리였다. 이런 상황에 소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걸까. 커다란 링겔을 맞고 쓰러져있는 루한이 안쓰러웠다. 사고가 난 것도 굉장히 안타까운 일인데 설상가상으로 눈마저 잃었다니, 어떻게 루한에게 전해줘야 할지 도무지 알 길이 없었다.

 

 

 

 몇 날 며칠을 병원에서 밤을 지새웠다. 곧 깨어날 것이라기에 마음에 걸리던 짐덩이를 덜었건만, 사흘이 되도 깨어나질 않자 루한에 대한 걱정이 심해졌다. 미동도 않은 채 편한 모습으로 눈을 감고있는 모습은 여전히 저를 설레게했다. 루한의 손을 잡지 않은 민석의 한 손이 루한의 얼굴에 닿았다. 고운 턱선을 쓸어내렸다. 순간, 민석이 잡고있는 루한의 왼손이 꿈틀거리더니 루한의 발간 입술이 움직였다. 김민석이 놀란 눈빛으로 루한을 쳐다보았다. 루한의 입에서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ㅅ.."

 


 민석이 숨을 죽이고 쳐다보았다. 루한의 발음이 좀 더 또렷해지고, 민석도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해졌다.

 

 

"…소, 희야…. 우리 소희 안 다쳤, 지..?"

 


 온 몸의 힘이 쭉 풀렸다. 루한의 의식이 돌아온 데에 대한 안도감과 기쁨, 그의 의식이 돌아오자마자 찾은 자가 옆에 있지도 않은 소희라는 것에 대한 설움이 동시에 느껴졌다. 그가 깨어나자마자 찾은 사람은 자신이 아닌 소희였다. 당연한 이치임에도 불구하고 서러운 마음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소희가 그의 옆에 없다는 것이었다. 어찌 해야할 바를 몰라 당황하여 허둥대던 김민석이 애타게 소희를 찾는 루한의 손을 잡고 무작정 손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루한, 소희예요. 사고 후유증으로 말을 못하게 됐는데 이렇게 글로 써드려도 되죠?]

 

 

 

 

 

04

 

 


 김민석은 루한과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냈다.
 루한은 안소희와 알콩달콩한 시간을 보냈다.


 앞이 보이지 않는 루한을 대신해 김민석이 모든 일을 대신해 주었다. 루한은 어지간히도 답답한 모양이었다. 완벽을 추구하는 그를 대신하니, 부담감이 실로 말할 수 없이 커져 실수 또한 잦아졌다. 저를 소희라 믿는 탓에 큰 꾸중은 하지 않았다. 민석은 소리를 내지 않으려 애썼다. 들키지 않기 위해 소희의 머리 길이 정도 되는 가발을 사곤, 실핀으로 단단히 고정시켜 생활했다. 학교는 휴학을 했다. 루한은 자신의 눈따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소희가 무사했다는 것에만 크게 안도하는 듯 싶었다. 혹시나의 경우를 위해 병원 관계자에겐 자신을 여자라고 일러두었다. 소희와 비슷해지기 위해 그녀처럼 일자 앞머리도 만들었다.

 

 


[좋아해요.]
"나도 좋아해, 안소희."

 

 

 밝게 웃는 루한을 보는 민석의 가슴이 쓰라렸다. 쓰디 쓴 블랙커피를 단번에 마신 것처럼 입 안에 씁쓸한 향이 멤돌았다. 저 미소는 저를 향한 것이 아닌 소희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 미소가 제 것이 되기를 끊이없이 갈구했다. 루한의 입에서 다시 한 번 저를 향한 애정의 말이 나오길 빌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에서 두려움이 솟구쳤다. 자신이 소희가 아님을 들킬까 항상 조마조마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소희가 됨으로써라도 루한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렇기에 이런 어리석은 결정을 계속하고야 만 민석였다.

 

 

 

. .

 

 

 

 한 날 한 시도 떨어져있지 않았다. 근데 루한은 어디로 사라진걸까. 땅으로 꺼졌나, 하늘로 솟아올랐나. 많이 회복되긴 했지만 아직은 못 다 나은 불편하고 지친 다리를 이끌고 그리 멀리 가지는 않았으리라 짐작했다. 게다가 루한은 앞이 보이지 않는다. 벽을 짚으며 간신히 이동하며 뻘뻘거릴 루한을 떠올린 김민석이 급히 루한을 찾으러 뛰쳐나갔다. 민석이 루한을 발견한 곳은 루한의 병동과 꽤나 떨어진 한적한 뒤뜰이었다. 꽤 오랜 시간 뛰어서인지 콧등 언저리와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힌 민석이 루한을 바라보았다.
환자들이 휴식을 위해 종종 찾곤 하는 곳이지만 인적이 뜸한데다 거무적적한 어둠에 쌓인 곳인지라 근처엔 루한 뿐이었다. 고요함 사이에 루한은 널부러졌다. 짙은 군청색 어둠과 금색의 그가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졌다. 한 쌍의 목발이 가지런히 눕혀있었고, 옆에 루한이 누워있었다. 민석이 조심스레 가까이 다가가 손을 잡아주었다.

 

 


"소희야?"
[네.]

"여기는 되게 좋다! 앞이 안 보이는데도 탁 트인 곳이라 그런지 하늘이 보이는거 같아."
[지금 밤이예요, 루한.]

"어..그래? 어쩐지 좀 졸리더라."

 

 


 민석이 멋쩍이 웃는 루한을 빤히 바라보다 살짝 손을 빼곤 옆에 같이 누웠다. 풀썩,소리와 함께 인기척이 느껴지는지 루한이 김민석이 있을 법한 곳으로 손을 뻗었다. 루한의 가느다란 손에 챠르르르 윤기나는 머리카락을 얽힌 김민석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갑자기 민석이, 생각난다."

 

 


 저의 기다란 머리를 손으로 빗던 루한에게서 뜬금없이 나온 자신의 이름에 민석이 살짝 눈을 떴다. 길고 예쁜 곡선을 이루는 속눈썹이 루한을 향했지만 핏자국이 남은 붕대 속에 감춰진 루한의 눈은 여전히 하늘을 향해있었다. 입을 다문 루한을 확인하곤 다시 눈을 감았는데 귀로 음성이 흘러들어왔다.

 

 


"민석이는 참 착한 아이였어."
[..네.]

"너무 바보같이 착했어. 그런 점에 질린 걸지도 몰라."

 

 


 그건 또 뭐예요. 김민석이 속으로 엷게 투정을 부렸다. 대답없는 민석에, 루한의 몸이 살짝 들썩였다. 중요한 것을 말하지 않았네!하는 어조로 루한이 말을 이었다.

 

 


"왜 질렸다는 표현을 쓴건지 소희 너는 모르겠지? 사실, 너와 사귀기 일주일 쯤 전까지만 해도 나 민석이랑 사귀었었어."
"....."

"나랑 가장 잘 맞는 사람은 소희, 너인 것 같아. 나랑 계속 있어줄꺼지?"

 

 


 …그럴게요. 루한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그마한 목소리로 김민석이 루한에게 대답했다. 맞지 않았다라, 민석이 골똘히 생각했다. 기억 속의 김민석은 항상 루한에게 맞춰주었다. 크림 파스타를 좋아하는 그를 위해 그 싫어하는 밀가루면을 맛있는 척 하며 먹어주었고, 동성연애를 밝히고 싶지 않아하는 그에 아무에게도 둘의 연애를 알리지 않았고, 그가 좋아하는 스타일에 자신을 맞췄지만 그에 반해 루한은 그의 의지에 모든 결정을 맡겼다. 서러워지려는 마음을 꾹꾹 눌러담았다. 이제와서 이럴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다 지나간 일이었다. 돌이킬 수도 없었고, 돌이켜봐야 루한은 또다시 제게 맞춰주지 않을 것이었다. 이제 늦었으니 돌아가자 말하고, 그를 부축해 병실을 향했다.

 

 

 

 

 

 

 

"...하였고, ...어, 이건 뭐지? 아하. 그런, 왕자..님을....하..녀....는 멀리...서..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잘 읽으셨어요! 짝짝짝.]

"푸흐, 글로 박수를 치면 어떡해."

 

 


 글씨로 박수소리를 내던 민석이 그런가,하며 두 손을 모아 열띤 박수를 쳐주었다. 만족한 듯 웃음을 짓던 루한이 점자책을 덮었다. 하, 이제 이런 것도 지겨워. 루한이 입술을 뾰루퉁하게 내밀었다. 김민석이 책을 더 읽어야 머리가 굳지 않는다고 드문드문 핍박을 주었지만 전혀 아랑곳하지 않은 루한이 귀차니즘에 못 이겨 이내 침대에 누워버렸다. 체력과 회복능력이 월등히 뛰어나서인지 다리는 금세 나았지만 전혀 회복되지 않은 눈과 혹시 모를 후유증을 대비하여 몇 주 더 쉬기로 했다.

 

 


[루한 . 잠시 화장실에 다녀올께요.]
"빨리 다녀와~"

[네.]

 

 

 루한을 보필하려면 금세 다녀와야겠단 생각으로 김민석이 황급히 화장실을 향했다. 한 시라도 그를 혼자 냅둘 수 없었다. 앞도 보이지 않고, 다리도 성치 못한 그가 혼자 있으면 상당히 위험하니까. 하필이면 화장실은 넓고 긴 복도 끝에서 좌로 꺾어 끝까지 가야 있었다. 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볼일 보는 시간보다 길 것 같은 불길한 예감과 함께 민석이 최대한 빨리 뛰었다.

 

 

 

 

 

 


"소희가 언제 올려나."

 

 


 루한이 콧노래를 부르며 홀로 침대에 누웠다. 알록달록한 세모네모가 그려진 커다란 병원복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펄럭거렸다. 몸이 성치 못한 환자인 루한은 찬 바람을 쐬서는 안 됐다. 찬바람이 건강에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고, 감기가 걸리면 증세가 악화되니까. 추위에 몸을 으스스 떨며 창문을 닫으려 루한이 몸을 일으켰다. 순간, 딸랑, 소리와 함께 침대와 매트리스 사이에서 금빛 물체가 튀어나왔다. 루한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켜 한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려 쇳소리를 내는 물체를 주웠다.

 

 


"...웬 목걸이?"

 

 


 물체를 만지적거리던 루한의 행동이 잠시 멈췄다. 정신이 멍해졌다. 목걸이가 루한의 하얀 손 사이에서 금속끼리 맞부딫히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달랑거렸다. 백 일 째 되던 날, 저가 민석에게 선물해준 목걸이. 직접 특수제작한 목걸이라 저만 알아볼 수 있는 특이한 무늬가 새겨져 있어 이를 알아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특수 고객용 일인실이라 자신의 방에는 소희밖엔 들어오지 않았는데. 애써 부정했다. 그러나 머리는 이미 받아들였다. 믿고 싶진 않았지만 설마,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05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비릿한, 마치 쇠 같은 피 맛이 혀 끝에서 느껴졌다. 일단 소희가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 루한이 살짝 허망한 표정으로 툭하고 쓰러지듯 병실 침대에 드러누웠다. 양 팔과 다리를 쭉 뻗곤 생각했다. 만약, 만약. 소희가 정말 민석이라면 자신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그는 소희 대신 그녀의 역할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나름 비상한 머리를 가졌다 생각했는데 불구하고 정리되지 않은 생각들에 머리칼을 움켜잡고 루한이 혼자 끙끙거렸다. 소희가, 아니 확실하진 않지만 민석이 돌아오면 뭐라 먼저 말해야할까. 그가 돌아온 후에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할 수 있을까. 꽤나 길게 생각해 보았지만 답은 나질 않았다. 병실 문이 드륵거리며 열리는 소리가 귓가로 와닿았다.

 

 

"소, 소희야 왔어?"

[네.]

"...그래."

 

 

 루한의 어눌한 말투를 들으며 민석이 갸우뚱거렸다. 루한이 누운 침대 끝에 걸터앉아 그를 바라보았다. 어쩐지 어색해 보이는 그의 모습에 잠시 당황스러웠지만 ,그 짧은 시간 내에 설마 무슨 일이 있었겠는가. 민석은 대수롭지않게 넘겼다. 아무 말 없는 루한 때문인지 병실 안은 적막했다. 루한이 채 닫지 못한 창문에서 조잘거리는 샛소리와 부릉거리는 자동차 소리가 간간히 들려왔다. 조용한 가운데 루한이 살짝 입을 열었다. 평소보다 낮고 조그마한 목소리로 누가 봐도 파르르 떨고 있는 루한이 말했다.

 

 

"민석..아."
"!"

"...아니지?"

 

 

 아니라고, 아니, 갑자기 무슨 소리냐고, 얼른 아무렇지않게 손가락을 움직여 그의 손에 글을 써야 하는데 갑작스러운 상황에, 손가락마저 제 뜻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당황한 민석의 얼굴이 조각상마냥 굳더니 살짝 파랗게 질렸다. 떨리는 손가락을 들키지 않기 위해 소리없이 심호흡을 하곤, 루한의 손바닥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무슨 소리세요.]

 

 

 꽤 오랜 시간 고민한 결과는 그리 길지 않은 두 마디 뿐이었다. 소희라면 이 상황에서는 '난 아무것도 몰라요'가 최상일 것이라 생각했다. 어떻게 자신을 민석이라 의심하게 된건지 도무지 감이 잡히질 않았다. 절대 들키지 않기 위해 위험한 싹은 죄다 일찌감치 잘라버렸는데.

 

 


"목..."
[네?]

 

"..안 허전해?"
"네? 헙!"

 

 


 놀란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입술 틈새를 비집고 나온 음성. 민석이 스스로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루한이 하얀 손에 아까부터 쥐고 있던 목걸이를 걸어 들어 올렸다. 민석이 당황했다. 왜, 저 목걸이가 그의 손에 있는 거지. 그런 위험한 변수를 가지고 있던 것이 화근이었다. 생각치도 못한 변수에 꼼짝없이 당해버렸다. 도대체 언제 빠진걸까, 항상 목에 걸고 옷 속에 꼭꼭 숨기고 다녔는데. 김민석의 놀란 음성을 들은 루한이 피식,하고 엺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힘풀린 그의 손에서 목걸이가 툭,하고 침대로 곤두박질쳤다.

 

 

"소희 대신이 되어서 무슨 생각을 했니, 민석아."
"...."

 

"왜 그런 짓을 한거야. 내가 그렇게 약해보였어? 소희가 없다는 이유로 좌절하고 삶의 의욕을 잃을 것 같았어?"
"...."

 

"...후, 됐다. 그럼 소희는 어디있어."

 

 


 콕콕 찔러서 묻는 루한을 보는 민석이 울상을 지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그의 눈이 서글프게 휘어졌다. 한치 앞도 가늠하지 못하는 루한은 민석의 표정이 어떻던, 그에게 계속해서 따지듯 물었다. 무섭게 쏟아지는 질문에 민석이 눈물을 무르곤 간신히 대답했다. 여전히 누워있는 채로 루한이 조용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없어요."
"..왜 없어."

 

"선배님께서 사고 당하신 날 이후로 보이지 않아요.."
"그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돼. 왠지 아까보다 더 복잡해진 듯한 기분에 루한이 끙,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소희가 사라졌다니. 분명 사고 당시, 그가 소희를 감싸 소희는 타박상 정도뿐이 없었다. 이를 확인한 것 까지가 자신의 기억이었다. 그 후 정신을 잃었는데 소희가 사라졌다면,

 

 


"..도망친건가."
"네?"

"아냐."

 

 


 안소희. 그녀는 나라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아가씨 였고, 그런 그녀의 애인으로서 불구가 된 자신은 부적합하다고 판단되었다. 소희도 그러한 생각으로 도망갔겠지. 그녀를 진심으로 좋아했다. 비록 병원에서의 그녀와의 시간은 민석과 함께한 시간들이었지만, 어쩌면 자신은 '안소희'라는 이름을 사랑한 것일지도 몰랐다. 여전히 민석에겐 선후배관계 외의 조그마한 감정도 없는 것으로 봐선. 하지만 왠지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미 오래 전 소희가 떠났다는 것을 인식하자마자, 마음이 제 스스로 포기해버린건가.

 

 

"...소희는 떠난건가."

 

 


 루한이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의 중얼거림을 들은 김민석이 급하게 대답하듯 루한에게 말했다.

 

 

"..소희 누나 대신에 제가..!"
"안 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떨리는 목소리로 소리친 민석이 실망한 듯 풀이 죽어 다시 침대에 푹 주저앉았다. 그의 기분따위 전혀 상관도 없는지 루한이 누워서 생각했다. 저는 그녀를 위해 몸을 희생했다. 두 눈을 잃고 다리도 온전치 못한데 그녀는 이제 없다. 나는, 이제, 어떡해야 할까.

 

 

 

 

 

 

 

06

 

 

 시간은 냇가에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또한 빠르게. 눈 한 번 끔뻑하면 하루가 지났고, 숨 한 번 내쉬면 이틀이 지났다. 옆에선 계속해서 민석이 자리를 지켰다. 그에게 이제 그만두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만 그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옆에 있겠다고 말할 뿐이었다. 작은 실랑이가 반복되자 이젠 돌아가라고 말할 기운조차 없었다. 다친 몸을 움직여 괜히 피곤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아 하루종일 가만히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째깍거리는 시계소리와 루한의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민석은 어디론가 간 모양이었다.

 

 

 

"졸려..."

 

 


 아무 생각 없이 말을 내뱉었다. 몸을 뒤척이다 손에 닿는 차가운 금속에 잠시 흠칫했다. ㅡ민석의 목걸이. 내심 민석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애초에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었다. 그냥 친한 후배의 고백이 귀엽고 순수하게 느껴져 호기심과 더불어 받아줬을 뿐이었다. 하지만 근 일 년간 꽤 재미있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남자와 사귄다는 것도 신기했지만, 민석이 자신을 진심으로 좋아한다는 것이 매우 놀라웠다. 더 이상 사귀는 것은 그에게 정말 못된 짓을 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어 이별을 선고했다. 갈팡질팡 제가 있을 곳을 찾지 못하고 흔들리던 그의 눈빛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난다.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여자치곤 낮은 감이 있는 미성이 들려왔다.

 

 


"루한 ."
"...김민석."

"밤이 깊었어요. 어서 주무세요."

 

 


 넌 왜 안 자. 루한의 입술이 무언가를 말하려는 듯 살짝 달싹였다. 태엽인형마냥 이리저리 뒤척이던 루한이 자세를 고정했다. 눈을 뜰 일이 없으니 잠들기는 쉽다. 민석의 '안녕히 주무세요.'를 자장가삼아 깊은 수면에 빠졌다.
자고 일어나면 지금까지의 일이 꿈이기를 바라며.

 

 

 

 

 

 

 

 

 밤이 끝나고 낮이 찾아온다. 어둠이 끝나면 희망이 찾아온다. 민석이 기쁜 표정을 감추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눈을 이식하겠다는 사람이 나타나게 되면 루한씨께선 눈을 뜨실 수 있습니다."
"저, 정말인가요?"

"하지만, 과연 누가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눈을 이식하려 할까요? 요즘은 눈 구하는 것도 힘듭니다. 게다가 조금만 더 지체되면 루한씨는 평생 눈을 뜨지 못하고요."

 

 

 민석의 눈이 밝게 빛났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 없어요.
ㅡ여기 있거든요.

 

 

 

 

 

 

 


 요즘들어 민석이 저의 곁에 없는 일이 잦아졌다. 이제 제 풀에 지친게지, 별다른 감흥 없이 루한이 생각했다. 하긴, 그에게 일말의 감정조차 없는 자신의 옆에서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도 용했다. 루한에게서 잔잔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아무도 없는 빈 방에서 유일한 소리인 콧노래. ㅡ가 왠지 그를 더욱 외로이 만들었다. 절대 눈물따윈 흘리지 않을 것 같았던 루한의 굳게 닫힌 눈에서 하얀 눈물이 한 방울 똑,하고 떨어졌다. 아. 외롭다. 생소한 감정에 루한이 갸웃했다. 항상 주변엔 사람들이 넘쳐났다. 저를 좋아한다던 사람, 멋있다고 칭찬하던 사람, 하다못해 질투하는 사람까지. 준수한 외모와 뛰어난 머리가 그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곁엔 자신을 존경한다던 사람들이 바글바글했지만 이젠, 없다.

 

 

 

 

 

 


"...맑네요, 공기가."
"......"

"안 그런가요?"

 

 


 조용하다못해 적막하기까지 한 분위기를 깨뜨리고자 쓸데없는 말로 대화를 시도했다. 두 눈으로 루한을 볼 날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생각하니 우울해졌다. 의사에겐 이미 말해놓았다. 양쪽 눈 모두 이식하겠다 했으나 그리하면 자신 때문에 민석의 눈이 성치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루한이, 죄책감에 심하게 시달리리라는 의사의 말에 한쪽 눈만 이식하기로 결정되었다. 수술 날짜는 이주 후인 20일. 루한의 생일이다.

 

 

 

"...그러게."
"....."

 

 


 단조롭게 대화가 끝이나버렸다. 더 이상 말을 하기 귀찮은건지, 자신과 말하기 싫은 건지 루한의 대답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곁에만 있어도 찬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기분에 김민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여전히 루한은 차갑다. 차갑고 냉소하다. 차갑고 냉소하고 슬펐다. 자신에게 조금이라도 웃어주면 좋으련만. 저가 소희가 아니란 것을 들킨 이후로 루한은 자신에게 웃어주지 않았다. 헛된 희망은 버려야해. 짤막한 세 어절을 되뇌이며 민석이 서글프게 미소지었다.

 

 

 

 

 

 

 

 


07 (完)

 

 

 

 

 


 좋아해요. 몇 번을 되말해도 질리지 않는 한 마디.

 


 루한에겐 눈을 이식해주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고만 알렸다. 워낙에 똑똑하고 매사에 철저한 그인지라 의심의 구석이 보였지만, 괜히 꼬투리잡을 필욘 없다고 느꼈는지 이내 기쁜 낯으로 알겠다 대답할 뿐이었다. 루한의 휠체어를 밀며 가만히, 꽤나 심란하게 생각했다. 수술 후 그에게 눈을 이식해준 사람이 자신이란걸 알려야 할까, 그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숨어 살아야 할까. 루한을 태운, 민석이 미는, 휠체어 바퀴가 돌돌 돌아가는 소리가 오밤 중의 텅 빈 복도를 복도를 울렸다.

 앞으로 오 일, 머릿속이 전혀 정리되지를 않았다. 여전히 복잡하기만 한 머릿속에 손을 집어넣어 정리정돈하듯 조물딱거리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할 정도로 민석은 혼란스러워했다.

 

 

"머리 울려. 그만 돌아가자."

 

 

 보이지도 않으면서 고개를 들어올려 자신이 있을 만한 곳을 바라보며 말하는 루한의 휠체어를 차분히 밀어주었다. 루한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드디어 앞을 볼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었는지 루한은 기쁜 기색이었다. 루한에게 보이진 않았겠지만 민석도 덩달아 웃었다. 그의 입가에 예쁜 곡선이 자리잡았다.

 

 

 

 

 

 

 


 어영부영 시간은 지나갔다. 허무하리만큼 빠르게 지나간 시간 때문인지, 착잡한 마음 때문인지 살래살래 고개를 젓는 민석이었다. 병원 침대에 누워 미련없이 웃음지었다. 후회는. 없었다. 눈을 돌리면 먼저 전신마취를 한 채 잠들어있는 루한의 모습이 보인다. 이제 그가 앞을 볼 수 있겠지. 그의 얼굴에 내 눈은 어떤 느낌일까? 날카로운 마취주사의 바늘이 체내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따끔한 느낌과 함께 눈이 스르르 감겼다.

 

 

 

 

 

 

 

 눈을 떴다. 앞이 보였다. 오랜만에 보는 세상은 상당히 생소했다. 눈을 뜬 것이 믿기지 않아 한참을 누워 이 기쁨을 만끽했다. 대기해있던 몇몇 의사들이 루한에게 앞이 잘 보이느냐 물었다. 네. 밝게 웃으며 대답한 루한이 몸을 일으켰다. 의사들이 떠난 후, 루한은 제 담당이었던 의사를 찾았다.

 눈을 떴다. 시야가 반으로 좁아졌다. 루한을 담당했던 의사를 찾았다.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문 앞에 도착해, 노크를 위해 손을 들어올렸다. 최소한의 예의는 지켜야지. 그런 민석의 생각은 금방 사라졌다. 문의 저 안 쪽에서 날카로운 목소리가 새어나왔다. 상당히, 익숙한, 두려운.

 

 

"김민석이라고?"

 

 

 민석이 자신의 이름에 손을 내렸다. 머리가 하얗게 되었나,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설마 의사가 말해준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애써 부정하던 민석의 싵오라기같던 희망이 루한의 목소리에 산산히 부서졌다.

 

 

"민석이가, 김민석이 나에게 눈을 이식했다고?"
"..네."

"마, 말도 안 돼!"

 

 

 목소리만으로도 그가 당황했단 것쯤은 알아챌 수 있었다. 괜스레 드는 죄책감에 민석이 고개를 푹 숙였다. 자신도 모르게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잘근잘근 씹어댔다. 그의 반응이 이러할까봐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한참을 아래만 내려보던 민석 앞의 문이 갑자기 열렸다.

 


"..!"
"...김민석?"

"루한.."
"너, 너, 너, 눈이..!"

 

 

 매사에 완벽하던 평소와 다르게 입을 헤- 벌리고 어리숙하게 말하는 루한의 모습은 무척이나 우스웠지만, 그런 것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민석 또한 상당히 당황스러웠기 때문인지 그들은 오랜 시간동안 묵묵히 서있기만 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루한이 화를 꾹꾹 눌러담은 목소리로 말을 뱉었다. 여전히 매력적인 그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민석은 오늘따라 유난히 그의 목소리가 두렵다고 느꼈다. 피하고 싶었지만 마땅한 구실이 없었기에 가만히 있었다.

 

 

"..이 눈, 네 눈이야?"
"....."

"대답해!"
"...네."

 

 

 하, 짧은 한숨소리와 함께 루한이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주저앉았다. 멍하니 일어날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앉아 있는 그를 보는 민석의 가슴이 착잡해졌다. 혼자서 중얼대는 루한을 바라보는 눈에 물기가 어렸다. 흐르려는 눈물을 막기 위해 고개를 살짝 들었다. 눈에 고인 눈물이 간당하게 걸리는 것이 느껴졌다. 계속 떠있던 눈이 따가워져 눈을 살짝 감았을 뿐인데, 그 짧은 틈 사이에 얍삽한 눈물은 아래로 툭툭 곤두박질쳤다. 루한이 민석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왜, 왜 그랬어?"
"...그 정도로 좋아하니까요."

"나 좋아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냥 너 원래 생활에 착실하라고 했잖아! 그냥 모른 척 하지 그랬어..!"

 

 

 울부짖듯 루한이 오열했다. 어느새 민석에 눈에서도 쉴 새 없이 흐르는 눈물들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루한은 민석의 생각보다 훨씬 크게 충격을 받은 듯 싶었다. 나사 빠진 로봇인 양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고, 저를 볼 때마다 무서울 정도로 제 동공을 흔들어대는 그의 모습에 민석도 지쳐가기 시작했다. 그에게 행복을 주고 싶어서 눈을 이식하겠다 한 것인데 오히려 더 악화됐다. 피하듯 자릴 비켜버린 루한에 의해 민석이 짐짝처럼 덩그러니 남겨졌디. 민석이 밝게 웃었다. 그래도, 루한의 수술이 무사히 성공해서 다행이야.

 

 

 

 

 

 시간은 약이다. 라는 말이 있듯이 루한의 발작도 점차 사그라들었다. ㅡ라고 생각됐던 루한이 성난 뿔소마냥 날뛰었다. 물건들을 닥치는대로 집어던지곤 제 풀에 지쳐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흩뿌리기 일수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횡포는 더해갔다. 그가 던진 물건에 맞아 여기저기 피멍이 든 김민석이 그를 붙잡았다.

 

 

"루, 루한.."

 

 

 루한보다 키가 더 민석이 머리 반 쯤 차이나는 그를 감싸안고 다독였다. 거짓말같이 얌전해진 루한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장난 라디오마냥 알아듣지 못할 말을 반복하며 그가 미친듯이 중얼거렸다. 민석이 계속해서 그를 안았다. 일순간에 루한의 움직임이 멈췄다. 사람은 뜬금없이 초능력을 발휘한다 했던가. 기운도 회복되지 못한 루한이, 어디서 난지 모를 거센 힘으로 김민석을 떼어내곤 눈을 맞췄다. 속눈썹이 지저분하게 엉클어진 채로 루한이 바싹 마른 입술을 열었다.

 

 

"내가, 진짜 인정 아, 안 하려고 했는데."

 

 

 줄곧 울다 말을 꺼내서인지 숨이 부족한 듯 루한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민석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나, 너 좋아하는 것 같다."

 

 

 뜬금없는 루한의 고백에 김민석이 멍하게 그를 쳐다보았다. 이 상황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해..?

 

 

 

 

-

 

 

 

 


 머릿속이 전혀 정리되지 않았다. 적어도 민석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가길 바랐는데. 그가 다른 사람에게 애꾸눈 취급받는 꼴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가 행복하게?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끼는거지. 루한이 어리둥절하게 웃었다.

 아무 생각없이 물건들을 집어던졌다. 자신이 던진 물건에 맞아 여기저기 상처가 난 민석을 보면 자신이 원망스러웠지만 막상 그의 얼굴을 보면 또 피하고 싶어져서, 몸이 멋대로 움직이고 말았다. 왜 갑자기 그를 피하게 된 건지도 몰랐다. 그를 보면 온 몸이 화끈거리고 머리가 아픈게, 저는 그를 더럽게도 싫어하는 모양이었다. 김민석이 그를 다독였다. 다독임을 받고 싶었던 것은 아닌데. 그런데도 불구하고 왠지 모를 눈물이 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아까까지만해도 거부반응에 휩싸였던 몸뚱아리가 얌전한 것이 수상쩍었다. 게다가 왜 이렇게 두근거리냔 말이다. 몸이 아프면서 뇌까지 퇴화된건지, 그의 뇌는 그에게 명확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저, 자신의 앞에 있는 남자에게 안겨 흐느낄 뿐이었다.

 

 

 좋다. 자신도 모르게 머릿속에 두 글자가 박혔다. 좋아? 내가? ...누구를? 김민석을? 루한이 혼란스럽게 중얼거렸다.

  ..아, 루한이 짧은 탄성을 내질렀다.

 내가 이 아이를 좋아하는 것이었나. 그를 좋아해서 그를 볼 때마다 심박수가 증가했고, 온 몸이 화끈거렸던 것이었다. 이상하리만큼 그를 피하고 싶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던 건가. 게다가 이렇게 안겨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지 않은가. 인정하고 싶지는 않다. 아니, 미안했다. 그렇게 모질게 대했던 김민석이 좋아졌다니, 그동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울 훑고 지나갔다. 하지만 그래도. 민석에게 안긴 루한이 흐느낌을 뚝 그치곤 김민석을 자신의 눈과 눈높이를 맞춘 후 말했다.

 

 


"내가, 진짜 인정 아, 안 하려고 했는데."

 

 


 눈물을 삼킨 마른 입술이 바삭거렸다. 물기가 가득 어린 눈으로 가만히 뚫어져라 자신을 바라보는 민석에게 루한이 말을 이었다.

 

 


"나, 너 좋아하는 것 같다."

 

 

 놀란 그의 눈이 시야 가득히 들어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를 싫어하는줄 알았던 자신이 한심했다. 고작 자기의 마음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루한이 머리를 쾅쾅 쥐어박고 싶다 생각하는데 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 맑고 투명한, 행복했던 그 때처럼.

 

 


"..그거 사귀자는 거죠?"
"멋대로 생각해."

 

 

 그가 짧게 고개를 끄덕이자 민석이 눈물로 얼룩진 눈을 곱게 접었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진 않았다. 너무 옆에 있어서 그가 나에게 소중한 사람인지 몰랐던 것일까. 곁에 있을땐 모르다가 떠나면 후회한다고들 하지만, 난 떠나기 전에 깨달았다. 여차하면 새드엔딩이 될 수도 있었던 뻔한 스토리지만,

 

 

"...고마워요, 루한."

 

 

 뻔한 스토리의 뻔한 사랑보다 더, 많이 사랑할 거니까, 기대해도 좋다. 삼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또 다시, ㅡ봄이었다. 그들의 시간에도, 그들의 연애에도.

 

 


"네가 이별을 준비하는 일따위 없게 해줄께."

 

 

 나는 그에게 웃었고, 그는 나에게 웃었다.

 

 

 

 

 

 

 

 

 

 

 

 

 

 

 

 

 

 

[안소희 번외]

 


루한 X 김민석
권지용 X 안소희

w.순백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MP3 플레이어에 찍힌 음악명을 보며 슬피 웃었다. 그 날도 이렇게 따스했었다. 마치 바람을 타고 날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을 정도로 화창하게 개인 날, 그는 이리저리 날아다니는 민들레 홀씨처럼 나에게 찾아왔다. 반복되는 하루일과를 실천하기 위해 상쾌한 새벽공기를 들이키며 산책로를 걷고 있었다. 길가에 들쑥날쑥 피어난 들꽃들과 새소리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해주었다. 옛말에 일찍 일어난 새가 벌레를 잡아먹는다는 속담도 있는데, 이 새들은 먹이를 많이 먹었으려나.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중, 오래 걸어선지 지친 다리를 쉬게 해주기 위해 힘겹게 이끌곤 벤치로 향했다. 조곤조곤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을 때였다. 그가 갑자기 다가온 것은.

 

 


"안녕."
"...?"

"네가 소희지?"

 

 


 아, 잘생겼다는게 이런거구나.싶을 정도로 그는 매우 수려한 외모를 지녔었다. 한 눈에 봐도 말을 질질 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주듯 그는 반짝이는 눈으로 날 쳐다보며 낮은 목소리로 길게 말했다. 앉아서 그를 쳐다보기엔 그의 키가 너무 컸다. 가만히 올려다보는데, 눈을 강타하는 강한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자신을 향해 인상을 쓰는줄 알았는지 살짝 말을 더듬기 시작했다. 우스운 속내를 감추고 대답했다.

 

 


"제가 안소희 맞아요. 누구시죠?"
"어..이름이 안소희가 맞구나, 아니지. 난 루한이라고 해!"

 

 

 그는 탁트인 화사한 금빛 머리칼을 지녔었다. 깊은 눈동자와 예쁘게 어울린다 생각하며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부담스러웠는지 그가 눈길을 피했다. 그는 시원시원한 목소리로 말했다.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다 어벙하다싶은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네."

 

 

 저의 대답을 들은 것이 그리도 기뻤는지 그의 눈에 희색이 감돌았다. 그가 목을 가다듬곤 말했다.

 

 


"하여간, 앞으로 잘 부탁해!"
"..네?"

"내가 너한테 첫 눈에 반했거든! 미래의 남자친구 얼굴이니 똑똑히 봐둬!"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내가 외모지상주의였나. 새롭게 알게된 자아에 갸웃거리며 그에게 싱긋 웃어주었다. 내 웃음에 답하듯 그도 내게 밝게 웃어주었다. 그 뒤로도 그는 계속 내게 찾아왔다. 나중에 알게된 일이지만 그는 예전부터 나를 봤다고 한다. 다른 사람 일엔 일말의 관심조차 없었기 때문인지 나만 그를 몰랐던 것이었나. 급격히 치미는 미안함에 그에게 사과했지만 그는 여전히 시원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발육이 좋아 두어살 쯤 연상이라 생각됐던 그는, 나와 동갑이었다. 조금씩 그에게 마음을 열어가는것을 깨달았다. 마음에 드는 것이 생기면 절대 놓치지 않는 집착을 가진 나는, 단번에 그를 붙잡았다. 그에게 당당하게 고백했다. ㅡ나랑 사귀자 루한, 하고. 시간이 흘러도 그는 여전히 내게 다정했고, 밝았다. 주변에 있기만 해도 행복해지게끔 만들어주는 그가 좋았다.

 

 

 

 

 

 

 

 마치 인소 속의, 드라마 속의 여느 주인공들처럼 우리에게도 시련이 닥쳐왔다. 국가에서 내로라하는 집안의 외동딸인 저와 달리 루한은 막대한 유산을 물려받았지만 고아였고, 집안에선 그보다 더 내력이 탄탄한 소꿉친구, 권지용과 결혼시키려 했다. 친구 이상으로서의 감정따위 전혀 갖지 않았던 그와 결혼하라는 터무늬없는 강요에 습기찬 여름 옷처럼 축축 처졌다. 저런 호구랑은 연애조차도 하기 싫은데, 결혼을 하라니.

 

 

 

 

 

"소희야!"
"뭐."

"아잉, 그렇게 대하면 섭섭하지!"

 

 


 죽여버리고 싶으니까 작작해. 소희가 사납게 대꾸했다. 날카로운 소희의 눈빛에 지용이 움찔거렸지만 이내 사람좋은 미소를 지으며 소희의 두 손을 잡았다. 싱글거리는 낯짝을 한 대 패주고 싶단 생각을 하며 소희가 뾰루퉁하게 대꾸했다.

 

 

"무슨 꿍꿍이야?"
"꿍꿍이라니~"

 

 


 난 니가 좋을 뿐이라고. 지용의 싱그러운 노란 앞머리가 봄바람에 휘날렸다. 지용이 소희의 몸을 돌려 머릿결을 만지작거렸다. 가지런한 머리를 손에 쥐고 입에 갖다댔다. 소희가 진저리를 치며 그를 밀어냈다.

 

 

"우웩.."
"뭐, 뭔 우웩이야. 간만에 분위기나 잡아봤는데."

"너랑은 전혀 안 어울리니 관두셔."

 

 

 루한과는 잘 어울리겠단 뒷 말을 깊숙히 눌러담으며 소희가 지용을 노려봤다. 그런 소희의 모습 쯤. 이미 익숙한지 지용은 웃음기를 잃지 않았다. 자신의 트레이드마크는 해맑음이라도 된다는 양, 그는 늘 천진난만하게 웃었다. 한 때는 그를 좋아했었다. 어린 마음에 성급히 고백해 사귄 적도 있었지만, 바람을 피고도 저 웃음을 유지하는 모습에 소름이 돋아 헤어져 버렸었다. 일이 잘 풀려 친구로 남아있긴 하지만 그는 여전했다.

 

 

"소희야, 우리 결혼 소식 들었어?"
"안 그래도 몹시 기분 나빠하는 중이야."

"왜? 나처럼 잘생긴 사람이랑 결혼하는 것에 대해 기뻐해야 하지 않아?"

 

 

 우웩이다, 우웩. 얼굴 가득 살기를 띄며 소희가 그를 째렸다. 낯짝도 두꺼운지 지용은 자기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이 눈을 봐, 이렇게 깊고 빠져들 듯한 청아한 눈과, 베이고 싶은 깔끔한 콧날, 키스하고 싶은 핏빛 입술에, 사과도 썰 것 같은 턱선을 보라고! 줄곧 이어지는 자기 자랑에 소희가 이러다간 진짜 그를 죽일 지도 모르겠단 생각에 살포시 귀를 막았다. 그 후에도 지용은 끈질기게도 잘난척을 이었다.

 

 

"결론은, 넌 이 퍼펙트한 나랑 결혼하는걸 영광으로 알라고!"
"에휴..."

 

 

 여전히 웃음을 띈 채 자랑스럽게 말하는 지용을 보며 그녀가 한숨을 내뱉었다.

 

 


"그런데 소희야, 너 오늘따라 더 예쁘다?"

 

 


 장난스레 말하는 그를 보는 소희의 눈처럼 하얀 볼이 벚꽃빛으로 물들었다.

 

 

 

 

 

1.

 그는 저를 좋아한다고 광고라도 하려는지 지겨울정도로 끊임없이 애정행각을 펼쳐댔다. 손잡기는 기본, 계속해서 입술을 들이대는 그에 소희가 몸서리쳤다. 날카로운 눈초리를 그대로 받아내며 지용이 말했다.

 

 


"소희야. 너 진짜 나 안 좋아해?"
"그런걸 왜 물어봐."

"그야,"

 

 

 나는 널 좋아하니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도 못 할 말에 소희가 의심스럽게 눈을 부볐다.

 

 

"확실해?"
"내 마음도 내가 모르겠냐."

"진짜?"

 


 소희가 되물자 지용은 그에 꼬박꼬박 대답했다. 머리도 누리끼리한게 삐약거리니까 진짜 병아리같네. 소희가 웃음을 흘렸다. 소희의 웃는 모습이 이쁘다며 덩달아 방실방실 웃는 지용을 보며 소희가 실소를 터뜨렸다. 하여간에 미워할 수가 없어요.

 

 

 

 

 


2.

 지용이 늘 그렇듯 웃음꽃을 피워대며 달라붙어 아기 강아지마냥 아양을 떨어댔다. 평소라면 있는대로 짜증을 부리며 피했을 애정행각인데 피하지 못했다. …피하지 않은건가. 어찌됐던간에 소희는 복잡하게 얽힌 머리가 불쾌했다. 자신의 애인은 루한인데도 불구하고 왜 요즘은 지용과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진걸까.

 

 

 

 

 

3.

 루한과 만나는 일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의 연락을 무시하기도 했지만, 워낙에 자존심이 드센 그인지라 먼저 약속을 잡은 적이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자신이 만나자 하지 않으니 자연스레 만날 일이 줄어들 수밖에.

 

 

 

 


4.

 끊임없는 권지용의 애정행각이 왠지 모르게 기분좋다.

 

 

 

 


5.

 사랑은 쉽게 변한다 하더라.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는 말도 있듯이, 저의 마음도 점차 변해가는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권지용이라니. 소희가 머리를 부여잡고 한탄했다. 나도 눈이 참 많이 낮아졌군.

 

 

 

 

 

-.

 오랜만에 루한에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데이트 신청, …이라기 보단 이별 선고일까.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기쁨 가득한 목소리에 죄책감이 솟아올랐다. 아이처럼 환하게 응! 그 때 보자! 하는 루한의 목소리가 몸을 쿡쿡 찌르는 듯 했다.

 

 

 

 

 

 


"소희야!"

 

 


 저 멀리 하얀 손을 크게 흔들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루한이 보였다. 부드러운 속눈썹이 예쁜 곡선을 그렸다. 마지막 데이트이니 더 잘 해줘야겠어. 소희가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생각했다.

 

 

 

 

 

 

"오늘 재밌었지! 어, 아이스크림이다. 잠깐 기달려!"

 

 


 어느 새 건널목을 지나 저 편으로 가버린 루한을 응시했다. 총각, 이천원일세. 우와 싸네요! 돈이 많은 이들은 오히려 돈을 아낀다 했던가. 그런 성향 덕에 돈을 모았다 하더라. 루한이 지갑에서 돈을 꺼냈다. 지갑 안 가득한 수표에 아이스크림 장수가 적잖이 놀란 듯 했다. 루한이 헤실헤실 웃으며 돈을 지불했다. 헤벌레 웃는 모습이 지용과 겹쳐보여, 소희가 탄식했다. 그가 다가오자 얼른 생각을 거뒀다.

 

 


"저, 루한."
"뭐라고? 잘 안 들려."

 

 


 이젠 이별을 고해야겠단 생각에 그를 불렀다. 잘 들리지 않는 듯 양손엔 아이스크림을 들고 루한이 다가왔다. 어차피 길 건너편이 집 방향이니까. 소희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루한에게 다가갔다. 길 건너편의 루한에게로 다가갔다. 이별 선고를 들으면 저 웃는 얼굴이 뭉개지리라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도 정말 좋아했었는데. 루한에게 가만히 있으라 말했다. 내가 그리로 갈께요. 차가 없는 틈을 타 길을 건넜다.
 분명히 주위까지 둘러보았고, 차가 없는 것을 확인했지만, 코너로부터 건널목 까지의 길이가 짧은 지라 상당히 위험한 곳이었다. 불운은 소희를 피해가지 못했다. 피할 새도 없이 눈 앞으로 다가온 고급 차에 소희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안소희!"

 

 


 커다란 외침이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아이스크림따위 땅바닥에 내리꽂은 채 자신에게 달려오는 루한이 보였다. 루한이 소희의 몸을 세게 밀쳐냈다. 동시에 한 인영이 하늘로 솟아올랐다.

 사람들이 저마다 그들의 핸드폰을 들고 구조를 요청했다. 소희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방금 전까지 제가 서있던 사고 현장으로 다가갔다. 저의 앞에 있는 이 피로 얼룩진 남자가 자신이 알던 자가 맞는가. 자신을 구하려다 그가 다친 것이다. 소희의 눈에 물이 고이기 시작하더니 곧 뚝뚝 흘러내렸다.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남자의 얼굴로 떨어졌다. 눈물에 씻겨 제 모습을 드러낸 이 남자는, 자신이 알던 자가 맞다.

 금방 응급차가 왔다. 여전히 제 눈앞도 가늠하지 못한 채 정신나간 여자처럼 소희가 오열했다. 왜 하필 오늘 그를 불렀을까. 내일 불렀어도 될 걸. 자신의 이별 통보를 받으러 나온 남자가 자신 때문에 크게 다쳤다. 모든 것이 제 탓인듯 싶었다. 왜 오늘 불렀을까. 왜 아이스크림을 사오라 시켰을까. 왜 내가 차를 피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을까. 한참을 울던 소희가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고가 났다는 것을 알려주듯는 핏자국이 사방에 퍼진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는 벌써 병원으로 운송된건가.

 비틀거리며 일어난 소희가 핸드폰을 켰다. 의식도 하지 못한 채로, 은연중에 저도 모르게 단축번호 1번을 꾹 눌렀다. 여보세요? 경쾌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지, 지용아."
"..응?"

"여, 여기 ㅁㅁ인데, 빠, 빨리, 좀, 와줘.."
"…금방 갈께."

 

 

 제 아무리 눈치없는 지용이어도 소희가 울었단 것쯤은 알 수 있을 법한 쉬어버린 음색에 지용의 음색이 한 층 낮아졌다. 금방 가겠다는 말과 함께 끊겨버린 전화기를 붙들고 소희가 오열했다. 아, 아.

 지용은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왔다. 그만큼 전속력으로 온 것인가. 약간 쌀쌀한 날 에도 불구하고 그는 가디건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머리는 엉망진창인 채로 달려나왔다. 온통 피바다인 주변을 보고 놀랐는지 지용이 소희에게 다급히 물었다.

 

 

"…어떻게 된 거야."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소희가 한참을 설명했다. 저를 좋아해서, 루한에게 이별을 선고하러 불러냈다 말할 땐 지용도 잠시 기쁜 기색이 보였지만, 루한의 사고 소식을 듣곤 지용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소희야.."
"나, 나, 어떡해야해? 응?"

"…모르는 척 하자. 그냥 애초부터 몰랐던 사람으로 생각하고 사라져버리자."
"..그게 무슨 소리야?"

 

 

 지용이 얘기해준 내용은 이러했다. 이대로 소희가 루한에게 간다면, 마음약한 소희는 죄책감 때문에라도 루한의 곁에 계속 남아있을 것이다. 마음을 굳게 다잡고 이별을 선고해도 머리 좋은 루한이 사고를 빌미로 소희를 옆에 두려 할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그냥, 루한을 모른체하고 자신과 결혼하는 것이 소희에게도, 자신에게도 더 좋은 방도일 것이리라. 그래도, 그래도. 하며 한참을 훌쩍이던 소희도 계속해서 설득하려는 지용에 넘어가고 말았다. 지용이 소희의 손을 꽉 붙들었다. 그러곤 이내 누가 볼세라, 누가 채갈세라 사고 현장에서 멀리 사라졌다. 며칠 뒤 병원에서 깨어나 민석을 마주할 루한은 기억 속에서 없애 버린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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