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지나간 자리
bgm : 홍대광 - I Feel you (Inst.)
07_익숙함의 역설
“어, 내가 먼저 도착할 줄 알았는데 너 되게 빨리 왔네?”
“약속 시간 십 분 전에 미리 도착해 있는 건 기본이지.”
네가 약속 시간을 얼마나 중요시하는지 내가 제일 잘 아는데 어떻게 너를 기다리게 할 수 있겠어. 남자와의 약속이라고 나름 신경 쓴 건지, 너는 전부터 즐겨 입던 하얀 원피스를 단정히 차려입은 모습이었다. 그 원피스 내가 참 좋아하는 옷이었는데. 물론 너는 기억할 리 없겠지만. 입는 사람이 너인데 무슨 옷인들 안 예뻐 보이겠냐만, 너는 그 원피스를 입을 때 특히나 더욱 빛나는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었다. 약속 상대가 나여서 다행이지, 다른 남자들과 만날 일이 있었을 때도 이렇게 예쁘게 입고 다녔던 거면 나 약간 서운해지려 해, 이여주.
“뭐 할래? 어제 집 가서 살짝 알아보니까 요즘 재밌는 영화 많이 나온 것 같던데 영화나 한 편 보고 저녁 먹을래? 아직 밥 먹긴 이른 시간이잖아.”
“어제 집 가서 영화까지 찾아봤어?”
“아니 그냥, 약속을 잡긴 잡았는데 마땅히 놀 거리가 없는 것 같아서.”
“너 자꾸만 나한테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고 하는 거 진짜 작업 거는 거 아니야? 완전 수상한데 이거.”
“자꾸 그렇게 몰아갈 거면 그냥 집 간다. 진짜 아니라고 했지.”
나 때문에 나를 잊어버린 너에게 이렇게 속 편한 농담이나 던지고 있어도 되나 싶은 생각이 뒤늦게 밀려왔지만, 전부 소용없는 짓이었다. 지난 2년간 너를 잊으려고 애썼던 나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고, 내 앞에 서 있는 너는 내가 감당하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으니까. 웃기지도 않은 내 농담에 아니라며 발끈하는 모습까지 하나하나 사랑스러운데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해맑은 너의 미소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
영화는 생각보다 지루했다. 사실 그건 영화의 탓이라기보단 내 탓에 가까웠다. 오늘 본 영화뿐만 아니라 여태껏 너와 함께 본 영화들은 대체로 그랬다. 너를 옆에 두고 앉아 영화를 보는 일은 나에겐 시간 낭비나 다름없는 일이었으니까. 나는 항상 영화가 상영되는 두 시간가량 스크린을 쳐다보고 있는 것보다 네 얼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여겨왔다. 그래서 너와 함께 영화를 본 날이면 주말에 혼자 영화관에 가서 그 영화를 한 번 더 보곤 했다. 영화관 옆자리에 네가 앉아 있다는 건 내가 그 영화에 집중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에. 아까 영화표를 사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했다. 주말에 시간 비워놔야겠네, 여기 와서 영화 다시 보려면. 하고. 예전 같았으면 너에게 영화를 보는 대신 다른 걸 하며 시간을 보내자고 제안했겠지만, 어제 저녁부터 영화를 알아봤다는 너의 말에 차마 다른 걸 하자는 말을 꺼낼 수 없었다. 결국 그렇게 영화 한 편이 끝났고, 시간은 벌써 두 시간이 지나있었고, 나는 아무런 소득 없이 영화관 밖으로 나와야 했다. 유일하게 얻은 거라곤 영화 내용에 대한 너의 질문들 정도? 물론 그중 내가 대답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었지만.
“영화를 본 거야, 만 거야. 중간에 졸았어?”
“졸지는 않았는데... 그냥 내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라.”
“뭐야, 아까는 액션 좋아한다며. 그래서 이걸로 정한 거란 말이야.”
“아... 그래? 원래 액션 좋아하기는 하는데, 이 영화 내용이 별로 마음에 안 들어. 분위기가 너무 어두워, 너무.”
“...액션 코미디였는데.”
“아... 몰라, 내가 원래 집중력이 안 좋아서 영화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해.”
“영화 별로 안 좋아한다고 진작 말을 하지. 그럼 다른 거 했을 텐데.”
너 영화 좋아하잖아. 장르 가리지 않고 다 좋아하잖아. 그깟 영화는 주말에 한 번 더 보면 되지. 너는 재미있게 본 것 같아서 마음이 놓이네.
“마땅히 할 것도 없었는데 뭐. 배고프지? 뭐 먹을까?”
“시우야, 나 사실 아까부터 먹고 싶은 거 있었는데 말해도 돼?”
“뭔데?”
“곱창. 저쪽 큰길 나가기 전에 있는 포장마차 알아? 거기 곱창이 진짜 맛있거든. 곱창 먹으면서 소주 한 잔 하자. 아, 너 혹시 곱창 못 먹어?”
“곱창? 좋지, 곱창. 나 곱창 엄청 좋아해.”
기억은 잃어버렸어도 식성은 잃어버리지 않았나 보다. 어쩜 곱창 좋아하는 것까지 그대로인 거야. 내가 곱창을 먹기 시작한 게 너 때문이라는 걸 알면 아마 살짝 놀랄 거다. 너는 내가 원래부터 곱창을 좋아하는 줄 알고 있었을 테니까. 나 사실 곱창 잘 못 먹었었는데, 너랑 같이 저녁 먹고 싶어서 억지로 먹었던 거거든. 그것도 벌써 3년 전 일이네. 그리고 이건 진짜 찌질해 보일까 봐 말 안 하려고 했는데, 어제 처음 본 사람 데리고 포장마차 가고 그러는 게 당연한 일인가? 다른 남자들한테도 같이 곱창에 소주 먹자고 자주 포장마차 갔었던 거라면 진짜 곤란한데.
“다행이다. 저기 곱창 진짜 맛있어. 얼른 가자. 나 배고파.”
그래, 다른 남자들이랑 곱창 좀 자주 먹었으면 뭐 어때. 지금 네 앞에 있는 게 나인데.
“아줌마, 여기 야채 곱창 2인분이랑 소주 두 병 주세요.”
“소주를 무슨 두 병씩이나 시켜. 나 많이 안 마실 거야.”
“그럼 내가 많이 마시면 되지 뭐. 어차피 맛있게 먹으려고 왔는데, 이럴 때 아끼는 거 아니야.”
아끼는 게 아니라... 너 술 잘 못하잖아. 소주 몇 잔만 들어가도 얼굴 새빨개져서 혀 짧아지는 소리 내는 애가 말은 꼭 술 잘하는 사람처럼 하네. 이제는 네가 취해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을 텐데, 참 큰일이다. 예전처럼 너를 업고 집 앞까지 바래다줄 수도 없는 입장인데 어쩌려고 이러는 건지.
***
“나 오늘 꿈에도 너 나왔다? 진짜 신기하지.”
“오늘도? 오늘은 또 무슨 꿈이었는데?”
“아... 또 놀림 받을 것 같은데.”
“무슨 꿈이었길래 그래?”
“나 진짜 너한테 작업 거는 거 아니다! 그냥 꿈 얘기하는 거야, 꿈 얘기.”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실까...”
무슨 내용일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잃어버린 나와의 기억과 추억이겠지. 네가 자꾸만 말을 빙빙 돌리며 시간을 끄는 동안 오늘은 네가 무슨 꿈을 꾸었을지 혼자 상상해 보았다. 우리가 함께 새해를 맞이했던 날? 오랜만에 같이 놀이동산에 갔던 날? 그것도 아니면 우리가 처음으로 말다툼을 했던 날?
“네가 우리 학교에 왔었어. 배경은 우리 학교였고 거기에 네가 있었는데, 아니지. 꿈이니까 현실이랑 똑같을 필요는 없잖아? 아마 너랑 내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설정이었나 봐. 엄청 자세하게는 기억 안 나서 잘 모르겠어. 원래 꿈은 깨고 나면 금방 희미해지잖아.”
“그렇긴 하지. 깨자마자 사라지는 게 꿈이 할 일이니까.”
내가 너희 학교에 찾아간 날이었나 보네.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정말 그냥 친구를 만나는 기분으로 놀다 오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실패인 것 같다. 나에겐 추억으로 남은 그날의 기억이 너에겐 아침이 되자마자 사라져버린 한 조각의 꿈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여전히 나의 마음을 아프게 헤집어놓았다.
“뭐가 그렇게 심각해. 너 표정 완전 무서워, 지금. 내 꿈에 또 네가 나왔대서 화났어?”
“어? 아니지. 화가 왜 나.”
“그럼 좀 웃어보든가. 넌 무표정보다 웃을 때가 더 낫던데.”
“...어?”
“아니~ 그냥 그렇다고. 나 아직 취한 거 아니다!”
취했냐고 묻지도 않았는데 혼자 찔렸구나, 이여주. 그러니까 술 잘 못하는 애가 오늘 왜 이렇게 열심히 마시는 거야. 이따가 취하면 어떻게 하려고.
+ 복습 잘 하고 계신가요 독자님들~?
11시에 8화가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