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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컨드 김정우 X FAME




*세계관이 있습니다 (FAME)









 샐러드 기념일 4

내가 사랑하는 빌런, 나를 사랑하는 히어로

W. 문달 









동경하는 도시에게 바칩니다.  


매캐한 연기들을 사랑합니다. 


형형한 불빛들을 사랑합니다.  


괴성과 사이렌이 쉴 새 없이 울리는 도로를,  


휘슬 소리와 이기적인 도시민들을, 그리고  


그중 가장 아름다운 나의 빌런을 사랑합니다. 










[NCT/김정우/치엔쿤] 내가 사랑하는 빌런, 나를 사랑하는 히어로 | 인스티즈




A. 내가 사랑하는 빌런 

 

 

-a 

 

 

조용한 걸 좋아해. 자습 시간에 숨소리도 내지 않고 공부하는 서른여덟 명의 머리들을 맨 뒷자리에서 바라봐. 신기해. 약속이나 한 듯 고요한 게 소름 끼칠 때도 있어. 쉬는 시간이 찾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같은 사람들 맞나 싶을 정도로 복도에서부터 시끄러워지거든. 나는 조용한 게 좋은데.  

 



유독 사과 같은 애가 있어. 모두가 입을 모아 잘생겼다고들 말해. 너. 난 네가 좋아. 단지 돋보이는 외모만은 아니야. 너는 조용하거든. 내가 말했잖아, 난 조용한 게 좋다고.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사람이 어떻게 조용할 수 있냐고? 나도 처음엔 부정적인 눈으로 너를 봤어. 선망의 대상으로 자주 올라가는 자리에서 너는 세 마디 이상 하지 않더라고.  

안녕, 고마워, 잘 가. 

의외로 같이 어울리는 특정 무리가 없었어. 쉬는 시간엔 뭐가 그리 재밌는지 책장만 열심히 넘기며 목을 숙였어. 점심시간엔 혼자 밥을 먹어. 식판 옆엔 항상 도서관 바코드가 찍힌 책이 있어. 네 앞자리는 매일 바뀌었어. 정직하게 밥을 다 먹고 나면 빠지지 않고 항상 도서관으로 향해. 나도 내가 좀 무서워. 그런데 너는 날 무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이기적이야? 그런데 다들 이기심은 지니고 살아. 무엇보다 난 널 좋아한다니까.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 나는 감히 손대거나 가까이 다가갈 수 없거든. 소중한 건 지켜줘야 되니까. 그런데 아끼는 그것이 먼저 다가오면 어떡하지. 

 

 

"너도 이 책 좋아해?" 

 

 

숨이 많이 섞인 목소리에 어깨가 절로 움츠려졌어. 기분 좋게 간지러웠어. 

나는 겨우 고개를 끄덕였어. 교실에서 우리는 가장 긴 대각선이야. 너는 앞문과 제일 가까운 자리고, 나는 창가에서 제일 끝자리지. 이렇게 가까운 거리는 처음이라 눈을 어디 둬야 할 지 모르겠더라. 내게 말을 건 입술을 쳐다보다, 높이 있는 눈을 맞추다, 툭 튀어나온 목젖을 보다가 지나가지 못하게 막고 있는 뻗은 팔을 보다가. 

 

 

"우리 같은 반이지." 

 

 

두 마디. 나는 또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어. 

 

 

"나 너 도서관에서 매일 봤어." 

 

 

세 마디. 다른 애들한테 해주는 안녕, 고마워, 잘 가는 들어가지 않았어. 

나는 학교에서 입을 잘 열지 않아서 갑작스레 말하면 쇳소리가 나올까 봐 입만 물고기처럼 뻐끔거렸어. 

 

 



"나도 너 도서관에서 매일 봐. 책 읽는 거 무지 좋아하나 보다." 

 

 

"응. 책은 떠들지 않거든." 

 

 

"책은 입이 없잖아." 

 

 

내 말에 네가 작게 웃었어. 웃을 때 잡히는 입모양이 너무 예쁘다 너. 

 

 

"응 맞아. 은묘 네 말이 맞아." 

 

 

너는 알까, 이름을 부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일단 난 조곤조곤 지저귀는 그 속삭임에 내 이름이 섞여 있다는 사실에 창문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었어. 

있잖아, 나는 모은묘 라는 이름이 부드러운 혓바닥에 박음질 되어 있었으면 하고 바라. 이미 뻣뻣한 내 혀는 네 이름 획을 따라 그었거든.  

 

 

그날부터 너는 내게 아는 체를 잘 했어. 먼저 점심을 같이 먹자고도 했지. 

동그란 한 쌍이 아닌 다른 눈총들은 부담스러웠지만 네가 좋은 건 나도 무조건 좋아. 너는 마주 보고 먹는 것보다 옆에 나란히 앉아서 먹자고 말했어. 왜, 얼굴 마주 보고 먹는 게 부담스러워? 물으면 절대 아니라 생머리를 찰랑거려가며 도리질을 했지.  

 

 

"더 가깝잖아." 

 

 

네가 뱉는 모든 말이 달아. 웃고 싶어 안달 난 입술을 겨우 말리며 네 식판 옆에 꼭 붙어있던 책을 밀었지. 네 앞에 앉았다 가는 애들은 이제 없어. 

 

 

"나 잠 좀 잘게. 50분 되면 깨워줘." 

 

 




도서관 제일 구석 자리가 우리의 지정석이야. 오래되고 재미없는 옛날 책들이 살고 있는 곳이라 웬만하면 다른 애들은 발을 들이지도 않아. 테이블 없이 의자만 덩그러니 있어서 허벅지에 책을 놓고 읽으면 목덜미가 뻐근해. 

원래 도서관에서 너는 5교시를 들으러 가기 십분 전까지 책을 읽었는데. 

내 어깨에 기대 곤히 잠이나 자고 있지. 나는 수동으로 숨을 쉬어. 일정한 길이로 들이마셨다가 뱉으려고 노력을 해. 내가 떨고 있다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도 있어. 그런데 것보다는 네가 잠을 자는데 내 호흡이 거슬리면 안 되잖아. 나는 너를 이만큼 배려해. 좋아하니까. 네가 바로 내가 찾는 눈 속의 사과인가 봐. 

 

 

"이리 와 봐." 

 

 

우리 둘 다 체육 시간을 따분해 해. 너는 천식이 있어서 밝은 운동장 트랙을 따라 돌지 못하고, 나는 매시간 다양한 핑계를 준비해 오지. 선생님도 포기하신 것 같아. 다른 애들이 피구를 하고 있을 동안 우리는 음습한 나무 그늘로 기어들어가 소소하게 놀아. 이끼가 파릇한 고동색 땅은 축축해서 엉덩이에 닿는 감촉이 매우 별로지만 햇빛에 인상 쓰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참는 거야. 그리고 네가 이런 장소를 좋아하잖아. 

 

네 손가락은 가늘고 길어서 내 머리카락이 마디마다 휘감아져 있는 모습이 참 예쁠 것 같아. 안타깝게도 나는 못 보네. 머리를 땋을수록 뒷덜미가 시원해지는 느낌이 참 좋다. 근처에 자리한 토끼풀을 뜯어 줄기로 매듭짓고 다 됐다고 말해. 바로 뒤를 돌면 가까이 네 얼굴이 있어. 온화한 미소를 띤 채로. 

 

 

"묶으니까 예쁘다." 

 

 

진정할 시간도 주지 않고 네가 내 어깨를 잡고 다시 앞을 보게 해. 네 손이 닿은 자리마다 불에 덴 것 같아. 화끈해 죽겠어. 약간은 우악스럽다 싶을 정도로 머리를 올려 잡는 손길에 뒤로 같이 당겨지지만 괜찮아, 나쁘지 않아. 내 머리가 길어서 다행이다. 네가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어 기뻐. 

 

 

"예쁘다. 진심이야." 

 

 

무겁게 얼굴을 감싸고 다니다가 이런 휑한 기분을 매일 겪으려니까 고민은 되더라. 그런데 네가 자꾸 예쁘다고 하잖아. 나도 모르게 보드라운 뺨에 손을 갖다 댔어.  


놀랠 줄 알았어. 난 그랬으니까. 그런데 넌 당황하는 기색 하나 없이 내 손바닥 안에서 더 비벼댔지. 위험했어. 네가 나를 만져도, 내가 너를 만져도 뜨거워지는 건 나뿐이니까. 

뭐하는 앨까. 인기는 많지만 조용한 애. 잘생겼지만 굳이 드러내지 않는 애. 그리고 조용하고. 그때부터였나 봐. 내가 좋아하는 잔잔함이 결코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어. 

 

 

"안녕." 

 

 

안녕. 

너는 인사해. 우유 거품 같은 목소리로. 무작정 달지 않고 담백한 게 내가 정신 못 차리기 좋은 맛이야. 그 선홍빛 입술을 움직여 내 이름을 굴려내. 난 진작부터 쓰러질 준비가 되어있어. 

 

 

"안녕, 정우야." 

 

 

"오늘도 머리 묶었네." 

 

 

"응." 

 

 

너 다 알고 있지. 네가 나 머리 묶은 거 보고 예쁘다고 해서 그다음부터 무조건 머리 묶는 거. 네 말 한마디에 충실하게 구는 날 넌 다 알고 있지.  

쑥스러워 머리 꼬랑지만 괜히 만지작거렸는데 그 한 마디 하고서 너는 금방 스쳐 지나갔어.  

다정하지만 때때로 쌀쌀맞은 나의 고요는 내가 스스로 뛰어들기만을 지켜보지. 나는 당연하게 몸을 던진다. 

 

 

"집에 같이 갈래?" 

 

 

야자가 끝나고 나가는 문이 아닌 창가 쪽 내 자리로 다가온 네가 책상을 두드리며 물었어. 사실상 물음표를 붙이지 않아도 되지만 예의상 묻고 답해. 내 짐까지 손수 챙겨주며 불 끄고 나오라고 너는 말해. 기다리게 하는 게 싫어서 후다닥 앞문과 뒷문을 왔다 갔다 하며 단속을 하고 소화기 아래에 열쇠를 놔뒀어.  

 

 


"고마워." 

 

가방을 건네받고는 손부채질을 했다. 고작 교실 한 바퀴 돈 것 가지고 온몸이 야단이네. 덥다 혼잣말하는 나를 가만 보다 볼을 부풀더니 후- 하고 입바람을 불었어. 

 

 

"더운 바람 나오나? 아니네. 시원한데." 

 

 

제 손바닥에 대고도 불어보더니 그렇게 말하며 웃어 보여. 입 안이 까끌까끌해져서 혀로 치열을 훑는데 네가 말을 꺼냈어. 

 

 

"열아홉이네." 

 

 

집이 가까워서 피곤하지 않은 날이면 집까지 걸어가. 어디 사는지는 모르지만 너도 같이 걸어간다기에 가까운 곳에 사는구나 싶었지. 빛이 적어지는 골목길로 빠졌어. 나는 무슨 의미인지 몰라 그렇지 하며 건성으로 수긍했어. 

 

 

"금방 성인이지." 

 

 

"은묘야. 넌 몇 살까지 살고 싶어?" 

 

 

그제야 좀 알겠더라고. 사는 데 모자람 없는 인류가 징그럽게 진화를 한 게 본인 수명 예측이었어. 정확하게 따지면 예측이 아니지. 인간마다 타고나게 부여된 시간이 있어. 어릴 때는 발현되지 않는데 성인이 되면 혀 밑에 오돌토돌하게 도드라진 핏줄들처럼 날짜가 드러나. 어디서 어떻게 죽을지 모르지만 몇 년도 몇월 며칟날에 죽는지는 알 수 있는 거야. 난 진화가 아니라 퇴행했다고 봐. 죽는 날이 명확해져서 오히려 받는 스트레스가 더 심하니까. 이보다 더한 성인식이 없지. 그보다 어릴 때 죽는 애들은? 잘 모르겠어. 운명이겠지. 혀가 잘린 사람은 어떡해? 내 사정은 아니니까. 알아서들 나지 않을까.  말했잖아. 인간은 아무리 선한 성질을 가졌대도 이기심이 한 묶음 정도는 뭉쳐있다니까. 

 

 

"나. 나는 그다지 오래 살고 싶은 생각이 없어." 

 

 

"나도." 

 

 

서로를 바라보며 키드득 웃었어. 잘 가. 힘차게 작별 인사를 하면 너는 담벼락 모퉁이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줘. 여운이 남아 외로이 문 앞 센서 등이 꺼질 때까지 멍청히 서 있다가 들어가. 

 

다녀왔습니다- 

 

등 뒤로 번쩍, 붉은빛이 번져. 마당까지 마중 나온 엄마한테까지 물들 정도로 커다란 빨강이야. 그 뒤로 사이렌 소리가 커졌다가 작아지는 걸 여러 번 반복해. 

 

 

요새 불이 자주 난다. 

 

내 어깨를 감싸며 엄마가 멀리 보이는 빛을 바라봤어.  

다시 우뚝 선 내 발을 재촉했어. 들어가자. 

 

그날 밤 불이 우리 집을 집어삼키는 꿈을 꿨어.  

 

 

 

 

 

 

-b 

 

 


몰랐는데 집에 오면 엄마가 항상 내게 걸레 냄새가 난다고 했어. 

기분이 나빠 퉁명스레 그게 무슨 말이냐 톡 쏘면 교실에 있는 대걸레 냄새가 뱄다고 부연 설명했지. 걸레 냄새는 모르겠고, 졸업식 당일 일찍 와 교실 문을 첫 번째로 따고 들어왔는데 포근한 냄새가 나더라. 칠판엔 언제 써놨는지 여기저기 낙서들이 바글바글했어. 수고했어 얘들아, 우리반 짱, 사랑해 뭐 이런저런. 


 

"일찍 왔네." 

 



목소리 주인부터 알아보고 활짝 웃으며 돌아봤어. 네가 코 밑까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풀더니 내 목에 한 번 휘감고는 잡아 내렸어. 순간 조여지는 목에 본능적으로 살려고 너에게 딱 붙었어. 죄이는 털목도리를 느슨해질 때까지 당겨 풀며 숨 막힌다고 약간 화난 티를 냈어. 

 

"미안, 미안.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 미안해." 

 

한결같이 나긋나긋한 음성에 화가 풀리는 걸 느끼며 됐다고 말했어. 네 입술은 세모야. 뾰족하지는 않은데 콕콕 찌를 때면 둔하게 아플 거야. 분홍색 입술 새로 살짝 보이는 앞니 두 개는 세상에서 제일 사랑스러워. 나의 음험한 속을 절대 몰랐으면 좋겠다.  

 

 

"그런데 너 가까이서 보니까..." 

 

 

맞아. 네가 내 목을 갑갑하게 만들어서 밧줄처럼 붙잡았지. 어쩐지 가깝더라니, 그래. 떨어지려고 뒷걸음치는 내 발 대신 손목이 잡혔어. 

 

 

"눈동자가 되게 새까맣다... 바다 같아." 

 

 

"바다?" 

 

 

"아주 어릴 때 바닷가 근처에서 살았던 적이 있어. 내가 눈을 뜨면 밤이었어. 그래서 기억 속 바다는 검은색이야." 

 

 

나는 대답 대신 의식적으로 침을 삼켰어. 귓바퀴부터 시작된 화끈거림이 귀 깊숙이까지 들어가 퍼졌어. 심장이 날뛰는 소리가 전해질까 봐 붙잡힌 손목을 흔들어 떨쳐냈어.  

 

너는 내 까만 속을 몰라야 해. 

 

복도가 슬슬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어. 너는 내게서 뒤돌아 먼저 인사해오는 애들을 받아주느라 바쁘게 됐어. 나는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아직 둘려 있는 네 목도리를 조물거리며 갖고 놀았어.  

재미없는 졸업식이 강당에서 진행됐어. 우리 부모님은 두 분 다 직장인이셔서 참석을 못 하셔. 내 말에 네가 그럴 줄 알고 내게 줄 꽃도 사 왔다며 슬쩍 꺼내보였어.  

 

 


"정우 너희 부모님은 어디 계셔?" 

 

 

"나 어릴 때 돌아가셨어. 할머니랑 둘이서 사는 데 거동이 불편하셔서 내가 오시지 말라 했어." 

 

 

"..미안해." 

 

 

"미안하면 밖으로 같이 나가자." 

 

 

나도 그렇고 너도 그렇고. 수업 시간에 차라리 잤지, 아예 빠진 적은 한 번도 없었어. 우리는 졸업장과 개근상을 들고 화장실을 핑계로 강당을 나왔어. 마이크에 대고 지루한 연설을 쏟는 말이 웅얼웅얼하는 소리 밖에는 안 들려. 강당 밖은 한산했어. 운동장 한쪽은 주차 공간을 마련한다고 각종 차로 빽빽했어. 우리처럼 빠져나와서는 사진이나 찍으며 놀고 있는 애들도 몇 있었어. 

 

 

"정우야. 내가 1월 1일이 딱 되자마자 내 혓바닥 밑을 거울로 봤거든?" 

 

 

"응." 

 

 

약간 비장한 목소리로 나왔어. 듣고 있는 네 표정도 사뭇 진지해졌어. 나는 아까보다 자그맣게 말했어. 참새가 지저귀는 것처럼. 

 

 

"나 환갑잔치는 할 수 있겠더라." 

 

 

내 말에 네가 손등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어. 그러다 곧 입꼬리를 내렸어. 순식간에 오가는 온도 차에 경탄하며 조심스럽게 물었어.  

 

 

"정우 너는..?" 

 

 

"난 내가 원하는 만큼은 못 살더라. 이 이상은 안 알려줄래." 

 

 

나보다 먼저구나. 속상했어. 졸업하면 멀어질 수도 있으니까. 갑자기 아득해졌어.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떨어지는지라 가뜩이나 친하다 하는 친구도 별로 없었거든. 그런데 오늘이 고등학교에서 정우와의 마지막이잖아. 

둘 다 정시를 썼는데 너는 말을 안 해주고, 알려달라기도 조심스럽고. 나는 합격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고. 울적한 상태가 겉으로 다 드러났는지 어깨끼리 부딪쳐오며 왜 그러냐 묻더라. 

입에 침 바르면 나중에 건조해지는 걸 알면서도 당장에 메마른 아랫입술을 혀로 쓸었어. 할까 말까 하는데 손에 땀이 다 났어. 

 

 

"조오오...정우야!" 

 

 

"응?" 

 

 

"우리 사진 찍을래?" 

 

 

속으로만 탐하면 뭐 하니. 정작 앞에서는 좋아한다고 말 한 마딜 못 하는데. 

학사모를 고쳐 쓰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어. 그런데 네가 들고 있던 꽃다발로 얼굴을 가리는 거야. 눈만 겨우 빼꼼 내놓고. 

 

 

"뭐야, 잘생긴 얼굴 보여줘 봐." 

 

 

"사실 나 사진 찍는 거 안 좋아해서." 

 

 

"치, 졸업 사진은 어떻게 찍었냐?" 

 

 

"울면서?" 

 

 

공간이 기괴하게 보이는 현상 겪어봤어? 환상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깊은 우물 안에 내가 잠겨 있는 것 같고. 모든 말소리가 동굴 속에서 기어 나오는 것 같아. 내 눈앞에 네가 사근사근 뭐라 말하고 있는데 글자들이 물을 잔뜩 먹어 퉁퉁 부었나 봐. 귀로 들어가질 않네. 

 

 

"모은묘." 

 

 

주술처럼 불린 내 이름에 깨어났어. 무슨 생각 하냐는 물음에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어.  

졸업식이 끝났는지 문이 활짝 열리고 사람들이 쏟아지기 시작했어. 네가 내 손을 잡더니 별다른 말없이 학교 건물을 향해 뛰었어. 

 

 

"어디가?" 

 

 

"우리가 제일 먼저 교실 가 있자." 

 

 

천식이 있다던 너는 잘도 달렸어. 오히려 내가 잡힌 손에 힘을 주며 앞으로 달려나가는 널 붙들었지. 

 

 

"나 배 아파. 천천히 가자." 

 

 

헐떡거리며 선 자리에서 주저앉으려 하니까 네가 나를 번쩍 안아 들었어. 너무 놀라서 소리도 못 내고 네 목만 끌어안았어. 오늘이 김정우 라는 명찰을 단 너를 학교에서 보는 마지막일 텐데 낯선 모습이 많이 보인다. 알 수 없는 일도 막 생기고. 회의를 느끼는 중에도 너에게 안겨서 올라가고 있는 지금이 좋다는 생각이 드는 내가 징그러웠어. 어디까지가 너의 가식인지는 묻지 않을게. 정우야, 네가 좋아. 계속 곁에 있고 싶어, 떨어지지 않고.  


이게 지금 내 나이에 맞는 감정인지 모르겠어. 판단하지 않을래. 네게 품고 있는 바다 같은 흑심 들키지 않을게. 되도록 너도 무엇이 됐든 내게 걸리지 마.  

 

 

 

 

 

 

 

 

 

 

 

 

-c 

 

 

 

de ligno autem scientiae boni et mali ne comedas in quocumque enim die comederis ex eo morte morieris 

 

Genesis 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창 2:17 

 

 

 

 

 

 

나의 고요는 친절해 보이지만 속은 매몰차서 결국 날 혼자 내버려 둬요. 

 

 

우려했던 일은 현실이 되었어. 고만고만하게 집에서 멀지 않은 대학에 들어갔어. 

너는 내로라하는 명문대들을 넘볼 정도로 성적이 우수했던 거로 기억하는데 수시로 진즉 가지 않고 정시까지 버티다가 어딜 갔는지 모르겠다. 기억을 보관해 놓는 상자가 있어. 졸업식 날 네가 내게 뜯어 줬던 교복 단추도 그 안에 있어. 가끔 꺼내 봐.  

 

 

"은묘야! 은명이한테 전화 좀 해 봐. 애가 밤늦도록 안 들어오네." 

 

 

엄마는 손톱을 물어뜯으며 방문을 열어둔 채 갔어. 거실을 서성이며 창문 너머를 보던 엄마가 뒤돌며 소리쳤어. 

 

 

"은명이한테 전화 했니?" 

 

 

"지금 하고 있어." 

 

 

내 방 창문에서 사이렌 소리가 들린다. 매일 두세 번은 꼭 들어서 감흥은 없는데 동생이 아직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으니 불안하게 만들어. 의자에 앉은 자세로 한쪽 다리를 떨며 전화를 걸었어. 적당히 신호음을 듣다가 끄고는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나왔어. 

 

 

"은명이 학교 쪽 가볼게." 

 

 

"지금 나간다고? 전화 안 받아?" 

 

 

"응. 갔다 올게." 

 

 

"은묘야. 폰 갖고 나가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야 돼." 

 

 

"응. 걱정하지 마." 

 

 

엄마는 몇 년 사이 폭삭 늙었어. 흰 머리가 희끗희끗 보여서 주기적으로 셀프 염색을 해. 팔 아파 죽겠다면서도 어쩔 수 없다며 화장실 안에서 염색약 냄새를 풍겨. 걱정하는 이마에 주름이 졌어. 가만 바라보다 핸드폰이 든 손을 흔들며 현관문을 열고 나갔어. 

 

나와 두 살 터울인 동생은 올해 고등학교 3학년인데 신기하게도 내가 다녔던 고등학교에 나와 똑같은 반이다. 오랜만에 모교를 가는데 밤이어도 신이 나더라고. 동물 병원이 줄줄이 이어진 인도를 따라 걸으며 전화도 계속 시도해보고. 큰길로 들어갈까 애용했던 지름길로 들어갈까 하다가 후자를 택했다. 학교가 탁 트인 곳에 세운 게 아니라서, 정류장에서 내려서도 안으로 걸어들어와야 했어. 어두컴컴하고 후미진 골목길이라 야자를 마치고 하교할 때도 빠른 걸음으로 지나갔었던 기억이 난다. 소슬한 분위기에 핸드폰 손전등을 켜고 멀리 보이는 가로등을 향해 빨리 걷는데 옆으로 좁게 난 길에서 펑 하고 터지는 소리가 났어. 바로 옆이라 귀청이 떨어져 나갈 듯한 폭파음에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 쭈그려 앉았어. 형체를 알 수 없는 고리 형태의 철근 하나가 새까맣게 타서는 데굴데굴 내 앞을 굴러가다 쓰러졌어. 지름길을 택한 조금 전의 나를 원망하며 벌벌 떨다가 앉은 자세로 발을 끌며 뒤로 갔어. 다리를 겨우 펴고 일어났는데 놀란 순간에 핸드폰을 떨어트린 거야. 기껏 오리걸음 비슷하게 후진했더니. 터지는 소리가 난 지점에 손전등 빛이 보이더라고. 욕을 읊조리며 조심스럽게 걸어가는데 잠깐 주변이 밝아지더니 곧 큰 


화염이 일어났어. 은명이는 어떡하지. 아직 학교 근처면 어떡하지. 걱정됐어. 어떡하지 갈등하다가 집에서 혼자 안절부절 못할 엄마가 눈에 밟혀서 핸드폰까지 불에 붙기 전에 얼른 가지고 달아나자는 결심을 했어. 겁도 없지. 

 

 

"아." 

 

 

다가가보니 불이 멀리 있어 보이기에 됐다고 생각했는데 화기가 훅 다가왔어. 숙였던 고개를 들자마자 나 불에 타 죽는구나 싶었어. 아까처럼 머리를 감싸고 무릎을 굽혀 앉았는데 그림자가 드리워지는 거야. 덜 뜨겁고. 뭐지 하고 숙였던 머리를 드는데 몸이 허공으로 쑥 올라갔어. 

놀래서 짧게 소리를 지르다가 나를 안아 든 남자의 얼굴을 봤어. 목부터 눈 밑까지 가리는 마스크를 쓴 잿빛이 도는 머리의 남자는 나를 곁눈질로 내려다보고는 말았어. 나는 가슴팍에 모으고 있던 팔을 홀린 듯이 그의 목에 둘렀어.  그가 나를 안은 채로 벽 하나를 풀쩍 뛰어넘었어. 안정감 있었지만, 갑자기 높이 올라가면 무섭잖아. 그런데 정체를 모르는 남이라 무서워서 바로 옆에서 소리도 못 지르겠고 겨우 참으며 대신 그를 꽉 껴안았지. 

 

남자는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밝은 곳을 피해 음산한 길로만 다녔어. 

학원들이 즐비한 곳으로 들어섰어. 건물의 그림자 진 벽에 등을 기댄 그가 옆 건물 사이로 난 통로로 목을 내밀고 살폈어. 우여곡절로 갖고 나온 핸드폰에서 벨 소리가 났지만 차마 받을 수 없더라고. 그가 나를 땅에 내려놓더니 내 등을 앞으로 밀었어. 고맙다 말 할 틈도 주지 않고 그는 사라졌어. 건물과 건물 사이 좁은 통로를 뒤뚱뒤뚱 헤쳐 나오니 어지러운 상가 간판들이 늘어져 있었어. 도로는 늦은 밤인데도 혼잡했고 성급함에 울리는 클락슨 소리가 난무했어.  

 나를 안전하고 시끌벅적한 도심으로 데려다준 남자를 생각하고 있었어. 다시 전화가 왔고, 은명이라는 이름을 보며 통화 버튼을 눌렀어. 

 

 

그 뒤로 같은 꿈만 계속 꿔. 너는 빈 교실에서 나를 기다렸어. 은묘야. 네가 내 이름을 부르면 그게 신호탄이라도 된 듯이 화면이 흐려져. 동시에 옆에서 소름 끼치는 폭발음이 들려와. 눈을 질끈 감으면 낯선 남자가 나를 데리고 그때처럼 불을 피해 도망가. 

 

 

정우야. 

 

 

내 등을 밀친 남자에게 나는 네 이름을 달아줬어. 네가 가다가 멈추고는 돌아봐. 꿈은 한 치의 오차 없이 매번 그렇게 끝나. 언제까지나 꿈에서 만날 순 없으니까 날 만나러 와. 

없는 번호라는 말은 그만 듣고 싶어. 

 

 

 

모든 뉴스의 헤드라인 1면은 강남 x 클럽 살인 사건이 챙겼어. 세상에 미친 인간들이 많아 하루에만 다양한 이유와 방법으로 사람들이 죽는데 왜 매체들이 호들갑을 떨며 보도하냐면.  

 

 

"피해자 P 씨의 시체 부검 결과 혀 밑에 있던 사망 날짜와 P씨가 실제 사망한 날짜가 불일치한다는 사실이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이번 사건으로 저희가 알 수 있는 새로운 사실은 두 대상의 혀와 혀과 접촉했을 때 상대적으로 이른 날짜를 가진 A가 자신보다 느린 B의 시간을 가져갈 수 있다는..." 

 

"..실험을 통해 정말 혀끼리 접촉 했을 때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수명을 가져올 수 있는지 알아보았지만, 국과수에서 발표한 내용과는 다르게 ..." 

 

 

일부러 보여준 건지 허술한 초짜인지는 모르지만 씨씨티비에 피해자 P 씨와 범인이 입 맞추는 장면이 찍혔거든. 술에 취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P 씨를 벽에 기대게 한 후 입을 오래도록 맞대고 있더니 범인이 떨어지자마자 P 씨가 그대로 쓰러졌고, 한쪽 발을 절며 범인이 씨씨티비 밖을 빠져나가는 영상으로 한바탕 난리였어. 사람들은 그녀를 타임 빌런이라 불렀어.  

무서워서 괜히 제 애인과 키스도 못 하겠단 이들도 많았다. 씨씨티비 문제인지 화면이 김 서린 것처럼 흐릿한 데다 타임 빌런의 교묘한 각도로 얼굴이 가려져서 공개수사 문만 붙고 잡히진 않았어. 더불어 뜬금없이 일어나는 화재도 빌런의 소행일 것이라는 여론이 불어났어. 

 

 

"은묘야,은명아. 앞으로 밤늦게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낮에도 그렇고. 

낯선 사람 경계하고. 특히 모은명 너. 친구들이랑 노니 어쩌니 하면서 함부로 쏘다니지 마." 

 

 

"모은명은 그렇다 쳐도 내 나이가 몇 갠데." 

 

 

그가 곳곳에 불씨를 심고 다니는 빌런이든 뭐든 간에 다시 한 번 만나고 싶었어. 꿈 속에서 말고. 행여라도. 네 이름을 부르면 그대로 반응해줄까. 

 

 

타임 빌런의 죗값은 나날이 무거워졌어. 그 혀 놀림에 제 명을 다 못 살고 죽는 사람들이 많아졌거든. 비꼬는 말로 넷상에선 인류가 멸망해도 살아있을 년이라는 말도 나왔어. 여잔지 남잔지도 확실하진 않아. 일단 감시 카메라에 찍힌 모습은 긴 머리에 키가 크고 통통한 체격이었으니까 여자로 보는 거지. 소수는 여장한 남자라고 주장하더라고. 

 

이제 우리 집 근처에선 불이 튀지 않아. 텔레비전으로만 어디 어디에서 정체 모를 불이 났다고 떠들었어. 아무래도 난 너를 만나야겠어. 뜨거운 불구덩이 안에 네가 서 있을 것 같아. 

근래 들어 자주 확인되는 동네를 돌아다녔어. 오늘은 이 구역, 내일은 저 구역. 

되도록 길이 복잡하고, 어두운 경로로. 며칠이 지나든 수업이 끝나는 대로 먼 거리를 왔다갔다 했어. 엄마의 잔소리도 그만큼 쌓였지만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종강할 때까지 허탕만 쳤어. 

또 떠났나 싶어 한숨을 쉬며 택시를 잡으려고 큰길을 찾았지. 큰 길. 정각이 다 되는 시간까지도 돌아다니는 사람들이 많고, 조명들이 켜진 가게들도 많은 큰길로 나가려고 했지, 화한 기운이 느껴지기 전까지는. 

 

날이 많이 더워져서 그런가. 불꽃이 휘었어. 원래 흐물거리며 피었던가, 그치. 

홀린 듯이 타오르는 주택을 향해 다가갔어. 근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고, 경보음 같은 게 마구 울리고, 아기 울음소리도 들리고, 난장판이야. 누군가 내 팔목을 채갔어. 불이 옮겨붙기 시작하는 옆에 빌라 기둥 뒤로 끌려갔어. 빌라 안 사람들이 급하게 빠져나가는 모습을 입이 막힌 채 숨어 지켜봤어. 기둥들이 지탱하고 있던 천장이 녹아 허물어졌어. 내가 서 있는 기둥도 안전하지 않아. 내 입을 막은 그의 손을 내치고 트이는 숨을 몰아쉬었어. 불길에 있으니 공기가 깨끗할 리 없지. 연기가 바로 코와 눈을 찔러왔어. 캑캑 거리면서도 다시 내 입을 막으려는 손을 잡고 말했어. 

 

 

"너 정우지? 정우 맞지?" 

 

 

그가 나를 업고 달렸어. 헤매기 쉬운 길 어디쯤에서 멈추고 나를 내려놨지. 마침내 그가 쓰고 있던 모자와 마스크를 내렸어.  

 

 

"모은묘." 

 

 

사이렌이 신경질적으로 울려. 다들 난린데 너만 해맑았어. 순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잊을 정도로.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에 대답보다 먼저 웃었어.  

 

 

 

 

 

 

 

 

 

 

 

-d 

 

 


"보고 싶었어. 보고 싶어서 널 찾아다녔어." 

 

 

"내가 보고 싶었어? 왜?" 

 

 

너는 태연한데 내가 불을 지른 것 마냥 안절부절 못하며 네 손을 붙잡고 저만치 보이는 소방차를 바라봤어. 발을 가만두지 못하고 자리에서 좁은 보폭으로 움직이니까 네가 나를 아예 품 안에 가두고 재차 물었어. 

 

 

"나를 왜 찾아다녔는데?" 

 

 

"어...이 상황에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 모르겠는데..그러니까.." 

 

 

평화로이 반나절을 붙어 다니던 시절에도 말 한마디 못했는데 지금이라고 할 수 있겠어. 머뭇거리면 눈앞에서 네가 경찰들에게 붙잡혀갈까 봐 두려운데 마음처럼 입이 잘 안 떼 져. 그런데 너는 뭐가 그리 자신 있어서 느긋하게 나만 기다리는 거야. 

 

 

"너 나 좋아하기라도 해?" 

 

 

"어?" 

 

 

"나 좋아해?" 

 

 

먼저 실마리를 던져줘서 고맙다고 해야 하나. 나는 옳다구나 하고 본능만 따라 움직였어.  

 

 

"...어. 정우야, 나 너 좋아해!" 

 

 

"얼마나?" 

 

 

"응?" 

 

 

"얼마나 좋아해 나?" 

 

 

"그게..어.." 

 

 

"얼마큼 좋아하는데?" 

 

 

나 아니면 아무도 못 봐. 혀의 밑바닥을 볼 수 없어. 그런데 넌 날 다 안 다는 듯이 굴어. 김정우 넌 모든 걸 알고 있는 것 같아.  감추고 있던 나의 미래를 들춰내 버려. 그 유명한 빌런처럼. 

너와 혀를 섞고, 너의 등을 끌어안고 있는 동안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어.  

너는 그 유명한 빌런.  

 

 

"너." 

 

 

뜨거운 무언가가 뿌리부터 박차고 올라오더니 찌릿한 통증이 너를 꽉 잡은 혀끝에 감돌았어. 묵직한 무언가가 내 몸에서 빠져나간 기분이었지. 아쉬워하는 혀가 입안으로 말려 들어갈 때 마주한 눈빛에서 난 읽어버린 거야.  

 

 

"정우야 좋아해." 

 

 

"나도." 

 

 



"거짓말. 그거 거짓말이야." 

 

 

네가 말하는 것 중 진실 건 단 하나였어. 은묘야. 내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 서늘한 입술의 움직임. 명확하게 불순한 의도가 담겨있지. 넌 날 집어삼킬 거야. 내 발밑을 따라다니는 까만 나는 머지않아 네 그 훌륭한 그림자 중 하나가 될 거야. 

 

"소문만큼 해롭지 않아, 은묘야." 

 

 

사랑하는 정우. 

나를 파멸로 몰아가는 아름다운 악당. 















[NCT/김정우/치엔쿤] 내가 사랑하는 빌런, 나를 사랑하는 히어로 | 인스티즈





B. 나를 사랑하는 히어로



-a



근 세 달간 못 먹다가 좋은 기회로 쌓아놓고 먹게 된 피자를 한 입 베어 물고 버리게 생겼다. 내 행세를 하고 당당히 모든 뉴스 데스크를 불태운 미친놈 때문에. 당장 김정우에게 달려가 따지고 싶었으나 그럴 필요 없게 되었다. 

 

 

"누나 혼자 먹네? 치사하게?" 

 

 

고맙게도 제 발로 찾아오셨으니까. 인사는 집어치우고, 방금까지 피자를 집었던 기름진 손으로 놈의 멱살을 잡았다. 

 

 

"연예인이 되고 싶어? 예쁘게 잘 나왔더라? 옷은 몇 개나 껴입은 거야? 나는 그렇게 통통하지 않거든?" 

 

 

"진정 좀 하지그래. 누나 손에서 맛있는 냄새 난다." 

 

 

보통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서 같이 다니거나 하지 않아. 유일한 가족이었던 할머니 돌아가시고 갈 곳 없다며 재워달라던 애 거둬준 내 죄가 크다. 차라리 돈뭉치를 쥐여줬어야 했는데 말이야. 

내 손을 치우고 소파로 걸어가 앉더니 제가 주인인 양 자리를 차지하고 먹더라. 

기가 차서 김정우, 야, 김정우 하고 불러도 건성으로 대답만 하고는 리모컨 채널을 막 돌린다. 

 

김정우는 유일무이하게 불도 다루고 시간도 다룰 줄 아는 데 문제는 그 시간을 다루는 능력이 나랑 겹친다는 거다. 약 올리는 건지 활동 영역도 겹치고. 하루는 빡쳐서 김정우한테 키스했는데 감전된 듯 찌릿한 전율이 올라와 서로 욕을 하며 떨어졌다. 그 뒤로는 둘 다 접촉은 피하려고 했다. 아직도 그때 일 들먹이며 누나가 순진한 날 덮쳤잖아요, 하고 협박도 한다. 

돈이 필요할 때만. 

 





이 집도, 안에 들인 비싼 가구들도, 입고 있는 옷도, 차도 모두 다 내 것이 아니다. 내가 사용하니 내 거라고 해도 되나? 내가 직접 산 건 아니고 고마운 숙주들에게서 얻은 거지. 성인이 되면 낙인처럼 새겨지는 운명의 시간은 길이가 다 들쭉날쭉하다. 김정우는 원래 단명할 수도 있었는데 남 목숨으로 장수하게 생겼다. 

 

 

"자제해라. 어? 불장난이나 실컷 해- 남의 직업군 가로채지 말고." 

 

 

"나도 살아야지. 요즘엔 한 가지만 잘해선 안 돼." 

 

 

"응. 나가." 

 

 

"한 길만 우직하게 파야지요, 암요. 안녕히 주무십시오 설이님!" 

 

허리를 곧추세우고 경례를 하는 김정우의 머리통을 휘갈겨주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충전기를 꽂아놓고 발전기처럼 돌려대는 침대 위 노트북은 내 작업이 이루어지는 작은 공간이다. 

`버킷 리스트`라는 반 폐쇄적인 익명 기반의 커뮤니티가 있다. 누가 만들었고 언제부터 만들어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알아서 경로를 찾아서 가입하게 된다. 딱히 등업이나 가입을 위한 테스트는 없다. 버킷 리스트를 찾는 것 자체가 진입 장벽이 크기 때문에. 평범한 알바생 롤플레이 중인 나는 노력 끝에 나를 비밀까지도 터놓을 수 있는 사이라고 여기는 친구를 통해 알아냈다. 

 

버킷 리스트 안 이용자는 두 부류로 크게 나뉜다. 들어주는 사람과 들어달라는 사람. 전자는 액티버 후자는 플래너라고 한다. 어떤 플래너는 세상에서 가장 비싼 외제 차를 운전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 액티버는 자기 속마음을 터놓고 얘기할 친구가 필요하다 했고, 둘 사이 거래는 이루어졌다고 한다. 플래너의 소원을 들어준 액티버는 당시 제일 비싼 외제차주였고, 플래너를 대신해 후기를 올렸다. 자기는 사정이 있어 주변인들을 믿을 수 없는 환경에 처해 있는데 그를 만나 너무 행복했다고. 그 역시 저와 마찬가지로 드라이브하다 갔다고. 물론 이런 시스템을 악용하는 이들도 더러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나다. 


윤설이. 

 

 

낮에는 평범한 카페 알바생이자 플래너, 밤에는 시간을 거둬 다니는 요정 정도라고 하자. 김정우에게 시간 요정이라는 얘기를 꺼냈다가 비웃음을 잠깐 사긴 했다. 

내가 집주인이므로 석고대죄를 받아냈다.

 

작업 기간은 보통 2~3주가 소요된다. 대책 없는 누구처럼 단발성으로 입술 박치기를 하지 않고, 정성 들여 이것도 뺏고 저것도 뺏고 단물 다 빨아먹은 다음 저승 보내주는 거지. 등쳐먹는단 소리다. 보통 액티버들은 금전적인 힘이 세기 때문에 내가 걱정해야 할 건 자연스러운 플래너 행세하기이다. 한 건 하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지속해서 여러 액티버들울 만나는 만큼 나도 멀티 플래너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진짜 살날이 얼마 안 남은 플래너들을 내 선에서 먼저 처리를 하고 내가 그 사람인 척 신원을 바꿔가며 접근해야 한다. 상당히 손이 많이 가지만 그만큼 돌아오는 게 있으니까. 예를 들면 지금 사는 주택이라든가. 

물론 최악의 시나리오는 그림자한테 걸려서 좆되는거. 인생 원래 도박이잖아. 인간은 아찔함을 무사히 지나 보낼 때 쾌감을 느끼는 동물이고. 

 

손재주가 좋아 메이크업만으로도 명단을 보고 오는 그림자들을 속일 수 있음에 감사하다. 고마워 내 열 손가락들아! 여기서 내가 말하는 그림자는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이 본래 사망일 전 비관적으로 자살하는 행위를 막기 위하여 국가 차원에서 붙여놓은 정부군 소속 공무원들이다. 좆같은 선도다. 이승 출신의 저승사자지 뭐야 그게. 

더 잔인하게 죽을 수도, 살살(?) 죽을 수도 있겠지. 근데 전자일지도 모르니까 어차피 죽을 거 내 마음대로 죽겠다는 거 아니야. 그것마저 막는 게 뭐가 좋은 건지 이해할 수 없다. 이딴 식으로 진화한 인간이 제일 혐오스럽다. 모르는 게 약이라던 시대로 차라리 가고 싶다. 

 

 

 

 

❋엄격한 가부장제 집안에서 장녀로 자라 착한 아이로 살아왔습니다. 

작성자 나쁜 어린이 표 

 

 

안녕하세요. 작성 글을 올리는 현 날짜로 앞으로 50일 남은 플래너입니다. 

저는 3대 독자이신 아버지 밑에서 1남 1녀 중 장녀로 태어나 자랐습니다. 

초·중·고 대학교까지 다니며 단 한 번의 반항 없이 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다 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안 남은 마당에 이십몇 년간 못 해봤던 일탈 마음껏 하고 가려고 합니다! 그런데 제가 쥐꼬리만 한 돈으로 전전긍긍하는 사무직 인턴이라 솔직하게 금전적 도움이 필요합니다. ㅠㅠ 

 

 



아무리 생각해도 글을 기갈나게 잘 쓴다. 누가 봐도 플래너다.  

자신을 칭찬해주고 있는데 알림 소리가 연속으로 왔다. 

걸려드는 놈들이 한둘이 아니네. 

 

 

[쿠야] 1대 1 메시지 주세요!^^ 

 

 

가장 먼저 온 사람이 이기는 뭐. 

나는 먼저 처리해놓은 진짜 플래너의 신분증들을 차곡차곡 정리했다. 

죽음을 앞둔 플래너들은 대개 의지가 없고 눈에 생기도 돌지 않았다. 

제가 고통 없이 죽여드릴게요.

몇 마디 나누면 그들은 기꺼이 목숨을 내준다. 

나는 스무 살 생일에 죽었다. 사망 신고도 다 해놨다. 윤설이는 이 땅에선 죽은 사람이다. 죽기 전날 비가 억수같이 내렸다. 울컥 넘치는 흙탕물을 토해내는 하수구 옆에서 엉엉 울던 내게 다가온 여자는 당시 전 보스의 총애를 받고 있던 실장이었다. 지금은 최고 우두머리 직에 올라가 계시지만. 자협이 내민 손을 잡고 들어간 조직에서 쪼가리 일부터 시작해 임무를 수행하며 내 능력을 찾았다. 만날 때마다 다른 사람으로 사는 나를 아직도 자협은 설이라고 부른다. 나를 잃지 말라고.

 

 

 

강보연. 

백한 번째 내 이름은 강보연이다. 완전 똑같이는 아니더라도 공을 들여 화장으로 흉내 내면 긴가민가 수준으로 닮을 순 있다. 억지로 짜 맞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처음 만난 남자랑 원나잇하기`를 수행하러 나간다. 육체적 대화만큼 간이고 쓸개 고 다 때줄게라는 말 받기 좋은 게 별로 없거든. 

 

 

 

 

 

 

 

 

 

 

 

 

 

-b 

 

 

 

단언컨대 백한 번째 사냥감은 그동안 만난 액티버들 중 가장 값어치 있는 사람이다. 일단 표면부터가 존나 잘났다. 누가 내 목을 세게 친 것처럼 억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여기서 눈이 초롱초롱하게 뜨이면 안 되는데. 마음을 다잡고 한껏 건조한 표정으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호텔 로비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그가 손을 내밀며 미소 지었다. 웃는 거 존나 잘생겼다 진짜. 벌써 재밌네. 박수 치고 싶은 걸 참으며 그의 손을 잡았다. 

 

 

"첫 만남부터 되게…. 낯부끄럽죠.." 

 

 

"아아..쪼,쪼끔?" 

 

 

"죄송해요. 그런데 해, 해보고 싶었어요!"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캐릭터 정체 화를 시작했다. 나는 일탈이라곤 방문 세게 닫고 바람 때문이에요 라고 말하던 게 전부인 순하고 착해야 했던 애다.  

인제야 후회 없이 뒤지려고 못 해 본 거 하는 시한부다.

 

 

"긴장. 되죠?" 

 

 

심호흡하며 세뇌를 하고 있으니까 잔뜩 긴장된 거로-어느 정도 맞긴 하다- 보였는지 고개를 까딱하며 물어왔다. 내가 저 존잘이랑 오늘 원나잇을 한다니. 

주체하기 어려운 기쁨이 입가를 간지럽혔다. 

 

 



"저도 조금. 그런데 액티버님 혹시 혼혈이세요? 뭔가 되게 이국적으로 생기셨어요." 

 

 

"네! 중국 사람이에요. 한국 회사에서 일하고 있어요." 

 

 

"정말요? 한국말 되게 잘하신다. 멋있어요. 저는 중국어 하나도 못 하는데." 

 

 

"저도 발음 아직은 어눌해요. 중국어 못해도 괜찮아요. 제가 한국말 잘해요." 

 

 

이번이 고비다. 숨길 수 없어 뿜어져 나오는 무해함의 기운에 자칫 잘못하면 일을 그르치기 쉽겠다 싶었다. 각오를 단단히 다지고 가식적인 웃음을 내보였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그가 잡아놓은 스위트룸으로 들어갔다. 회사에서 본부장 정도 되는 거 아니야? 이 호텔 비싼데. 

쾌재를 부르고 싶었다. 중국 부자를 잡은 느낌이었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물으니 중국 본사를 둔 외국계 기업인데 여행 관련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라고 한다. 이름을 듣자마자 알 정도로 유명한 회사였다. 한 번 이용해본 적 있거든. 직급은 몰라도 액티버 수입이 짭짤하다는 건 알겠다.

 

원나잇이 뭔 줄은 알고 오신 건가 싶을 정도로 부끄럼을 타셨다. 혹시 경험은 있으시나 물으니 한 번도 없단다. 룸에 들어오자마자 격정적인 입맞춤으로 옷을 한 꺼풀씩 벗겨내려고 했더니만 팍 식어버렸다. 어떡해. 그렇지만 존잘인걸. 강보연은 접어두고 윤설이적인 면이 나와야겠다 싶어 술부터 마시기로 했다. 

 

 

"술 마셔본 적 있어요?" 

 

 

"네. 그럼요." 

 

 

"다행이다. 저는 플래너끼리 만난 줄 알았어요." 

 

 

"제가 너무 막 한다고 했나 봐요. 죄송해요. 그렇지만 열심히 할게요!"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게 아니고 잘해야 하지만 당신 얼굴이 잘하고 있으니까 넘어갈게. 

말 대신 술을 목구멍으로 넘겼다. 

 

 

"저도 술 처음 마셔봐요. 항상 친구들 마시는 거 옆에서 봤어요. 저는 취해서 집 들어가면 진짜 혼나거든요. 그게 무서워서 물 마시고 콜라 마시고 그랬죠. 아 맞다. 통금 시간은 성인인데도 9시였어요. 9시가 말이 돼요?" 

 

 

나만 마시면 안 되는데 어느새 내가 꾸며낸 소설에 액티버는 손에 잔을 들고만 있으면서 경청했다. 약간 기분이 좋아지는 걸 보니 취기가 도나 보다. 

 

 

"아아! 왜 저 혼자 마셔요. 부끄럽게! 짠해요 짠~" 

 

 

"네. 짠~" 

 

 

"악! 맞아! 저 그거 해보고 싶었어요! 러브샷." 

 

 

"러브샷…. 할까요?" 

 

 

"네네!" 

 

 

어색한 만큼의 거리를 좀 두고 앉아있던 그가 내가 걸터앉아있는 침대로 오더니 내 팔에 자기 팔을 휘감았다. 여기서 멈춰야겠다 싶어서 잔을 내려놨다. 어지러움이 미미하게 느껴지는데 액티버는 멀쩡해 보여서 도리질을 하며 취기를 떨쳐 내려고 했다. 

 

 

"하아. 왜 멀쩡해 보여요? 전 좀 어지러운데." 

 

 

"제가 술이 세요." 

 

 

망했네. 어떻게 살리지 라는 생각부터 머릿속을 복잡하게 칠하고 있지만, 얼굴은 평온함을 유지했다. 뭐든 받아주게 생겨서는 뜻밖에 단단한 면이 있었다. 

강한 적수를 만난 것 같아 안 보이게 허벅지를 찔러가며 정신 차려 나 자신! 하고 자신을 깨우는 중이었다. 

 

 

"저! 중국어 아는 거 있어요. 니하오, 짜이찌옌, 씨예씨예, 라오씌 ,화, 쑤쑤 저 엄청 많이 알죠?" 

 

 

"네네. 대단해요." 

 

 

"더 알아요! 빠오무, 리엔, 워 아이 니 그리고, 그리고, 워아이니~ 워아이니!" 

 

 

나와라. 윤설이. 눈웃음을 살살 치며 두 팔 벌려 그에게 다가갔다. 그도 마찬가지로 웃어주며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고 파고드는 나를 감싸 안았다. 기르는 강아지에게 사다 준 마약 방석이 이런 느낌일까. 그를 침대로 쓰러트리며 안긴 이후로 복잡하게 그려놨던 생각들이 모조리 사라졌다.

 

시간을 빨아들이는 건 난데 기가 쪽쪽 빨리는 것도  나 같았다. 

하염없이 그의 밑에서 신음하고 있을 때 무슨 말을 들었던 것 같은데 당장에 밀려오는 후희를 느끼기에 급급해서 그의 어깨만 세게 쥐며 울었었다. 

 


[어차피 못 알아듣겠지만 부끄러우니 빠르게 말할게요. 당신이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부터 참기 힘들었어요.] 

 

 

집까진 어떻게 왔는지 모르겠지만 눈두덩이가 축축해서 깨어나니 푸두가 헥헥 거리며 나를 발로 때렸다. 일어난다고 말하며 기지개를 켜다가 욱신거려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익숙한 풍경은 우리 집이 틀림없었다. 푸두를 침대 밑으로 내려주며 두리번거리다 뒷머리를 긁던 손을 멈췄다. 

 

 

어제 했던 짓들이 생각났다. 씨발을 부르며 벌떡 일어나 방 안을 돌아다녔다. 

멈춰선 전신 거울 앞에서 입고 있던 티셔츠 목을 잡아 내렸다. 

보이는 붉은 자국에 아예 속옷 차림으로 거울 앞에 서서 몸을 살폈다. 

 

 


"씨발…. 처음이라며. 한 번도 안 해봤다며! 졸라 잘 찍어놨잖아 여기저기!"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내가 상대방을 데려다줬으면 줬지 어떻게 집에 들어왔는지 경황없을 정도로 풀어진 적은 없었다. 불안해하다가 일단 옷부터 다시 입고 핸드폰을 찾아다녔다. 그런데 내 손에 들린 핸드폰은 처음 보는 기종이었다. 내 폰이 아니다 이 말씀을 하고 싶습니다. 

 

 

"돌겠네. 주인이 누구니 너는?" 

 

 

당연히 잠금이 걸려있겠거니 했는데 아무런 보안 없이 열렸다. 어리둥절해 하며 앱 여기저기를 눌러보고 있는데 중국어로 되어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액티버와 폰이 뒤바뀐 모양이다. 머리칼을 뜯으며 자책하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액티버와 다른 남자가 함께 찍은 사진이 화면에 뜨길래 혹시 동료인가 싶어 뜸을 들이다 부재중으로 넘겨 버렸다. 엄지손가락을 물고 아프지 않게 씹어대는데 다시 같은 사람에게 전화가 왔다. 받아야 하나 싶어 일단 귀에 대고 니..하오오.. 말은 했는데 건너편에서 묵묵부답이었다. 

 

 

"여보세요?" 

 

 

곧이어 웃음소리가 들렸다. 전화기에서 떨어져 들리는 목소리에 이어 중국어로 뭐라 뭐라 다른 이의 음성이 들리더니 익숙한 한국말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저 어제 ㅋ 호텔에서," 

 

"헐! 아안녕하세요!" 

 

"네~ 잠은 잘 잤어요?" 

 

쓸데없이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헤벌쭉 올라가던 입꼬리에 힘을 줬다.

 

"네. 그런데 제 폰이.."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전화 드렸어요. 바뀐 거 같아서. 오늘 시간 되세요? 만나실래요?" 

 

 

전화하며 거울에 비친 몰골을 살폈다. 화장도 안 지우고 자서 상태가 엉망이었지만 이 사람을 잡아야 하니 별수 없었다.

 

 

"좋아요! 만나는 김에 다음 리스트 할까 하는데 어떠세요?" 

 

"어어. 뭐죠?" 

 

"놀이공원 개장 시간부터 폐장할 때까지 있는 거요. 이미 시간이 좀 지났지만.

아! 평일이라 일하시겠구나. 그러면 미루고 폰만 받으러 갈게요." 

 

"오후 반 차 쓸게요. 지금이라도 가요. 제가 데리러 갈게요." 

 

"헉 안 그러셔도 되는데…. 감사합니다 정말." 

 

"빨리 갈게요~"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계획대로 리스트는 진행되고 있다. 나는 이 사람을 사로잡아 물질적인 것부터 시간적인 것까지 빨아먹으면 된다. 

엉뚱한 선을 타려는 건 내 마음이었다.

전화를 끊고 상기된 뺨을 손으로 두들겼다.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윤설이 멘탈 잡아라 진짜.." 

 

 

 

자협은 내가 조금이라도 어리숙한 모습을 보이면 가차 없이 그녀의 족욕기에 머리를 집어처넣었다. 처음엔 살고 싶어서 아등바등했다. 숨을 못 쉬는 것도 고역이지만, 가만있다 봉변당하는 족욕기 안 닥터 피쉬들에게도 미안했다. 반항할수록 물속에 오래 처박혀 있는다는 걸 알고 나서부터는 물 표면에 닿기 전부터 숨을 참았다.

사치스런 미술 작품 같은 보석 장식의 도기 족욕기는 자협의 발보다는 내 대가리를 많이 받았다. 귀로 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와중에도 빌어먹을 족욕기는 예뻐서 눈을 좀체 못 떼게 했다. 돈이 많으니까 이런 커스텀도 해오는 거지. 

내 귀와 입에서 간혹 나오는 닥터 피쉬를 생각하면 지금도 헛구역질이 나온다. 

게네들은 하루에 한 번 갈아치워 졌다.

 



참다 참다 보면 어떻게 도로 내쉬더라 하고 잊게 된다. 머리에 벌레가 앉았다며 훅 들어온 그 때문에 바짝 긴장해서 숨을 참았다. 됐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나도 모르게 계속 참고 있었는지 그가 원래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상체를 기울인 상태로 나를 쳐다봤다. 눈동자를 또륵 굴리자 손을 들어 코끝을 톡, 건드린다. 

 

 

"뭐, 뭐예요?" 

 

엉덩이를 들썩이기까지 하며 놀래 의자와 같이 뒤로 밀렸다. 그 역시 등받이에 기대며 말했다. 

 

 

"가만히 얼음 돼 있길래 땡 해줬어요." 

 

 

이런 액티버는 처음이다. 원래라면 어제부터 시작해서 끊임없이 입을 맞댔을 것이다. 다 그래 왔으니까. 연애질하려고 하는 건 아니잖아. 지금까지 만난 남자들은 비슷비슷했다.

짐승처럼 먼저 덮치고 드는 새끼도 있었고, 아예 만날 때마다 돈을 주고 섹파처럼 잠자리를 가지잔 새끼도 있었고. 물론 꽤 반반하게 생겨서 연애 비스름하게 나간 새끼도 있었지만, 사적인 감정은 절대 들지 않았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 모두 철저하게 계산했다.

고작 이틀 만나지만, 첫 단추부터 즉흥적이었다. 이 사람을 먹어치운다 이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름 연기를 하고 있다고는 했지만 내가 끌고 나가는 게 아니라 끌려다녔다. 심장이 방정맞게 뛰는 소리가 불편해서 가슴을 치며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오겠노라 말했다.

 

 

"다음부턴 존잘 다정 남은 상대하지 말아야겠어. 컨트롤 엑스야." 

 

 

다음이 있어야 할 텐데. 

밖으로 나가기가 무서워졌다. 화장실 출입구에 숨어서 멀리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를 지켜보다가 겨우 다가갔다. 

 

 

"우리! 이것도 타고 저것도 타요!" 

 

 

"좋아요!" 

 

 



그가 좋다며 손을 들었다. 하이파이브하잔 건가 싶어서 손바닥을 찰싹 부딪쳤더니 그대로 손가락 사이사이 들어온다. 화장실에서 열심히 세우고 온 나의 마음은 볼품없이 무너졌다. 이게 아닌데. 중얼거리며 또 끌려다녔다. 

 

 

"오늘 진짜 재밌었어요." 

 

 

날이 어둑어둑해지고 남은 사람들이 없어 같은 기구만 여러 번 탔다. 소리를 지른다고 목이 다 쉬어서 삑사리가 장난 아니었다.

그가 뚜껑을 딴 물을 건넸다.

 

 

"재밌다니 다행이에요. 저도 즐거웠어요." 

 

 

"내일은 출근해야 되죠?" 

 

 

"그렇죠? 왜요? 내일도 놀고 싶어요?" 

 

 

"현업에 지장은 주면 안 되니까…. 대신 내일모레. 토요일에 온종일 질릴 때까지 영화관에서 영화 보기!" 

 

 

"그래요. 데려다줄게요." 

 

 

기다리고, 걷고 한다고 부은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가 그의 차에 탔다. 몸에 힘을 풀고 있으니 피로감에 졸음이 밀려왔다. 조수석 차 문을 닫아주고 빙 돌아서 운전석으로 온 그가 차 문을 닫았다.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리고 운전석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런데 우리 집은 어떻게 알았어요?" 

 

 

"새벽에 개? 라는 사람한테 전화가 와서 제가 받았어요. 그분한테 물었어요." 

 

 

개. 

김정우 번호를 저장한 이름이다. 이 새끼가 과연 순진한 사람에게 뭐라고 말했을까 두려워하며 무슨 용건으로 전화하더냐 물으니 별일 아니라고만 했단다. 일단 그렇구나로 넘어가긴 했지만 찜찜해서 그의 차를 떠나보내고 바로 김정우에게 연락했다. 

 

 

"너 어디야?" 

 

-친구 집. 나 바빠. 

 

"네가 친구도 있어?" 

 

-어. 끊어. 

 

이 개새끼가. 

 

친구네로 얼른 짐을 빼길 바라며 집으로 들어갔다. 얹힌 꺼림칙함은 잠들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감사했습니다." 

 

 

강보연이 죽기 열흘 전까지 다가왔는데도 나는 그에게서 소량의 시간을 가져오는 것 외에는 하지 못했다. 

 

 

 

 

 

 

 

 

 

 

 

 

 

 

 

 -c 

 

 

T그룹이 새로 런칭한 프로모션의 성공적인 개최 기원을 위해 샹그리라 호에서 만찬이 열렸다. 덤으로 T그룹 장 회장의 고희 기념도 겸사로 한다니 듣자마자 늙은이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잔치네 생각이 들었다. 각종 기업 고위 간부들부터 유명 셀럽들이 한자리에 모이다 보니 경비도 삼엄한 게 스릴 넘치는 작업이 되겠더라. 간만에 몸 쓰는 일에 설레서 콧노래를 부르니 김정우가 집중하라며 꼽을 줬다.

 

 

"선착장부터 난관인데 배에 탈 방법은?" 

 

"뭘 생각해. 그냥 하는 거지." 

 

"또라이새끼. 그래서 내가 너랑 같이 현장 뛰기 힘들어." 

 

 

자협은 김정우의 저런 면이 좋아서 아끼는 걸지도 모르겠다.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내가 저 새끼보다 잘해야지. 초청받은 배우의 차를 뺏어 타는 건 일도 아니었다. 미리 조직으로부터 명단들을 받았다. 가짜 폭탄 하나를 덜덜 떠는 매니저 사타구니에 감아주고 나만 풀 수 있다고 협박한 뒤 기절한 배우 얼굴을 스캔해서 최대한 비슷하게 화장으로 만들었다. 특수 분장 배우길 잘했지. 배우와 똑같은 위치에 점까지 찍고 뒷자리 시트로 넘어가 옷을 바꿔 입었다. 

 

 

"운전이나 똑바로 해. 힐끔힐끔 보지 말고." 

 

 

"네.." 

 

 

"하여간 고추 달린 놈들은 시도 때도 없지." 

 

선착장 앞 포토존에서 플래시가 마구 터지는 게 보일 즈음 조수석에 앉아있던 김정우가 마취주사로 매니저 팔뚝을 찌르고 뒤로 넘겼다. 면허도 없는 주제에 운전은 폭력적으로 잘해서 일단 방향을 틀어 한적한 곳에 댄 다음 주변을 살피며 트렁크에 두 사람을 꽁꽁 묶어 실었다. 차 열쇠는 가다가 물 쪽으로 휙 던졌다. 매니저가 쓰고 있던 안경과 모자를 뺏어 쓴 김정우는 내 옆에서 당당하게 기자들 앞을 지났다.



우리의 임무는 아주 간단하면서 어려울 수도 있다. 장 회장이 대량으로 사들인 마약들을 그대로 날라 치기 하면 된다. 배가 선착장을 떠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귀에 칩 형태의 무전을 꽂고 브레인 역할을 해 줄 키키와 연결했다. 

 

 

"키키. 몇 분 컷으로 하면 돼?" 

 

 

- 넌 제이가 마약 위치 파악할 동안 배우 행세 하고 있으면 돼. 지금부터 40분 뒤에 헬기 뜰 거야. 

 

 

"헬기? 너무 위험한 거 아니야?" 

 

 

-장 회장 가드용 개인 헬기야. 거기 내가 탈 거야. 

 

 

"아하, 몸싸움 좀 하시겠다. 우리 키키가?" 

 

 

-제이 서둘러. 적당히 맞춰주다가 흰 눈 너도 내려가. 

 

 

"샹그리라 호 구조도나 파악해서 우리한테 알려줘." 

 

 

 

누군가의 손이 어깨를 잡아오길래 입꼬리를 당겨 웃으면서 뒤를 돌았다. 장 회장과 그 옆은 수행 비서였다. 장 회장이 주변 눈치를 보더니 수행비서와 함께 나를 둘러쌌다. 그가 내 엉덩이골 사이로 손가락을 집어넣더니 아래로 깊숙이 내려갔다. 더러운 손길에 욕이라도 한 사발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나는 신분을 숨기고 있으므로 이 배우가 이래서 초청이 되었구나 정도만 속으로 생각했다. 장 회장 불륜 상대로군. 

 

 

"주사라도 맞았나? 얼굴이 좀 달라진 것 같은데?" 

 




"회장님께 잘 보이려고 군데군데 맞았죠~" 

 

내 아양이 먹히기는 하는지 호방하게 웃으며 내 허리에 손을 둘렀다. 

시발 이렇게 잡혀서 데리고 다니면 좆되는데.  

 

 

-나 천잰가 봐. 찾은 거 같은데. 장 회장 대단하네. 손님들 먹을 음식에 마약을 남발해놓고. 마약파티네. 

 

- 둘이 잘 들어. 물건들은 모두 밖으로 던져버리면 돼. 우리 쪽에서 배 하나 띄워서 채갈 테니까 선박 뒤에서 던져. 다 앞에서 놀아서 뒤는 한산할 텐데 혹 사람 있으면 알아서 처리해. 헬기에서 사다리 내려오면 타고 올라와. 

 

 

장 회장 옆구리에 껴 다니다가 화장실 간다는 핑계로 겨우 빠져나와 김정우가 있는 식당으로 내려갔다. 바로 꺾어지는 코너를 돌다가 누군가와 부딪쳤다. 본능적으로 쓰러트리려고 몸이 움직였는데 상대가 더 빨랐다. 순식간에 벽에 등을 기댄 자세로 압박당했다. 

팔을 사선으로 세워 내 목을 누르던 상대와 눈을 제대로 마주치자마자 놀라 눈이 크게 떠졌다. 

 

 

"보연 씨." 

 

 

알 듯 말 듯해도 웬만해서는 다 속아 넘어가는 분장을 꿰뚫고 나의 전 액티버가 백한 번째 이름을 불렀다. 강보연은 예정된 날짜에 죽고 없는 사람이었다. 모른 체하며 누구신데 이러시냐며 그의 팔을 밀어내려 했지만, 전보다 숨은 쉴 수 있을 정도로만 힘을 풀어놓고 여전히 날 가두었다. 

 

 

"보연 씨 맞죠." 

 

 

"아닌데요. 저 모르세요? 저 박," 

 

 

배우의 이름을 대며 상황을 무마시키려 했다. 평범한 회사원인 그가 왜 여기 있는지. 명단에도 없는 사람이 어떻게 들어온 건지 의문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식당 안에 있을 김정우는 들키면 안 됐다. 어떻게든 이 사람을 붙잡고 위로 올라가야 했다. 



그래야 하는데 

 

 

"내가 보연 씨 몸을 잘 아는데. 우리 처음 만났을 때도 말했죠. 목부터 쇄골까지 이어지는 점이, 별자리, 같다고." 

 

그가 미처 생각 못 한 점들을 손끝으로 찍으며 따라 내려갔다. 아찔함에 고개를 돌렸다. 나와 관계를 한 남자들은 모조리 죽였는데 유일하게 살려둔 이 사람이 허를 찌른다.

 

 

"이래도 모른다 할래요? 우리 사이에 섭섭하게." 

 

 

"이거 놓으라고." 

 

 

"강보연이 아니고 설이 씨죠. 그렇죠, 윤설이 씨." 

 

 

강보연으로 만났던 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날카로운 지적만 남았다. 완전히 다른 분위기에 정체를 정확하게 들킨 것까지 연타로 두들겨 맞아 빠져나갈 궁리도 못 하고 있었다. 차라리 나 혼자가 낫겠지. 겨우 판단하고 무전 칩을 빼서 바닥에 던지고 구두 굽으로 밟았다. 

 

그가 내 턱을 그러쥐고 자길 보게 했다. 저기 안에 누가 있나 봐요, 자꾸 힐끔거리네. 

 

 

"나한테 집중해야죠. 설이야." 

 

 

내가 저지른 잘못이니 전적으로 책임지는 건 내 몫이다. 김정우 너는 살아라. 그의 얼굴을 감싸고 입을 맞췄다. 의외로 순순히 그는 나를 받아주었다. 이참에 여기서 남은 수명을 모두 빨아먹자는 마음가짐으로 그의 혓바닥 밑을 건드렸다. 그가 내 아랫입술을 꼬집듯이 물고는 떨어졌다. 

 

 

"얼마나 오래 살려고 집요하게 빨아대요?" 

 




 

비꼬아 말하는 중에도 흐트러진 머리를 정돈해주는 손은 다정해서 더 헷갈리게 했다. 나는 돌려 말하지 않고 그를 반대 벽으로 밀어붙인 뒤 쏘아댔다. 

 

 

"내가 윤설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어?" 

 

 

"처음부터 알고 접근했으니까." 

 

 

"나를 알고 있었다고?" 

 

 

"우리가 멍청히 손만 놓고 빌런들한테 놀아나는 건 아니거든요." 

 

그러면서 곧 이 배는 경찰들에게 포위되어 선착장으로 돌아갈 것이라 덧붙여 말했다. 그가 정부군이었다는 걸 알게 되니 얼추 모든 상황이 들어맞았다. 버킷 사이트를 이용하여 액티버인 척 위장해 플래너 행세를 하는 내게 접근하고. 연기하는 내가 윤설이인걸 알고 얼마나 같잖아했을지 생각하니 분해 옷깃을 세게 쥐었다. 

 

 

"그래도 당신은 나 못 잡아요. 허술하게 다 드러났어도 기본값은 하거든." 

 

 

"잡을 생각 없어요." 

 

 

그리곤 쓰게 웃었다. 허벅지 안쪽에 숨겨둔 총을 꺼내려던 손을 멈추게 하는 말이었다.

 

 

"놀려요? 어차피 지금 놔줘도 얼마든지 잡을 수 있다. 그런 거예요? 당신이나 나나 장난식으로 일하는 거 아니잖아요." 

 

 

"놀리는 거 아니에요.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애초에 내가 여기 먼저 온 이유는 그 누구보다 설이 씨를 먼저 만나서 빼 오기 위해서니까. 배우 코스프레는 끝까지 해요." 

 

 



경보기가 앵앵거리며 빨간 불을 번쩍였다. 대답할 새도 없이 그가 나를 안아 들고 갑판 위로 올라갔다. 그의 말마따나 경찰들이 사방에 쫙 깔려 있었다. 심지어는 헬기까지. 육해공 모두를 접수하신 모양이다. 나는 정우와 키키가 약들은 둘째치고 무사히 빠져나갔길 바라며 얌전히 그에게 안겨 있었다. 장 회장은 마약 밀거래로 잡혔고, 거기서 약을 탄 음식을 먹은 사람들 전부 잡혀들어갔지만 나는 그에 의해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진짜 박나희 배우는 어딨어요?" 

 

 

"맞다. 트렁크에 기절해 있을 거예요. 그런데 차 키 버렸는데." 

 

 

그가 돌겠다는 표정을 하고 이마를 짚더니 일단 차가 있는 데로 가자고 했다. 나는 모든 걸 내려놓고 아무렇게나 주차된 SUV 에 다가가 그와 함께 트렁크를 억지로 열었다. 진이 다 빠져 바닥에 철푸덕 주저앉자 내 손목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발이 아파서 그래요. 좀 앉아 있을게요." 

 

 

다시 엉덩이를 깔고 앉아 구두를 벗어 던졌다. 공기 중에 노출된 맨발이 탁 트였다. 사람들이 줄줄이 나가고 있는 선착장 쪽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기 대충 정리된 거 같은데 이제 나 잡아가요?" 

 

 

"잡혀줄 거예요?" 

 

 

"아니요." 

 

 

그가 실소를 터뜨렸다. 마취에서 깨지 않고 있는 배우를 보며 미친놈(=김정우) 주사 존나 많이 찔렀나 보네 중얼거리며 아까 트렁크 열 때처럼 차 뒷문도 가진 도구로 부수듯이 뜯어 열었다.

 

 



"일단 옷 갈아입고 나올게요. 저 아저씨는 바람 쐬게 하면 깰 거예요." 

 

축 늘어져 전신에 힘이 없는 사람의 옷을 갈아입힌다는 건 은근한 체력 소모가 되는 일이었다. 땀을 흘리며 후덥지근해진 차 안에서 나와 다시 물었다. 

 

 

"나 진짜 이대로 보낼 거예요?" 

 

 

"글쎄요." 

 

 

"빨리 정해요. 나 저기서 구해는 줬으니까 연행되는 척하면서 중간에 도망치기는 가능할 수도." 

 

 

"그럴래요?" 

 

 

"악! 자꾸 저 갖고 놀래요?" 

 

 

답답해서 큰 소리를 내니까 더 싱글벙글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미소에 나만 펄쩍 뛰었다. 달아날 준비를 하며 마지막으로 그에게 기회를 줬다. 

 

 

"후, 일단. 이름이 뭐예요? 끝까지 이름 안 알려줬잖아. 나는 지가 다 조사해놓고." 

 

 

"쿤이요." 

 

 

"그래요, 쿤 씨. 나 진짜 가요? 이 정도면 엄청나게 양심 있었어." 

 

 

그가 내 손을 잡았다. 반사적으로 뿌리칠 뻔한 걸 겨우 억제했다. 잡힌 손이 느슨해서 얼마든지 놓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보낼 거예요. 안 잡아요. 보낼 건데, 오늘은 말고 내일 보내줄 거예요." 

 

 

쿤이 잡은 손을 자기 쪽으로 잡아당겨 나를 품에 안았다. 신음하듯 한숨을 내뱉고는 내 어깨에 턱을 올려놓고 웅얼거렸다. 

 

 

"너무 지쳤거든요. 설이 씨가 보고 싶기도 했고. 그러니까 얼마 안 남은 오늘은 나랑 같이 있어요." 

 

 

 

며칠 안 지나 다시 만나게 된 거지만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고 도무지 이 사람보다 위에 설 수가 없다. 따라 들어간 근처 호텔에서 하룻밤을 한 침대 위에서 보낸 다음 날 나는 처음 만난 날처럼 내 방에서 눈을 떴다.

 

 

 

 

 

 

 

 

 

 

 

 

 

 

 

 

 









-d 

 

 

반드시 어떤 길이 됐든 결말은 봐야 했다. 키키와 정우는 신변은 무사했지만-그래도 안심할 수 없다. 정부 측에서 내 정보도 털었는데- 자협에게 된통 깨졌고, 나는 천장에 단 줄에 거꾸로 매달려 일주일을 아무것도 마시지도 먹지도 못하고 보냈다.

 

 

"설이야." 

 

 

"네." 

 

 

"내가 모를 줄 알았니?" 

 

 

부드럽던 음성을 가르고 자협의 손이 내 뺨을 호되게 내리쳤다. 돌아간 고개를 재빨리 원위치시켰다. 거꾸로 매달려 있으면서 자협을 보려니 피가 쏠린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배신을 해? 하마터면 키키랑 제이까지 죽을 뻔했어. 

아, 이미 넘겼니?" 

 

 

"아닙니다. 아니에요. 정말." 

 

 

"그래. 아니라고 할 줄 알았어. 딸 같은 네가 나한테 그러면 안 되지. 내가 마지막으로 기회를 줄 테니까 부디 저버리지 말렴?" 

 

 

"네." 

 

 

쿤이 내가 잠든 사이 부적처럼 지니고 다니는 목걸이에 도청 장치를 심어 놓은 걸 안다. 그는 도청으로 모든 돌아가는 상황을 다 파악하고 있었으면서 자협이 마련한 덫에 자처해서 들어왔다.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오면 망설임 없이 정우는 불을 지필 것이고, 하나의 큰 불꽃이 개화할 것이다. 나는 앞으로 나가는 걸 말리는 정우 옆에서 울먹이기 시작했다.

 

 

 

"설이가 원하는 게 이런 거예요?" 

 

 

"쿤." 

 

 

"그래요?" 

 

 

"쿤 움직이지 마. 움직이면 안 돼요." 

 

 

"설이가 좋다면 나도 좋다고 할게요." 

 

 

"제발 나한테 다가오지 마!" 

 

 

육체적으로 이어진 관계는 이래서 위험하다. 사슬이 끊어짐과 동시에 상대도 확실하게 처리해줘야 나중에 내게 치명타를 입히지 않는다. 백 번도 잘 넘겼으면서 백한 번은 온통 오류투성이다.

 

 

"김정우 움직이면 나한테 죽어." 

 

 

"누나 너 제정신이야? 왜 그래?" 

 

 

"제발…. 제발. 저 사람 그냥 보내면 안 될까, 응?" 

 

 

"뒤를 더럽게 남겨두고는 이제 와 왜 그래. 쟤 살려 보내면 누나가 죽어." 

 

 


나는 무릎을 꿇고 매달리기까지 하며 빌었다. 내가 저 사람이랑 사라질게. 아주 멀리 가 버릴게. 

뒤통수에 차가운 총구의 감촉이 느껴졌다. 내 뒤에 있는 사람이 글록을 든 팔을 들어 올려 그를 겨누게 했다. 

 

 

"방아쇠 당겨." 

 

자협의 왼팔이었다. 내가 울며 고개를 흔들자 총구로 머리를 퍽퍽 밀며 다시 명령했다. 

 

 

"내가 이런 성가신 일까지 관여해야겠어?" 

 

 

불은 그림자가 없다. 사람은 죽기 전까지 따라 다니는 그림자가 있는데. 

스무 살 윤설이가 무사히 제 명에 끝나도록 인도해야 하는 이승의 그림자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내가 자협의 손을 잡는 걸 숨어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총성이 여러 번 울렸다. 

 

 

 

 

 

 

 

 

 

 -e 

 

 

처음 맡은 임무였다. 나보다 고작 세 살 어린 여자였고, 그녀는 예정일 전날 내리는 비만큼의 눈물을 쏟아냈다. 서류상 그녀는 죽었지만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 그렇게 그녀의 그림자로만 몇 년이었다. 나의 양심과 싸우면서 그녀가 저지르고 다니는 범죄 현장들을 따라다녔다. 

마침내는 내가 표적이 될 수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는 그림자로서의 일을 해내지 못했다. 

한 달이면 족할 그림자는 칠 년 만에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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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기준에선 약한 편인데 수위씬이 걸릴 것 같아서 뺐습니다 ㅎㅎㅎ 문달 겁쟁이. 샐러드 기념일 합본 안에서만 즐겨주시길 ㅎ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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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회원84.194
옹달샘이에용....... 어떻게 글을 이렇게 쓰세요 진짜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휴 증말,,, 세컨드 정우 저렇게 발칙해진 것도 넘 좋구 페임 쿤 더 아련해진 것도 좋네요.... 주르르륵.. 넘 급하게 읽어서 체한 것 같으니 다시 천천히 정독할래요웅,,
5년 전
독자1
아 이런 나른한 글 너무 사랑해요 진짜 ㅠㅠ 문달님 필력도 분량도 항상 최고.. 좋은 글 너무 감사합니다!
5년 전
독자2
정우 글에서 정우는 은묘를 좋아했나요..? 은묘가 정우를 좋아하는 것은 너무나도 명확하지만 제 독해력?으로는...정우의 감정은 잘 모르겠어요..은묘의 시간을 뺏어간거라고 생각해서 마지막 부분에...게다가 설이가 나오는 글을 보면 정우는 괜찮은 것 같아서요...그리고 쿤...다정킹....설이도 결국 그 다정에 마음을 열었겠죠..안타까워요ㅠㅠㅜ
5년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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