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춘기
Cliche, Puberty
W. LIGHTER
한여름의 중반이 넘어가는 8월의 초입. 드디어 내가 미쳤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숱한 연애에 실패를 겪은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확률은 0에 수렴할 정도였다. 남들에게 최소한의 경우라도 있을진 몰라도 적어도 내겐 그랬다. 스물의 나이가 될 동안 도합 세 번의 연애를 했다. 한 번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생일날이라고 대뜸 뽀뽀를 해준 민들레반의 남자애. 두 번째는 열여덟의 나이에 내가 못해도 수십번은 쫓아다니면서 붙잡은 결과로 얻어낸 3학년 학교 선배. 그리고 마지막 연애는 한 달 전이었다. 한 달 전이라고 하니까 무척이나 옛날 이야기 같은 기분이지만 저번주까지만 해도 오빠의 전화번호를 차마 지우지 못하고 울어댄 사람이 여기있으니 나에겐 그닥 먼 일도 아니었다.
여하튼 숱한 연애 실패와 가까스로 얻어낸 연애마저 차이기 일수인 내가 미친 것 같다고 느끼게 하는 장본인은 단 한 명이다. 강다니엘. 그는 태어나보니 친구였다. 태어나서 응애, 하고 소리를 외치기가 무섭게 내 옆엔 강다니엘이 차지하고 있었고 첫 걸음마, 첫 입학, 첫 사랑, 첫 연애. 모든 처음이란 처음을 하는 동안 난 강다니엘의 친구로, 그는 내 친구로 있었다. 심지어 그 놈이 똥을 쌀 때 자기네 집 변기가 막혔다고 우리집까지 건너온 걸 보면. 그냥 우리에겐 남녀라는 사이보다 성(姓)이라는 것이 딱히 필요가 없는 형제 같은 사이였다. 그는 내가 남자에게 차여서 우는 순간마다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들고 왔었다. 그것도 퍽이나 재수없게 '앞으로 더 차일 걸 대비해서 아예 한 박스를 사다줄까?' 하는 새끼였다. 거지같은 새끼.
그가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 날 놀리는 낙을 제외하고 나면 딱히 뭘 위해서 사는 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강다니엘은 춤을 좋아했다. 운동도 곧잘 잘해서 유도, 태권도, 수영, 테니스.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한 번 시작하면 모든지 끝을 보곤 했다. 매일 하얀색과 검은색의 티셔츠만 입고 사는 듯했지만 그의 옷장엔 여러 옷들이 많았다. 옷에 관심이 있다고 그가 스무살이 되었을 무렵 하루에 몸 쓰는 알바를 세 개씩 돌려가면서 얻어낸 돈으로 그는 옷을 샀다. 들어도 알지 못하는 브랜드부터 신발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면 뭐해. 결국에 내가 제일 자주 보는 강다니엘은 항상 큰 무지티에 청바지. 닥터마틴에서 구했다던 하얀색의 운동화였다.
그러한 그를 볼 때의 난 미간을 찌푸리거나 욕을 하든가. 아니면 아예 표정을 짓지 않는, 무념무상의 길로 빠져든다든가. 이 세 가지가 다였다. 남녀가 같이 다니면 항상 사귀냐는 질문을 의례적으로 받긴 했지만 나와 다니엘이 함께 있는 걸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다신 사귄다, 라는 말 같은 건 꺼내질 않았다. 남들 뿐만이 아니라 나와 강다니엘도 사귄다는 말의 사, 자도 싫어했다. 매일 같이 듣는 오해도 문제였지만 어떻게 쟤를 연애상대로 보지? 하는 게 더 앞섰으리라. 근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상했다. 드라마나 소설책에서 나오는 말처럼 뻔하디 뻔한 일이 내게 일어났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없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강다니엘에게 자꾸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너희 둘 사귀어?
나는 더 이상 그 말에 대해 부정을 할 수 없었다. 분명 내가 미친거다.
사춘기
Cliche, Puberty
W. LIGHTER
한여름의 중반이 넘어가는 8월의 초입. 드디어 내가 미쳤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숱한 연애에 실패를 겪은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확률은 0에 수렴할 정도였다. 남들에게 최소한의 경우라도 있을진 몰라도 적어도 내겐 그랬다. 스물의 나이가 될 동안 도합 세 번의 연애를 했다. 한 번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생일날이라고 대뜸 뽀뽀를 해준 민들레반의 남자애. 두 번째는 열여덟의 나이에 내가 못해도 수십번은 쫓아다니면서 붙잡은 결과로 얻어낸 3학년 학교 선배. 그리고 마지막 연애는 한 달 전이었다. 한 달 전이라고 하니까 무척이나 옛날 이야기 같은 기분이지만 저번주까지만 해도 오빠의 전화번호를 차마 지우지 못하고 울어댄 사람이 여기있으니 나에겐 그닥 먼 일도 아니었다.
여하튼 숱한 연애 실패와 가까스로 얻어낸 연애마저 차이기 일수인 내가 미친 것 같다고 느끼게 하는 장본인은 단 한 명이다. 강다니엘. 그는 태어나보니 친구였다. 태어나서 응애, 하고 소리를 외치기가 무섭게 내 옆엔 강다니엘이 차지하고 있었고 첫 걸음마, 첫 입학, 첫 사랑, 첫 연애. 모든 처음이란 처음을 하는 동안 난 강다니엘의 친구로, 그는 내 친구로 있었다. 심지어 그 놈이 똥을 쌀 때 자기네 집 변기가 막혔다고 우리집까지 건너온 걸 보면. 그냥 우리에겐 남녀라는 사이보다 성(姓)이라는 것이 딱히 필요가 없는 형제 같은 사이였다. 그는 내가 남자에게 차여서 우는 순간마다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들고 왔었다. 그것도 퍽이나 재수없게 '앞으로 더 차일 걸 대비해서 아예 한 박스를 사다줄까?' 하는 새끼였다. 거지같은 새끼.
그가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 날 놀리는 낙을 제외하고 나면 딱히 뭘 위해서 사는 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강다니엘은 춤을 좋아했다. 운동도 곧잘 잘해서 유도, 태권도, 수영, 테니스.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한 번 시작하면 모든지 끝을 보곤 했다. 매일 하얀색과 검은색의 티셔츠만 입고 사는 듯했지만 그의 옷장엔 여러 옷들이 많았다. 옷에 관심이 있다고 그가 스무살이 되었을 무렵 하루에 몸 쓰는 알바를 세 개씩 돌려가면서 얻어낸 돈으로 그는 옷을 샀다. 들어도 알지 못하는 브랜드부터 신발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면 뭐해. 결국에 내가 제일 자주 보는 강다니엘은 항상 큰 무지티에 청바지. 닥터마틴에서 구했다던 하얀색의 운동화였다.
그러한 그를 볼 때의 난 미간을 찌푸리거나 욕을 하든가. 아니면 아예 표정을 짓지 않는, 무념무상의 길로 빠져든다든가. 이 세 가지가 다였다. 남녀가 같이 다니면 항상 사귀냐는 질문을 의례적으로 받긴 했지만 나와 다니엘이 함께 있는 걸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다신 사귄다, 라는 말 같은 건 꺼내질 않았다. 남들 뿐만이 아니라 나와 강다니엘도 사귄다는 말의 사, 자도 싫어했다. 매일 같이 듣는 오해도 문제였지만 어떻게 쟤를 연애상대로 보지? 하는 게 더 앞섰으리라. 근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상했다. 드라마나 소설책에서 나오는 말처럼 뻔하디 뻔한 일이 내게 일어났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없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강다니엘에게 자꾸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너희 둘 사귀어?
나는 더 이상 그 말에 대해 부정을 할 수 없었다. 분명 내가 미친거다.
사춘기
Cliche, Puberty
W. LIGHTER
한여름의 중반이 넘어가는 8월의 초입. 드디어 내가 미쳤다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솔직히 말하면 난 숱한 연애에 실패를 겪은 사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확률은 0에 수렴할 정도였다. 남들에게 최소한의 경우라도 있을진 몰라도 적어도 내겐 그랬다. 스물의 나이가 될 동안 도합 세 번의 연애를 했다. 한 번은 어렸을 때 유치원에서 생일날이라고 대뜸 뽀뽀를 해준 민들레반의 남자애. 두 번째는 열여덟의 나이에 내가 못해도 수십번은 쫓아다니면서 붙잡은 결과로 얻어낸 3학년 학교 선배. 그리고 마지막 연애는 한 달 전이었다. 한 달 전이라고 하니까 무척이나 옛날 이야기 같은 기분이지만 저번주까지만 해도 오빠의 전화번호를 차마 지우지 못하고 울어댄 사람이 여기있으니 나에겐 그닥 먼 일도 아니었다.
여하튼 숱한 연애 실패와 가까스로 얻어낸 연애마저 차이기 일수인 내가 미친 것 같다고 느끼게 하는 장본인은 단 한 명이다. 강다니엘. 그는 태어나보니 친구였다. 태어나서 응애, 하고 소리를 외치기가 무섭게 내 옆엔 강다니엘이 차지하고 있었고 첫 걸음마, 첫 입학, 첫 사랑, 첫 연애. 모든 처음이란 처음을 하는 동안 난 강다니엘의 친구로, 그는 내 친구로 있었다. 심지어 그 놈이 똥을 쌀 때 자기네 집 변기가 막혔다고 우리집까지 건너온 걸 보면. 그냥 우리에겐 남녀라는 사이보다 성(姓)이라는 것이 딱히 필요가 없는 형제 같은 사이였다. 그는 내가 남자에게 차여서 우는 순간마다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들고 왔었다. 그것도 퍽이나 재수없게 '앞으로 더 차일 걸 대비해서 아예 한 박스를 사다줄까?' 하는 새끼였다. 거지같은 새끼.
그가 인생을 사는 데에 있어 날 놀리는 낙을 제외하고 나면 딱히 뭘 위해서 사는 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강다니엘은 춤을 좋아했다. 운동도 곧잘 잘해서 유도, 태권도, 수영, 테니스. 종류를 가리지 않고 한 번 시작하면 모든지 끝을 보곤 했다. 매일 하얀색과 검은색의 티셔츠만 입고 사는 듯했지만 그의 옷장엔 여러 옷들이 많았다. 옷에 관심이 있다고 그가 스무살이 되었을 무렵 하루에 몸 쓰는 알바를 세 개씩 돌려가면서 얻어낸 돈으로 그는 옷을 샀다. 들어도 알지 못하는 브랜드부터 신발 종류도 다양했다. 그러면 뭐해. 결국에 내가 제일 자주 보는 강다니엘은 항상 큰 무지티에 청바지. 닥터마틴에서 구했다던 하얀색의 운동화였다.
그러한 그를 볼 때의 난 미간을 찌푸리거나 욕을 하든가. 아니면 아예 표정을 짓지 않는, 무념무상의 길로 빠져든다든가. 이 세 가지가 다였다. 남녀가 같이 다니면 항상 사귀냐는 질문을 의례적으로 받긴 했지만 나와 다니엘이 함께 있는 걸 한 번이라도 본 사람은 다신 사귄다, 라는 말 같은 건 꺼내질 않았다. 남들 뿐만이 아니라 나와 강다니엘도 사귄다는 말의 사, 자도 싫어했다. 매일 같이 듣는 오해도 문제였지만 어떻게 쟤를 연애상대로 보지? 하는 게 더 앞섰으리라. 근데 어느 순간부터 내가 이상했다. 드라마나 소설책에서 나오는 말처럼 뻔하디 뻔한 일이 내게 일어났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없다는 말을 믿게 되었다. 강다니엘에게 자꾸 친구 이상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너희 둘 사귀어?
나는 더 이상 그 말에 대해 부정을 할 수 없었다. 분명 내가 미친거다.
비디오 태그를 지원하지 않는 브라우저입니다
사진 터치 후 저장하세요
1. 사춘기에 대한 고찰
"네가 왜 여기있어?"
그러니까 강다니엘과 내가 친구를 한 지는 20년이었다. 나와 그의 나이만큼이나 우리는 친구로 있었다. 내 엄마와 강다니엘의 엄마는 고교동창이었다. 내 아버지와 강다니엘의 아버지는 대학 동기였다. 고로 따지고 보면 내가 그와 친구가 아닌 게 더 이상했다. 산부인과도 같았고 태어난 날도 같았다. 12월 10일. 생일까지 같아서 이젠 12월이 되면 내 생일보다 강다니엘의 생일이 떠올랐다. 심지어 집까지 맞은편에 살고 있으니 자칫하다간 내 구역이 사라질 지경이었다. 지금처럼 강다니엘은 아무렇지 않게 자기 집인 것마냥 우리집에서 뒹굴거리고 있었고 난 그런 놈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으니.
"지금이 몇 시인데 이제 일어나냐."
"그러게. 지금이 몇 시인데 넌 우리집에서 뒹굴거리고 있냐."
오전 10시도 채 안되는 시간부터 이 놈을 봐야 한다니.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만 만지고 있는 놈을 한 쪽으로 밀어내고 반대쪽에 앉자 그는 내 말에 대한 대답 대신 치킨 시킨다, 같은 말을 꺼냈다. 완전 동문서답이 따로 없구만. 친구를 20년 넘게 하면 뭐해. 서로 말이 통할래야 통할 수가 없는데.
"콜."
그렇다고 굳이 치킨을 마다할 필요는 없었다. 네가 사. 언젠 네가 냈냐, 양념이랑 간장 시킨다. 사실 우리가 대화가 짧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했다. 딱히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게 많았다. 당연하게 그는 내가 매번 시키는 치킨 종류를 골라서 대낮도 아닌 아침부터 문을 여는 치킨 집을 찾고 있었다. 묻지 않아도 알았고. 서로의 구역을 무턱대고 넘어대도 쉬이 넘길만큼 딱 그만큼, 나와 그는 친한 듯했다. 야, ㅇㅇㅇ.
"너 요즘도 울고 그래?"
"뭐?"
"신현수 때문에 아직 울고 그러냐고."
불쑥 내뱉는 말에 난 순간 할말을 잃었다. 이젠 울지 않았다. 슬프지 않냐, 하면 아직도 많이 슬펐고 화나지 않냐, 하면 한 대 쥐어패고 싶을만큼 신현수를 증오했다. 그래도 시간이 약이라고 그냥 넘기고 나니 아무렇지 않게 되는 날이 왔을 뿐이었다. 난 많은 연애를 하지 못했다. 애초에 사람한테 낯가리는 게 당연지사인 나한테 여러 사람을 만나는 것도 에너지 소모였다. 그래서 내 세 번째 연애는 말아먹었나보다. 사람보는 눈이 더럽게 없어서. 대학에 들어가서 처음 한 연애는 같은 학교에, 같은 학과인 선배였다. 갓 복학한 그 놈은 내 이름도 제대로 모르면서 나를 좋아한다고 했었다. 거기에 넘어가면 안되는 거였는데. 나는 항상 내가 먼저 좋아했던 입장에서 처음으로 들어본 고백에 홀랑 넘어가 버린 꼴이었다.
'너도 강다니엘 만나고 다니는데 나라고 왜 못해?'
연애를 한 지 딱 네 달이 넘어갈 때쯤이 되서야 알았다. 그에게 있어 나는 숱하게 치고 다닌 제 어장 속에서 미끼를 물어버린 불쌍한 생선 한 마리였고. 대뜸 다른 여자들을 만나는 걸 나한테 걸렸을 때 다니엘을 물고 늘어서는, 고작 해봐야 쓰레기만도 못한 놈이라는 걸 알았다. 대학에 처음 들어온 새내기 때부터 만난 4개월이 아까웠다. 여름이 되면 같이 여행갈 곳을 정해두고 신나했던 내가 불쌍했다. 느닷없이 그의 변명거리로 전락해버린 강다니엘에게 미안했다. 그 때 느낀 감정은 이게 전부였다. 어차피 쓰레기는 있으니만 못하다고 과 애들한테 애써 자기 위안을 했으면서.
'오늘 무슨 일 있었어?'
문득 우리집에서 라면을 끓여먹다가 말고 나에게 물어오는 강다니엘의 말에 울음이 터져나왔다. 그냥 툭하고 던진 말 한마디가 뭐라고. 그는 한 번 물꼬가 터진 애처럼 울어대는 내 등을 쓸어줄 뿐 별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어디서 주워왔는지도 모를 하얀 두루마리 휴지 한 통을 들고선 다음날 나를 찾아왔을 뿐이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당분간 학교 같이 가자는 말을 덧붙이면서. 어울리지도 않게 그 때 그는 내게 위로를 해줬고 난 나름의 위로를 받았다.
"안 울어."
"진짜?"
"어."
영 못 믿겠다는 식으로 눈을 흘긴 그는 긴 팔로 내 뒷머리를 꾹꾹 눌러댔다. 웬일이래. 잘했어. 그러고선 웃었다. 좀처럼 무표정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그의 눈두덩이가 휘어져라 접히며 나를 보고 있었다. 뭐라 대답을 해야 할 것 같았는데 말이 턱, 하고 또 한 번 막혔다.
"제발 사람 보는 눈 좀 키워."
"뭔 개소리야."
"그 놈의 금사빠 기질 좀 버리라고."
사람을 진득하니 봐야 뭐가 좋은 놈인지, 아닌지를 알지. 그는 곧장 내 금방 사랑에 빠지고 마는 약점을 찔러댔다. 사실이니 부정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다. 내가 좋아하는 계기는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 한 눈에 보고 반하면 그게 내 좋아함의 시작이었다. 아주 작고 사소한 행동 하나에, 표정 하나에 마음이 동요하는 것처럼. 나 이제 안 그래. 정작 말은 아니라고 했지만 난 나를 잘 알았다. 알고 있는 만큼 보인다고. 금방 사랑에 빠지는 나란 년은 또다시 덥쳐올 소용돌이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고.
"너, 재수없어."
대뜸 꺼낸 말 뒤로 괜스레 목이 말라왔다.
사진 터치 후 저장하세요
2. 사춘기와 강다니엘
'이건 뭐 그냥 짧은 원피스로 입고 다녀도 되겠다.'
같은 학교를 다녔던 중학교 때와 달리 다른 고등학교를 갔을 무렵 난 강다니엘이 다니는 학교를 부러웠다. 정확히는 학교 보단 교복을 부러워 했다. 알록달록 온갖 색감을 자랑하는 우리 학교 교복은 춘추복은 초록색, 하복은 빨강색이었다. 체육복도 알록달록인 걸 보면 그냥 원색을 더럽게도 좋아하는 학교인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가 다니는 학교는 무채색 계열이었다. 짙은 남색으로 통일되어서 교복의 정석이라고 하면 딱 정석인 교복. 그래서 곧장 입학식을 치루고 나서 그의 집에 가서 뺏듯이 교복을 입었다. 치마가 아니라는 게 아쉬웠지만 남자 교복이라도 학교 마크나, 넥타이가 달린 내 꿈의 교복인 건 변함이 없었으니까. 너네 학교 마크 엄청 예쁘다!
'야. 너는 좀....'
'어?'
근데 무작정 입은 놈의 교복이 컸다. 와이셔츠만 입었는데 허벅지의 반을 가렸다. 대뜸 너무 신나하면서 나온 게 문제였나. 아니면 그냥 강다니엘을 편하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을 지도 모르겠다. 고작 셔츠 하나만 입고선 그의 앞을 가로막고 조잘거려댔다. 내 꼴이 어떤지 알지도 못한채. 아무리 원피스로 입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옷을 입었다 하더라도 셔츠 쪼가리는 여러모로 위험했나보다. 적어도 강다니엘한테는. 내가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아도 날 보는 그의 귓가가 새빨간 색으로 물들여 진 게, 꼭 나까지 더워지는 기분이었다.
사진 터치 후 저장하세요
3. 스물에 찾아온 사춘기(1)
강다니엘이 나에게 있어 지나가는 똥개보다 못한 놈이라곤 해도 그가 매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와 같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오면서 난 그의 인기를 누구보다 잘 알았다. 왜냐, 다른 애들의 표현에 의하면 나는 그의 옆에 껌딱지 처럼 붙어다는 년이었고. 정확히 그가 통통하게 오른 젖살이 빠지기 시작하고부터 그는 더 이상 소심쟁이 강다니엘이 아니었다. 덕분에 나는 매일마다 양팔에 먹을 것들을 잔뜩 들고 다녀야 했는데 다니엘한테 이것 좀 전해줄래? 라는 말을 하루에 몇 번이나 들었더라. 감히 셀 수도 없었다.
"너는 왜 연애를 안 해?"
"뭔 말이야."
그런 이 놈이 모쏠이라는 걸 세상 사람들은 알아야 했다. 나같이 하느니만 못한 연애를 하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강다니엘처럼 조만간 절이라도 들어갈 기세인 놈도 있었다. 그렇게나 인기가 많은 놈인데 왜 연애를 안 하지? 처음 그가 체대에 입학하고 나서 학교에는 한동안 '체대 강다니엘'이라는 수식어가 생성이 될 지경이었다. 신환회 때부터 실로 그 인기를 옆에 있는 나조차도 실감을 하고 있는 중이었거늘 정작 여자들의 애정이란 애정은 다 받는 그는 그다지 감흥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너 설마..."
"뭐."
"다른 성향을 갖고 있다거나.."
뭐 어디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내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붙인 순간 그가 몸을 틀었다. 쿵. 무슨 가슴에다가 판자라도 깔아놨나 겁나게 아프네. 그의 가슴팍에 대뜸 얼굴을 박은 내가 코를 문지르며 위를 올려다 보자 강다니엘은 한동안 가만히 내 얼굴을 내려다 보았다.
"왜. 뭐. 어쩌라고."
띠리릭. 문이 열렸습니다. 내 말에도 답이 없는 그는 곧이어 제 집의 현관문을 열고선 고개를 까닥했다. 뭘. 들어가라고. 내가 왜? 누가 보면 봉창 두드리는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뜬금없이 얘는 왜 지 집에 들어가라, 마라야.
"들어오려고 따라온 거잖아."
"아..."
별 생각없이 따라온 내 발걸음은 어느새 그의 뒤를 찰싹 붙어서 집 앞까지 따라와 있었다. 딱히 뭐라 할 말도 없는지라 그대로 집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을까 그 전에 문고리를 붙잡는 손이 있었다. 자세히 말하자면 문고리를 붙잡고 있는 내 손을 잡고 있는 거겠지만. 그의 큰 손이 내 손을 덥썩 감싸는 것만으로도 이미 꼼짝없이 붙잡힌 듯한 이 묘한 기분은 가시질 않았는데. 뒤에는 문 틈 사이요, 앞은 강다니엘이니 이 해괴망측한 자세가 참으로도 부끄러웠다.
"들어가라는 거야, 말라는 거야."
"야."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가까스로 감추고 있었다. 얘는 나를 여자로 보지 않는 듯했지만 나에게 강다니엘은 더 이상 지나가는 똥개가 아니었다. 아무렇지 않게 그를 상대할 뻔뻔함도, 용기도 없었다. 그러니까 제발 그만 좀 해줬으면. 고작 한 발자국이면 콧잔등이 닿을 법한 거리에서 그는 내 속마음과 달리 얼굴을 더욱 가까이 들이밀었다.
사진 터치 후 저장하세요
4. 스물에 찾아온 사춘기(2)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멍청한가.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또 후회를 한다. 그러고선 또다시 실수를 하는 게 멍청한 짓이 아니고선 무슨 말로 표현을 한단 말인가. 나는 강다니엘을 그래, 그, 그거를 한다. 그 요상한 마음이 오가고 심난한 것도 하루이틀이었다. 요즘 난 매일 꿈을 꾼다. 잠자는 숲 속의 공주도 아니고. 잠을 하루에 많게는 열 시간 넘게 잘 때도 있는데. 문제는.
'어디가.'
'어, 으응?'
'나랑 키스하다 말고 또 어딜 가려고.'
그래. 매일 꾸는 꿈이 이런 모양새라는 것이다. 나는 요새 몽정을 하는 남자애들마냥 꿈을 꾼다. 그것도 하루도 안 빠지고 매일, 잠을 잘 때마다, 이제는 낮잠을 자거나 잠깐 조는 시간에도 강다니엘이 아른거려댔다. 꿈 속에서 강다니엘과 나는 못한 게 없었다. 고백도 안 했는데 입을 맞췄다. 손을 잡고 안고 그의 넓은 등을 껴안고선 하루를 같이 보내기도 했다. 뭐 일어나고 나면 내 팔에 안겨 있는 게 강다니엘 대신 이불보라는 것이 조금은 섭섭하긴 했지만서도 아무튼 중요한 건 내 상태가 별로라는 것이다. 매일 그런 야한 상상만 해대니 잠을 제대로 잘리는 만무했고 피곤함에 찌든 다크서클이 눈가를 자욱하니 덥고 있었다.
"아 미친!!!!!!!"
존나 차가워. 머리를 감겠다고 해놓고선 샤워를 한 꼴이 되었다. 잠을 자지 못한 폐해가 이 정도로 심할 줄이야. 이럴 줄 알았으면 옷을 다 벗고 씻는 편이 더 나았을 것이다. 내가 잠깐 넋을 놓고 있는 사이 샤워기는 내가 저를 놓치기가 무섭게 욕조 위를 길길이 날뛰고 있었다. 아오씨. 그냥 씻지 말 걸. 내가 언제부터 그렇게 깔끔했다고 씻는다고 했을까. 말도 안되는 이유를 거들먹거리며 샤워기를 겨우 주웠을까 갑자기 화장실 문이 열렸다.
"뭔 일인데?"
아니나 다를까 화장실 안으로 들어오고 있는 사람은 딱 봐도 강다니엘이었다. 미처 감기도 전에 물이 온 몸을 적신 탓에 산발이 된 머리카락 사이로 본 것임에도 불구하고 저 큰 덩치는 누구도 아니고 그 놈이라는 걸 단번에 알았다. 그러기도 그러는 게 우리집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활기치는 사람이 이 녀석 말고는 없었다. 그냥 병신짓 한거야. 덕분에 샤워도 다 해버렸다야.
사진 터치 후 저장하세요
5. 사춘기의 말로, 강다니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