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줘
눈을 감았다 뜨니 날이 밝아 있었다. 개운한 몸을 일으키니, 큰 창 너머로 햇빛이 쏟아질 듯 빛났다. 눈이 부셔 얼굴을 잠시 찡그렸다가, 7을 조금 넘겨 8로 향하고 있는 시계를 쳐다봤다. 어제 꽤 늦게 잔 것 같은데, 생각보다 일찍 눈이 떠졌다. 잠시 눈만 깜빡이고 있으니, 어젯 밤의 예쁜 정원이 떠올랐다. 그리고, 함께 있었던 지민도. 지민이 정원과 참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방 문을 열고 나와, 바로 옆에 있는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잠이 완전히 깨지 않아 약간은 띵한 머리로 양치를 했다. 오늘 잠에서 깨며 결심한 것은, 이왕 두 달이나 살게 된 거 즐겁게 살자는 것이었다. 즐길 건 즐기고, 조심할 건 조심하면서. 어찌보면 이 곳에 들어오게 된 일은 온통 무료하고 따분했던 휴학 인생에 신기하고 큰 사건이었으니까.
"일어났어요?"
"아, 안녕히 주무셨어요.."
"뭘 그렇게 어색해해요."
다른 사람들도 일어났나 싶어 1층으로 내려가니, 주방에서 분주히 무언가를 하던 지민과 눈이 마주쳤다. 먼저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지민에 어색하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인사했다. 그런 내 모습에 소리를 내어 웃더니 편하게 하라며 예쁘게 눈웃음을 짓는다. 사실 전부 내 또래여서, 이렇게 극존칭을 쓰는 게 약간은 불편했지만 그만큼 엄청나게 가까운 사이는 또 아니었기 때문에 애매하게 대할 수 밖에 없었다.
"근데 뭐 하는 거에요?"
"아. 오늘은 제가 아침 담당이거든요."
"아침 담당이 매일 바뀌어요?"
"네. 저희는 일곱명이라서, 하루에 한 명씩 돌아가면서 해요."
매일 밥을 누가 하는 걸까 생각했는데, 나름의 규칙이 또 있었다. 하긴, 꽤 오래 함께 살았으니 엄연히 그들만의 생활 방식이 있을 것이다. 나도 돕겠다며 소매를 걷어 붙이는데, 지민이 아니라며 나를 밀어낸다. 이건 자신의 역할이라며. 지민의 행동을 이해는 했지만, 나는 나대로 곤란했다. 내는 돈도 없이 집과 밥을 해결하는 처지인데 그렇다고 이 집에서 특별하게 돕는 것도 없으니.
"어? 여주 일어났네!"
"아..안녕하세요."
"잘 잤어요?"
"네."
결국 지민의 옆에서 한 걸음 물러나 있는데, 계단이 조금씩 울리더니 나머지 사람들이 내려오기 시작한다. 태형이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했고, 그 다음으로는 남준이 어제처럼 다정히 웃어보인다. 그 뒤로도 호석, 석진, 정국이 내려온다. 오랜만에 여러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으니 마음 한 편이 따뜻해지는 것도 같았다. 앉으라는 말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으니, 또 내 앞자리가 비어있다. 윤기의 자리였다.
"근데 윤기 씨는.."
"아, 올거에요. 계단을 워낙 싫어해서."
"내 얘기 했지."
옆에 앉은 호석에게 물으니 언제나 그렇다는 듯이 대답해준다. 호석의 말이 끝나고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내 앞자리에 앉은 윤기가 호석을 쳐다보며 말한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흠칫 놀란 나와 달리, 호석은 칭찬 좀 했어요, 형님- 하며 능글맞게 대처한다. 윤기도 호석을 미심쩍게 쳐다보다, 금세 자신의 앞에 놓인 음식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도 슬쩍 포크를 집었다.
"형. 나 건의할 거 있어요."
"응?"
"여주 씨가 우리를 너무 어렵게 대하는 거 같지 않아요?"
"맞아. 여주 완전 극존칭 쓰고. 별로야."
밥을 반쯤 먹었을까, 지민이 만들었다던 샐러드 소스에 감탄하는데 갑자기 지민이 남준을 부르더니 내 이야기를 꺼낸다. 양상추를 입 안에 집어넣던 내가 그대로 움찔 하며 굳었고, 태형도 방울토마토를 오물거리며 동의한다. 남준이 그래? 하며 반응하자 어제까지는 존댓말을 썼던 것 같은데, 어느새 짧아진 말투로 석진까지 거든다.
"그래, 편하게 해. 나도 편하게 개그 좀 치게."
"네? 개그요?"
"어. 내가 한 유머 하거든."
"여주야. 저 형이랑은 그냥 불편하게 지내. 계속."
난데없이 석진의 입에서 나온 개그라는 말에 네? 하고 되묻자 뻔뻔한 얼굴로 한 유머 한다며 코를 찡긋한다. 좀 독특한 캐릭터인건 알았는데, 유머러스한 사람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니 태형이 간만에 진지한 얼굴로 충고한다. 김석진과 편하게 지내지 말 것. 태형의 그런 태도에 석진은 아니, 이 자식이 형님이 개그 좀 하겠다는데! 하며 큰 목소리를 낸다. 처음 들어보는 억양에 웃음이 터질뻔한 걸 겨우 참았다.
"편해지면 편하게 해요. 다들 괜찮을테니까."
"아..네."
"잘 먹었다."
남준의 말에 조용히 대답하곤 작게 웃었다. 그저 불청객일지도 모르는 나를 친절히 대해주는 이 사람들이 고마웠다. 자꾸만 올라려는 입꼬리에 꾹 힘을 주는데, 윤기가 짧게 한 마디 하더니 금세 사라진다.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저 능력이 제일 좋은 것 같다. 아무때나 원하는 곳으로 슝슝. 아, 맞다. 한 가지 의견을 낸다는 걸 그대로 잊어버릴 뻔 했다.
"저도 식사 준비 돕고 싶어요."
당찬 내 말에 먼저 올라간 윤기를 제외하고 여섯 쌍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다들 왜 굳이? 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모든 걸 공짜로 얻어먹는 나로써는 조금 불편했기 때문에, 됐다고 거절하는 걸 하겠다고 밀어붙였다. 잠시 고민하던 남자들은 결국 알았다며 매일 아침에 당번을 조금씩 도와주는 역할을 줬다. 피곤하면 굳이 매일 매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과 함께.
"책 읽는 거 좋아해요?"
"네!"
"그럼 심심할 때 다락방 가서 읽어요. 좋은 책 많으니까."
어제 꽤 둘러 봤다고 생각했는데, 다락방이 있는 줄은 몰랐다. 남준이 꺼낸 책 이야기에 눈을 빛내며 관심을 보이자 그렇게 좋아하는 줄 몰랐다며 약간 놀란 듯 답한다. 어렸을 때부터 아파트에만 살아서 책으로 가득찬 다락방이 작은 로망이었는데, 드디어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아까보다 밝은 모습으로 그릇을 정리하니, 옆에서 빤히 보던 태형이 한 마디 덧붙인다.
"조심하는 게 좋을걸?"
"뭘요?"
"아니 뭐... 계단이 많으니까?"
뭘 조심하라는 건지. 말을 늘이며 계단 핑계를 대는 게, 조심할 것이 계단이 아닌 게 분명한데 무엇인지는 가르쳐 줄 생각이 없어 보인다. 머릿 속으로도 알려주세요! 하고 몇 번이나 외쳤는데도 씩 웃으며 머리 위로 올려놓았던 안대를 내려 쓴다. 눈을 마주치며 생각을 읽는다고 하던데, 저 행동은 내 말을 들어줄 생각이 없다는 거다. 치사해. 태형을 살짝 째려보다가 다락방 생각이 나 정리하던 행동을 서둘렀다.
"잘 먹었습니다!"
아직 주방에 남아있는 몇 명에게 활기차게 인사를 하곤 걸음을 재촉해 계단을 올랐다.
"아, 그걸 얘기 안 해줬네.."
남준의 혼잣말을 듣지 못하고.
"우와.."
3층에서 계단을 더 올라와야 들어갈 수 있는 다락방은 그야말로 내 로망과 딱 맞아 떨어지는 공간이었다. 마주 보고 놓여 있는 2인용 소파와 1인용 소파, 그 가운데 있는 노란 빛의 조명, 벽을 둘러싸고 있는 책들.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부터, 카페트 위에 겹겹이 쌓여 있는 책들까지. 책을 좋아하는 나에겐 천국이 따로 없었다. 책들을 구경하다, 옛날부터 읽고 싶었던 책 한 권을 꺼내와 1인용 소파에 털썩 앉았다.
조용한 분위기와 따뜻한 조명, 푹신한 소파와 재미있는 책. 나는 금세 책에 빨려들어갈 듯 집중했다. 그렇게 1/3 정도를 읽었을까, 갑자기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왜 기척이 느껴지나 했더니 역시나 윤기였다. 나는 살짝 놀랐다가 잠잠해졌고, 윤기는 나처럼 놀랐다가 이제는 약간 짜증나는 듯 한 얼굴이었다.
"여기 어떻게 온 거야?"
"아..남준 씨가 알려줘서.."
"아, 진짜."
"..."
아예 대놓고 짜증을 내는 윤기다. 내가 여기 있는 게 짜증이 나는 거겠지. 한순간에 불청객이 되어버린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윤기의 눈치를 살폈다. 어쩌지, 책을 접어두고 당장 여기를 나가야 하나. 아니면 조용히 책을 다시 읽어도 되는 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매한 곳에 시선을 둔 채 손가락을 꼼지락대는데, 나를 부르는 윤기의 목소리에 윤기를 바라보았다.
"저기."
"..."
"나가줬으면 좋겠는데."
아. 네, 죄송해요. 돌직구로 날아온 불편함 가득한 말에 잠시 멍하다 허둥지둥대며 급하게 다락방에서 나왔다. 죄송은 무슨 죄송. 왠지 윤기 앞에서는 기에 눌려 어리버리하게 된다. 책 재밌었는데... 시무룩한 얼굴로 계단을 내려가다가 올라오고 있는 남준과 마주쳤다. 좋지 않은 나의 표정을 보고 어느 정도 짐작이 되는 듯 안타까운 눈빛을 보낸다.
"윤기 형이랑 마주쳤구나."
"네.."
"그 형이 좀 그래요. 되게 차갑죠."
"..좀.. 그런 것 같아요."
"너무 담아두진 마요. 원래 사람한테 정을 잘 안 주거든요."
처음 윤기를 봤을 때, 눈 때문인지 정말 날카롭고 차갑게 생겼다고 생각했는데 성격도 정말 그랬다. 남준의 위로와 같은 말에도 고개를 끄덕거릴 뿐 기분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이 집에서 정원만큼, 아니 어쩌면 정원보다 더 마음에 든 공간이었는데. 남준은 여전히 풀이 죽어 있는 나에게 기운 차리라는 듯 어깨를 톡톡 두드리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 들어오니 텅텅 비어있는 책꽂이가 눈에 들어온다. 아무래도 다락방에 가지 않는 건, 안 될듯 하다.
열어줘
# 03
결국, 또 올라왔다. 저녁을 먹자마자 쏜살같이 올라와 문을 여니 다행히 윤기는 없었다. 문 옆에 있는 스위치를 달칵, 하고 누르니 몇 번 깜빡이며 조명이 켜졌다. 1인용 소파 쪽으로 다가가 아까 떨어졌을 게 분명한 읽던 책을 찾았다. 그 와중에 책갈피는 해 놓았는지 읽었던 곳에 끈이 끼워져 있었다. 금세 신이 나 소파에 자리를 잡고 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헐.."
반전이 숨어 있는 책 내용에, 작가의 소름끼치는 필력에 감탄사를 내뱉고 혼자 놀라며 한창 읽는데 탁탁. 하고 누군가의 발소리가 바로 앞에서 들렸다. 움찔하며 고개를 드니 아까처럼 2인용 소파에 윤기가 팔짱을 끼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 언제 온 거지..? 책에 집중해 미처 몰랐던 것 같다. 아까처럼 나가길 바란다는 듯 눈짓을 주는 윤기에 서운한 마음과 억울한 마음이 들어 저절로 울상을 지었다.
"이것만 읽고 가면 안 돼요..?"
"뭐?"
"한 번만요.."
"..."
최대한 불쌍한 척을 하며 검지 손가락 하나까지 살짝 들어올렸더니, 아까와 다른 반응에 황당한건지 윤기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는다. 눈썹을 팔자로 만들어가며 윤기를 끈질기게 쳐다봤더니 결국엔 마음대로 하라며 손을 휘휘 젓는다. 아마 얼굴을 돌리라는 얘기 같다. 아싸. 주먹을 불끈 쥐며 기뻐하다 또 금세 책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앞에서 윤기의 참나, 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그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으.."
불편한 자세로 잠들어 근육이 살려달라 외칠 때 쯤에야 눈을 떴다. 언제 잠들었는지도 모르게 푹 잤다. 손에 들려 있던 책은 잠결에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소파 옆에 가만히 놓여있었고, 조명은 약한 빛을 내고 있었다. 잠기운에 눈을 깜빡이며 상황을 파악하는데, 몸을 살짝 일으키니 무언가가 몸을 타고 스르륵 흘러내린다. 느릿느릿 잡아 올리니 누군가의 남방인 듯 했다.
"...어.."
윤기가 입고 있던 남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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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너무 이상하게 끊은 것 같..?
아무튼 네.. 남주가 7명이다 보니 한 명 한 명 써내야 할 서사가 많네요 참..ㅎ...
자꾸 늦어서 죄송해요 ㅠㅠ
암호닉 신청은 가장 최신 화에 [암호닉] 양식으로 해주세요.
■ ♡ ■
글읽다 돌연사
@방탄@
푸른밤
어덕맹덕
단팥빵
키위맛푸딩
빙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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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태네 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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