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gm on
15. 그대 미워해서 무얼 해
감기 걸렸다. 어제 비 왔는데 운다고 청승맞게 맞으면서 간 게 화근인 듯. 일어나 보니까 세시여서 아 오늘 결석인가, 하고 씻고 누워있었다. 열나는지 몸은 무겁고 목은 따가운데 약상자 텅텅 비어있고. 죽 먹을 힘도 없어서 가만히 있는데 어제 만 생각하면 한숨부터 나온다. 지금까지 이동혁 오해하고 화낸 거 어떻게 하지. 앞으로 얼굴 어떻게 보지, 이런 생각 하고 있었음. 이제노랑 황인준 포함해서.
억지로 눈 감았는데 뜬금없이 일하고 있을 엄마한테 문자 온다. [문 좀 열어줘] 짐이 많아서 열어달라는 건가. 하고 문 벌컥 열었는데 앞에 이동혁 서있고. 니가 왜 거기서 나와.. 학교 끝나고 바로 왔는지 가방 메고 한 손엔 약봉지 들고 있다. 머리가 좀 멍한데 설마 꿈은 아니겠지. 감기 걸렸다며. 멍청하게 서있는데 이동혁 말한다.
결국 집에 들여보냈다. 이동혁 가방 내려놓고 손 씻더니 죽 데운다. 나 괜찮은데. 안 괜찮아 너. 돌아보지도 않고 말하는 이동혁. 들어가서 쉬어. 더 서있기 어색해서 고분고분 방에 들어와 이불 덮고 앉아있었다. 서먹해서 마주치기 조금 그랬는데 지금 와버리면 어쩌자는 건지. 안 그래도 아파서 얼굴 좀비 같은데. 거울보고 부시시한 머리 급하게 정리하는데 이동혁 방 노크하고 들어가, 한다.
침대에 걸터 앉아서 갑자기 머리카락 귀 뒤로 넘기길래 이게 무슨 상황인가, 했더니 온도 재는 거였다. 체온계 차가워서 한 번 놀라고 이동혁 얼굴 너무 가까이 있어서 두 번 놀란다.
"약 상자에 감기약 넣어놨으니까 꼭 먹어"
대답 안 하니까 조금 뜸 들이더니 일어난다. 근데 왠지 여기서 그냥 보내면 평생 사과 못 할 것 같고 다신 못 볼 것 같은 거야. 동혁아. 이름 부르니까 문고리 잡은 손 멈추고 고개 돌린다.
".. 안 가면 안 돼?"
뇌를 거치지 않고 말 그냥 나와버리고. 이동혁 느리게 걸어와서 다시 앉는다. 어쩌자고 가지 말라고 한 거지. 하고 싶은 말 있어? 이동혁이 묻는다. 하고 싶은 말이야 수만 가지인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미안해야 할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깜깜해서 머뭇거리고 이불만 꼼지락.
"미안해"
내 말에 이동혁 무덤덤하게 나 쳐다본다.
"내가 멋대로 오해하고.. 너한테 상처 주고"
"나만 힘든 거 아닌데, 너도 힘든 거 알면서 너랑 멀어지는 게 무서웠어"
이동혁 앞에서 우는 것도 지겹다 이젠. 목울대가 울렁이는 게 툭 치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했다. 미안한 감정도 있지만 솔직히 이동혁과의 관계가 끝날 것 같은 두려움이 더 커서. 이기적이게도.
"나도 내가 나쁜 거 아는데. 근데 나한텐 니가 너무 커서"
좋아해,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이 말 한마디를 안 하면 말 그대로 죽을 것 같았다. 눈에 고인 눈물이 볼에 차고 넘쳐 이불에 자국 남긴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네가 좋아"
누선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없어서. 내리깔은 눈에서 눈물 뚝뚝 떨어지는데 차가운 손으로 머리카락 넘겨주곤 옷소매로 얼굴 닦아준다.
"진짜 밉다 너"
모순적으로 머리를 쓰다듬는 손은 너무 다정하고, 그 다정함이 나를 더 울렸다.
"미움조차 좋아지는데, 어쩌지 진짜"
..어? 너무 예상외의 대답에 놀라 고개를 벌떡 들었다. 이동혁은 의연한 얼굴로 그저 쳐다볼 뿐이다.
"...무슨 소리 하는데"
이 상황에서 장난이라고 하면 나는 울음을 뚝 그치고 명치를 칠 자신이 있다. 서러워 죽겠는데 딸꾹대는 내가 웃긴지 푸스스 웃는다. 아직 할 말이 더 남았는데 애석하게도 도어락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 들린다. 무어라 더 말할 것 같던 이동혁도 나 갈게. 내일 아침엔 아프지 마. 하고 나간다. 여주는? 여주 자요. 엄마 물음에 잔다고 대답한 이동혁 때문에 나는 이불 끝까지 덮고 자는 척하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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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빼고 모두가 평범한 하루가 시작됐다. 하루 빠졌다고 학교 가는 것조차 어색한데. 약 먹고 쭉 잠만 잔 덕분에 몸은 개운한데 어찌 기분은 영 개운치가 않았음. '미움조차 좋아지는데 어쩌지 진짜'.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이동혁이 할 줄이야. 이런 낯간지러운 말을 이동혁한테 들을 줄이야. 견딜 수 없이 간질거려서 이동혁 집 앞에서 발 동동 굴렀다.
이동혁이랑 같이 등교하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라 어떻게 행동해야 안 어색할지 생각하고 들어갔다. 준비 다 끝냈는지 교복에 가방까지 메고 물 마시고 있는 이동혁이랑 눈 마주침. 화들짝 티 나게 놀라고 바로 고개 돌렸지만.. 이동혁 식탁에 앉더니 나한테 밥 먹어, 한다.
유부초밥. 오랜만이다 너. 요즘 밥도 잘 안 먹어서 유부초밥이 그나마 제대로 된 한 끼 식사였다. 쭈뼛쭈뼛 젓가락 들고 입에 가득 담아서 오물오물 먹으니까 이동혁 휴대폰 보다가 컵 가지고 꼬물댄다. 식탁 위에 놓고 간 휴대폰 켜져 있길래 봤더니 유자차 만드는 방법 검색하던 중이었음.. 웃겨서 약간 웃음 나올 뻔. 이거 마셔. 내 앞에 컵 딱 놓는데 유부초밥에 유자차라니.. 진짜 이동혁만 생각할 수 있는 신기한 조합이다. 몸은 괜찮아? 응. 안 아파 이제.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게 다 먹고서야 학교 갔다. 가면서 숨 막혀 죽을 뻔. 너무 어색해서.
학교 들어섰는데 역시 소문이 났는지 보는 애들마다 수군댔다. 모르는 척 반에 들어가니까 이제노랑 황인준 장난치고 있었음.
"어? 오늘 왔네"
"야 니 어제 안와서 청소 내가 대신했잖아"
이제노랑 황인준 아무렇지도 않게 말 걸어서 오히려 내가 놀랐다. 아픈 건 괜찮아? 이제노 묻고 그래, 못생긴 건 좀 괜찮아? 황인준 이어서 말한다. 이제노 실실 웃고. 참 한결같다 너희도. 다 나았는데, 니는 존나 여전하다. 내 말에 황인준 어깨 으쓱한다.
"그래서 내가 너희한테 할 말이 있는데"
말 끝나기 무섭게 황인준 표정 확 구기고 아 솔직히 오글거리는 말 하지 마, 한다. 아ㅋ 어떻게 알았지. 자연스럽게 고맙다고 하려고 했는데. 뜨끔했지만 나는 나만의 길을 간다.
"고맙다고.."
"아아아아악!!!!!!!!!!"
이게 뭐라고 역정 내는 황인준 귀 막고 도망간다. 야 사람이 말을 하면 좀 들어라. 투덜대면서도 여전해서 고맙고 참 다행이다. 다행히 평소처럼(이라기엔 이제노 한 명이 늘긴 했지만) 밥먹고, 수업을 듣고 나절이 지났다.
16. 너에게 하고 싶은 말
김여주. 오늘도 어김없이 야자시간에 자다가 이동혁 목소리에 깼다. 볼 콕콕 찌르는 이동혁 얼굴 바로 앞에 있어서 왂!! 소리 지름. 누구는 창피해서 죽겠는데 이동혁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나서 가방 챙겨준다.
원래는 별생각 없이 했던 행동들이 서로 마음을 알고 나니까 조금 쑥스러운 거임.. 눈 마주쳐도 더워지는 게 얼굴 벌게지는 것 같아서 바로 피하고. 계단 내려가다 삐끗했는데 이동혁이 잡아주니까 또 그게 너무 설레고. 이어폰 나눠끼고 전에 자주 듣던 노래 들으면서 집 가는데 보폭 넓은 이동혁 내 발걸음 맞춰준다는 것도 오늘에야 깨달았다.
티를 많이 냈구나. 이제야 그동안 이동혁이 서툴게 표현한 것들이 생각난다. 비 오는 날 항상 마중 나와 있던 것도, 추운 날 겉옷을 하나를 더 챙기던 것도. 아.. 그리고 초등학교 때 고백한 것도. 지성이랑 결혼할 거라니까 울상 짓던 이동혁 얼굴 생각나서 웃음 나오는데 이동혁이 뭐가 그렇게 재밌어? 한다. 아니 그냥.. 대충 얼버무린다.
엘리베이터 지나쳐서 계단으로 올라가는 이동혁. 뭐지.. 따라가면서 왜 오늘은 계단으로 가? 물어보니까 그냥, 하고 올라간다. 느릿느릿. 그러다 갑자기 걸음 멈추는 이동혁. 따라 멈춰서 오잉스럽게 쳐다봤다. 뒤돌아 가방에서 뭐 주섬주섬 꺼낸다.
"그 목걸이 잠깐 풀어봐"
빤히 보고만 있다가 이동혁 말에 목걸이 풀었다. 왜? 내 물음에 웃으면서 손 내미는 이동혁. 손바닥 위에 목걸이 올려놓으니까 다른 손으로 같은 목걸이 케이스 꺼낸다.
"야.. 뭐야"
뭐야 진짜. 부끄러워서 괜히 투덜대니까 내 반응에 이동혁 헤헤 웃는다. 다른 목걸이 직접 걸어주는 이동혁. 이동혁 숨 어깨에 닿는데 심장 뛰는 게 머리까지 울려댄다. 전에 직접 걸어주면 설렐 것 같다고 지나가듯이 말했던 게 생각났다.
"이제야 주인 찾았네"
말하고 살풋 웃는 이동혁. 다신 이동혁 앞에서 안 운다고 다짐했는데 이번엔 떨려서 눈물 날 것 같다. 자기도 쑥스러운지 고개 숙이고 손가락 꼼질 대던 이동혁 목 몇 번 가다듬더니 고개 들고 말한다.
"솔직히 나는 아직도 꿈인가 싶어,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게"
"이 말 하게 될 줄 몰랐는데"
".. 응"
"좋아해. 처음 봤을 때부터 좋았고, 그 후로도 변함없이 좋았고, 지금도 네가 너무 좋고, 내일모레도, 그 이후로도 좋아할 예정이야"
"울지 마, 변하지 않을게. 내가 네 옆에 있을게. 너도 내 옆에 있어"
고장 난 센서 등이 켜졌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두 계단 위에 있던 이동혁이 내려와 내 앞에 섰고, 센서 등이 마지막 빛을 내며 생을 다할 때 이동혁의 입술이 맞닿았다.
예쁜 예감이 들었다. 우리는 언제나 손을 잡고 있게 될 것이다.
동혁의 삽질일기,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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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전부터 썼던 삽질일기가 드디어 끝이 났습니다!!
첫 글인 만큼 애정이 많은 글이었고, 때문에 시간도 많이 쏟았던 글이에요.
다른 글들로 계속 찾아뵙고 싶지만 제가 수험생이라서 꾸준히 올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ㅠ
지금까지 부족한 글 봐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번외로 찾아올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