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화관에 머무는 이슬방울 같이 청순한 얼의 그윽한 곳에 머문다.
-F R 라므네
-
"세상에서 제일 향기로운 꽃이 되게 해줄게."
오랜 시간동안 갈아입지 않아 힘 없이 너덜거리는 소매 끝을 매만지며 그가 더러운 모양새로 꿉꿉해진 내 눈가를 손가락으로 쓸어내린다. 꽤나 긴 손톱 끝으로 내 얼굴을 엷게 쓸어내리던 그가 이내 턱 끝을 잡아 올린다.
"그런 눈을 하고,"
쭈그려 앉은 내 앞에 마치 군림하듯, 무릎 하나 굽히지 않고 꼿꼿한 자태로 줄곧 서있던 그가 이내 무릎을 굽혀 눈을 맞춰온다.
그의 시선이 내 눈동자 가장 진한 그 어딘가를 관통하듯 깊이 들어온다.
"저렇게 살고싶어?' 입꼬리 한쪽만을 인위적으로 올린 그가 내 뒷쪽을 가리킨다. 슬레이트 지붕 아래로 볼품없이 으스러지듯 겨우 서있는 집. 시선을 가득 채우는 남자의 실크 블라우스와 대조되어 더욱 추한 모양새로 내게 손짓한다. 가라고. 저 남자의 손을 잡고 멀리 떠나버리라고.
"네 동생, 만나고 싶지 않아?"
침을 꿀꺽 삼켰다.
동생-
동생이란 단어에 입안에 쓴물이 올라온다. 후끈거리는 눈꺼풀 사이로 남자가 환히 웃어보인다. 반으로 접힌 그의 눈매가 내게 속삭인다. 골이 울리도록 수백, 수만번.
잡았다.
그래, 난 널 위해 직접 이 악취에 찌든 세상에 발을 들였어. 수많은 꽃들이 만개한 꽃밭 그 끄트머리에 서 눈이 에일 정도로 예쁘게 웃는 너 하나만 보고 그 꽃밭에 발을 들였어. 날카로운 가시덩굴에도, 진득하게 온몸을 휘감아오는 불순물에도 굴하지 않고 순결하던 너와 달리 난 너무 탁해져버렸어. 이젠 정말 지쳤어. 제발 한번만, 시간을 돌릴 기회를 줘 내 하나뿐인, 내 순수한, 내 동생,
내 -.
-
"김여주!"
손으로 딱, 하는 소리를 내며 면전에 대고 소리치는 재현 탓에 경련하듯 몸을 비틀며 눈을 깜빡였다. "무슨 생각해, 밥 먹다 말고." 답답하다는 듯 재현이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숟가락을 갈곳 잃은 손에 쥐어주곤 떠먹으라는 시늉을 해보였다. 무의미한 입운동 사이사이로 들리는 시리얼의 부서지는 소리에 그제야 재현은 만족한듯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옳지. 마치 재현의 애완견, 따위가 된 것만 같은 착각에 헛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그렇고, 아까 내가 한 말 들었어?' 재현의 물음에 미안한 기색을 내비치며 고개를 저었다. "미안, 오늘 좀 피곤한가봐." 내 말에 재현이 하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보였다. "나 오늘 학교 못간다고." 한숨과 섞여 일종의 푸념이 되어버린 재현의 대답에 눈썹을 치켜올렸다. "못- 간다고? 왜?" 내 물음에 곤란한듯 재현은 어색한 미소를 띄웠다. "일단은 심부름이라고 해둘게." 숟가락의 표면이 우유와 맞닿아 찰박거리는 소리를 낸다. "이태용이 시키는 심부름이면 뻔하지." 안그래? 내 말에 응수할 생각이 없어보이는 재현에게 재차 되물었다.
나는 곤란한 정재현이 좋다.
나와 이태용. 그 중간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버벅거릴 때에 그 애의 절박한 말투가 자지러질만큼 좋다.
"그래."
음절 사이에 공백을 길게 깔며 애매한 대답을 내어보인 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타형은 보스랑 같이 출장 나가서 없고, 태일이형도 병원에 출근해서 오늘 같이 등교할 사람은..." 말을 흐린 재현이 아직까지도 굳게 닫힌 문을 손으로 가리켰다. "굳이 길게 말 안해도 예상은 하고 있었어." 체념한듯 그릇을 치우는 내 뒷통수를 재현이 토닥였다. 차라리 혀나 깨물어버릴까, 하고 바싹 마른 입술을 훑다 문득 떠오른 얼굴에 가만히 교복을 챙겨 입었다. 매운것들을 한가득 물어삼킨 후 맞는 사탕의 달콤함. 내게 김동영은 모난 곳 하나 없이 둥근 모양새를 한, 분홍빛 사탕처럼 입 안을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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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인의 사랑은 클리셰 범벅의 다시 펴 볼 정도의 가치조차 없는 로맨스 소설일 뿐이다. 뽀얗게 먼지로 뒤덮인. 그러나 그 소설의 주인공이 이민형이라면 이야기는 조금 다르다. 이민형의 사랑은, 한 평생 사랑이라는 작은 감정에 얽혀 살지 않겠다는 듯 해보였던 그의 따분할 정도로 고지식했던 행동을 한순간에 무너트릴만한 화제거리였으며, 그 어떤 짖궂은 장난을 해서라도 꼭 망치고 싶은, 나만의 작은 털실뭉치였다.
"살다보니 이런 날도 다있네." 혀를 끌끌 차며 감탄하는 내 모습에 민형은 평소와 같이 무감정한 눈빛으로 응수했다. 이민형의 품에 고이 안긴 쪽빛의 꽃이 눈을 시리게 만들어 시선을 돌렸다. 적어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여자친구 주게?" 저에게로 몸을 바싹 붙이며 물어오는 내 행동에 민형은 눈살을 찌푸리며 몇걸음 물러섰다. "어." 귀찮다는 듯 서둘러 대답하는 녀석의 모습에 최대한 순진한 눈을 하며 웃었다. "근데, 네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뭐가 달라져? 네가 허구한 날 사람이나 죽이고 다니는 새끼라는게 달라지기라도 하냐구-" 끝을 늘이며 제 심기를 건드리는 모습에 민형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머리를 쓸었다. "연애한다고, 너랑은 다른- 그런 평범한 여자애 하나 만난다고 네 인생이 존나게 괜찮아진 것 같지?" 어절 사이로 자꾸만 웃음이 새어나왔다. "착각하지마, 아무리 발버둥 쳐도 네 손에 묻은 피, 그거 절대 못지워. 너도, 정재현도, 이태용도,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집구석에 눌러 사는 새끼들 전부 다." 숨을 헐떡였다. 민형은 내 말을 듣지도 못했다는 듯, 한참을 조용히 걷기만 했다.
"이게 무서워?"
교문을 조금 앞두고 민형이 줄곧 들고 있던 꽃을 내 면전에 들이밀며 걸음을 멈췄다. 시야를 가득히 채운 꽃의 향이 달큰하다.
달큰해.
너무 달큰해서 구역질이 나.
고개를 돌리며 깊이 공기를 내뱉는 내 모습에 이민형이 어린애마냥 웃어제꼈다. "너, 병신같이 아직도 꽃이 무서워?" 그냥, 싫어 죽겠지? 이민형의 목소리가 웃음을 참느라 바들바들 떨린다. 그에 대답 없이 민형을 두고 교문으로 발걸음하는 내 손목을 빠르게 잡아챈 녀석이 이내 웃음기 하나 없이 싸늘해진 낯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좀 대단해진 것 같지. 사람들이 네 말에 어쩔줄 몰라하니까, 뭐라도 된 것 같지."
"놔." 팔을 있는 힘껏 휘두르며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달라질건 없었다. "기억 안나? '플뢰르의 텐'이 직접 심은 꽃, 그게 너잖아. 추잡한 그 꽃밭에서 네가 그렇게 경멸하는 텐이 시키는 대로 앙앙거리던건 너, 김여주잖아." 말이 끝나자마자 팔을 놓아준 민형이 하얗게 질린 내 얼굴을 응시하며 뇌까렸다.
"맞다. 넌 그새끼를 경멸하는게 아니라 병신마냥 무서워하는거였지."
민형에게 기세등등한 태도로 악담을 퍼부었던 일전의 내가 아니꼬울 정도로 아무말도 나오질 않았다. 무서운게 아냐. 그저 치가 떨릴만큼 싫을 뿐이야. 속에서 걸린 가증스러운 거짓이 숨구멍을 막아 시야가 아득하니 어지러워진다. 잇새로 흘러나오는 바람빠진 비명을 주워담으며 멀어지는 민형의 뒷통수를 허망히 보냈다.
억겁의 시간이 지나도 내게 새로이 상처를 줄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던 민형의 눈이 꼭 죽은 생선과도 같았다.
내게 닿은 그 숨결이 너무도 비려, 헛구역질을 간신히 집어삼킨다.
-
-여주야 오ㅔ 학교 안오ㅏ?? 어디야
-반장ㅇ이 너 번호 줬어. 나 동영이야!!
첫 문자를 보낸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연달아 울리는 문자음에 눈살을 찌푸리며 휴대폰 전원을 껐다. 이제 수행평가 기간은 지난건지, 먼지가 꽤나 쌓인 매트리스 위에 힘없이 누워 허공에 대고 손가락을 튕겼다. 답장 하나 못하는 겁쟁이. 속 안에서부터 차오르는 자기비난에 눈을 감았다. 흔적은 지우면 그만. 그저 태용의 눈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되었다. 허나 내 마음 깊은 곳까지 잠식한 두려움은, 그 따위의 사소한 것이 아니었다. 어디인지 답하면 그 순간부터 김동영의 말간 낯을 머릿속에 하염없이 그리며 그를 기다릴까봐. 끝내 오지 않은 그에 몇날을 좌절하며 잠시나마 소중히 여겼던 내 감정을 비웃게 될까봐. 그런 내가 초라해질까봐. 그래. 이제 이런 일탈 따윈 그만 두자. 동영은 그저 내 더럽고 꼬일대로 꼬인 삶의 작은 일상탈출일 뿐이었다. 다 죽어가는 풀밭에 실수로 발을 들인 토끼, 그 뿐이었다. 싱싱한 풀은 없다는걸 알아채자마자 사뿐히, 쉬운 걸음으로 들어왔듯이 쉽게 돌아서겠지. 아무리 더 세게 눈을 감아 암흑을 담아내려 에써도, 수업시간에 몰래 보낸건지 오타가 가득했던 동영의 문자만이 잔상처럼 시선 끝을 따라온다. 열아홉, 스물을 겨우 채우지 못한 미성숙한 세월동안 그 누구도 마음에 담아본적이 없었다. 내 곁을 스친 수많았던 옷깃들과 넌 어디가 그렇게 달라 내 맘을 이렇게 헤집어놓는걸까. 머리를 천천히 쓸었다.
잠시나마 잊고 있었다. 그토록 끔찍한 꽃잎들조차 네 손을 타면 어여쁘게 살랑이는 사랑의 징표가 되어주곤 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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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뜬건, 어깨를 흔드는 얕은 손길 때문이었다.
"역시. 여기 있을줄 알았어." 한손엔 방금 불을 붙인 듯한 담배를 든 채, 동영이 내 뺨에 손을 댔다. 세상의 죄악 따위에 전혀 무지할 것만 같은 그의 무고한 얼굴을 담아내며 눈을 감았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눈을 뜨더라도 그의 잔상만이 시야에 남아있도록. "여주야 일어나, 정말 결석할거야?" 걱정스런 동영의 물음에 고개를 주억거렸다. 훗날 후회할지 몰라도 최소한 지금은 그쪽이 민형에게 복수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같았다. 나중에 태용의 귀에 들어가 벌을 받을지언정 내가 받을 벌은 민형이 받을 벌에 비하면 마치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같을테니. 한참을 강아지마냥 끼잉대다 동영은 내 발치에 걸터앉으며 주변의 먼지를 살살 털었다. 어색한 분위기를 중화시키려는 듯 동영은 잔잔히 콧노래를 부르며 연기를 연신 들이마시다 뱉어냈다. 그의 숨소리에 실눈을 떠 동영을 응시했다. 어린아이마냥 때묻지 않은 얼굴이 담배를 피우는 모습이 묘하게 색스러웠다.
지독하리만치 독점하고 싶어 아무와도 공유하고싶지 않은 그런,
은근한.
톡, 소리와 함께 담배를 바닥에 튕긴 동영이 읏차, 하며 매트에서 내려와 손을 내밀었다.
딱 두번, 내 앞에 놓인 손을 두고 고민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난 그 두번 다, 손을 내어주고 나서야 내가 잡은 것이 실은 칼날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에 검붉은 혈흔을 덕지덕지 뭍인 채로. 비참하게.
"그럼 같이 땡땡이 치자."
손바닥을 감싼 손이 부드럽게 팔목을 그러쥔다.
칼날일까?
적어도 아프진 않아.
일상 탈출이던 그대가, 내 일상이 되어버린 그 순간을 아직도 기억한다.
맞잡은 손이 천사의 그것과도 같이 부드러웠던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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