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마음은 혼란에 빠지면 걷잡을 수 없는 법이다.
- "위대한 개츠비" 中
꽃밭의 중심에 정신을 놓은 사람마냥 축 늘어진 채 누워있었다. 제가 얼마나 화려한 꽃인지 내게 입증하려는 것 마냥 제 향을 있는대로 뿜어내는 백합더미 탓에 눈을 감은 채 몽롱해지는 정신을 가까스로 붙잡는 와중에 내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는 자연스레 두 어깨를 움찔거리게 만들었다. "백합의 꽃말은 순결, 이라고들 하지." 두 눈을 감아도 자꾸만 그의 피사체가 심연 뒤에서 일렁인다. "그래서 널 백합이라 불렀어. 내 시들어가는 꽃밭에서 넌, 유일하게 온연히 아름다운 채로 피어있었거든." 물론 넌 꿈도, 야망도 없는 불쌍한 년이긴 했지. 낮게 웃으며 그는 내 목덜미를 느리게 잡았다 놓는다. 그의 손길에 속수무책으로 목이 턱턱 막혀왔다. "이제 자는척은 그만좀 하지?" 느릿함 뒤에 숨은 강압적인 그의 어투에 못이겨 잘게 떨리는 눈꺼풀을 가까스로 떠 그를 마주했다.
"예전보단 몰골이 많이 좋아졌네. 뭐, 사랑이라도 시작했나?"
제가 꺼낸 말에 그는 자지러지는 웃음을 터트렸다. "사랑같은거 받아본적도 없는 네가, 사랑을 어떻게 하는줄 알기는 해?" 유한 얼굴로 내게 묻는 텐의 모습은 천사의 얼굴을 잠시 빌린 악마와 같다. 그의 악랄한 질문에 결국은 눈물이 차오르고 만다. "자꾸만 이렇게, 꿈에 나와서 날 괴롭히는 이유가 뭐에요."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파르르 떨리는 몸짓으로 들어올리며 그를 마주한 채 묻는다. 내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고선 눈밑에 아롱진 눈물을 힘이 실린 손가락으로 지워낸 그가 짐작할 수 없는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럼 네가, 자꾸만 날 네 꿈에 불러들이는 이유가 뭔데?"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기울인 채 말하는 텐의 모습에 말문이 막혀버린다. "그건..." 쉽사리 말을 끝맺지 못하는 내 모습에 텐은 그저 웃음만을 지은 채 제 아래에 핀 수많은 백합 무더기를 발로 즈려밟는다.
"이태용의 손아귀 안에서 꼼짝없이 갇힌 넌,"
"지금 벌을 받고 있는걸까, 아니면 사랑, 뭐 그런걸 받고 있는걸까."
사랑. 두 단어에 다시금 눈밑이 뜨겁게 차오른다. "난 그런걸 받아본 적이 없는데. 감히 어떻게 내가, 그걸 알겠어요." 축축한 목소리로 악에 받힌 고함을 내지르는 내 모습에 텐은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날 끌어안는다. 따스한 감촉 대신 가슴에 칼이 꽃히는 듯한 고통.
"어찌되었건 잊지마. 넌 내게 다시 돌아와야 할 몸이라는걸."
텐의 손에 잡힌 백합들이 힘없이 고개를 꺾으며 나풀거린다.
흰 꽃잎들을 속절없이 휘날리며.
마치 날 질식사 시키기라도 할 것 마냥 온몸에 칭칭 감긴 이불을 그대로 두른 채 복도를 내달려 태용의 방으로 향했다.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되는 것도 무시한 채. 숨을 헉헉 들이쉬며 제 방문을 세게 열어젖힌 채 방을 둘러보아도 침대에 누워있어야할 태용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내가 죽어버리고 싶을 때엔 아무도 없어. 머리를 쥐어뜯으며 그 자리에 무너져내려 울음을 크게 터트렸다. 그런 내 울음소리에 놀란건지, 제 침실과 연결된 서재 문을 황급히 열어젖히며 정돈되지 않은 모습의 태용이 달려나왔다. 바닥에 주저앉아 울어제끼는 내 모습을 보자마자 태용은 한달음에 곁으로 달려와 턱을 들어올려 내 얼굴을 확인한다.
"누가 울렸어."
그는 아직도 울음이 멈추지 않은 날 제 품에 끌어안은 채 거친 숨소리을 몰아쉬며 묻는다. 그의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못한 채 꺽꺽거리는 숨을 고르기 바쁜 날 보며 태용은 옅은 한숨을 쉬며 눈물자국이 가득한 두 볼에 입을 마주댄다. 온기가 닿음과 동시에 다시금 흘러내리는 눈물에 적셔진 태용의 입술이 짜게 물든다. "자꾸만 꿈에 나와. 싫은데, 싫은데 자꾸만... 돌아오라고..." 기어이 울음에 파묻히고만 내 말에 태용의 눈꼬리에 날이 선다. "다시 널 그곳으로 보내지 않아." 그의 말에 달뜬 숨소리가 점차 옅여진다. 쉬이, 울지마. 다시는 공주님을 놓치지 않을께. 태용의 다정한 속삭임에 마치 그가 왕자님이 된 듯한 터무니없는 착각마저 든다. 아직도 떨리는 몸을 등을 받친 채 안아올린 태용이 조심스레 날 침대 위에 눕힌 후 옆에 누워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사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흐트러지는 머리칼의 소리와 느리게 움직이는 태용의 눈꺼풀을 보며 점점 무의식의 부름에 이끌려가며 이성의 끈을 놓는다. "다시는... 날 플뢰르로 돌려보내지 않기로 약속해..." 웅얼거리며 뱉은 말에 태용은 고개를 끄덕이며 제 가슴에 날 감싸안는다.
"원한다면 네가 받을 벌까지, 다 받을 수 있어."
노래를 부르듯 간지럽히는 태용의 대답에 결국 눈을 감았다.
당신은 알까.
네가 내게 속삭이는 그 말들에, 가끔 난 착각을 해.
날 사랑, 그런 감정 따위로 대한다는 착각.
밤잠을 설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멍하니 턱을 괴고 앉아있는 내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정재현이 이내 걱정스러운 손길로 이마 위를 살짝 짚었다. "태일이 형이 너 감기 기운 심하댔는데. 오늘은 좀 쉬지." 내 이마에 얹었던 손을 제 이마에 대어보며 재현이 말했다. 그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고 그저 책상에 올려진 가방 위에 그대로 엎드렸다.
"이러다가 너 감기 더 심해지면 어떡해."
연신 어쩔줄을 모르며 내 이마에서 손을 뗄 줄 모르는 재현의 손을 아프지 않게 쳐내며 입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데에서 혼자 골골대는 것 보다는 나아." 내 말에 재현은 고개를 얕게 끄덕였다. "하긴, 이 시간이 보스가 가장 바쁠 시간이긴 하지." 재현의 말에 별안간 가방에 파묻힌 고개를 들어올리며 물었다. "뭐하느라 이시간에도 바빠? 밤에도 맨날 현장이니 뭐니 해서 나가는 주제에." 맨날이라니. 가당치도 않다는 듯 재현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나에 비하면 보스는 양반이지." 그래? 한번도 길게 이야기해본적 없는 주제에 차오르는 흥미를 느끼며 고개를 들고선 정재현을 빤히 응시했다. "그래서. 밤에는 그렇게 피칠갑을 하고 들어오면서, 낮에는 뭘 하는데?" 내 말에 재현은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지그시 잘근거리며 고개를 저었다. "거기까진 좀..." 재현이 뒷목을 성글게 매만졌다. 싱거워. 재현의 반응에 쌀쌀맞게 대꾸했다. "그래도, 다 널 위한거라는건 알아둬." 보스는 낮이건 밤이건 항상 네 생각으로 가득 찬 분이시니까. 재현의 말에 가당찮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그런 사람이 그렇게 날 가만 두질 않고 괴롭히나." 내 말에 재현은 두손을 허공 위로 휘, 저은 뒤 힘없이 땅으로 흩뿌린다.
"백번 말해줘봤자 뭐하나, 정작 당사자는 들은 척도 않는데."
정재현의 한탄에 차오르는 대답을 삼킨다.
백번 내 생각을 해봤자 뭐해, 결국엔 볼품없이 일그러진 집착인걸.
그 한마디가 자꾸만 속에 얹혀 불쾌하다.
불쾌한 감정은, 아침조회가 시작됨과 동시에 배가 되어버렸다. "오늘 자리 바꾸는 날인거 다들 알지?" 창 밖으로 내리는 비를 배경음 삼아 반장이 퍽 들뜬 말투로 말문을 연다. 반장의 말에 뒤따르는 아이들의 침음성이 들리지도 않는건지, 아님 이미 진작에 예상한건지 반장의 표정은 태평하기 그지없다. 반 아이들에게 뒷통수를 보이며 칠판 위에 책상 배치도를 그리는 반장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다 정재현에게 귀엣말을 건넸다. "이번에도 자리표 잘 바꿔서 내 옆에 앉아. 알았지?" 내 말에 정재현은 제 볼우물이 패이도록 웃는다.
"그치? 역시 여주는 내가 제일 좋지?"
날 보며 연신 생글거리는 정재현의 얼굴이 달다. 꼭 한여름 햇살을 훔친 복숭아 처럼. 그런 재현의 얼굴이 보기 싫지 않아 대답없이 앉아 의자만 연신 까딱였다.
어느덧 내 차례가 왔는지, 반장이 종이조각들이 가득 들어찬 쇼핑백을 내게 내민다. "ㄴ...네 차례야 여주야." 여기서 뽑으면 돼... 항상 느끼는 바지만 역시 반 아이들은 내가 퍽 불편한가보다. 반장의 말에 그게 별 대수겠냐는 표정으로 쇼핑백 안으로 손을 깊게 집어넣어 종이조각 하나를 대충 꺼내들었다. 어차피 무슨 번호를 뽑던 옆자리에는 정재현이 앉을테니까. "6번." 내 대답에 재현은 눈을 살짝 찡그리며 칠판에 자로 잰듯 그려진 배치도를 훑는다. "아, 또 자리표 바꾸러 돌아다녀야 되겠네." 제가 뽑은 종이조각을 연신 손가락으로 튕기며 재현이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난다. "7번 누구야." 어슬렁대며 아이들의 손에 저마다 들린 종이조각을 흘끔대던 재현이 이내 7번을 찾았는지 아, 하고 작게 탄성을 내지르고선 이내 재현을 불편한 몸짓으로 올려다보는 남자아이 하나에게 어깨동무를 한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인다. 허나 일이 제 뜻대로 풀리지 않는지 살짝 인상을 찡그린 재현은 이내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녀석에게서 어깨동무를 푼 채 무언갈 연신 묻는다. 이야기가 꽤 길어지겠다 싶은 생각에 그들에게 가까이 가면, 남자아이는 고개를 저으며 재현에게 말한다. "7번 자리가 그렇게 좋은 자리야? 아까 너 오기 전에 이미 바꿔달라는 애가 있어서... 바꿔준지 오랜데." 녀석의 말에 재현의 미간에 패인 인상이 더 짙어진다. "그러니까, 누가 바꿔달라고 했는데?" 그리고 그런 재현의 물음에 답할 새도 없이, 반장은 배치표에 적힌 내 이름 옆에 네모나게 그어진 선만큼이나 반듯한 글씨체로 이름 석자를 적어나간다.
[김 동 영]
순간 나와 눈이 마주친 그 애가 가뜩이나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떠보이며 제 손에 들린 종이조각을 흔들어보인다.
어젯밤 꿈속의 백합 꽃잎들을 연상시키는 종이조각을 텅 빈 눈으로 응시하며 그에게 들리지 않을 물음을 묻는다.
넌 왜 항상 나와의 접점을 그렇게나 만들고 싶어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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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가기 전 세이브 원고 올립니다! 여행가서도 글은 변함없이 올릴 예정입니다. 앞으로 더 빨리빨리 찾아뵐께요!
그나저나 오늘 비지엠이 처음으로 팝송이 아니네요... 뭔가 좀 색다른 느낌.ㅎㅎ 좋아요
독자님들은 제 마지막 첫~~싸랑!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