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린다는 것은 |
너를 기다리는 일은 행복하다. 약속시간에 늦어 외투도 다 걸치지 못하고, 헐레벌떡 뛰어올 너의 모습을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살풋. 웃음이 난다. 찰랑찰랑 흔들릴 너의 주황빛 머리칼을 떠올리다가, 채 녹지 못한 눈을 한번 바라보고. 동글동글 쌍꺼풀 진 큰 눈을 생각하다, 볼 곁으로 스치우는 날카로운 바람을 한번 느껴보고. 뛰어왔는데도 새하예서 창백해 보일듯 한 너의 흰 얼굴을 생각하다, 채워지는 내 가슴을 느껴보고.
꽤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도 너는 오지 않았다. 하지만 무엇이든 좋았다. 어찌됐든 오늘은 너와 함께할 것이니까. 너를 기다리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내 곁을 지났다. 왁자지껄 욕설을 섞어가며 무어가 그리 신이 나는지 웃으며 이야기하는 학생들 무리와, 저마다 몇 명씩 모여 팔짱을 끼고 깔깔대며 웃어대는 여자아이들. 보통 날 같았으면 그저 넘어갈 일들 이였지만, 가만히 서서 바라보는 세상은 좀 더 활기차고, 밝았다. 주머니에 넣지 않고 어색하게 빼내어 있던 손이 날카로운 바람에 붉게 물이 들 때 즈음. 너는 내 상상 속 너와 그대로, 얇은 가디건을 다 걸치지 못한채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미안! 많이 늦었지?”
잠이 많아 거의 항상 약속에 몇 분 씩 늦는 너지만, 너는 내게 장난끼 많은 어린 아이처럼 웃어 보이며 새삼스레 내게 말했다.
“뭘 새삼스레. 매일 늦으면서”
그 웃음에 보답하듯 나 또한 웃어 보이며 말했다. 나의 장난끼 섞인 대답에, 너는 밉지 않게 눈을 흘겨 보이다, 자연스레 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저 장난으로 한 말 이였지만, 너는 못내 그것이 신경 쓰였는지 신발의 앞코로 걷지 않고 서서 땅을 쿡쿡 밟았다. 앞코로 땅 패기. 무언가 신경 쓰이거나, 무슨 대답이 듣고 싶을때 마다 나오는 너의 버릇이다. 그런 너를 알고도 모른 척 계속 손을 잡고 딴청을 피우자, 너는 우물쭈물 고민하다 결국 입을 열었다.
“...그래서..화났어?”
내 생각과는 전혀 다른 대답에 놀라 고개를 들어 경이를 바라보니, 방금 보다는 조금 무언가 풀이 죽은듯한 모습 이였다. 목소리 또한 잘못을 저지른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살짝 우울함이 섞여있었다. 놀란 것도 잠시. 너무나도 순수하고 맑은 니 모습에 다시금 웃음이 차올랐다. 푸흐
“...?”
내 웃음소리가 의외였는지, 너는 놀란 토끼눈을 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화나긴 왜 화가나. 장난이야 좋았어”
최대한 포근히, 니가 안심할 수 있도록 나 나름 따뜻하게 웃어 보이니, 순식간에 너의 얼굴이 다시 환해졌다. 좋다 이런 솔직한 표정이. 숨김 없이 드러나고 마는 너의 생각과 마음이. 정말 좋았다. 너를 기다리는 것이. 너는 알까? 이렇게 너를 기다리는 것은 너를 향한 나 나름의 애정표현이라는 것을.
조금은 풀어진 손을 다시 꼬옥 마주잡았다. 내가 너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가 너를 기다린다는 것은. 삭막한 내 마음에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고, 너를 떠올리며 주변을 바라보다 웃음을 지을 수 있다는 것이고, 내가 너를 기다린다는 것은 내가 너를 숨김없이 올곧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너를 기다린다는 것은 너를 향한 조심스런 나 나름의 사랑방식이다.
나는 내일도 모레도 그 다음날도. 언제든 너를 기다리고 있을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너를 사랑할 것이다. 나는 너를 기다리며 너에게 다가간다.
나는 뛰어 오는 니가 너무 힘들지 않게, 나또한 너에게로 다가간다. 그리고 손을 마주잡는다. 기다린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애달픈 일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 기다린다는 것은 그저 나에게 헐레벌떡 뛰며 다가올 너를 넘어지지는 않나 바라보며 웃으며 기다리는 일이다.
봄햇살이 따듯하게, 포근하게 우리의 등을 감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