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를 사랑했던, 익명이.
㈜솨솨
그러니까, 너와 정식적으로 만났던 건 올 봄이었지. 나는 고등학교에 입학했고, 너는 나와 같은 반이 되었다. 내 기억 속의 넌 키도 참 컸고 목소리도 굵은, 꼭 어디선가 많이 봤다 싶은 사람이었다. 우리 반의 규칙은 종 치기 전 책상 위에 교과서를 갖다 놓기였다. 나는 입학식 날이고 또 새 친구들과 말을 트다 보니 교과서를 책상 위에 갖다 놓는 것을 깜빡했고 종이 치고 나서야 급하게 뛰어 사물함으로 향했다. 그런데 너 다리가 긴 탓이었나, 너 다리에 걸려 넘어졌다. 지금 생각하면 참 부끄러웠는데 어쩌면 운명이었겠다 싶었다.
"괜찮아?"
너는 내게 곧 손을 내밀었지만 나는 너무 급해 괜찮다는 말 한 마디만 놓고는 벌떡 일어나 사물함으로 향했다. 사실 그 때 너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음, 솔직히 말하면 그 때까지도 너의 이름을 몰랐었다. 그냥 너는 키가 크고, 목소리가 굵구나 라는 것까지만. 이게 너와 나의 첫 대화였다. 그리고 2주 후, 짝을 바꿨고 거짓말 같이 너는 내 뒷자리에 앉았다. 같은 조다 보니까 말이 금방 틀 수 있었고 더군다나 너와 나는 성격이 잘 맞았다. 그것도 아주, 잘. 너의 성격은 정말 순했고 어쩔 때 보면 참 바보 같았다. 키만 멀대 같이 크다고 놀리는 날이면 화를 내기보다는
"이것도 능력이지."
라며 웃었다. 넌 참 순수하고 맑은 사람임을 알았던 순간이었다.
넌 농구하기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다들 인정하는 거지만 넌 선수 급으로 정말 잘했다. 그런데 교실 뒤에서 공을 튀기며 애들하고 노는 건 정말 싫었다. 시끄럽기도 시끄러웠지만 반 친구들이 다칠까 걱정이 됐다. 그렇다고 내가 남자애들하고 친한 것도 아니고, 유일하게 말이 튼 사람은 너 뿐이었기에 공을 튀기며 놀 때마다 나는 항상 큰 목소리로 네게 말했다. 야, 김태형. 공 좀 그만 튀겨. 그러면 항상 나에게 넌 미안하다고 말했고, 다른 애들이 공을 튀길 때마다 나에게 다가와 어깨를 툭 툭 치고는 얼굴을 가까이 하고 남자애들을 가르켰지.
"야, 야. 쟤네도 공 튀기잖아."
"근데?"
"아니 왜 쟤네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냐고~"
"나 쟤네랑 안 친해..."
"아오, 쨔잇."
넌 항상 마음에 들지 않거나 할 말이 없으면 얼굴을 잔뜩 피며 머리를 털면서 아오, 쨔잇. 이란 말을 한다. 네 버릇이 뭔지 알게 된 순간이었고 너와 한 층 더 가까워졌다.
너도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고, 나 역시 사귀는 사람이 있던 때였다. 나는 경기도에 살고 내 전 남친은 포항에 살아 연락도 잘 안 되고 내가 많이 힘들어 하던 때 너와 카톡을 시작했다. 첫 시작은 내가 너의 짝사랑을 응원한다며 놀리던 카톡이었다. 그 당시 우리 반에서의 재밋거리는 너의 짝사랑을 응원한다며 너를 놀리는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전 남친과의 잦은 다툼과 싸움 후 고민은 항상 네게 털어 놓았고 넌 내게 위로가 되어주었다. 내가 남친과 싸운 후 기분이 안 좋을 때마다 넌 다음 날 내게 새콤달콤이나 초콜릿 등 맛있고 달달한 것들을 잔뜩 사다 주었고 네가 나에 대한 감정이 어떤 감정인지 조금씩 알 때, 난 남친과 헤어졌다. 남친과 헤어진 날 나는 울면서 네게 전화를 걸었고 너는 학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우리 집 앞으로 와 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줬다. 내 머리는 떡이 져서 후드티를 뒤집어 쓰고 놀이터 그네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아무 말 없던 정적이 오갈 때, 네가 내 후드를 벗기려고 얼굴을 두 손으로 쥐었다.
"아 진짜 벗기지 마라. 진짜 나 지금 진지하다."
"아니 한 번만 벗어 봐. 얼마나 머리가 떡이 졌나 보자."
"니 진짜 뒤진다."
"안 한다, 안 해. 성질만 더러워서."
너는 다시 그네에 앉았고 나는 애꿎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만 이빨로 씹었다. 왜냐하면 자꾸만 나를 쳐다보는 네 시선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뭘 봐."
뭘 보냐는 나의 질문에 너는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예뻐서."
나는 그 말에 얼굴이 달아올랐고 네가 날 좋아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애매모호한 감정은 싫어했으니, 네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너 나 좋아해?"
솔직히 좋아한다고 할 줄 알았다.
"아니? 미쳤냐?
미쳤냐고 할 거까진 없잖아... 기겁을 하며 미쳤냐고 말하는 너 때문에 분위기도 깨지고 기분도 조금 상해서 집이나 가자며 너를 버스 정류장까지 데려다 주고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네게 카톡이 왔다. 사귀자는 카톡. 아까는 너무 떨리고 부끄러워서 차마 말하지 못했다고. 그래서 3월 16일, 좀 이른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우리는 사랑을 시작했다. 피시방을 가서 게임하는 내 손을 자꾸만 쳐다보길래 결국 내가 먼저 손을 내밀어서 손을 잡았고, 우리 학원에서부터 우리 집까지 걸어서 1시간 반이 되는 거리를 손을 잡으며 걸었고, 그 날 나는 너의 품에 처음으로 안겼고, 내 생일 날에는 먹을 것을 한 아름 안겨다 주었다. 사회가 같은 조라 항상 밑에서 몰래 손을 잡았고, 벚꽃 축제 때 예쁘게 올라오는 불꽃놀이를 보며 첫 입맞춤을 나누었다. 석촌호수 벚꽃길도 걸으며 내년에도 이 길을 또 걷자고 약속했다. 우리의 100일 날은 시험 기간이라 하루 종일 카페에서 지냈고, 시험 끝난 다음 날에는 커플 시계를 맞추고 첫 키스를 나누었다.
행복했다면 행복했다. 우울증이 있어 자해를 자주하는 내게 너는 잠시나마 약이 되어 줬고 그나마 하는 자해를 줄일 수 있게라도 되었다. 네가 자해를 하지 말라니까 나도 안 했다. 그런데 안 하니까 너무 죽을 것만 같았다. 중학교 때 왕따를 당했던 기억들이 자꾸만 떠올라서 우울증이 심하게 찾아오면 자해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너가 한 거를 볼까 봐 무서워서 차마 자해를 하진 못했다. 그래서 너와의 연애 초에 심적으로 많이 힘들었던 그 때, 나는 접하면 안 될 것을 접했다. 너무 힘들어 하는 내게 내 친구가 담배를 권했고, 그 후 나는 정말 죽고 싶을 때만 담배를 폈었다. 네가 싫어하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우울증이라는 것을 핑계로 그랬다. 내 주변 친구들도 자해를 할 바엔 차라리 담배를 피라고 해서 나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다. 너도 이해해 줄 줄 알았다.
기말 고사가 끝난 날, 망친 시험 때문에 너무 우울해서 시내에서 담배를 폈는데, 다른 반 남자애들이 그걸 찍었을 줄은 몰랐다. 너는 방학식 이틀 전부터 내게 말을 걸지 않았다. 나는 단순 내게 화가 난 것이라고 생각해 네 기분을 풀어주려 노력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다음 날인 방학식 날까지 너는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결국 네 친구에게 들었다. 내가 담배 피는 것을 알았다고. 그 날 학교에서 한참을 울었다. 그래도 풀 건 풀어야 된다고 생각했지만 넌 학교 끝나고 재빨리 집으로 향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 날 카톡으로 나에게 왜 폈냐고 묻길래 우울증 때문에 폈다 나는 너무 힘들었다 말하는 내게 너는 그냥 그만하자는 말과 함께 카톡 외 모든 SNS를 차단했다. 나는 아직 네가 너무 좋아서 널 못 잊어서 방학 내내 울고 울었다. 먹지도 못했고 살이 5키로나 빠졌다. 길을 걸을 때 주변에서 자꾸만 네 향기가 나는 거 같아서 길바닥에서 운 적도 있다.개학하는 날이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개학하는 날이 왔다. 나는 너가 잘 못 지냈으면 했다.
근데 너는 되게 아무렇지 않았다는 듯 너무 행복해 보였다. 난 이렇게 너무 우울한데. 그래서 학기 초에 너무 힘들었다. 밥만 먹으면 토가 나와서 수업 시간에 자꾸만 토를 하러 가고 조퇴도 되게 많이 했다. 네가 농구를 할 때마다 저녁 11시까지 개천 농구대에서 농구를 하다가 나를 집에 데려다 준 기억이 자꾸만 생생하게 기억 나서 그것조차 너무 힘들었다. 모든 이유는 너를 보기 너무 버겁고 너무 힘들어서. 내가 그만큼 너를 너무 좋아했어서 그랬다. 근데 시간이 약이라고, 나도 이제 서서히 너를 잊어가는 듯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