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01
“생각보다 일찍 말하게 됐네. 미안해”
다니엘이 웃는 얼굴로 말한다.
난 유난히 사람관계에 있어서 쿨했다.
한번 아닌 사람은 영원히 아니었다.
어울리지도 상대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오래 지속되는 관계는 몇 없었다.
“미리 말하지 화내지 않았을 텐데”
그렇다고 사랑에 있어서도 쿨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다니엘이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는 건
다니엘이 나에게 지나간 사랑이라는 증거였다.
다니엘과 함께 있던 여자가 멀리서 다니엘을 불렀다.
“나... 먼저 가봐도 되지?”
다니엘은 별다른 반응을 하지 않는 내 눈치를 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헤어진 내 애인은 어리고 생각이 없었으며
“집에서 마저 얘기하자”
멍청하기까지 했다.
‘똥싸고 있네’
쿨하게 대응해놓고 치졸하게 구는 것처럼 보일까
나오는 말을 삼킨 채 혼자 우스워 큭큭댔다.
문득 지금 굉장히 열 받을 상황이란 걸 생각해냈지만
생각일 뿐 오히려 마음은 편안했다.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볍다.
그 길로 다니엘과 함께 살던 집에서 나왔다.
짐이 얼마 남지 않았었다.
2달 전부터 조금씩 옮겨왔기에 칫솔과 옷 몇 벌만 가지고 나올 수 있었다.
집 보증금이 나오면 보내달라는 간단한 메시지와 계좌가 적힌 쪽지를 두고 나서는데
솔직히 아쉬웠다.
1년간 함께한 이 공간과의 헤어짐이
사람관계는 싹둑싹둑 잘만 잘라버리는 주제에 물건이나 공간에는 애착이 강했다.
3년을 함께한 연인과의 이별에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와서는
고작 1년 함께한 집을 나간다고 발걸음이 무겁다는 내 자신이 우스웠다.
‘다니엘 계약이 끝나면 다시 들어올까?’
꽤 진지하게 생각하며 집을 나섰다.
이게 다니엘 스눅스와의 마지막이어야했다.
“정상씨 마치고 약속 있어요?”
부장님의 말에 애매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으며 눈알만 굴렸다.
정상의 침묵이 계속되자 부장님이 말했다.
“계속 이렇게 팅기시면 저도 치사하게 굴 수밖에 없어요?”
“...예를 들면요?”
“오늘 정상씨 약속 있다 하면 저도 할 일없으니까 야근이나 하려고요”
다니엘 린데만이 사람 좋게 웃는다.
‘damn it!’
매력적인 웃음이긴 하나 정상에겐
너 오늘도 나 안 만나주면 강제 야근이야! 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상사를 향해 보이지 않는 엿을 날리며 정상은 얼른 표정을 고쳤다.
“부장님 저 오늘 약속 없어요 배고프시죠? 뭐 먹으러 갈까요?”
허허실실 웃으며 정상은 그래 야근보단 밥 한 끼 하고 얼른 집으로 도망가자 라고 생각했다.
“정상씨 봐서라도 더 일 열심히 해야겠어요~
제가 정상씨 상사 아니었으면 같이 밥 먹기가 하늘에 별따기였겠네요.”
이번엔 개구쟁이처럼 웃는다.
솔직히 다니엘 린덴만이 정상이 싫어하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이상형에 가까웠다.
서글서글하게 웃는 모양새나 배려심도 책임감도 있었고
너무 진지해 재미없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어른스럽고 자상했으며 잘생기고 능력 있기까지
그런데 정상은 1달째 주제넘게 부장님께 철벽을 치고 있었다.
이 완벽한 부장님에게는 모든 장점을 뭉게버리는 단점 딱 두 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첫째는 이름
전 남친과 똑같은 다니엘이라는 이름과
두 번째는 외국인이라는 점이었다.
이 조건 역시 전 남친과 겹쳤다.
정상은 다니엘이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었다.
다니엘과 쿨하게 헤어지고난후 자유는 3달도 채우지 못했다.
이별한지 2달쯤 됐을까
다니엘은 친구를 통해 자신의 소식을 은근슬쩍 건네 왔다.
잘 기억은 안 난다. 대충 다니엘이 너와 헤어지고 힘들어한다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반응이 없자 sns에 지나간 추억을 끌어올렸다.
정상이 생일선물로 준 시계를 차고 #보고싶어 따위를 끄적이거나
전에 서로를 불렀던 애칭을 적어놓거나
오랜만에 들어간 sns에 쌓인 다니엘의 소식을 보고
이걸 정리 안했구나 싶어 바로 다니엘을 차단해서 더 보지는 못했다.
다니엘은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술을 마시고 전화가 오는가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대충 내가 잘못했다. 기회를 달라 따위의 내용이었는데
저장되지 않은 번호를 받았더니 들리는 다니엘의 청승맞은 고백의 반복에
질릴대로 질린 정상은 수신거부에 스팸등록까지 꼼꼼히 설정해야했다.
입 싼 몇몇 친구들 때문에 정상은 집 앞에서도 다니엘을 마주쳐야했고
자주 가는 까페, 맥주집, 고깃집 그 어디에서도 다니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열이 받을 대로 받은 정상은 그날도 술 취해 집앞에 서성이던 다니엘의 머리통을 후려치며
욕을 갈기고는 그 길로 직장도 집도 전화도 모두 바꿔버렸다.
새 직장은 만족스러웠다.
다니엘 린데만
이름을 듣고 움찔하긴 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물론 아무 인연이 없을꺼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정상은 식당에 자리 잡고 앉아서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니엘부장도 별 말은 없었다.
음식이 나오고 나서야 다니엘이 말했다.
“정상씨 왜 이렇게 도도하게 굴어요?”
정상은 그저 어색하게 웃는 수밖에 없었다.
“별로 엄청난 미인도 아니면서...”
중얼거리는 다니엘의 말을 알아들은 정상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는 부장님은 왜 미인도 아닌 저한테 작업 거시는데요?”
어? 웃는다
따라 웃으며 다니엘이 말했다.
“미인 아니라곤 안했어요. 이뻐요 정상씨
엄청나진 않아서 그렇지”
개구지게 웃는 얼굴
“근데 작업거는거 알고 있었구나~ 근데 왜 안 넘어와요?”
능글거리는 듯 여전히 개구진 표정으로 말하는 다니엘을 보며
정상은 다니엘 스눅스따위 때문에 이 완벽한 남자에게서 도망치는 멍청한 짓을 이제 그만두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