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家)네 식구들
부제 : 시월드의 정석
남편은 하늘을 우러러 기쁨에 포효하고 며느리는 땅을 치며 슬퍼한다는, 민족 대명절 중의 하나인 추석. 올해 3월 말에 결혼한 새 신부인 나는 결혼하고 나서 맞는 첫 명절에 신경을 안 쓸래야 안 쓸 수가 없었다. 남편의 집이 큰집이라 모든 식구들이 남편의 집에서 모이는 건 당연지사, 거기다 남편의 집에서는 내가 독며느리이기에 더욱더 걱정이 되었다. 그래도 내가 엄연히 남편의 집에서 독며느리이니 나 몰라라 친정에만 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으로, 결국 나는 벌벌 떨며 지옥의 시월드에 입성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다 좋은 분들이셔.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가 눈치 좀 봐가면서 도와줄게."
오세훈 28 · 남편
위로는 형 셋이 있으며, 집안의 막내이다.
맏이가 아닌 막내가 먼저 결혼한 특이한 케이스.
막내임에도 맏이 같은 포스와 외모로 나름 집안에서 막내온탑을 구축하고 있다.
특이사항
잘생겨도 너무 잘생겨서 가끔 부부싸움을 하는 날에는 벽을 사이에 두고 싸운다. 안 그러면 남편 얼굴 때문에 저절로 화가 풀려 버린다.
(간혹 내가 잘못한 일이 아님에도 내가 먼저 싹싹 비는 경우도 있다.)
"어머님, 저희 왔어요."
괜찮다며 시댁으로 가는 길에서도 계속 내 손을 꼭 잡아주는 남편을 보고 있으니, 나는 마음이 어느 정도 놓이는 듯했다. 그리고 선물을 갖고 시댁에 들어 가자, 반갑게 여겨 주시는 어머님과 아버님이었다. 역시 내가 괜한 걱정을 한 거였나. 옷을 편히 갈아입고 나와서 어머님, 아버님과 같이 차를 마시고 있던 나는 한시름 마음이 편해졌다.
"근데 형들은 다 어디 갔어요? 안 보이네."
"준면이는 지금 방에서 자고 있을걸? 경수는 심심하다고 좀 전에 영화 보러 갔고, 종인이는 길이 막혀서 늦는다나 봐."
그러나 나는 곧 깨달았다.
이 집에서는 절대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는 것을.
"…엄마, 나 밥 줘."
김준면 32 · 큰 아주버님
집안의 장남.
맏이임에도 성격이 순해서 그런지 집안에서 별로 힘은 없다.
특이사항
잘생기고, 능력 있고, 집도 잘 살지만 결혼은 안 했다(라고 우긴다.).
여자친구도 없다. 심지어는 썸녀도 없다고 한다.
"어, 제수씨 왔어요? 세훈이도 왔네. 언제 왔냐."
"뭐, 나는 오면 안 되냐."
"…아직 온 지는 얼마 안 됐어요. 배고프세요? 제가 지금 얼른 밥 차려 드릴게요."
절대로 밥 차려 주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나는 조금만 기다리라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내 손목을 잡아 나를 다시 소파에 앉히는 세훈 오빠는, 자기 밥은 자기가 알아서 차려 먹으라며 되려 아주버님을 꾸짖었다.
"…너 혹시 결혼했다고 지금 마누라 편 드는 거야? 와, 웃긴다. 누가 보면 내가 막 하루 종일 밥도 굶기고 부려 먹은 줄 알겠네. 서운하다, 오세훈. 엄마, 얘 결혼하더니 애가 이상해졌어. 제수씨 알고 보니까 막 집에서 세훈이 꽉 잡고 사는 거 아니야? 나 제수 그렇게 안 봤는데 좀 실망이다. 우리 세훈이를 집에서 얼마나 잡고 살길래 애가 지금 우리 집에 와서도 이래."
(딥빡)
"제, 제가 무슨 세훈 오빠를 잡고 산다고…."
"자기야. 준면이 형이 지금 내가 먼저 결혼했다고 배알 꼴려서 저런 거야. 그냥 신경 쓰지 마."
"그래, 저런 놈은 그냥 무시해. 다 큰 것이 엄마한테 밥 차려 달라고나 하고. 네 밥은 네가 알아서 차려 먹어."
시작은 어머님과 세훈 오빠의 도움으로 무난히 넘어가 승자의 미소를 짓고 있으면, 큰 아주버님은 나를 뒤통수가 따갑다 못해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나를 노려 보았다. 필히 지금 저 눈빛은 분명 '내가 삐졌으니 얼른 나에게 밥상을 대령해라. 그렇지 않으면 네 년을 추석이 끝날 때까지 괴롭힐 거야.' 라는 말을 함축하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아니에요. 제가 차려 드려야죠."
"당연히 그래야죠. 어제부터 제육볶음이 먹고 싶었는데 마침 잘 됐네. 저는 간단하게 제육덮밥이나 해주세요."
빼앗긴 명절에도 자유가 찾아온다면 김준면 존나 패고 싶다.
…결국은 첫 기싸움에서부터 내가 지고 말았다. 이번 추석의 징조가 좋지 않은 건, 그저 내 기분 탓이라고만 믿고 싶었다. 집에 가고 싶다. 엄마가 보고 싶다. 이 와중에 소름 돋는 건, 시댁에 온 지 한 이틀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 한 시간이 채 안 지났다는 거다. 시계가 미친 게 틀림없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다. 근데 이것보다 더 소름인 건,
아직도 세훈 오빠에겐 더 많은 식구들이 남아 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