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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이상이거나, 혹은 허상이거나]


홍빈에게 재환은 고등학교, 아니 어쩌면 중학교 때 멀리서 언듯언듯 봐왔을때부터 알게 모르게 표본이고 정석이고 진리였다. 그냥 홍빈에게 재환은 그랬다. 중학교 때 멀리서보던 재환은 교복을 말씀하게 차려입곤 친구들사이에 둘러싸인 멋진 형같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해 재환의 옆에 서게 되면서 그는 재환에 대해 좀더 감탄하게 되었다.


그는 공부를 잘했고 운동도 잘했다. 믿을 수 없게도 그는 유단자였지만 그것을 입밖에 꺼내지 않았다. 홍빈이 그 사실을 알게 된 건 그가 재환의 집에 놀러가서 어쩌다 보게된 단증 덕분이었다.


홍빈의 커다래진 눈을 보며 재환은 오히려 부끄러워했고 겸손했다. 홍빈은 그것에 다시 감탄했다. 게다가 무엇보다 재환과 함께 있으면 즐거웠다. 말주변도 별로 없고 잘생긴 얼굴덕에 편견을 가지고 들어오는 친구들은 다들 제말만 하기 바빴다. 홍빈은 그들에게 웃어줘야했다. 다년간의 경험상 그는 그래야했다. 그래야 얼굴값 한다는 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었다.

 

하지만 재환은 조금 달랐다. 억지로 웃지 않아도 됐다. 마음속의 말을 꺼내도 됐다. 그에게 편하게 말을 해도 그는 홍빈을 기분 나쁘게 쳐다보지 않았다. 그는 그저 홍빈에게 웃었다. 게다가 그는 사람도 잘 챙긴다. 살갑다. 그는 만인에게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재환이 졸업하고 명문 대학교에 입학했다. 더이상 고등학교에 재환은 없었다. 홍빈은 한동안 방황 비슷한 것을 했다. 재환에게 전화를 걸어 아무렇지 않은 척 좋냐고 비아냥댔다. 그 빈도수가 서서히 많아졌지만 재환은 그저 웃으며 홍빈을 받아줬다. 고3 시작점의 홍빈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아마 이제와서 고3시절을 회상한다면 홍빈은 마구 고개를 가로저을 것이다. 마구마구.

 

 


딱! 공부만 했다. 무엇이 홍빈을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몰랐다. 그냥 같은 대학교에 가서 같이 고등학교때처럼 생활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재환은 국문학과에 지원했고 붙었다. 홍빈은 그날부터 국문학과를 목표로 했다. 사실 과를 선택하는 데에 많은 방황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들은 죄다 쓸모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홍빈은 국문학과를 목표로 했다. 그저 그뿐이다.

 


그리고 재환이 다니는 대학에 합격했다. 과는 국문학과였다. 간간히 문자를 주고받던 재환에게 불쑥 전화를 걸었다. 1년만이었다. 홍빈은 꿀렁대는 가슴께를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해야했다. 그래도 여전히 꿀렁댐은 멈추지 않았다. 홍빈은 땀이 찬 손바닥을 급하게 바지에 닦았다.

 

탈칵-

 

재환이 눈앞에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목소리는 여전했고 말투도 여전했다. 홍빈은 새삼 머리가 아찔했다.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표본, 혹은 정석, 혹은 진리의 목소리가 다정스러웠다. 홍빈은 자신의 표본, 혹은 정석, 혹은 진리의 위치가 조금 더 위로 올라간 것을 느꼈다. 그는 아무도 모르게 홍빈의 이상이 되어 있었다. 홍빈은 잠시 큼큼 목을 가다듬었다.

 

장난스럽게 아무말도 안하냐는 목소리에 홍빈이 아무렇지 않은 척 "선배님" 하고 말의 물꼬를 텄다. 재환은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다가 마구 소리를 지르며 홍빈에게 물었다.

 

 [뭐야, 너 우리학교 붙었어?]

 

홍빈은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러곤 자신도 모르게 마구 끄덕였다. 그는 눈앞에 없었지만 눈앞에 있는 듯 했다. 홍빈에게 그는 이상이거나, 혹은 허상이거나.

 

 

 

 

*

홍빈의 핸드폰이 잠시간 울렸다. 문자였다. 과별 오티에 관한 내용이었다. 홍빈은 그저 내용을 가볍게 훑곤 과별 오티라면 형이 오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그러곤 별 생각없이 소파위로 툭 핸드폰을 던지듯 내려놨다. 그런데 이상하게 TV를 보는데 집중이 되지 않았다. 홍빈은 슬그머니 일어나 핸드폰을 챙기곤 자신의 방으로 들어왔다.


저번의 통화 후 홍빈의 마인드는 조금 변했다. 그는 문득 재환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입은 머리와 따로 놀았다. 홍빈은 그게 가장 다행이었다. 재환은 생각보다 부담스러운 걸 싫어했다. 홍빈이 고등학교 2학년 때쯤의 일처럼. 이제와 생각해보면 뭘 그렇게까지 재환을 괴롭혔을까 싶어도 그덕에 계속 잘 지냈으니까 다행이다 하고 머저리마냥 고개를 끄덕였다.

 

홍빈은 잠시 핸드폰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그러다 벌러덩 침대에 드러누웠다. 잠시 멍하니 있다가 다시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손에 쥐었다. 형은 국문학과다. 나도 국문학과고 그럼 같은 과니까 오티날 만날 수 있을거다. 홍빈의 머리속엔 계속 재환에게 부담을 줘선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박혀들었다.

 

홍빈은 머리를 긁적이며 핸드폰을 침대위로 던졌다. 그러곤 옷장을 활짝 열었다. 옷을 찾는 손놀림이 분주했다. 오티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홍빈은 이옷 저옷 꺼내어 자신의 몸위로 대었다. 그러면서 보게 된 자신의 얼굴이 생각보다 초췌했다. 수능을 보고나서 집밖에 나간적이 있던가.


홍빈은 어느새 까칠하게 올라온 수염을 살살 만지다가 이번엔 머리로 시선을 옮겼다. 많이 길렀다. 조금 덥수룩하기도 하고. 홍빈은 어색하게나마 씨익 웃었다. 볼우물이 패였다. 재환은 홍빈의 보조개를 그렇게나 좋아했더랬다. 홍빈은 자신의 보조개를 꾹꾹 눌렀다. 그런다고 더 패일까. 그럼에도 홍빈은 보조개를 꾹꾹 눌러댔다. 꾹꾹, 꾹꾹.

 

 

 

 


오티날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힘들다고 느꼈다. 그러나 정작 당일이 되자 그 시일이 빠르다고 느꼈다. 요즘의 홍빈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잠시라도 거울을 손에서 떼어놓지 못했다. 그는 맨날 면도를 하고 미용실에 가서 이발을 했으며 보조개에 시선을 주었다. 보조개를 꾹꾹 눌러대다 상처가 났던지라 괜히 민망해서 더이상 보조개를 누르지는 않았다.


다행히 홍빈은 잘생겼고 잘생겼고 잘생겼다. 지금껏 사는동안 그것이 다행이라거나 정말 좋다거나 했던적은 없었지만 이제와 조금 느꼈다. 그래도 이상에게 보이는 얼굴이 잘생겨서 다행이다. 홍빈은 재환을 못보는 동안 그가 고팠다. 흔하게들 말하는 꿈에 대한 갈증쯤이라 말할 수 있겠다.

 

홍빈은 가디건을 챙겨 입었다. 홍빈의 기억속에서 재환은 종종 가디건을 입고 다녔다. 그것이 학교 가디건일 때도 있었고 진한 검은색의 사복 가디건일때도 있었고 연한 회색의 가디건일때도 있었다. 홍빈은 비교적 화려한 문양으로 짜여진 가디건을 입었다. 날씨가 춥진 않았지만 따뜻하지도 않았다. 홍빈은 날씨가 딱 좋다고 생각했다. 참 좋은 날이다.

 


오랜만에 본 얼굴은 좋았다. 빛도 좋았고 걱정도 없어보이고. 아주 잘 지낸티가 팍팍났다. 홍빈은 미묘한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여전히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홍빈은 그것을 못견디겠다고 잠시 생각하다 어느새 눈앞에 다가온 재환의 얼굴에 조금 놀랐다. 홍빈은 아닌 척, 아무렇지도 않은 척 재환을 향해 웃었다.


미친 사람처럼 거울을 보며 혼자 웃는 연습을 했다. 홍빈은 속으로 잠시 그날들을 떠올렸다. 그러곤 병신. 하고 속으로 읊조렸다. 재환은 사람좋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여전하다. 홍빈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잠시 고등학교로 돌아간 기분을 느꼈다. 홍빈은 재빠르게 퉁명한 표정을 지었다. 재환은 부담스러운 것을 싫어한다.

 

 

 

 "우리 빈이 안뇽. 오랜만이야."
 "제가 빈이라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아니, 그럼 우리 빈이를 빈이라고 부르지 뭐라고 부른담?"

 

 

 

홍빈이 여전히 뚱한 표정을 짓자 재환이 눈이 휘어져라 웃었다. 그러곤 홍빈의 어깨를 짤짤 흔들면서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는다.

 

 

 

 "우리 동아리 들어와. 재밌을거야."

 

 

 

홍빈은 여전히 퉁명스러운 눈으로 재환을 올려다봤다. 그러다 이제서야 재환의 옷차림을 인지했다. 가디건이다. 홍빈은 씰룩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부여잡곤 눈썹을 한번 올렸다가 내렸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재환이 환하게 웃었다. 홍빈은 잠시 자신의 장래에 대해 조금 고민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연기쪽도 괜찮을지도.

 

 

 

 


*

재환의 주위엔 동기들과 동아리 사람들, 그리고 친한 교수님들, 선배님들로 바글바글했다. 홍빈은 재환을 둘러싼 많은 사람들을 헤쳐 재환의 가까운 주위를 차지할 수 있을까 하고 잠시 쓸데없는 고민을 했더랬다. 해답은 생각보다 쉽게 나왔다. 혼자 다니면 불쌍해서라도 같이 다녀주겠지.

 

 


홍빈은 일부러 얼굴값을 해댔다.

 

 


오티이후 엠티에 참여한 홍빈은 여러 여자들에게 추근덕댔다. 입이 가벼운 여자들이 금방 소문을 날라주지 않을까 싶어서 한 행동이었다. 첫 엠티날 순진해보이는 여자에게 계속 웃어주고 술을 먹였다. 이름이 아마 소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소민은 오티 이후에 두번째로 마시는 술이라고 했다. 그녀는 웃는 얼굴의 홍빈이 주는 술을 족족 들이마셨다. 그러곤 급하게 취해들었다. 소민은 가누지 못하는 고개를 홍빈의 어깨에 기댔다. 여러 여자가 홍빈을 힐끔힐끔 훔쳐봤다. 홍빈은 재환쪽을 쳐다봤다. 형이 술이 잘마시던가? 홍빈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소민을 내려다봤다.


홍빈은 소민의 입술에 살짝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댔다. 여러명의 작은 탄식을 들려왔다. 홍빈은 씨익 웃으며 여럿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곤 소민을 부축해 방으로 데려왔다. 방엔 아무도 없었다. 차라리 빨리 끝내는 게 쉬울거야. 홍빈은 저혼자 고개를 끄덕이곤 소민을 성의없이 내려놨다. 둔탁한 소리가 났다. 끄응 고통을 참는 신음도 작게 들렸다. 홍빈은 신경도 안쓰곤 땀이라도 난듯 이마를 쓸었다. 이마는 땀한방울 없이 깨끗했다.

 

홍빈은 제가 입고있던 가디건을 벗었다. 그러곤 안에 있는 티셔츠며 바지며 훌훌 벗어냈다. 속옷차림의 홍빈이 소민의 옷을 거리낌없이 벗겨냈다. 그래도 뭐, 양심상 속옷을 내버려뒀다. 적지 않은 술을 마셔 홍빈도 잠시 몸이 동하는 듯 했지만 소문은 더러워도 자신에게는 떳떳해야 했다. 홍빈의 생각은 그랬다. 자기 자신에게 떳떳하지도 못한다면 어찌 재환의 주위를 맴돌 수 있을까. 말도 안되는 소리다.


홍빈은 속옷바람의 소민의 옆에 가지런히 누웠다. 그러곤 소민의 머리밑으로 자신의 팔을 밀어넣었다. 소민이 뒤척이는 듯 하더니 홍빈의 품을 파고들었다. 홍빈은 꽤나 자연스럽게 소민을 품에 안았다. 홍빈은 동하려는 몸을 정신력으로 참아냈다. 차라리 술에 취할것을. 정신이 또렷했다. 홍빈은 눈을 감고 잠을 청하려 노력했다. 마침 그때 희미하게 들어오는 형광등 불빛과 귀가 째질듯한 비명이 들려왔다. 다행히 홍빈의 예상은 적중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인생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소민이 소문을 낸 것인지 과내에 소민과 사귄다는 소문이 돌았다. 홍빈은 동기들의 물음에 딱히 고개를 젓기도 끄덕이지도 않았다. 그저 웃어주면 그들은 금새 자신의 목적도 잊곤 홍빈의 환심을 사려 노력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외모는 경쟁력이 되는가 싶더니 자석처럼 사람을 끌어모았고 결국엔 인품까지 대변하게 되었다. 어느샌가 홍빈은 한눈에 반한 소민을 쟁취한 멋진 남자가 되어있었다. 개새끼가 아니라.


재환은 홍빈에게 부럽다며 한마디를 건넸다. 홍빈은 마음을 굳게 먹었다. 마치 고3때처럼 굳게 먹었다. 굳게.

 

홍빈은 이번엔 화려한 외모에 색조화장이 진한 여자를 찾았다. 여친도 있는 새끼가 여자 후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돌 수 있도록. 이름은 주현이었다. 주현은 홍빈과 같은 국어국문과에다가 겹치는 교양과목이 많았다. 같이 듣는 강의가 많았다. 둘은 금새 친해졌다. 그 와중에도 재환의 동아리에 들어가 계속 재환을 따라다녔다. 그러자 홍빈은 금새 재환의 곁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홍빈은 타이밍을 아는 현명한 남자였고 곧바로 주현에게 관심을 끊었다. 소민에게 소소하게 오던 연락들 역시 죄다 끊었다. 그러자 상황은 전혀 생각치도 못한 쪽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홍빈이의 비밀을 알 게 되었으니 사실 상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홍빈이의 행동이 이제 좀 다르게 느껴지게 될거에요. 다음화부터는 다시 가볍게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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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1
작가님 매회 정말 잘보고있어요! 홍빈이 캐릭터 진짜 대박인거같아요ㅠ
9년 전
생시
고마워욯ㅎㅎㅎ 계속 재밌게 즐겨주세요
9년 전
비회원도 댓글을 달 수 있어요 (You can write a comment)
작품을 읽은 후 댓글을 꼭 남겨주세요, 작가에게 큰 힘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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