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이 오는 소리에 문득 잠에서 깨어, 오래된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며 베란다 문을 반쯤 열었다. 발등을 감싸듯 들어서는 아침 공기가 서늘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 시간엔 밖이 쨍쨍했는데 아직 어스름한 게, 진짜 가을이 오긴 온 모양이다. 그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 일부러 거실 등도 켜지 않았다. 젖은 머리칼을 수건으로 털어내며 벽에 걸어둔 9월 달력을 보았다. 곧바로 눈길이 가는 빨갛고 진한 동그라미에 묶인 숫자 12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 시간에 드라이어를 쓰긴 좀 그래서 바닥에 앉아 선풍기 앞에서 머리를 마저 말렸다. 어깨에 금세 한기가 든다. 조금 있으면 선풍기도 정리해서 넣어야겠지,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등이 뜨끈해졌다. 한쪽으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내 다리 옆에 비죽이 솟은 무릎이 보였다. 언제 방에서 나왔는지 남준이 내 등에 이마를 기대고 있었다.
“시끄러워서 깼어?”
“아니이...옆이 허전해서”
“아직 7시 밖에 안 됐어. 더 자.”
“...자기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났어요.”
너 코 너무 골아서. 장난을 쳤더니 이마 대신 볼을 꾹 눌러온다. 코는 나만 고는 줄 아나... 하품을 하는지 말끝이 쩌억 늘어난다. 고개를 뒤로 틀어 보니 머리는 까치집을 해가지곤 아직 눈도 제대로 못 뜨면서 입술이 불퉁하게 튀어나와 있다. 덩치는 커다란 게, 삐죽이기는.
“아침 먹고 나갈 거지?”
“점심도 먹고 저녁도 먹을 건데.”
“일 있다면서.”
“아- 말하지 마요. 다 취소해 버릴 거야.”
“어차피 갈 거면서 땡깡이야? 사람 기대되게.”
“푸흐 나 안 갔으면 좋겠어요?”
두 손이 허리를 감싼다.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턱을 괸 남준이 볼에 입을 몇 번 맞춘다. 진심 나가기 싫다. 꿍얼대면서 팔을 꼬물대며 뻗어서 선풍기에 말리고 있는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다 책상다리를 하고 있던 다리를 뻗어 내 다리를 끌어 모으듯 휘감으며 코알라처럼 딱 붙어왔다. 서늘하던 기운은 온데간데없고 이젠 약간 후덥지근하다.
“답답합니다, 김남준씨.”
“참으세요.”
“...아유 좀 머리 좀 말리자”
“하루 종일 이러고 있었음 좋겠다.”
“가서 잠이나 더 자. 하루 종일 피곤하려고.”
“어제 많이 자서 괜찮아요.”
“뭘 많이 자? 우리 새벽까지 깨어 있...야,”
“흐흐, 그니까 많이 자서 괜찮다고.”
“너는 지치지도 않냐.”
“내가 항상 말하잖아요. 나는 젊,”
“너도 이제 완벽하게 한 살 더 먹어서 어제보단 안 젊거든요?”
“아이고, 생일을 이렇게 축하해주시네?”
천연덕스럽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굴을 빤히 본다. 진짜 얄미워서 흘겨보기만 했더니 남준이 푸스스 웃으면서 내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좋은 날 싸우지 말고 화해합시다. 근엄한 목소리로 나한테 그런다. 아주 날마다 말주변만 늘어가지고 사람을 꼼짝 못하게 만들지. 분한데도 이 개구진 얼굴에서 눈을 못 떼겠다.
*
“우, 우와-”
“너 여기 있는 미역은 다 먹어야 돼.”
“...이걸 다??”
“생일엔 다 이렇게 먹는 거야.”
식탁위엔 밥그릇과 국그릇이 내 앞에, 밥그릇과 대접이 남준의 앞에 차려졌다. 누군가의 생일날 손수 미역국을 끓이는 건 엄마 생신 이후 처음이다. 내가 미역국 간을 보고 상을 차릴 땐 마냥 흐뭇하게 쳐다보더니 대접에 가득 담긴 미역국 앞에서는 웃는 듯 우는 듯 어정쩡한 얼굴이다. 회나 어패류만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해조류까지 포함해서 바다에서 나는 건 다 별로구나, 너?
“너무 많은데 이거.”
“대신에 고기도 많이 넣어줬잖아. 한우다, 너?”
“...일단은! 잘 먹을게요. 고마워요, 진짜.”
“응, 먹자.”
“근데 나 축하 노래 안 불러줘요?”
“노래? 어제 케이크 촛불 켜놓고 불러줬잖아.”
“또 불러줘요.”
“...오늘까지만 봐준다, 진짜.”
목을 가다듬고 손뼉을 치면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어제 자정으로 넘어가는 시각 케이크 하나 두고 둘이 파티하면서도 그랬지만 여간 민망한 것이 아니었다. 남준이 다시 싱글벙글해졌다. 그러나 노래가 끝나자마자 급격히 어두워졌다. 불안하게 미역국을 한 번 떠먹어본다. 생각보다 괜찮았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아주 천천히 숟가락질을 하며 남준과 속도를 맞추었다. 대접에 담긴 걸 결국 다 먹느라 아침 식사가 평소보다 한참이나 길어졌다.
*
밥을 다 먹고 또 나가기 싫다고 내 무릎에 드러누워 수다를 떨다가 결국 약속 시간에 늦은 남준이 거실과 침실과 화장실을 정신없이 번갈아 드나들고 있었다.
“아, 네 형 저 지금 나가요. 금방 도착할 거에요. 네에.”
읽고 있던 책을 덮고 가만히 남준의 동선을 따라 눈을 굴렸다. 휴대폰을 귀와 어깨 사이에 끼워넣고 청바지만 입은 채로 거실을 서성이며 양말 한 쪽 꿰어 신고 또 침실에 들어갔다 나오면서 윗옷에 팔만 끼운채로 끙끙거리고, 지금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시계가 어디 있지 두리번거린다.
처음 만났을 때 되게 어른스러운 척 미소 지으며 악수를 건네던 길고 예쁜 손이 떠올랐다. 안녕하세요, 라고 인사를 했을 땐 아주 좋은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고, 부드럽고 예쁜 단어만 모아놓은 듯 조용조용한 대화를 나눈 뒤에는 정말로 꽤 오랫동안 그 목소리의 리듬이 머리에서 지워지질 않았었다. 실은 아주 장난기가 많고 생각보다 소심한 수다쟁이였다는 걸 알게 된 뒤로는 오히려 한결 편안해졌다. 무엇보다도 살아 숨 쉬는 느낌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열정적인 사람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하루가 벅차게 흘러갔다.
그러고 보니 나는, 너에게 무척 고마워하고 있구나.
“자기야.”
“...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나 지금 가요.”
“어, 그래.”
“심심해도 조금만 참고 있어요. 금방 올게요.”
“...”
현관 앞에 섰다. 남준이 다급히 신발코를 두드리며 기필코 금방 오겠노라 다짐에 다짐을 한다. 그 와중에도 신발장에 붙은 거울에 한껏 멋있는 표정을 지으며 제 얼굴을 살피는 남준을 함께 들여다보다가 갑자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아, 나 얘가 왜 이렇게 좋지. 마음이 속수무책으로 부푼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은 남준이 왜 그러냐는 듯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둥그렇게 뜬 쌍커풀 없는 매끈한 눈매에 주책없이 가슴이 뛰었다. 무작정 손을 뻗어 남준의 목에 두른채로 속삭였다.
“잘 다녀와, 오늘도.”
생일 축하해,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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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해 줘서 참 감사해, 김남준!
암호닉 신청해주신 충전기님, 꾸기님, 벨님, 나무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