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제 간 택 (皇帝揀擇) 06
: 현명한 여인을 태자빈으로 삼아, 태자빈으로 하여 태자를 정하도록 한다.
"우와-"
절로 탄성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
북적북적한 사람들은, 사람들마다 행복한 웃음을 짓고 서너명씩 무리를 짓고 다녔다.
아이들의 손을 잡고 나온 부녀자들도 있었고, 연인으로 보이는 남녀, 또래의 친구들로 보이는 처녀들까지.
그들에겐 이 모습이 매우 익숙해 보였지만, 책에서만 보던 모습을 처음 본 나에게는 그 무엇보다 강렬했다.
가격을 흥정하고, 간식거리를 나누어 먹고, 서로를 불러 챙기고, 내가 본 어떠한 모습보다 따뜻하고 아름다워보였다.
그리고 모든 것이 새로운 나의 곁에는,
"어어-. 낭자. 어서 이리 바짝 따라오세요-. 여기서 길이라도 잃으면 큰 일 납니다!"
"ㅈ,저하. ㅈ,조금만 천천히 가시면..."
"쉿-. 주위 사람들이 쳐다봅니다. 도련님-.하고 그냥 부르시면 됩니다."
"허나...누가 듣기라도 한다면..."
""에이, 누가 알아챈단 말입니까-. 빨리 움직이지 않으면, 오늘 내에 둘러보지 못합니다아-."
오늘도 어김없이 해맑게 웃으시며 내 손을 잡아 이끄시는 종대 저하가 계셨다.
"아이고~도련님~왜이리 오랜만에 오십니까~!"
"예, 시간이 나지 않아 이제, 겨우 들렸습니다."
저하께서는 평소에도 자주 다니시는 듯, 이곳 저곳 상인들과 인사를 나누며 살갑게 다가가셨다.
"어머, 그럼 옆의 아가씨께서는..."
"아아~그런거 아니예요~"
"에이~ 도련님께서 아가씨를 데려오시는 것이 처음 있는 일인데, 정인(情人)이 아니십니까~"
"ㅈ,정인이라니요...!!"
"부끄러워하지 마십니요. 쇤네는 다~ 알고 있사옵니다."
즐겁게 이야기하던 여상인이 정인이라는 단어를 꺼내자 저하께서는 이내 귀까지 붉게 물드시어 소리를 지르셨다.
냉큼 손사래를 치며 당황하시는 모습에 그냥 왠지 한 번 장난을 치고 싶었다.
"도련님, 도련님께선 저와의 정인의 약조는 내키지 않으시옵니까?"
"ㅇ,예?!"
"저를 두고 그리 온 몸으로 싫다, 하시면 소녀는 뭐가 되옵니까-."
"ㅇ,아니..ㄱ,그것이...!"
저하께선, 당황하시어 더욱 얼굴이 붉어지셨다.
하지만 이내, 내 얼굴에 웃음이 베시시 지어지는 것을 보시고는 잔뜩 울상을 짓고 도망치듯, 발걸음을 옮기셨다.
저하께서 갑자기 자리를 뜨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것이기에, 나까지 당황스러움을 감출 길이 없었다.
이곳 길을 모르는 나로서는, 저하 곁에 붙어 있어야 하건만...
저하의 뒷꽁무니를 쫓아 황급히 뒤따라 갔으나, 길을 잔뜩 채우고 있는 사람들 때문인지, 어두운 날 때문인지, 어느 순간 저하가 보이지 않았다.
"아-."
저하께서 내 시야에서 사라지신 후,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해야될지 몰라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고 말았다.
아까까지만 해도 즐거워보이던 이곳은, 더이상 나에게 활기의 공간이 되지 못했다.
이리 넓은 곳에, 많은 사람들 틈에, 혼자 남겨진 것은 처음인지라 불안함에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한참을 거리 한 중간에서 우두커니 서있자, 지나가던 사람들이 나를 한 번씩 쳐다보고 지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저하께서 계시지 않는다면, 내가 궁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문지기들의 교대 시간에 맞추어 몰래 나왔기에 내가 나갔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을테고, 문지기들이 내 얼굴을 아는 것도 아니니 문으로는 들어갈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의복을 차려 입고 있는 차림으로 높디 높은 궁의 담을 넘을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이 많은 사람들 속에서 저하를 어찌 찾는단 말인가.
한숨 아닌 한숨만을 내쉬며 저하께서 사라지신 방향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불쑥 얼굴 하나가 내 눈 앞에 들어왔다.
"어딜 그리 바라보고 계십니까? 혹여 길이라도 잃으셨습니까?"
양 손 가득 먹을거리를 들고 허리를 굽혀 내 눈을 맞추어오는 미남자가 싱긋-하고 웃으며 물었다.
"ㅇ,어...그것이..."
"명문가의 자녀분이신듯 한데, 처음 뵈는 것 같은데..."
누가 봐도 귀족의 자제의 차림을 한 사내는 여기저기 아는 이가 많은지 처음보는 내 얼굴에 궁금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나라고 성급히 신분을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내가 확실히 신원을 밝히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자, 사내는 되었다는 듯 손사레를 쳤다.
"괜찮습니다. 제 오지랖이 워낙에 넓어 그저 길 잃은 그대를 돕고자 할 뿐이니. 혹여, 일행을 잃으신 겁니까?"
"예, 사람들 속에 묻혀 놓치고 말았습니다."
"음, 그럼 제가 도와드리겠습니다. 높은 곳으로 올라가 보면 잘 보일터이니, 저를 따라오시렵니까?"
난생 처음 보는 사내인지라, 그저 따라가는 것이 망설여지기는 했지만 악의 없이 호의를 보이는 그의 얼굴에 서슴없이 그를 따라 조금 높은 언덕을 따라 올라갔다.
그는 정말 나를 돕고자하는 것에 큰 흥미를 보이는 듯 했고, 망설임 없이 자신이 들고 있던 음식들을 나누어주었다.
잔디밭에 앉아 아래를 내려다보니, 북적북적한 시장 아래가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사내는 곧 정신없이 손에 들고 있던 꼬치를 먹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먹어 치우고는 다시 잔디밭 위로 누워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잣거리에는 처음 오시는 겁니까?"
"예, 밖으로 나오는 것이 익숙치 않아, 길을 찾는 것이 너무 어렵습니다."
"예에? 그럼 무얼하고 지내셨습니까?"
아래를 내려다보다, 나를 향해 말을 걸어노는 사내에게 고개를 돌리며 대답해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란 얼굴로 멍하게 나를 바라보는 사내가 큰 키에 맞지 않게 귀여워 보였다.
그리고 아까 급히 먹은 꼬치의 양념이 묻어 있는 입술 아래 또한, 아이 같은 모습이었다.
옷 안 쪽에 넣어둔 손수건이 떠올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어?"
"입술 아래에, 묻어 있습니다."
"아..."
사내가 멋쩍은 듯 웃어보이곤 손수건을 받아 입을 닦았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다시 저잣거리 쪽을 내려다보자 이곳저곳을 훑어보며 급히 발걸음을 옮기는 남자의 모습이 종대 저하를 닮아 벌떡-하고 일어났다.
"일행을 찾은거 같습니다!"
"에?"
"오늘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혹여 이름이라도 알려주신다면, 후에..."
"아닙니다. 만약 인연이 있다면, 다시 만날 날이 있겠지요. 먼저 내려가보세요. 다시 놓치면 아니되지 않습니까."
사내에게 감사의 인사를 하고 급히 뛰어 저하께서 계신 곳으로 달려갔다.
저하께서도 달려오는 나를 보신 것인지, 급히 내가 있는 곳으로 오셔 내 이곳저곳을 살피셨다.
"제가, 제가 빈을 두고...어, 너무 송구스러워,어,어디 상하신 곳은, 없으십니까?"
저하께서는 당황함과 미안함이 가득 차신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하셨다.
잔뜩 울상이신 얼굴을 보니, 마음이 편안해져 그저 저하께 괜찮다고, 고마우신 분을 만났다고 말씀 드리니 저하께서는 그제서야 안심하신 듯 하였다.
처음 나온 세상 구경이, 당황스럽기도 두렵기도 하였지만 그래도 고마운 사내 덕에 마음 편히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다행히, 궁에서는 우리가 나간 것을 아직 눈치채진 못한듯, 평온한 모습이었다.
붉은 석양이 지고,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을 뒤로 하고 처소의 방 문을 닫았다.
* * * * *
사내는 화려한 외출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뛰어내려가는 여인의 모습에 작은 웃음을 흘렸다.
본성이 남을 도와주고, 간섭하길 좋아하니,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는 여인을 도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눈을 마주쳤을 때, 사내는 자신의 오지랖을 칭찬해주고만 싶었다.
여인이 달려가 멈춘 곳은 한 남자의 앞이었다.
남자는 여인을 심히 걱정했던 듯, 여기저기를 살펴보았다.
남자가 다정히 여인을 챙겨주는 모습에 사내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낯이 익은 남자인데...어디서 본 적이있던가?"
낯설지 않은 남자의 모습에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사내는 그가 여인과의 어떤 사이인지에 다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머리를 틀어올리지 않았으니, 혼인한 사이는 아닐테고. 약혼? 가락지도 보이지 않았으니 약혼도 아닌데..."
얼굴을 잔뜩 구기고 곰곰히 생각에 잠겨있던 사내는 이내, 아! 하고 박수를 쳤다.
"그럼, 오라비인가보구나!"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결론이었는지, 다시 사내의 얼굴이 밝아졌다.
"어느 댁, 귀한 여식이길래 이제야 얼굴을 보이는걸까...뭐, 상관은 없으려나."
어깨를 으쓱해보인 사내는 이내, 자신의 부모와 형님들을 떠올렸다.
명문 집안의 막내 아들로 태어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사내였다.
제 말이라면 꼼짝도 못하는 부모님과 형님들이니, 여인을 찾아내는 것은 얼마 걸리지 않을 것이다.
사내는 자신의 손에 남은 분홍빛 손수건을 쳐다보았다.
아까 먹은 꼬치의 갈색 양념이 오점마냥 남은 손수건을 사내는 소중히 품 안으로 넣었다.
"인연이라면, 진정 곧 만날테니. 아니, 인연이 아니라할지라도 인연으로 만들면 될터이니."
사내는 다시 잔디밭 위로 몸을 뉘이며 입가에 남은 미소를 쉬이 지우지 못했다.
붉은 석양이 지기 시작한 하늘이, 여인 마냥 가슴이 뛰는 것 같음을 느끼며 눈을 감는 사내는,
재상(宰相) 박 건영의 막내 아들, 박 찬열이었다.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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